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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 민주주의는 어디에?
[비마이너 7주년 토론회 토론문②] ‘무능하고 사악한 대표 교체’가 아니라 ‘데모스의 역량 강화’를!
등록일 [ 2017년02월17일 13시24분 ]

지난 2월 14일 진행된 비마이너 7주년 기념 토론회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이 원하는 새로운 나라, 어떻게 만들까?>에서 발표된 토론문을 필자들의 허락을 얻어 순서대로 게재한다. 현재의 촛불항쟁이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이 원하는 나라를 만드는데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고민과 실천이 필요한지에 대해 독자들과 더욱 활발한 토론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편집자 주]

<< 이전 토론문 보기 >>

▷ 역사 속 도시하층민 항쟁이 오늘에 던지는 메시지 (하금철 비마이너 편집장)


1. 촛불시위와 민주주의


나는 이번 시위를 2008년의 광우병 시위와 비교해보곤 한다. 2008년의 경우에는 왜 그토록 폭발적인 시위가 일어날 수 있었는지 사실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석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대선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었고 정부의 정책들은 아직 본격적으로 시행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사태의 직접적인 발발 계기는 ‘광우병 위험 소고기 수입’과 관련된 PD수첩의 방송이었지만 그것은 아마도 점화스위치에 불과하지 않았나 싶다. 당시 ‘고소영’, ‘강부자’ 등으로 희화된 내각, ‘영어몰입교육’, ‘0교시’, ‘우열반편성’ 등의 경쟁적 교육정책, ‘공기업민영화’ 등 ’비즈니스프렌들리’라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던 경제정책, ‘한반도대운하'와 같은 생태파괴정책들이 당시 폭약 역할을 했던 거라 짐작할 뿐이다.


이와 비교한다면 2016년 겨울의 거대 촛불시위의 발발 원인은 그다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JTBC의 태블릿PC 보도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온 어마어마한 국정농단 뉴스들을 보고도 가만히 있다면 그 사람이 좀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이번 시위에서 가늠하기 어려운 쪽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 쪽이다. 이 엄청난 규모의 시위가 앞으로 한국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이번 사건은 한국 민중들을 어떻게 변모시킬지, 좀처럼 가늠하기 어렵다.


이번 시위에서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규모’이다. 지난 수십 년 간 한국사회에서 이처럼 큰 규모의 시위는 없었다. 2008년 시위에서 사람들, 특히 집회를 주관했던 이들은 1987년을 기념비적으로 참조했지만(이 참조는 6월초, 특히 최대인파가 모인 6월10일에 두드러졌는데, 이 참조는 2008년 시위의 변곡점, 내 판단으로는 매우 좋지 못한 방향의 변곡점이 되었다), 이번 시위에서는 1987년이 참조점이나 목표치가 되지 못했다. 그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규모’이다. 집회 규모가 이미 1987년을 두세 배 초과해버렸기 때문이다. 2008년과 비교해 볼 때, 이번 시위는 아주 온건한 편이다. 그럼에도 청와대와 국회에 상당히 위협적으로 느껴졌던 것도 역시 ‘규모’ 때문이었다. 이번 사건의 결과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 요인 중의 하나도 이 ‘규모’이다.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하지만 최근 흐름은 그다지 좋지 않다. 태극기 집회가 커지고 촛불이 작아졌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사건’의 영역이 급속히 닫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체제의 작동이 부분적으로 중단되고 거대한 민중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사건’이 ‘사건’으로서의 성격을 잃어가고 있다. 결과에 대한 예측을 불허하며 진화하던 흐름이 이제는 도식을 따라, 단순하고 동질적인 표상 아래, 예측 가능한 형태로 변해가는 느낌이다. 비유컨대, 1987년 ‘독재타도’에 표현된, 한국사회의 미래와 관련된 다양한 가능성이 ‘직선제 쟁취’로 단순화되고, 다시 그것이 대통령 후보의 선택 문제로 단순화되듯이, 이번 시위에서도 ‘박근혜 퇴진’ 속에 표현된 여러 목소리, 헬조선의 변혁을 담은 여러 목소리가, ‘탄핵인용’으로, 그리고 이후에는 아마도 ‘정권교체’와 ‘대통령후보 선택’으로 축소될 조짐이 있다.

