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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욕망체제를 전복할 소수자들의 전쟁기계를 작동하라
혐오담론 씹어먹기 세미나 ⑧
등록일 [ 2016년08월11일 15시47분 ]
[편집자 주] 끔찍한 말들이 떠돌고 있다. 할퀴는 말, 증오를 선동하는 말, 차별과 폭력을 부르는 말, 무엇보다 그걸 즐기는 말들이. 그 말들은 말할 권리를 갖지 못한 자들, 권력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소수자들을 겨냥한다. 여성, 동성애자, 이주자, 장애인 등 소수자에 대한 혐오의 담론이 분출하고 있다. 언제 부터일까, 대략 2000년대 이후 온라인의 ‘일베’와 오프라인의 개신교 우파를 중심으로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와 차별과 폭력을 선동하는 담론이 노골적으로 유포되고 있다. 작금의 혐오담론은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을 무분별하게 표현하는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 위기를 반영하는 사회적 담론으로, 20세기 초반의 파시즘과 유사한 정치적 욕망의 표출이다.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혐오 담론의 실체는 무엇이며, 거기 내포된 정치적 욕망은 무엇이고 그 혐오의 정치에 대항하는 정치는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비마이너가 노들야학과 함께 ‘혐오담론 씹어먹기’ 세미나를 열었다. 공개 모집을 통해 25명의 다양한 소수자, 인권 활동가들이 모였으며, 13주 동안 8권 정도의 텍스트를 읽고 토론할 예정이다. 그 토론 내용을 보고서 형태로 연재하려 한다. 

<<‘혐오담론 씹어먹기’ 연재 목록>> 
 혐오표현? 문제는 혐오정치야! 
 
‘인류애’로 혐오하는 자들에게 마사 누스바움이 전하는 ‘인류애의 정치’ 
 
일베의 사상을 넘어 견유주의적 가치전도로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여성혐오로 발기된 남근의 정치학과 함께 
 
‘핑크코끼리’와 ‘주토피아’가 공유하는 혐오의 사상, 사회진화론적 문명사관
⑥ "나의 몸이여, 내가 언제나 질문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를"
⑦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로 읽는 '일베'의 정의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혐오 담론이 젠더 전쟁의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여성혐오 문화에 대한 고발이 터져 나오자 모든 남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몰지 말라는 반발이 일어났고, 그 반발은 점차 ‘여혐’ 고발을 ‘남혐’으로 규정, ‘메갈리아’로 특정된 ‘혐오집단’을 몰아내자는, 진보와 보수를 초월한 남성연대의 파상공세로 발전했다. 이 담론 전쟁의 주된 전술은 상대방의 언어(무기)를 빼앗는 것이다. ‘메갈리아’는 ‘일베’의 여성혐오 언어를 ‘미러링’ 하여 가부장적 남성들을 조롱하는 데 사용했다. 생전 처음 여성들한테 당한 성적 모욕에 분기탱천한 남성연대는 여성들의 언어를 미러링하여 ‘여혐’에 대해 ‘남혐’으로, ‘Girls do not need a Prince’에 대해서는 ‘Men do not need a Princess’라는 문구로 대응했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남자의 전유물인 혐오표현을 빼앗음으로써 남자들을 화나게 했다면, 남성연대의 미러링은 여자들을 어이없게 만든다. 그들의 미러링은 발화 맥락을 무시한 기계적 반사라서 ‘남자들은 공주가 필요없다’는 구문처럼 ‘무의미non-sens’하다. 어떤 의미에서 그 멍청한 미러링은 여성들의 언어구사(커뮤니케이션) 능력에 열등감을 가진 남성들의 ‘언어 혐오’라고 할 수 있다. ‘의미’와 ‘개념’을 더럽혀서 더 이상 그 언어를 원래 의미로 사용하지 못하게 분탕질치는 전략이라면, 최소한 ‘혐오’란 단어에 대해서는 성공적이다. 즉 ‘여혐’에 대해 ‘남혐’이란 반사어를 사용함으로써 ‘혐오’란 단어를 원래의 비대칭적 권력관계(발화맥락)과 차별선동(발화효과)은 상관없이 그저 ‘부정적인 감정 표현’을 뜻하는 말로 오염시킨 것이다.   
 
