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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다수와 소수자의 경계를 묻다
[비마이너 7주년 토론회 토론문⑤] 광장의 한복판에서 장애인의 자리는?
등록일 [ 2017년02월22일 12시13분 ]

지난 2월 14일 진행된 비마이너 7주년 기념 토론회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이 원하는 새로운 나라, 어떻게 만들까?>에서 발표된 토론문을 필자들의 허락을 얻어 순서대로 게재한다. 현재의 촛불항쟁이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이 원하는 나라를 만드는데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고민과 실천이 필요한지에 대해 독자들과 더욱 활발한 토론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편집자 주]

<< 이전 토론문 보기 >>

▷ 역사 속 도시하층민 항쟁이 오늘에 던지는 메시지 (하금철 비마이너 편집장)
▷ 촛불시위, 민주주의는 어디에?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 박근혜의 '복지국가'를 탄핵하라! 복지를 '민주화'하라! (박정수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 박근혜 정부는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왔나?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들어가는 말


2016년 10월, 국정감사에서부터 촉발된 최순실 예산에 대한 조사가 눈덩이처럼 커져 결국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전화(轉化)되었습니다. 그저 권력의 비호 아래 돈 몇 푼 횡령한 수준인 줄 알았던 사건이 캐면 캘수록 눈물을 흐르게 만드는 양파처럼 온 국민을 한숨과 분노에 젖게 만들었습니다. 급기야 이 모든 이면에는 박근혜 자신이 있었고 권력형 비리임이 밝혀졌습니다.


이때부터 국민들은 들끓기 시작했고, 11월 말부터 시작된 광화문 촛불집회는 매주 토요일마다 참석인원 기록을 갈아치우며 100만을 훌쩍 넘어섰고, 연인원 1000만을, 신기록이라는 단어가 민망하지만, 넘어선 상태입니다. 박근혜 자신이 “한국사회 적폐(積弊)를 청산하겠다”며 내세웠던 용어가 자신에게로 쏜 화살이 되어 돌아갔고, 그 자신과 그가 임명했던 행정수반 전체가 적폐가 되어버렸습니다. 박근혜 자신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수행했던 모든 국정운영방식과 제도가 청산의 대상으로 또 한 번 전화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광화문 광장에 모인 국민들의 마음속에는 단순히 구시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인습과 제도의 청산이 아니라 무엇인가 새로운 사회를 저마다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그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의 중심에는 “평등과 정의”가 있었습니다. 애초 최순실 게이트로 알려지기 시작한 모 여대 부정입학부터 학점 문제가 불거지면서 수면에 드러난, 그러나 이면에 팽배했던 주제였습니다.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필자도 광장에 모인 시민들 속에서 약간은 결이 다른 열망을 품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주 광장에 설 때마다 마음속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답답함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병을 앓는 사람마냥 매주 그 답답함이 쌓여갈 때쯤 그 원인에 대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단초가 발견되었는데,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광장의 폐쇄성”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속된 말로 “비장애인 중심의 모든 것”들, “소수자의 목소리”는 전혀 발설될 수 없는 구조, 그럼에도 “광장은 평등하다는 이데올로기”가 필자를 답답하게 했던 것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이야 사전무대와 본무대가 나뉘어져 본집회가 진행되기 전에 어떤 주제로 사전집회가 열리는 구조였지만 처음 광장의 모습은 오로지 본집회가 모두였고 수없이 몰려드는 시민들 덕에 장애인들은 본집회 무대 근처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광장은 평등하다”는 보이지 않는 암묵적 이데올로기가 허상임을 깨달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 이 광장을 형성하게 했던 단 하나의 주제 외에는 그 어떤 목소리도 들려지지 않는, 조금 더 과격하게는 하나의 목소리만으로 제한하는 강요 아닌 강요가 필자를 가장 답답하게 했던 부분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광장의 모습뿐만이 아니었고, 광장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움직여가는 조직의 한 일원으로 참여하면서 더욱 필자를 힘들게 했습니다. 이런 답답함에 가슴이 터질 즈음, 한 회의에서 두루뭉술하고 소심하게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래도 장애인은 본무대에 두 번이나 올랐고,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구호는 여러 번 외쳐졌어요.” 하는 어느 한 분의, 그나마 장애인의 입장을 잘 알고 계셨던 분의 답변에 “아, 다 때려 치워야겠구나.” 하는 결심을 곤고하게 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필자를 더 놀라게 했던 건 다름 아니라, “여성·청년·장애인” 등을 “소수자”로 인식하고 있던 필자 자신의 사고 구조였습니다. 처음 이 토론회를 위해 모여 몇 분과 함께 초등 회의를 했을 때도 이런 식의 사고에 입각한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이런 필자 스스로의 사고 구조와 그 자리에서도 이런 사고 구조에 기초해 이야기를 했던 사실 자체를 깨닫고 반성의 시간을 가지게 했습니다.


