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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윤리의 심판자로 선 ‘국가’와 재생산권리의 왜곡
[성과 재생산 포럼 ⑤] 삶이 삭제된 생명, ‘생명권 대 결정권’ 논의의 허상을 넘어서기 위하여
등록일 [ 2016년12월13일 18시47분 ]

[편집자 주] 2015년에는 ‘장애/여성 재생산권 새로운 패러다임 만들기 기획단’이라는 이름으로, 올해는 ‘성과 재생산 포럼’(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건강과 대안 젠더건강팀, 장애여성공감,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및 연구자 등으로 구성)이라는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장애와 젠더’의 경험과 관점을 가지고, 성과 재생산 정치에 개입하고 담론과 실천을 만들어나가고자 합니다. 장애와 젠더의 관점은 성과 재생산권리의 사각지대를 비추는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와 인구, 인권, 생명 문제에 보다 근본적으로 접근하는 통로가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이번 연재는 총 8회에 걸쳐 진행됩니다.

<지난 연재 보기>
① 재생산을 둘러싼 국가와 여성의 역동 : 시기별 변화의 양상과 시사점
② ‘저출산 담론’에 숨어있는 생명정치를 넘어서기 위하여
③ 소수자 운동의 관점으로 성과 재생산 말하기

④ '보조생식기술시대'의 낙태논쟁

 

2012년 8월 23일, 헌법재판소는 ‘임부의 요청에 따라 낙태 시술을 행한 죄’를 처벌하고 있는 형법 제270조 1항에 대해 합헌의견 4 : 위헌의견 4의 의견으로 최종 합헌결정을 내렸다. 이 위헌소송은 2010년 부산의 한 조산원에서 임신 6주차 여성의 요청에 따라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시행하여 기소된 조산사가 제기한 것이었다. 소송이 제기된 2010년 당시는 ‘진오비’ 등 프로라이프 의사 집단이 임신중절 시술 병원을 고발하고 제보를 받으면서 여성들의 상황이 매우 심각한 상태로 내몰리고 있었다. 임신중절 시술 비용이 치솟고, 폭력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려는 남성 파트너들에 의해 여성들이 고발되었으며, 여성들은 결국 안전하지 못한 병원에서 시술을 받거나 해외로까지 나가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의 당사자인 여성도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해 결국 조산사를 찾아가게 되었으나 상대 남성이 고소를 하여 결국 재판까지 가게 된 것이었기에 당시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판결문 결정요지는 결국 현재의 국가와 법체계가 형법상의 ‘낙태죄’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이 판결문에서 ‘존엄한 인간 존재’인 태아는 ‘비교불가능하며, 어떠한 이해관계도 개입될 수 없는 절대적이고 순수한 생명체’로 상정된다. 그리고 여성은 오직 태아의 ‘모(母)’로서,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공익’인 태아의 절대적 생명권과 대립할 뿐, 여성 자신의 생명권 차원에서는 고려되지 않는다. 임신중지에 관한 여성의 결정은 마치 ‘태아냐 자신이냐’ 사이에서 ‘사익’을 좇는 이기적인 결정인 것처럼 설정되며 따라서 이를 처벌하지 않을 시에는 쉽게 사익을 선택하는 여성들로 인해 ‘낙태가 만연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입법자는 일정한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에는 임신 24주 이내의 낙태를 허용하여, 불가피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태아의 생명권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엄한 인간 존재의 근원’인 생명권이 누군가에게는 제한될 수도 있는 것임을 스스로 확인한다. 여기서 ‘불가피한 사정’이란 모자보건법 제14조 1항에서 규정하고 있는 ‘본인이나 배우자’, 즉 개인의 문제일 뿐이다. 국가는 윤리적 담지자이자 심판자 위치에 서서 뒷짐만 지고 있다. 


그 동안 ‘여성의 자기 의사(意思)에 의한 임신중지 합법화’에 관한 논쟁은 사회적 차원에서 본격화되지 못했고, 그나마 헌법재판소의 수준 역시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자기결정권’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는 ‘생명’을 대하는 국가와 사회의 모순적 태도를 가리고, ‘선택’의 맥락을 단순화함으로써 생명권과 자기결정권 모두를 현실의 의미망에서 삭제해버리고 만다는 점에서 매우 문제적이다. 게다가 기술의 개입은 갈수록 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그간 ‘생명권 대 결정권’ 구도에서 구체화되지 못했던 ‘생명’과 ‘결정’의 현실적인 맥락들을 다시 살피고, ‘생명권’과 ‘자기결정권’의 보장을 위한 요구를 사회적 요구로 재구성하기 위한 방향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사진출처 : www.flickr.com