‘혐오’란 개념과 함께 최근에는 ‘파시즘’이란 개념도 오염되고 있다. ‘혐오의 정치’에 대해 ‘파시즘’이라는 명명이 일반화되자 일베에 맞선 메갈리아를 ‘페미나치’ 혹은, ‘파시즘에 맞서는 파시즘’이라고 칭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원래의 권력관계와 정치적 함의는 쏙 빼고 ‘파시즘’을 그저 ‘과격한 방식으로 주의주장을 관철시키는 집단행동’을 가리키는 단어로 ‘피상화’ 시키는 것이다. ‘파시즘’을 표현방식의 거침이나 주의주장의 급진성으로 정의하고 ‘근본주의’, ‘급진주의’, ‘전체주의’와 동의어로 쓰는 것이 최근의 일은 아니다. 그것은 2차 대전에서 역사적 파시즘(일본, 독일)과 싸웠던 연합국, 특히 영국, 미국, 프랑스 같은 1세계 자유주의 국가가 자기 안의 파시즘을 은폐하는 기제로 자기와 다른 정치 체제의 피상적 모습을 모아다 ‘파시즘’이라 명명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파시즘(fascism, fascismo)이란 단어는 1919년 3월 23일 일요일 밀라노 상공업연맹 회의실에서 무솔리니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지만, 그것의 원형(archy-type)은 고대 로마 사회에 출현했다. 로마 공화정의 집정관이 시가행진을 할 때 맨 앞에 내세웠던 ‘파스케스’(fasces), 즉 ‘나뭇가지 다발에 싸인 도끼’가 파시즘의 원형이다. 단일한 중심으로 결속된 대중의 힘이 국가권력의 원천이라는 의미가 담긴 ‘파스케스’는 근대 공화주의의 상징 문양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1792년 프랑스 공화국 최초의 국새와 미국의 25센트 동전에 새겨진 ‘파스케스’가 증명하듯 파시즘은 무솔리니와 히틀러, 일본의 ‘현실 파시즘’과 싸웠던 나라의 국가이념이기도 하다. 
 
1세계 자유주의 국가가 파시즘을 ‘피상화’ 하는 전형적인 방식은 ‘폭력 대 합의’, ‘광기 대 이성’, ‘욕망 대 가치’의 대립구도 속에서 파시즘을 앞에, 자유민주주의를 뒤에 배당하는 것이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따리는 이런 거짓 대립구도를 비판하면서, 강렬한 분열증적 욕망으로 반-파시즘 전선을 형성하도록 촉구한다. 들뢰즈와 가따리는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 논의를 이어받아 파시즘을 외디푸스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욕망 체제로 파악하고, 그로부터 해방된 욕망의 유연하고 강렬한 흐름 속에서 코뮨적 삶의 비전을 찾는다. 미셀 푸코가 들뢰즈, 가따리의 『안티-외디푸스』 영역판 서문을 쓰면서 ‘비-파시스트적 삶의 입문서’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그 때문이다. 푸코는 들뢰즈와 가따리의 책이 파시즘이라는 적과 싸우는 욕망의 기술, 사유의 기술, 정치의 기술을 제시했다면서 그 기술을 테제 형태로 열거했다. 

