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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잠들어 있던 ‘부랑아 강제수용’ 선감학원의 진실, 이제 깨어날 때
[선감학원 기획-2]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 소장 인터뷰
등록일 [ 2016년10월06일 18시22분 ]

"진실이 가지는 유일한 단점은 그것이 몹시 게으르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자신만이 진실이라는 교만 때문에 날 것 그대로의 몸뚱이를 내놓고 어떤 치장도 설득도 하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 진실 아닌 것들이 부단히 노력하며 모순된 점을 가리고 분을 바르며 부지런을 떠는 동안 진실은 그저 누워 감이 입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지영, <도가니> 중에서)


진실을 향한 이런 원망을 요즘처럼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시절이 또 있을까. 세월호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유가족과 시민들의 몸부림이 벌써 두 해를 넘겼지만, 진실은 거짓을 앞질러 우리 앞에 달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세월호 사건 뿐만 아니라 지난 몇 해 동안 우리는 국가권력에 의해 스러진 수많은 죽음 앞에서 거짓이 얼마나 발 빠르고 영악했는지, 또 진실은 얼마나 굼뜨기만 했는지 두 눈 똑똑히 보고야 말았다.


비마이너는 지난달 23일, 일제강점기인 1942년에 세워져 해방 후 1982년까지 운영된 부랑아 강제수용시설 ‘선감학원’ 사건을 소개하는 기사를 전한 바 있다(▷관련기사: 저 야산에 묻힌 원혼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기사에서도 전했듯이, 선감학원의 끔찍한 참상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폭로된 것은 1995년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선감학원 부원장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선감도에 살았던 이하라 히로미쓰가 소설 <아! 선감도>를 통해 공개적인 참회를 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소년들을 위한 진실규명과 위령사업을 해야 한다고 호소하면서부터다. 그러나 그 이후로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몇 번의 위령제가 열리고 위령비가 세워진 것 말고는 이 엄청난 국가폭력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어떠한 작업도 진행된 게 없다. 특히나 해방 후 선감학원에서 벌어진 참상에 대한 국가기록은 제대로 남아있는 게 거의 없을 정도다.


그렇게 선감학원의 진실 또한 더디게 다가왔다. 하지만 진실의 나태함만을 탓하지 않고 선감학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의 끈을 20년간 붙잡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이하라 히로미쓰가 처음 안산시를 방문해 위령사업을 제안했을 때부터 선감학원 문제를 파헤쳐 온 그는, 최근 선감학원 피해 생존자들을 만나며 모은 구술기록을 정리하는 작업에 여념이 없다. 그의 이런 노력에 힘입어 경기도의회는 올해 초 선감학원 피해자 지원 조례를 만들었고, 도의회 특위를 통해 조만간 진상조사에 착수할 예정이다.


바로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 소장이다. 지난달 초 그를 만나 선감학원 사건의 배경과 진실규명을 위한 여정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의 부랑인 강제수용과 처벌의 역사가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 이어져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진실규명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한다.

1956년 선감학원 건물 신축 및 재개원 후 시찰단이 방문한 모습 ⓒ경기창작센터

선감학원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기까지


- 선감학원 사건을 처음 알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이하라 히로미쓰 씨가 1996년에 안산시청에 찾아와서 '선감도에 어린아이의 (암매장된) 무덤이 있다, 그러니 위령비를 세워달라' 이런 얘기를 했다. 그래서 시에서는 (향토사, 지역사를 연구하는) 나를 불러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같이 들어보자 한 거다. 나도 그 때 처음 알게 됐다. 그런데 관련 자료를 일제 당시의 시정 연보, 관보 같은데서는 찾을 수 없고,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그나마 관련 기사가 몇 개 있더라. 하지만 나도 일제강점기 때 잠깐 있다가 없어진 줄 알았다.


- 해방 이후에도 선감학원이 운영되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90년대 중반에 KBS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선감학원 문제를 폭로하는 방송을 한 번 한 적이 있다. 그 때 시신을 하나 발굴했는데, 가슴팍에 미군 잠바 단추가 놓여져 있었다. 그래서 ‘일제시대에 죽었으면 미군 단추가 말이 안 된다. 이건 6.25전쟁 이후다’ 이렇게 생각을 한 거지. 그래서 해방 후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당시에는 도서관 서고를 일일이 뒤져가며 하나하나 찾은 것이다.


그렇게 해방 후 자료를 조금씩 모으고 피해자들을 만나 증언을 기록하던 와중에, 작년에 지역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언론 보도가 나가기 시작했고, TV방송에서도 심층적으로 다뤄줘서 어느 정도 여론화가 되었다.


- 해방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선감학원의 상황도 급변했을 것 같은데.