‘낙태죄’ 담론에서 생명권 개념의 한계와 모순


‘낙태죄’ 존치 주장에서 가장 절대적인 가치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생명의 존엄성’이다. 여성의 몸 안에서 형성되는 과정 중에 있는 태아는 아직 독자적인 인격권을 지닌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서, 어떠한 이해관계로부터도 동떨어진, 순수하고 힘없고 작은 존재로만 상상된다. 반면 그 동안 이 논리에 맞서 온 주장은 여성의 행복추구권과 자기결정권, 프라이버시권, 평등권 같은 내용들이었다. 때문에 ‘임신중지를 결정할 권리’란 여성의 사적 권리를 위해 ‘생명’을 죽이는 행위를 용인하는 것으로 쉽게 치환된다.


그러나 낙태죄 존치를 위해 생명권을 내세우는 국가의 태도는 실제 국가에 의해 자행되거나 용인되고 있는 숱한 살인과 생명에 대한 차별적, 실용적 태도들을 가린 채 국가가 생명윤리의 심판자 위치에 선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국가의 생명윤리에 대한 모순적 태도는 다음의 세 가지 경우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첫째, ‘낙태죄’에 관하여서는 국가가 태아의 생명권을 절대적으로 보호하는 것 같지만, 실제 법체계에서도 배아, 태아, 영아, 사람, 사체에 따른 보호법익은 모두 다르며 태아의 권리 역시 상황에 따라 다르게 취급된다. 특히 배아의 경우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제51조 제2항을 보면, “잔여배아를 이용하여 훼손한 자에 대하여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한다”고 되어 있어, <형법> 제269조 제1항에 따른 낙태죄 처벌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보다 형량이 높다. 태아가 여성의 몸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반면, 배아의 경우 생명의료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체외에서 별도로 이용, 보관, 폐기될 수 있으며 생식세포를 채취하거나 배아를 이식하는 과정 등에서 인체의 이용과 연동된다는 점에서 규제를 더욱 강하게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이는 아무리 배아나 태아를 독립적 생명체로 본다 하더라도 결국 법적으로도 모체와 떼어놓고 온전히 별개의 개체로 다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편, 사람에 대해서는 상해죄나 과실치사상죄를 두고 있지만 태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일례로 산부인과에서 양수천자검사에 따른 합병증으로 태아를 사산하게 된 부부가 태아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제기했던 사건에 대해, 2008년 헌법재판소는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낙태죄’ 위헌소송에 대한 판결과는 상이한 판결문을 내놓았다. “법적으로 사람의 시기를 출생의 시점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헌법적으로 금지된다고 할 수 없”으며, “동일한 생명이라 할지라도 법질서가 생명의 발전과정을 일정한 단계들로 구분하고 그 각 단계에 상이한 법적 효과를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라고 판결한 것이다.


이와 같은 판결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결국 현행 법체계는 독립된 하나의 개체로서 법적 인격권과 생명권이 인정되는 시기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고 있으며, 특히 배아의 이용이나 태아의 구체적인 사법적 권리와 연결될 때는 생명의 절대적 존엄성 보다는 현실적 조건들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생명으로서의 권리가 시작되는 시점에 대한 판단이 임신한 여성과의 관계나, 법적 주체로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적 조건에 있기보다 의료/과학기술의 조건에 따라 좌우되고 있다.


의료/과학기술의 개입은 ‘인간 생명으로서 권리를 인정할 수 있는 시기’를 언제로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인간이 생식세포, 수정란, 배아를 직접 관찰하고 다양한 목적으로 이를 이용하거나 여성의 몸에 직접 개입할 수 있게 되면서, 그리고 이전에는 스스로 생존하기 어려웠던 상황에 의료/과학기술이 개입하여 생명을 연장할 수 있게 되면서 기술이 생명윤리의 판단 기준을 좌우하게 된 것이다.


배아 이용에 있어서 ‘원시선’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수정 후 14일째에 나타난다는 이 ‘원시선’은 육안으로 관찰할 수 없는 것이지만 체외에서의 배아 이용에 대한 윤리적 명분을 도입하기 위해 갑자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임신 이후의 어떤 시기에도 임신중지를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는 현재의 ‘낙태죄’ 조항과 전면적으로 배치된다. 즉, 인간의 몸에서 분리한 배아와 여성의 몸에 존재하는 배아에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것이고, 정작 여성은 법적으로 자신의 몸에서 분리해 낸 생식세포와 배아에 대해서도, 자신의 몸에 지닌 배아나 태아에 대해서도 주도권을 제대로 가지지 못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는 한편으로, 저출산 정책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난임 시술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정부가 스스로 자기 딜레마를 만들고 있는 상황과도 연관된다. 시술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배아의 선별이나 폐기, 다수의 배아가 착상되었을 경우의 선택적 유산 등은 현재 얼마든지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개정안이 논란이 되자, 정진엽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정감사에서 “다태아 착상의 경우 인공수정 과정에서도 낙태가 이루어진다. 일종의 퇴로를 마련하고 규제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다시 검토하도록 지시했다”고 말한 것에서도 이런 딜레마를 확인할 수 있다. 
 