1972년에 출판된 『안티-외디푸스』는 68혁명에 대한 철학적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일원적이고 총체화하는 편집증으로부터 정치적 행동을 자유롭게 하라. 
*행동, 사유, 욕망을 분할과 피라미드식 위계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증식, 병렬, 그리고 이접에 의하여 발전시켜라. 
*오래된 부정적(the Nagative) 범주들(법, 제한, 거세, 결핍, 결함)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라. 그것은 서구적 사유가 실재에 대한 접근과 권력의 형태로서 오랫동안 신성시해온 것이다. 긍정적이고 다양한 것들, 획일성을 넘어선 차이들, 통일성들을 넘어선 흐름들, 체계들을 넘어선 유동적인 배치들을 선택하라. 생산적인 것은 정착이 아니라 유목임을 믿어라. 
*우리들이 싸우는 그것이 지긋지긋함에도 불구하고, 투사가 되기 위하여 슬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혁명적 힘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욕망과 실재(그리고 재현의 형식으로의 퇴각이 아닌)의 접속이다. 
*진리 안에 정치적 실천을 근거 지우기 위해서 사유를 이용하지 마라. 사유의 선을 단순한 사변으로 불신하는 정치적 행동도 하지 마라. 사유를 증강시키는 것으로서 정치적 실천을 사용하고, 정치적 행동을 고안하기 위한 형태들과 영역들을 증식시키는 것으로서 분석을 사용하라. 
*철학이 ‘권리들’을 규정했던 것처럼, 개인의 ‘권리들’을 되찾는 것을 정치에 요구하지 마라. 개인은 권력의 산물이다. 요구되는 것은 다양성과 전치, 다양한 조합들에 의한 ‘탈개인화de-individualize’여야 한다. 집단은 위계화된 개인들을 획일화하는 유기적 접착이 아니라 탈개인화의 부단한 발생장치여야 한다. 
*권력에 매혹당하지 마라.
 
『안티 외디푸스』 후속편 『천의 고원: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에서 들뢰즈, 가따리는 비-파시즘적 욕망의 생성을 ‘소수자-되기’란 개념으로 푼다. 파시즘은 다수자, 즉 ‘메이저’이고자 하는 욕망의 체제이다. ‘다수자’란 쪽수가 많다기보다 그 특성이 사회적 ‘표준’, 혹은 ‘척도’로 기능하는 정체성 집단으로, 파시즘은 ‘인종’, ‘민족’, ‘국민’, ‘남성’ 같은 다수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거기 속하는 자와 배제될 자를 구별하는 권력을 지향한다. 그것이 특별히 남성적 욕망인 것은 ‘man’이 ‘남자’이자 ‘인간’을 뜻하듯 서구에서 남성은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남성을 인간의 척도로 보편화 하면서 세상의 주권자로 군림해왔기 때문이다. 남성은 ‘메이저’이고자 하는 욕망의 대표단수이다. 
 
반-파시즘 전선은 이런 남성적, 파시즘적 욕망 체제에 균열을 내고 그로부터 소수적 욕망의 흐름이 사막 위의 리좀(뿌리줄기)처럼 분열 증식하면서 형성된다. 그 때 소수자, 즉 ‘마이너’는 더 이상 사회적 약자나 소외된 자들이 아니라, ‘메이저’와는 다른 실존 방식과 감성을 가졌기에 남성적, 파시즘적 욕망 체제로부터 탈주하는 욕망의 주체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탈주가 아니라 집단적인 탈주이기 때문에 그들을 노예로 삼은 파시즘 체제의 붕괴와 해체를 수반한다. 즉 소수자는 자신의 욕망과 함께 사회를 파시즘 체제로부터 탈주시킨다. 들뢰즈, 가따리가 이것을 소수자-’되기’(devenir-minoritaire)로 칭하는 것은, 다수자의 존재론이 남자-‘임’, 한국인-‘임’ 등 무엇 ‘임’에 집착하는 것과 대조해서, 정체성을 지켜야 할 성이 아니라 통과할 정류장으로 여기며, 그 ‘되는’ 과정을 즐기는 소수자의 존재론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정체성을 본래부터 주어진 것, 변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발명되는 것, 통과하거나 변하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이다.  