원래 선감학원은 조선감화령(1923년)에 의해 세워졌는데, 이에 근거해 처음 세워진 게 원산의 영흥학교다. 그런데 여기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고는 하지만 원생 탈출이 빈번히 발생하니까, 목포 고하도와 안산 선감도에 감화원을 추가적으로 설치한 것이다. 아이들이 빠져 나올 수 없는 섬에다가. 선감학원의 경우 서울, 경기지역 부랑아들을 바로 옮길 수 있는 곳으로 작정하고 세운 것이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령에 의해 경기도가 선감학원을 그대로 인수한다.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기 때문에, 일제 때 선감학원 설치를 위해 보상 받고 쫓겨난 주민들이 다시 섬으로 돌아와 무단 점거를 하는 일이 발생했고, 그것을 잡아내서 다시 쫓아내려는 국가의 시책들도 이어진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일어나니까 황해도, 평안도 주민들 중 남으로 피난하는 사람들이 배를 타고 인천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인천에서는 이들을 다 수용할 수가 없으니까 마침 비어 있는 선감도로 피난민을 몰아넣었다.


- 전쟁이 진행되던 중에는 일제시대처럼 강제수용이라는 목적을 가졌다기 보다는 불가피한 상황들이 벌어졌던 측면도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부분은 휴전 후 선감학원이 언제 어떻게 정비가 되어서 운영되었는가 하는 점일텐데.


전쟁이 끝나고 1955년 한미재단(韓美財團) 등의 재정지원을 받고 미1군단 병력이 투입되어서 건물 보수작업을 진행한다. 그 전에도 운영은 되고 있었지만 제대로 시설을 갖추고 재개원을 한 게 이 시점이다.


그런데 그 직후인 1956년 8월 31일 경인일보 기사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한미재단 관계자, 경기도지사 등 방문단이 선감학원에 갈 때 기자가 따라가서 쓴 것인데, '선감학원에 지원되는 예산이 엄청나지만 원생들의 식사도 엉망인데다가 원생은 170명인데 직원들은 가족까지 합해서 100명이 넘는다, 이게 직원을 위한 선감학원이냐 아니면 원생들을 위한 선감학원이냐...' 이런 게 기사에 그대로 폭로되었다.

1956년 8월 31일 경인일보의 선감학원 관련 기사. "부랑아 수용에 이상, 희열보다 비애가 커지는 아방궁. 기아에 떠는 원생"이라는 제목을 뽑았다. (정진각 소장 제공)

 
기록이 사라졌다
 

- 50년대야 그렇다 치더라도, 60년대 이후는 군사정부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진행된 것이긴 하지만 사회가 점차 안정화 되어가는 시기 아닌가. 그 때도 일제 때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면 그거야 말로 문제일텐데.


비슷한게 아니라 더 심해졌다. 완전히 군대로 변한 것이다. 박정희 시대 이후로는 길에서 아이들을 강제적으로 잡아가고, 연고자가 있는 경우도 잡혀온 경우가 허다했다. 63년 7월 12일 경향신문 기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서울 광화문 인근의 매동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던 학생이 심부름으로 우체국에 편지를 부치러 갔다. 하지만 우체국을 찾지 못해 방황하다가 부랑아 단속에 적발되어서 서울아동보호소로, 일주일 후엔 선감학원으로 끌려갔다. 결국엔 부모님이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서 8개월 만에 아이를 찾아냈다는 내용이다.


매동국민학교가 지금으로 치면 강남 8학군 정도 된다. 이 당시에도 여기로 위장전입 하려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잘 사는 동네였다. 그러니까 부모들이 다른 일 다 제쳐두고 아이를 찾아내고 신문에까지 난 것 아니겠나. 그럴 정도의 가정 형편이 안 되는 경우엔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섬으로 끌려가 가족도 만나지 못하고 고초를 당했을지 상상을 해보라.


60년대부터는 특히 일제단속, 소위 '후리가리'라고 해서 100명 잡아 넣으라고 지침이 떨어지면 어떻게든 채워 넣어야 했다. 그래서 사실상 아이들을 유괴한 것이다. 얼마 전에도 피해자 한 사람을 만났는데, 길에서 누가 짜장면을 사 준다기에 시청가서 짜장면 한 그릇 얻어먹고 선감학원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 그런 단속을 경찰이 아니라 시청 직원들도 한 것인가?


시청 직원들도 숫자를 채워야 하니까. ‘거리에서 부랑아를 일소한다’ 이런 걸 군사정권에서 얼마나 많이 했나. 길 가다 머리도 깎이던 시절이니까.


- 60년대 이후 선감학원이 운영되었던 행정상의 기록이 어느 정도 남아 있나?


거의 없다. 그나마 직원 숫자는 시설이 폐쇄되기 직전인 80년대 자료에 어느 정도 나온다. 그 전의 기록은 없다. 그나마 일제시대 때의 기록도 일본 교토대학 도서관에 가서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60년대 이후 기록들도 어딘가 분명히 있을 거라 확신한다. 선감학원 아이들이 죽으면 인근 야산에 암매장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증언을 들어보면 매장을 할 때, 직원이 입회를 했고 의사도 있었다. 웃기는 것은 60년대에 선감학원에 의사가 있긴 했는데, 그게 수의사였다고 한다.