셋째, 결국 ‘낙태죄’를 통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생명의 존엄성’이 아니라 ‘생명의 선별’이다. 국가는 생명윤리를 내세워 ‘낙태죄’를 존치시키면서 여성의 임신중지에 대해서는 그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반면에, 배아의 이용이나 태아의 민사상 권리에 대해서는 필요에 따라 권리 기준을 선택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에서 사실상 생명은 우생학적 목적과 인구관리를 위해 선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자보건법 시행령의 개정 과정을 보면 그 목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1973년 제정된 시행령 제3조는 임신 28주 이내에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허용할 수 있는 조건으로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을 명시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현저한 유전성 범죄경향이 있는 정신장애’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항들은 2009년 인공임신중절의 허용 시기가 24주로 앞당겨지면서 전문개정이 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현재까지도 모자보건법 14조 1항에는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로 남아 있어 우생학적 이유의 낙태의 근거조항이 되고 있다. 제정 당시에도 가족계획 정책의 성과를 높이는 데에 목적이 있었던 모자보건법은 이와 같이 우생학적 요건들을 인공임신중절의 허용사유로 넣음으로써 인구의 수뿐만 아니라 인구의 질까지 관리하고자 했던 국가의 의도를 명확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제 이러한 우생학적 선별 과정은 생식세포와 배아의 단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결국 ‘낙태죄’를 존치시킴으로서 이루어지고 있는 생명에 대한 효과는 ‘태아의 생명’에 대한 대척점에 여성을 둠으로써 국가의 인구관리 목적에 따라 여성을 언제든 통제가능한 위치에 있도록 유지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태아와 모체의 관계성을 분리시키고 생명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결정권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선택’은 과연 존재하는가


두 번째로 짚어볼 지점은 ‘자기결정권’에 관한 것이다. 과연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임부의 ‘자기결정권’이란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로 여성의 성적 권리와 피임, 임신, 임신중지, 출산, 양육과 관련된 권리와 요구들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을까?


‘생명권 대 결정권’의 구도에서는 마치 각기 독립적인 개체로서 태아와 개인 여성이 각자의 권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대로 ‘태아의 생명권’에 대한 판단 요건이 태아라는 존재 자체에 있지 않고 국가의 필요와 다양한 이해관계에 얽혀있듯, 여성의 ‘자기결정권’ 역시 현실의 조건과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인구관리의 목적에 따라 생식세포, 배아, 태아가 이용, 폐기, 선별되는 과정은 여성의 신체와도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결정권’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조건인 것이다.


무엇보다 이 ‘결정권’조차 모든 여성들에게 동등한 조건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장애, 질병, 연령, 경제적 상황, 지역적 조건, 혼인 여부, 교육 수준, 가족상태, 국적, 이주상태,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등 다양한 조건에 따라 정보 접근성, 의료 접근성, 사회적 압력, 자신의 몸과 태아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이 모두 달라진다. 10대와 장애나 질병을 지닌 여성, 레즈비언 여성, 트랜스젠더 여성은 자신이 원하는 성관계와 임신, 출산, 양육 자체를 제한 당하거나 그 능력을 의심받으며, 10대, 비혼, 장애 여성, 전염성 질병의 감염인 여성에 대한 편견과 낙인은 임신과 출산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제약한다. 연령, 장애, 경제적 상태, 지역적 조건, 교육 수준, 이주 여건에 따라 피임, 임신, 임신중지, 출산에 관한 정보 접근성과 의료 접근성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또한 성관계와 피임, 임신, 임신중지, 출산의 전 과정은 국가와 사회의 요구, 젠더 관계, 가족의 요구가 끊임없이 개입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낙태죄’는 이 과정에 개입하는 모든 당사자들 중에서 오직 여성만을 처벌하며, 심지어 모자보건법에서는 ‘배우자 동의’ 조항을 두어 남성에게는 처벌 대신 여성과 태아에 대한 결정권을 대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시부모나 상대 남성은 ‘낙태죄’를 빌미로 여성을 고소할 수도 있고, 반대로 얼마든지 낙태를 요구할 수도 있다.