들뢰즈, 가따리는 『천의 고원』 10장에서 소수자-되기의 혁명성을 논한다.
 
다수자의 보수적 존재론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이 될 수 없고, 남자는 여자가 될 수 없지만, 소수자의 유동적 존재론에 따르면 인간은 그 운동 방식에 따라, 다른 사물과의 관계 맺음에 따라, 그 감성과 욕망의 배치에 따라, 다른 존재에게 주는 정동(affection)에 따라 얼마든지 동물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해 직립보행 대신 네 발로 기어 다니고, 땅 바닥에 주둥이를 처박고 뭔가를 뱉어 내고, 역겨움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며, 아무 데서나 배설을 하고, 암컷만 보면 킁킁대며 들이댈 때 그는 비유가 아니라 실재로 개가 된 것이다. 남자가 여자가 되는 것도 성전환 수술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실존의 총체적 양태를 통해, 감성과 욕망의 변이를 통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들뢰즈, 가따리는 “남성-표준에 대한 여성의 특수한 상황 자체로 인해 모든 소수자 되기가 여성-되기를 경유하게 된다.”고 말한다. 오랜 역사 속에서 여성은 남성(인간)의 가장 가까운 ‘타자’로 정의되어 왔다. 따라서 남성(인간)으로부터 탈주하는 어린이-되기, 동물-되기 등 소수자-되기의 첫 번째 관문은 여성-되기이다. 다수의 여성들은 남성적 욕망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남성과 함께 “여성 역시 여성-되기를 해야 한다.” ‘여성주의feminism’는 이 ‘여성-되기’의 이념으로, 남성(인간)적 욕망 체제로부터 탈주하는 소수자 운동의 가장 오래된 형태이자 여전히 반파시즘 전선의 최전방에 있는 운동의 이념이다.  
 
들뢰즈, 가따리는 ‘여성되기’와 그에 잇닿은 ‘동물되기’, 그리고 ‘지각불가능한 것 되기’를 전쟁기계의 작동 방식으로 파악한다. 즉, 남성, 파시즘적 욕망체제인 ‘국가’ 체제와 맞서 싸우는 전쟁 기계는 여성적으로, 또한 동물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은 남성적 관점으로는, 파시즘의 시야로는 포착되지도, 이해되지도, 지각되지도 않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느끼고, 욕망하고, 실존해야 한다. 그래야 ‘거시적으로’, ‘한 뭉텅이로’, ‘위계적’으로, ‘중앙집중적’으로 작동하는 남성-파시즘-국가체제와의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국가가 수행하는 전쟁과 달리 화약 냄새가 나지 않는 전쟁이다. 그것은 영토와 주권을 건 전쟁이 아니라, 삶의 방식, 감성의 형식을 둘러싼 전쟁으로, 그 무기와 전략 역시 움직이고, 느끼고, 욕망하는 방식에서 얻어진다. 파시즘이라는 혐오의 정치에 맞서 우리는 소수자의 전쟁기계를 작동시켜야 한다. 다수, 남성, 파시스트들이 소수자들을 혐오스럽다고 배척할 때 그럴수록 그들이 혐오하는 소수자들의 실존 방식과 감성의 형식들을 긍정하고 소통시켜야 한다. 그 소수자 연대의 힘으로 파시스트들의 혐오가 혐오스럽게 느껴지도록, 소수적 욕망을 관능적으로 느끼도록 사회적 감성 체제를 교체해야 한다. 
 
메갈리아는 이런 감성 체제의 전복을 노린 전쟁기계이다. 메갈리아는 적의 언어로 적을 조롱하고, 전쟁 기계 특유의 동물-되기를 통해 적에게 ‘맷돼지’의 정동(affection)을 주면서 적의 실체를 폭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 메갈리아에 비난의 소리가 드높다. 일격을 당한 자들의 비명 소리다. 


*'혐오담론 씹어먹기 세미나' 연재는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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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lizom@hanmail.net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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