나는 우리가 ‘사건’ 자체를 사유해야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싶다. 자칫 이번 사건이 18대 대통령과 19대 대통령의 필름 사이에 있는 하나의 ‘선’처럼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대의제에서는 탄핵과 대선이 맞물리는데, 이 둘을 이어붙이면 정작 ‘사건’이 실종된다. 우리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을 때, 그러니까 이 사건을 가꾸고 이 사건 속에서 우리가 변형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을 때, 결과적으로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사건’ 자체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건’을 하나의 ‘지속’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번 ‘사건’이 탄핵과 대선 사이에 끼어 있는 하나의 선, 하나의 점에 머물지 않게 해야 한다. 사건을 ‘지속’으로 보자는 것은 우리가 그 속에서 처해 있고 거기서 어떤 일을 겪고 있는 하나의 시공간으로 보자는 것이다. 사건 앞뒤를 보지 말고, 사건 자체, 우리가 겪고 있는 일(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의 지속으로서, 우리 자신의 변형의 지속으로 보는 것이다(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이때의 변형이 민주주의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고 이 일은 사람들의 감각, 감정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예컨대 노동자들은 각성 후 파업을 일으키기보다 ‘파업’ 속에서 각성되는 경우가 많다. 파업이라는 사건 속에서 하나의 변형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려면 파업 자체를 사고해야 한다. ‘파업이 왜 일어났고 이후 어떤 성과가 있었는가’라는 식의 물음이 아니라, 파업 중에 어떤 변형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사고하는 것이다. 이번 사건 역시, 진행으로서, 지속으로서 사고해야 한다. 이번 사건에서 우리에게 어떤 변형이 일어나는지(일어났는지, 일어날 것인지, 아니면 불가능해졌는지), 이번 사건 자체를 사고해야 한다.


2. 해방구 없는 범람의 문제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은 일상의 질서, 특히 현행의 법적, 제도적 질서가 중단되었음을 뜻한다. 일종의 비상사태, 예외적인 시공간이 만들어진다. 규모가 크지 않을 때는 현행적인 지배질서가 미치지 않는 작은 ‘함몰’이 생겨난다. 2008년의 경우를 떠올려보면, 초기에(5월) 시위대가 여기저기로 흐르는 ‘범람’ 현상이 있었다. 그런데 6월에 들어서 소위 ‘명박산성’이라 불린 거대 컨테이너 장벽이 쌓아지면서, 범람은 멈추고 제법 큰 ‘함몰’ 공간이 만들어졌다. 대략 2-3개월 동안 주말마다, 현행적인 법질서가 잠시 괄호 쳐지는 해방구가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저녁에는 격렬한 시위가 있었지만 밤에는 이곳저곳에서 이야기 자리가 마련되었다).

'아큐파이 월스트리트' 시위 당시 주코티공원을 점거한 시민들의 모습. 둘러앉은 시민들이 울먹이는 여성의 말을 듣고 있다.


함몰된 공간에 만들어진 해방구의 전형은 2011년 뉴욕에서 일어난 ‘아큐파이 월스트리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시위대는 뉴욕의 리버티스퀘어(주코티공원)를 2개월 남짓 점거했는데, 여기서 민중들은 서로 자신의 처지를 토로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현행 체제의 문제를 더 깊이 인식해 들어갔다. 민중들은 이런 시공간에 참여하면서 변화하게 된다(생각도 바뀌고 표현력도 달라진다).


그런데 이번 촛불 시위는 그 규모가 매우 컸기 때문에 시공간의 전유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함몰’이 아니라 ‘범람’이다. ‘범람’은 특정한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공간을 뒤덮는 것이다. 이를테면 12월 3일,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 통과가 불투명해졌을 때 모여든 200만 명이 넘는 군중들. 사람들은 쓰나미처럼 서울 도심을 덮어버렸다. ‘함몰’이 제한된 규모의 해방구를 연다면, ‘범람’은 전체 공간을 ‘해방구’처럼 만든다.


‘범람’한다는 것은 온갖 것들이 합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온갖 이념들, 온갖 세대들, 온갖 지역들이 다 모여든다는 말이다. 비록 구호는 ‘박근혜 탄핵’,  ‘박근혜 퇴진’ 등이었지만, 거기에는 나름의 맥락과 이유들이 있었다. 동일한 구호 아래 다양한 목소리들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다양한 사람들, 이 정도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드문 일이다.