한국 사회, 조금 더 범위를 좁혀 소위 진보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람들 내에서, 아니 필자 자신도 “다수와 소수”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낯선 것으로 다시 사고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소수자”라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이러한 사고 구조가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이게 허상이겠구나 하는, 그리고 이런 사고 구조 속에서 살고 운동하고 있는 것 자체를 깨지 않으면 새로운 사회는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왜 소수자란 말이 필요했을까?


90년대 말부터 한국 사회는 그동안 보이지 않은 곳에 있었고 보여지길 꺼려할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졌던 이른바 사회적 소수자들의 ‘Coming Out’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수자들의 등장은 단지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개인적 결단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지배적 인간상을 비판하고 더 나아가 자신들의 생존 보호와 권익 확장을 위한 사회운동의 형태를 띠고 있기도 합니다.


최근 한국에서의 소수자에 대한 이론적 논의를 살펴보면, 소수자 문제에 대한 기본 관점이 대략 세 가지 방향에서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소수자의 등장을 인류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유명기에 따르면, 차별화와 배제의 메커니즘은 인간 사회의 내재된 본질이라고 합니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구성원 간에 ‘우리 의식’이 형성되어야 하며, 우리 의식이란 여기서 배제되는 타자를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타자는 우리가 아닌 사람들이며, 우리는 타자가 아닌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소수자란 바로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 되는 사회적 타자를 말하며, 이는 공동체 구성원 간의 우리 의식 형성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공동체 내부의 욕구불만이나 긴장을 타자에 대한 적대감으로 전이함으로써 내부 결속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차별은 사회집단의 긴장과 적의를 해소하기 위해 선택된 일종의 속죄양에 대한 집단 폭력으로 바라봅니다.1)


둘째는 소수자의 등장을 인권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한인섭에 따르면 소수자란 계급적, 문화적, 가치관의 차이가 중첩되면서 사회적 영향력이나 공적 공간에서 배제된 사회적 약자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오늘날 소수자에 대한 인권적 차원의 보호가 필요한 것은 형식적 민주주의가 다수결 원칙으로 귀결되면서 일종의 ‘다수의 전횡’을 낳을 수 있기 때문으로 사고합니다. 인권이란 사회적 의사 결정 원칙이 아니라, 이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개인의 인격보호를 근본으로 합니다. 따라서 인권은 민주적 의사 결정에 의해 형성된 다수자의 사고, 관심, 이익이 전체의 이익으로 포장됨으로써 나타날 수 있는 소수자의 차별과 배제를 방지하고 이들의 사고, 관심, 이익을 법적 원리와 권익, 법익이라는 이름으로 승화시켜 보편적 호소력을 얻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통해서만 한 사회가 보다 다양한 사고, 관심, 이익을 포용할 수 있올 뿐만 아니라, 이러한 다양성 속에서 사회 발전의 새로운 가능성 또한 확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2)


셋째는 소수자 등장을 새로운 사회 운동이란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윤수종에 따르면, 다수자란 이성에 입각한 표준적 인간상을 내면화한 사람이며, 이에 반해 소수자란 이러한 표준적 인간상을 거부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수자와 소수자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다수자의 인간상이 한 사회의 지배적 가치로 권력화 됨으로써 소수자를 차별하고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소수자의 저항은 이전의 사회 운동처럼 이성적 인간상을 대표하는 중심화 된 사회 주체를 설정하고, 이 집단의 정체성에 상충되는 제반 세력을 자기 안에 포획하면서 스스로를 총체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중심화 된 인간상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주체를 다양화시키면서 자신들의 분화된 공간을 창출합니다. 소수자 운동은 따라서 중심화 된 사회 주체를 통한 국가 권력의 전복올 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자치공간인 ‘미시 코뮌’을 형성함으로써 국가의 지배 영역을 줄여나가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3)