어쨌든, 직원과 의사가 입회를 했고, 대부도에서 순경도 파견되었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이 기록을 다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부터도 사람이 죽으면 아무데나 묻을 수 없었다. 암매장하면 다 잡아갔다. 사람이 죽으면 어느 시대에나 신고를 하고 절차를 밟아서 묻도록 되어 있는데, 선감학원 원생들도 다 그런 절차를 밟았다는 거다. 그럼 그 서류를 보면 되는데, 그게 다 없어졌다고만 하는 상황이다.

선감도 인근 야산에는 선감학원생들이 암매장되어 있다. 암매장된 시신은 최소 300구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 국가기록원 같은 기관에서 보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선감학원이 82년도에 폐쇄되면서 관계 서류 일체를 경기도로 이관하게 된다. 그 중 영구문서가 87건이 있다고 나오는데, 그게 없다는 거다. 말이 되나? 그래서 내가 그걸 어떻게든 찾아내자고 따지고 있는 것이다.


- 최근까지 가장 이슈화 되었던 부랑인 시설인 부산 형제복지원의 경우 법적으로 등록될 때에는 사회복지시설이었고, 실제로 사회복지법인이 이 시설을 운영했다. 그런데 선감학원의 경우에는 사회복지시설도 아닌 것 같고... 이걸 법적으로 뭐라고 정의해야 하나? 소년원?


그것도 아니다. 정확한 법적 규정도 없고, 고작 선감학원 운영 조례가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엉망으로 운영하다가 70년대 말에 민간에 불하하려고 했는데 아무도 안 받으니까 82년에 폐쇄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선감학원에 대해 이른바 ‘소년 양아치’들을 수용하는 시설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아무리 뜻 있는 사람이라도 이런 편견을 받고 있는 시설을 누가 운영하겠나?


- 70년대 말, 80년대 초라면 정부가 이른바 ‘사회정화’ 사업을 가장 강력하게 추진하던 때이다. 그런 시점에 굳이 정부가 부랑인 수용시설인 선감학원을 민간위탁하려하고, 그게 안 되니 폐쇄했다는 게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당시는 성인 부랑인이 문제가 많이 됐지만, (선감학원 수용 대상인) 소년 부랑아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던 시점이다. 선감학원은 18세 이하만 수용했는데, 50~60년대에는 주로 전쟁고아들을 많이 잡아다 수용한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쯤 되면 전쟁고아들도 성인이 되고, 중학교도 의무교육이 되었다. 그래서 소년을 수용하는 시설인 선감학원은 국가적 수요가 없어진 측면도 있는 것이다.

끝나지 않는 삶의 악순환


(피해자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선감학원 운영 구조를 보면) 기숙사가 가장 많았을 때는 5개까지 있었다. 1개에 100명 정도 수용되었던 것 같고, 방 하나에 20명씩, 건물 하나에 방 5개 정도 있었다. 각 방마다는 반장이 있고, 이를 총괄하는 사람을 사장이라고 불렀다. 구타나 기합을 주는 것은 이 사장들이 한 것이다.


초등학교 다닐 정도의 아이들에게 몽둥이를 친다는 게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증언에 따르면, 누군가는 엉덩이가 없어졌다는 말도 한다. 정말 안타까운 사례들이 많다. 한 사람의 예를 들면, 초등학교 3,4학년 즈음에 잡혀가서, 천신만고 끝에 5년만에 탈출을 해 부모를 만났다. 하지만 자기 친구들은 이미 중학생이 되어 있는데, 부모는 이 사람을 다시 학교를 보내려고 해도 보낼 데가 없는 거다. 초등학교 3,4학년으로 다시 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중학교를 갈 수도 없고... 부모들은 검정고시라도 보라고 하지만, 맨날 얻어맞고 그 고생을 하다 온 사람이 갑자기 평범한 삶으로 전환이 쉽게 되겠나? 그러니까 그 때 되어서는 자의로 가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은 (국가의 공식 기록이 없으니) 피해자들 구술을 열심히 받아 정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 명 한 명 구술을 받다 보면 공통적인 것이 나올테고, 그게 하나의 증거자료가 될 수 있지 않겠나.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 소장 - 경기도가 운영했다고 하지만, (지방자치가 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사실상 선감학원 운영에 대한 궁극적 책임은 국가에게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단지 경기도의회 차원의 진상조사에 그칠 것이 아니라, (형제복지원특별법이 제출된 것처럼) 국회에서 특별법을 만들어 제대로 된 국가책임을 규명해야 하지 않을까?


필요한 부분이다. 현재 선감학원에 수용되었던 피해자들이 만든 ‘선감학원 생존자협의회’라는 조직이 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일정한 활동이 만들어지면 여러 시민사회의 힘을 모아 특별법도 제안하고 국가책임을 규명하기 위한 움직임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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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철 기자 rollingston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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