실제로 11월부터 12월 초까지 토요일, 5시 본집회가 시작되기 전, 곳곳에서 흥미로운 집회들이 많이 열렸다. 보신각 쪽에서는 스스로를 주권자로 선포하는 십대들의 집회가 있었고, 대학로 쪽에서 국정화교과서에 반대하는 운동이 있었고, 또 대학로와 광화문에서 장애인들의 집회도 있었다. 이순신 동상 아래쪽에서는 대학생들의 모임이 있었고, 광화문 광장 아래쪽에는 예술가들의 집회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풍자물을 준비한 사람도 정말 많았고, 자신이 준비해온 먹을 것을 나눠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는 5시 즈음부터 이들 모두가 광화문으로 흘러넘쳐왔다.


그런데 이런 지류들이 언제부턴가 사라져버렸다.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 사람들이 뭔가를 토로하고 뭔가를 깨닫는 자리, 뭔가를 배우고 뭔가를 실천해보는 자리가 사라져버렸다. 범람 후에 물구덩이가 생기듯 작은 해방구들이 마련될 것 같기도 한 데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범람은 대규모 공간을 해방구로 만들 가능성이지만, 거기에 실패할 때 그것은 황량함만을 낳으며, 금세 하나의 표상으로 포획될 위험이 있다(반동으로의 전화).


이번 시위에서는 12월 9일 국회에서의 탄핵소추안 통과가 하나의 분기점이 된 것 같다. 그 다음주 사람들은 청와대로, 헌재로 행진하며, 박근혜 퇴진과 탄핵안 인용을 외쳤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또 불가피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 이어지는 시위 양식은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탄핵소추안 통과 이후, 필요했던 것은 청와대를 향한 고함이 아니라, 민중들이 서로에 대해 말하는 자리가 아니었나 싶다. 해방구, 즉 준안정적인, 예외적 시공간을 열고 여러 집단들에게 발언과 표현의 장소를 제공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헬조선에서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민중들이 서로 꺼내놓고 발언하는 자리가 있어야 했다. 광화문 공간을 온갖 개인과 집단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아고라로 만드는 식으로 말이다(시위 이전에는 격주로 서울시에서 벼룩시장을 열었는데, 그런 식으로 매주 점거를 하고, 한국사회를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논하는 자리를 만들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려면 낮 시간을 활용해야 하는데 촛불집회는 촛불퍼포먼스 때문인지 밤만을 고집한다.


이 추운 날, 서로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시간에, 사람들은 누구를 보고 누구의 말을 들을까. 너무도 당연하다. 빛이 환하고 마이크가 크게 나오는 곳. 바로 무대이다. 어느덧 사람들은 관객이 되었다. 범람하던 흐름은 저수지에 갇힌 물처럼 모여 있다가, 동일한 구호를 따라서 외치고, 차량의 인도를 받아 청와대와 헌법재판소를 향해 걸어갔다가 이후 해산한다. 노래듣고, 구호듣고, 산책하듯 행진하고. 오직 박근혜 퇴진에 대한 요구만 있을 뿐, 여기에 참여해서는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된 것도 없고, 새로운 것을 말하고 표현하게 된 것도 없다. 한마디로 ‘사건’이 사라지고 있다. 헬조선에 대한 토로는 사라지고 박근혜 탄핵만 남았다. 오직 노심초사하는 것은 헌재에서 ‘박근혜 탄핵’이 인용될지 여부이다. 그런데 박근혜가 퇴진한 자리, 무엇이 남을까. 그 빈자리를 채울 사람을 택하는 일만 남는다.


3. 민주주의와 대의제 — 누구를 보고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데모스의 힘’이란 뜻이다. 나는 우리가 이 본래적 말뜻을 좀 더 꽉 움켜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민주주의를 너무 쉽게 제도, 특히 지도자 선출의 문제와 동일시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정치체를, 지도자나 제도 중심으로 보지 않는 데서 생겨났음을 잊고 있다.


