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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의 이름으로 실행된 ‘전쟁고아 구호’, 실상은 ‘고아 추방’이었다
[기획연재 - 부랑인 강제수용의 역사④] 한국전쟁과 고아 문제
등록일 [ 2017년07월27일 19시04분 ]

 

한국전쟁! 오! 소름끼치는 전쟁터
집집은 타 버리고 그리고 양친은 이미 도라가셨도다!
꺽이운 팔다리 눈멀고 귀먹고
바다 건너 멀리서 온 위대한 사랑의 사도
굶주림을 덜어주고 쓰라린 상처를 쓰다듬어
하늘보다 높은 덕 바다보다 넓은 사랑!
어린이의 아버지 그 이름은 맥킨 소령
영원이 성스러운 그 이름은 기억될진저
하나님이여 그이에 영광 돌리소서
(동아일보, 「행복산의 천사들」, 1952.03.06)


갑작스런 해방과 뒤이은 전재동포의 귀환, 그리고 한국전쟁의 발발로 한반도는 대혼란에 빠졌다. 1952년 10월 당시 정부는 피난민·전재민 수가 135만 8,909명, 원주빈민은 429만 2,363명으로 파악해 도합 1,065만 2,272명이 요구호자인 것으로 집계했다. 이는 전체 인구 1,887만 5,106명 중 절반이 넘는 숫자다. 그러나 조사결과 실제 구호를 받고 있는 인원은 525만 3,626명으로 전체 요구호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파악됐다.(서울신문, 1952.10.01)


이런 피난민에 대한 구호대책의 책임은 미군 주도하에 만들어진 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UNCACK)가 사실상 전담했다. 때로는 UNCACK를 통해 들어오는 선교단체들의 구호물자와 구호품 등의 재정이 남한 정부의 보건사회부 한 해 예산보다 많을 때도 있었다.


미군, 전쟁고아의 구원자이자 아버지


UNCACK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구호사업의 대상은 전쟁고아였다. 한 자료에 따르면 1952년 8월 전국에 280개 고아원이 있었고, 수용아동은 3만473명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된다. 미군 제8군 소속의 UNCACK 수송관이던 클리퍼드 매키언(Clifford G. McKeon)도 1950년 11월 부산시 아미동에 행복산보육원을 세우고, 전쟁고아를 돌보도록 했다. 그런데 1952년 귀국을 하게 된 매키언이 작별을 고하고자 보육원을 방문하자, 전쟁고아들이 감사의 뜻으로 위 송별의 노래를 합창했다.


한국전쟁의 혼란과 공포 속에서 미군은 이처럼 집과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사랑으로 돌봐주는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의 이미지로 그려졌다. 1953년 4월 21일, UNCACK의 메이필드 사령관은 서울 영등포구 흑석동의 수산보육원 창립 2주년 행사에서 ‘고아의 할아버지’로 추대되었다.(경향신문, 1953.04.24) 1958년 성탄절을 앞두고는 미 군사고문단 장교구락부 내에 4백 명의 고아들이 초청되어 성대한 크리스마스 잔치를 즐기기도 했다. 미군들은 군악대를 동원해 춤과 노래로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고,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온 산타클로스 복장의 미군이 아이들이에게 선물 보따리를 나눠주기도 했다.(경향신문, 1958.12.22)