여성들은 태아의 생명권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사회적 조건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낙태죄’는 이러한 사회적 조건들을 모두 삭제하고,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단지 개인적 선택의 문제로만 간주함으로써 임신중지를 생명을 침해하는 이기적 행위로 몰아가 버린다. 


결정적으로, ‘낙태죄’는 여성의 주체적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고 국가가 직접 여성의 합리적 판단력을 무시함으로써 유지되고 있는 처벌 조항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는 헌법재판소 판결문에서의 ‘낙태를 처벌하지 않거나 형벌보다 가벼운 제재를 가하게 된다면 현재보다도 훨씬 더 낙태가 만연하게 될 것’이라는 문장에서도 드러난다. ‘낙태죄’가 여성만을 처벌하고 있는 조항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여기서 ‘풍기문란’이나 ‘낙태 만연’은 결국 여성들을 통제하고 단속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낙태죄’를 유지하는 근간에 여성의 주체적 판단과 섹슈얼리티를 통제해야 하고, 국가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기에, 낙태만 단속해도 출산률이 몇 % 상승할 수 있다거나 몇 년 안에 출산률을 몇 배로 만들 수 있다는 식의 발언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10대 비혼모, 이주 여성, 장애 여성 등은 실질적인 삶의 조건들은 고려되지 않은 채 출산률 제고를 위한 얄팍한 금전적 지원이나 태아 선별을 위한 산전검사 지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왜 ‘태아의 생명권’은 공익이고 ‘여성의 결정권’은 사익인가
-‘재생산’을 다시 생각한다.


결국 지금까지 ‘낙태죄’의 존치 여부에 관한 논의는 ‘생명권 대 결정권’ 구도로 진행되어 왔지만 실제 ‘생명’과 ‘결정’이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누구에 의해, 어떻게 판단되고 결정되고 있는지를 자세히 보면 결국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결정권’은 단순히 ‘태아 대 여성’의 문제가 아니며 서로 배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오히려 국가의 인구관리 목적, 생식세포, 배아, 태아를 다루는 의료/과학기술의 개입 속에서 태아와 여성의 생명권과 결정권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여성이 자기 삶의 과정을 생명권으로 이해하고 이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태아의 생명이 어떻게 다루어질 것인지에 대해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따라서 이제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의 시작은 어디부터인가’ 같은 질문들은 “왜, 어떤 생명이 무슨 기준으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래야 ‘생명권’도 추상적 언명에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인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고려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생명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요구 또한 구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생명에 대한 질문을 이렇게 전환하는 것은 장애, 질병, 연령,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국적 등에 따라 다양하게 작동하고 있는 국가와 의료/과학기술의 개입 속에서 이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고 서로 간의 교차성을 확인하면서 함께 대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짚고 싶은 것은 “왜 ‘인간’, ‘태아’의 ‘태어날 권리’만이 이토록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가”에 관한 것이다. 생명을 선별하는 우생학적 태도나 여성에 대한 섹슈얼리티 통제, 여성을 판단력을 삭제한 출산 도구로 취급하는 태도 등을 통해 결국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이 국가와 사회가 출산을 여전히 ‘남성 가부장의 대를 이을’, ‘새로운 인간 노동력 생산’의 과정으로만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상성’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된다. 생명에 대한 국가의 모순된 태도를 보면 ‘태아의 생명권’은 ‘공익’이고, ‘여성의 결정권’은 ‘사익’이라는 입장은 사실상 태아의 생명을 국가가 너무나 존중해서가 아니라, ‘인간 노동력의 재생산’이라는 ‘공익’적 목적을 이에 복무해야 할 여성이 ‘사익’으로써 침해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 테다.


여전히 ‘재생산’이라는 용어는 ‘생산’과의 위계에서 파생되는 가치 패러다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재생산’을 ‘인간 재생산’으로 한정해서 본다고 하더라도 이는 여성이 경험하거나 행하는 특수한 과정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살아가기 위한 모든 과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시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상품과 이윤을 생산하는 것이 가치 있는 ‘생산’이고, 그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정상성’을 갖춘 출산과 양육을 유지하는 것이 ‘재생산’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온전히 자율적으로, ‘나답게’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과정이 가치있는 공존의 ‘생산’ 과정이 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상품의 생산과정이 ‘재생산’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생명’도, ‘선택’도 상품과 이윤 생산에 맞추어진 가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진정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명을 선별하기 위해 ‘생명의 존엄성’을 내세우고 있는 현재의 시스템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조지 칼린의 공연 중 대사를 덧붙여본다.


“그러니까 기껏해봐야 이 생명의 존엄성은 차별적인 거라고... 우리 인간이 느끼기에 어떠한 생명은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결정하고, 나머지는 싹 죽여버리는거야.”  (조지 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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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적녹보라 의제행동센터장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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