조시아 오버1)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기원전 5세기 이전)에서 정치체를 분류하는 방법에는 ‘아르케’(archē)를 기준으로 하는 것과 ‘크라토스’(kratos)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있었다. ‘아르케’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은 정치체 전체를 지휘하고 감독하는 직무와 관련해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직무를 관장하는 지배자의 숫자를 중시했다. 우리가 ‘군주정’이라고 옮기곤 하는 ‘모나르키아’(monarchia), ‘과두정’(‘소수정’)으로 옮기는 ‘올리가르키아’(oligarchia), ‘무정부주의’로 옮기는 ‘아나르키아’(anarchia) 등은 ‘아르케’를 맡은, 말하자면 그 최고권한을 가진 자의 숫자에 따른 분류이다(각각 지배자가 한 명인 경우, 소수인 경우, 없는 경우를 나타낸다).


반면 ‘크라토스’는 힘과 역량에 따라 나누는 것이다. ‘아리스토크라티아’(aristokratia), ‘데모크라티아’(demokratia), ‘이소크라티아’(isokratia) 등이 정치체를 ‘크라토스’라는 기준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우리가 ‘귀족정’이라고 옮기는 ‘아리스토크라티아’는 ‘최선자의 정체’로서,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인식역량을 갖춘 자들이 통치하는 정치체이다. 그런 인식역량을 갖춘 자들은 소수의 엘리트들일 수밖에 없기에 그것은 ‘아르케 그룹’의 ‘모나르키아’나 ‘올리가르키아’와 같을 수밖에 없다. 어떻든 유능한 소수의 지배자가 다수의 민중들을 보살피는(양육하는) 체제이다.


그런데 ‘데모크라티아’는 역량의 주체가 ‘데모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제도적, 신분적 권한도 없고, 재산도, 지식도 없는 데모스가 어떤 힘을 갖는다는 말일까. 오버에 따르면, ‘데모스의 힘’은 혁명의 순간에 나타나는 ‘데모스의 권리 주장’이다. 내 식으로 부연하자면 이렇다. 혁명의 순간이라는 것은 기존의 제도 질서의 작동이 중지된 상태이고, 기존의 통념, 상식이 작동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즉 제도적 권한도, 재산도, 지식도 작동할 수 없는 상태, 말하자면 기존의 ‘권리’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의 ‘권리’라고 할 수 있다(이 ‘권리’는 법적 권리와 구분에서, 법이 중단된 상태에서 작동하는 권리, ‘권리 이전의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장면을 근대 주권 이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주권과 예외상태에 대한 긴 논쟁은 여기서 생략한다). 이를테면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인민집회 장면이 그렇다. “인민이 주권적 신체로서 합법적으로 집회하는 순간 정부의 모든 권한은 정지되고 집행권도 정지되어, 최하층의 인민의 인격은 최고층의 행정관의 인격과 마찬가지로 신성불가침하게 된다. ... [로마의 예에서 볼 수 있는] ... 정부가 실제의 권위를 인정하거나 또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 정지기간은 정부에겐 언제나 무서운 존재였다.”2) 인민이 집회를 여는 순간, 일종의 비상사태를 만들어내는 순간, 정부의 모든 권한은 정지되고, 인민의 인격은 최고권력자의 인격과 같아진다. 그러므로 ‘데모스의 힘’은 일차적으로 체제를 중단시키는 힘, 정부의 권위를 해제하는 힘이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정부의 권위가 먹히지 않는 해방구를 여는 힘이다.