미군이 이처럼 전쟁고아 사업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전쟁 과정에서 미군은 한편으로는 전쟁과 전투를 수행하는 ‘파괴자’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파괴의 산물을 ‘구원’하는 역할까지 수행해야 했다. 이들은 적 점령지역으로 간주된 지역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통해 대량의 민간인 사상자와 피난민을 만들어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들 ‘전쟁의 부산물’을 군사작전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관리해야만 했다. 그런데 피난민이라고 해서 다 같은 피난민이 아니었다. 피난민 속에는 인민군의 첩자가 섞여 있을 수도 있었고, 피난민의 성급한 귀향 시도가 전선을 교란시킬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미군이 수행하는 ‘민간원조’란 ‘사상불온자’가 아니면서 군의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예외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전쟁고아 구호사업은 이 조건을 충족하면서 구원자로서 미군의 이미지를 심는데 최상의 수단이었다. 전쟁고아의 참상은 공산주의의 악행을 고발하고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려는 미군의 선정을 드러내기에 가장 적절한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런 시도는 복음주의적 기독교 구호단체들의 활동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한국전쟁에서 구호를 수행한 많은 기독교단체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의 부당성을 드러내기 위해 전쟁고아 등의 끔찍한 실상을 노골적으로 해외에 전시하는데 주력했다. ‘뉴욕 타임스’, ‘라이프’, ‘리더스 다이제스트’ 등 미국의 매스컴에는 연일 한국의 전쟁고아의 실상이 실렸다. 전장 지역에서 부모가 공산군에게 죽임을 당한 후 거리를 헤매다 미 해병에게 발견되어 잘 적응하며 지낸다는 아이의 이야기, 오랫동안 부패한 엄마의 시신 옆을 지키고 있던 5살 소년의 이야기, 중공군의 개입으로 가족이 굶어죽거나 포탄에 맞아죽어 정신적 외상을 겪게 된 아이들의 이야기 등 구체적인 사례들이 상세히 소개되었다. 여기서 미군은 언제나 버려진 아이들을 구원하는 또 다른 ‘아버지’이자 ‘할아버지’로 그려졌는데, 이를 통해 미군의 선정과 공산군의 잔악상을 선명하게 대비시켰다.


그러나 한국의 지식인들은 미국의 이런 태도를 못내 불편해 했다. 1956년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전숙희는 같은 해 2월 16일 자 경향신문에 쓴 ‘내가 본 아메리카’라는 글에서 미국 언론이 기부금이나 구제품을 걷기 위해 한국과 관련해 너무나 비참한 이야기만 선전한다고 하면서, 이들은 한국의 거의 모든 어린이가 거지 아니면 고아인 줄 안다고 불평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이 불평은 미국 언론의 보도 태도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창피함’이었다. 즉, 그가 보기에 전쟁고아는 선진국에 내보이기 민망한, 국가 체면을 떨어뜨리는 부끄러운 존재였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신문들은 전재와 피난의 후과로 발생한 고아들을 사회의 해악으로 여기는 기사를 반복적으로 실었으며, 고아들은 불량행위를 하고자 반복적으로 고아원을 탈출하는 아이들로 그려졌다.


다음 세대를 지닐 수많은 소년소녀들이 가두에 방황하는 이 사실은 뜻 있는 사람들을 전율 이상의 공포 속에 집어넛고 있으니... (경향신문, 「전쟁 이면의 사회상」, 1952.05.27)


온 종일의 재수를 잡치게 하고 심지어는 밤에 이르도록 꿈자리를 괴롭히기가 일수인 거머리때처럼 악착스럽고 귀찮은 꼬마거지들은 그야말로 서울 도심지대의 암적존재로서 조속한 구제책이 절실히 요망되고 있다. 그러나 병든 사회풍조의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특히 여인들에게 화려한 거리를 공포의 거리로 만들고 있는 이 "꼬마거지"를 철저히 퇴치하려면.... (경향신문, 「거지단속을」, 1958.02.19)


지난 11월 10일 창설을 본 시내 사직동 중앙보호소에는 지금까지 거리의 부랑아 310명을 수용하였다고 한다. 이 수용소의 수용기간은 6주일인데 이 사이에 고아원 등 보호시설에 전출시킨 아희가 100여명에 달하였으며 소년심리원에 보내여 교정의탁한 아해가 5명밖에 안되는 호성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용아 중 도주자가 연인원 80여 명에 달하였는데 그 중에는 5회 이상 도망한 상습도망자가 태반이였다고 한다. (민중일보, 「도망자가 태반 중앙보호소의 부랑아들」, 1948.03.13)

 

신문지상에는 고아들이 반복적으로 수용시설을 탈출하여 불량행위를 일삼는 존재로 그려졌다. (민중일보, 「도망자가 태반 중앙보호소의 부랑아들」, 48.03.13 ⓒ국립중앙도서관)
 