소수자라는 말이 감추는 것들


소수자에 대한 세 가지 관점이 이론적 설득력뿐만 아니라 심정적 호소력을 갖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관점이 전면에 나서게 될 때 우리의 시각에서 사라지는 관점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앞서 말한 세 가지 관점은 근본적으로 단지 소수자의 관점에서 이들의 사회적 발생을 설명하고 또 인권적 보호와 소수자의 자율 공간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반대로 세 가지 점에서 이론적 사각지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첫째, 소수자 발생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은 우리 의식을 가능케 하는 지배적 인간상을 소수자에 대한 폭력의 근거로 보고 있지만, 왜 이러한 지배적 인간상이 다수자 입장에서 수용되고 있는가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둘째, 소수자에 대한 인권적 접근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넘어서 이들에 대한 보호를 전제하고 있지만 우리가 어떤 규범적 관점을 취해야만 다수자와 소수자를 포괄한 일반적 시각에서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차별을 비판하고 또 이들에 대한 인권적 보호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가 불분명합니다. 셋째, 소수자 미시 코뮌에 대한 요구는 여전히 이와 대립해 있는 따라서 소수자 미시 코뮌을 침해할 수 있는 기존의 사회 질서가 어떻게 변화해야 비로소 이것이 가능한지를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회의 내적 통합을 위해 소수자라는 가공의 적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가공의 적만 가지고 사회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 사회의 지배적 인간상이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 사회가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차별이라는 폭력적 위협을 통해 복종을 강요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적 인정”이라는 적극적 수단을 통해 구성원들의 자기실현 조건을 보장함으로써 자발적 복종을 유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회적 인정 개념을 전제한다면, 첫째 사회적 소수자란 사회적 인정이 유보됨으로써 경제적 불이익을 당할 뿐만 아니라 법적 권리 그리고 문화적 가치부여에서 배제되고, 결국 자기실현의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사람을 가리키게 됩니다. 둘째, 우리가 사회적 인정과 자기실현과의 관계에 주목한다면,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비판은 물론 이들에 대한 보호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규범적 토대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즉 소수자에 대한 보호는 민주주의적 의사 결정 원칙이 낳을 수 있는 다수의 횡포를 방지하고, 이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개인의 인격 보호를 위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모든 개인의 자기실현 조건을 확보하기 위한 도덕적 요구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사회적 인정 개념을 전제한다면 경제적, 법적, 문화적 영역 등 제반 사회적 영역에서 누가 한 사회의 완전한 구성원인가를 규정하는 어떤 일반적 질서, 즉 사회적 인정 질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의 장점은 소수자 운동의 규범적 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한 일반적 시각을 얻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소수자 운동의 목표를 단지 소수자들만의 미시 코뮌이 아니라, 소수자와 다수자 구분 없이 보다 많은 사람이 사회적 인정을 향유하며 자신의 삶을 실현할 수 있도록 기존의 사회적 인정질서를 변혁하는 것에 두게 합니다.




새로운 사회는 제도 변화가 아닐지도


소수자라는 의미에 대해 그리고 그 의미가 감추고 있는 것들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습니다. 아니 제가 공부한 것들을 나열식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 머릿속에 자리 잡은 것은 필자 스스로가 빠져 있던 거의 종교적 도그마에 가까웠던 “소수자”라는 개념 자체를 지워버려야 한다는 결심입니다.


이렇게 자리 잡고 있는 우리 혹은 장애인을 소수자로 인식하고 있는 체계를 지우지 않는다면 장애인운동은 정말 소수자 운동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적 인정 체계 속에, 아니 진보운동조차도 스스로를 가두는 도그마로서의 소수자운동은 소수자운동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인정 질서를 만들어내는 운동이어야겠습니다.


* 각주

1) 유명기, “소수자, 그 무적의 논리”, 최협 등 엮음, 『한국의 소수자, 실태와 전망』 (서울: 한울출판사 2004).
 

2) 한인섭, “왜 소수자, 약자의 인권인가”, 한국인권재단 엮음, 『일상의 억압과 소수자의 인권』 (서울: 사람 생각, 2000).
 

3) 윤수종, “맑스주의의 확장과 소수자 운동의 의미”, 『진보 평론』, (1999): 윤수종, “우리는 모두 소수자다”, 윤수종 엮음, 『다르게 사는 사람들』 (서울: 이학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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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실장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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