하지만 체제를 중단시키는 것을 곧바로 데모스의 힘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데모스의 힘이란, 술에 취한 사람이 휘두르는 폭력처럼, 제멋대로 지껄이고 때려부수는 그런 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폭력은 역량이 아니라 술에 대한 무능함의 표현일 것이다(실제로 니체는 근대 민주주의, 민족주의를 술에 취한 대중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데모스의 진정한 힘은 사건, 예외상태, 즉 해방구를 가꾸는 힘에 있다. 법이 예외적 시공간을 가꾸려는 노력, 현행적 법과 제도가 멈춘 곳에서 발휘되는 데모스의 거번먼트 능력, 이 예외적 시공간에서 자신을 변혁하고, 사회 변혁의 비전을 끌어내려는 노력. 여기서 데모스의 힘이 드러나고 강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데모스의 힘의 증대=민주주의의 신장’이다.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그런데 지금 촛불시위에서는 이런 가능성이 열렸다가 급속히 닫히고 있다. 문제가 탄핵에 집중되면서 자연스레 대선이 핵심 이슈로 부상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우리 사회가 ‘대의제’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피한 현상이기도 하다. 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임박했다는 것은 다음 대통령 선거가 임박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뛰쳐나온 촛불시위의 기본프레임이 민주주의에서 대의제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은 ‘대의제’를 ‘민주주의’의 형식으로, 그것도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유일한 형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에서 대의제로 프레임이 넘어간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대의제’는 민주주의와는 전혀 다른 배경에서 탄생한 말이다. 실제로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말을 처음 쓴 것으로 알려진, 18세기 미국 연방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대의제를 고민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제어하기 위해 대의제를 도입했다. 이를테면 매디슨(J. Madison)은 순수민주주의는 ‘다수의 폭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공화제, 즉 대의제가 행해지는 거번먼트”를 구축해야 한다고 했다. 즉 대의제는 대중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만큼이나 대중의 의견을 제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대의제로 제어된 민주주의를 ‘공화주의’라고 불렀다3)(이 점에서는 칸트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대표 문제를 무시해야한다는 뜻은 아니다. 대의제 하에 있는 이상 어떤 대표를 뽑는가는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주의 문제와 겹치는 영역이 있다고하더라도, 어떻든 좋은 대의제의 문제이다. 대의제가 역량이 있는 대표를 갖는 것의 문제라면, 민주주의는 역량있는 데모스의 문제이다. 그 둘은 일치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대표의 선출이 데모스의 무능력을 보여주는 예도 있고(독재자에게 예속을 원하는 대중의 경우), 훌륭한 대표가 무능한 데모스를 돌보는 형식의 사회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데모스가 일정한 힘을 갖는 경우에는 왕정의 경우에도 일정하게 데모스의 힘, 즉 민주주의가 행사되기도 한다.


문제를 민주주의라는 틀에서 볼 것인가, 대의제라는 틀에서 볼 것인가에 따라 현재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탄핵과 대선이 부각되는 것은 대의제라는 틀이 강화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대의제라는 틀에서 지금의 문제를 보면, 문제를 야기한 것은 무능하고 사악한 대표이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그 무능하고 사악한 대표를 유능하고 정의로운 대표로 교체하는 것이다. 이 경우 촛불시위의 목표는 무능하고 사악한 대표를 최대한 빨리 교체하는 쪽으로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누가 그를 대체할 더 유능하고 매력적인 후보인가에 관심을 두게 된다. 시선이 대표들의 역량에 맞춰지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를 민주주의라는 틀에 놓고 보면, 우리는 어떤 것이 데모스의 역량을 강화하는 일이 될 것인가를 사고하게 된다. 시선을 우리 서로에게 맞추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서로에게 서로를 알릴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 시간이 데모스의 깨달음의 시간, 공감의 시간, 연대의 시간, 실천의 시간이 되게 할 것인가. 이것을 고민하게 된다. 데모스의 인식역량과 실천역량은 이런 식으로, 사건 속에서, 사건을 가꾸면서 그 속에서 커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민주주의가 커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헬조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절박한 소리들, 박근혜 퇴진을 외쳤던 여러 절박한 목소리들을 들어야 한다. 그 각각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듣는 것이다. 헬조선의 고통의 지도를 가장 선명하게 그려줄 수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 그래서 헬조선이 바뀌어야 할 가장 선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의 촛불시위의 시간들은 점점 박근혜에 대한 조기탄핵을 요구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허한 시간이 되고 있다. 사건이 없는 황량한 시간이 되고 있다.


* 각주

1) Josiah Ober, "The Original Meaning of 'Democracy': Capacity to Do Things, not Majority Rule," Constellation, Vol. 15, N. 1, 2008.

2) J. J. Rousseau, 최현 옮김, <<사회계약론>>, 집문당, 1993, 275쪽.

3) 참고로 소설가 조셉 헬러(Joseph Heller)는 한 대담에서, 민주주의를 두려워했던 연방주의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재밌는 말을 했다. "그들은 대중무리들(mob) -이것은 그들이 실제로 사용한 단어입니다-이 어떻게 투표할지도 모를 것이고 자신의 진정한 이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대중무리들이 그들이 이해가 어디에 있는지 알까봐, 그래서 그들의 이해에 따라 투표를 할까봐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Joseph Heller와 Bill Moyers의 대담(B. Moyers, A World of Ideas : Conversations with Thoughtful Men and Women about American Life Today and the Ideas Shaping Our Future, Doubleday, 1989, p.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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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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