즉, 전쟁고아는 미군의 선정이라는 이미지를 극대화하고 해외 구호물자를 끌어오는 수단으로 필요에 따라 ‘전시’되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회의 암적 존재로 여겨져 내쳐질 뿐이었다. 이 때문에 실제 고아들에게 구호가 제공되는 과정에서도 온갖 부정과 비리가 반복적으로 드러났다. 국내에서 구호물자를 배분하는 권한은 해외 선교단체와 연이 닿아 있는 월남한 서북지방 기독교인들이 독점했는데, 이들은 사실상 구호물자를 자신들의 교세를 확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러한 세태를 소설가 김승옥은 대학생 시절이던 1960년, 서울경제신문에 연재한 네 컷짜리 시사만화 ‘파고다 영감’에서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그는 10월 25일 연재에서 머리가 벗겨지고 배가 불룩 나온 탐욕스럽게 생긴 고아원 원장을 등장시키는데, 원장은 교회 예배당에서 “하나님 아바지시여 / 부디 미국사람들의 심령에 성령을 나리사 / 올겨울엔 구호물자 많이 보내주시도록”이라고 기도를 올린다. ‘아바지’라는 전형적인 서북지방 사투리와 미국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길 기도한다는 설정으로 당시 구호사업에 뛰어든 기독교인들이 가진 사회적 위치와 미국식 복음주의에 기반한 욕망을 절묘하게 담아낸 것이다.


민족의 순수성을 해치는 ‘혼혈아’, 해외입양을 통해 방출되다


한편, 이 당시 나타난 특수한 현상 중 하나가 바로 혼혈아 문제다. 혼혈아는 다른 전쟁고아와 다름없이 한국전쟁이 낳은 부산물이었지만, 단일민족 신화를 고수하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민족의 순수성을 해치는 방해요소로 인식되었다. 이들은 아버지가 부재한 상황에서 어머니와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정상가족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아무리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해도 고아와 다름없는 존재였고, ‘아버지’의 국가로 보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등장한 해결책이 해외입양이었다. 당시로선 해외입양과 관련한 명확한 법령이 없었지만, 국가는 ‘위기에 처한 아동의 긴급구호’라는 명분으로 진행되는 민간차원의 해외입양을 사실상 묵인했다. 하지만 정상가족 구성이라는 명분으로 혼혈아를 친생모로부터 분리하여 강제적으로 이주시키는 것은 인권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인데다, 심지어 이들을 친아버지에게로 보내는 것도 아니었다. 입양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대리 아버지’가 있는 ‘대체가족’의 품으로 혼혈아를 돌려보내는 것뿐이었다. 특히 입양아동과 양부모의 사전 면접 절차도 없이 신속하게 입양을 진행하도록 하는 ‘대리입양’은 문제가 심각한 것이었다.


대리입양은 월드비전의 설립자인 밥 피어스(Bob Pierce)와 버다 홀트(Bertha Holt) 여사의 주도하에 적극 추진되었다. 피어스는 1956년 3월 9일 한국 사회부 장관과 자원봉사 단체 대표들과의 면담을 주선해 대리입양 문제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어 홀트는 매스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대량의 대리입양을 추진했다. 홀트를 통한 입양은 6개월이면 입양이 완료되고, 조사가 엄격하지 않으며, 비용이 절감된다는 이유로 미국 부모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또한 홀트는 입양 사업이 원활히 추진될 수 있도록 만료를 앞둔 미국의 난민구제법이 연장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입법 청원을 벌이기도 했다. 그 결과 1956년 12월 만료 예정이던 난민구제법은 1961년 6월 30일까지 연장되었다. 이에 홀트는 1955년 본인이 8명의 혼혈고아를 입양한 것을 시작으로, 56년에는 191명, 57년에는 287명, 58년에는 598명, 59년에는 441명을 입양했다.

 

한국 고아를 입양한 미국 가정 방문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생산기관: 공보처 홍보국 사진담당관, 생산년도: 1959년, 관리번호: CET0062240
 

지금까지도 이런 시도를 부모를 잃은 아동에게 따뜻한 가정을 선물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보는 시선이 강하다. 그러나 이는 입양부모와 입양아동이 무지의 상태에서 연결될 수 있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최소한 거쳐야 하는 과정인 면접권을 박탈하는 행위로서, 혼혈아동을 인권적 고려 없이 대량 방출하는 데에만 골몰한 것이다. 이런 성격은 1961년 통과된 고아입양특례법에서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법의 제5조는 “고아가 본법에 의하여 외국인의 양자로 되었을 때에는 법원은 직권으로 그 제적(除籍)을 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했다. 즉, 입양이 완료될 경우 더 이상 한국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호적상의 기록 삭제를 통해 명확히 한다는 것으로, 대체가정을 제공한다는 명목 하에 고아를 강제적으로 추방하는 것이다. 이런 입양 관행을 수십 년 간 유지해온 한국은 여전히 ‘고아 수출국’, ‘아동 슈퍼마켓’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관련 기사, 아래 참조)

 


국내입양, 고아 추방의 또 다른 방식


입양정책은 꼭 혼혈아동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경찰이 앞장서서 고아원에 수용된 고아를 양부모에게 알선하는 사업을 전개하기도 했다.


서울시내 각 고아원에 수용되어 있는 고아 5천8백 명 중 다섯 살부터 열 살까지의 고아 1천 9백 11명에게 양부모의 연을 맺어주는 결연식은 … 서울시립극장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앞으로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될 사회유지 및 경찰간부들의 손을 잡고 오랜만에 때때옷을 감은 고아들로 서울시립극장 안은 초만원을 이루었는데 … 이날 이(李)대통령도 “전란이 낳은 많은 고아들을 애국 애족하는 의미에서 서로 돕자”는 치사를 보내었으며 이(李) 내무부장관 정(鄭) 보건사회부장관 주한미국대사를 대리하여 「슈버커」씨 그리고 8군 헌병사령관 「잭슨」 대령 등 많은 내빈들이 고아들의 앞날을 축복하는 축사를 들려주었다. … 서울시 경찰국이 주동이 되어 연을 맺은 1천 9백 11명의 고아는 제각기 양부모에 이끌려 … 희망에 벅찬 길을 떠났다. (조선일보, 「일천여 고아 24일 결연식」, 1956.11.25)

 

전쟁고아 양부모 결연식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생산기관: 공보처 홍보국 사진담당관, 생산년도: 1956년, 관리번호: CET0062199)
 

여기서 우리는 고아 문제를 오로지 가족주의적 방식으로만 해결하려는 국가의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고아 수천 명을 집단적으로 양부모와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아동의 입장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이는 결국 공권력으로 고아를 떠넘기려는 계획인데, 이 과정에서 국가에 의해 반 강제적으로 고아를 떠맡게 된 양부모가 아동의 인권과 건전한 양육을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의문은 전혀 제기되지 않는다.


이처럼 고아원 수용과 해외 및 국내입양은 ‘자선’과 ‘사랑’의 이름으로 수행되었다. 그러나 그 실상은 국가체면을 훼손하는 것으로 여겨진 고아들을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처리’하고 나아가 ‘추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국가는 그렇게 처리된 아이들의 삶에 대해서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고, 책임지지도 않았다.


(다음 연재에서는 본격적으로 50년대 부랑인의 삶과 국가의 대응 문제를 다룹니다.)

 

 

* 참고문헌

- 김재민(2016), 「한국의 해외입양 정책 연구 ― 국가기록물과 언론보도를 중심으로」, 성공회대 사회학과 박사논문
- 김학재 외(2010), 『전장과 사람들』, 선인
- 윤정란(2015), 『한국전쟁과 기독교』, 한울
- 천정환 외(2005). 『혁명과 웃음 ― 김승옥의 시사만화 <파고다 영감>을 통해본 4.19 혁명의 가을』, 앨피
- 최원규(1996), 「외국민간원조단체의 활동과 한국 사회사업 발전에 미친 영향」,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박사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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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철 기자 rollingston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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