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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과 최저임금 - 나의 노동의 가치는 얼마인가?
김상희의 삐딱한 시선-3
등록일 [ 2017년08월08일 10시57분 ]

기대 받지 못한 삶


내가 8살 되던 해, 출생신고가 되어있다면 누구나 그렇듯 초등학교 입학 통지서가 나왔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스스로 몸도 건사를 못하는데 무슨 학교냐며 학교에 입학시키지 않으셨다. 대신 집에서 책이라도 보라며 일일 학습지를 시켜주셨다. 하지만 나는 학습지가 재미없었기에 낙서만 잔뜩 해 놓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내게 학습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어머니는 한글이라도 깨우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집 근처 특수학교를 알아보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반대하셨다. 몸도 혼자 못 움직이는 계집아이를 등하교까지 직접 시켜가며 공부를 시키는 것이 용납이 안 되신 모양이다. 다른 자식들처럼 직장에 취업도 못 할텐데 공부는 시켜서 뭐하나고 하셨다.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는 한글만 읽을 수 있을 때까지만 다니게 해 보자고 설득하셨고 결국 아버지는 승낙을 하셨다.


그렇게 나는 10살이 돼서야 학교란 곳을 다녀볼 수 있게 되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모든 게 다 신기했고 새로웠다.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도 재밌었고, 나랑 나이 차이는 있지만 반 친구들과 노는 것도 재밌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갈 때쯤 아버지는 학교를 자퇴할 것을 강요하셨다. 그리고 하교 때 아버지가 데리러 오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아버지가 데리러 오지 않는 날이면 어머니와 둘이서 하교를 해야 하는데 학교에서 차를 탈 수 있는 곳까지 가려면 30분을 힘겹게 걸어 나와야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온갖 치료 덕분에 나는 부축해주면 걸을 수는 있었지만 옆에서 손목으로 지탱해 주는 힘으로 걸었기 때문에 부축해주는 사람이 굉장히 힘들어했다(어머니는 휠체어를 끔찍하게 싫어하셨기에 휠체어는 사용할 수 없었다). 힘겹게 걸어오면서 어머니의 푸념을 들어야 했다. “내가 왜 너를 낳아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전생에 무슨 원수로 태어난거니?” “네가 아들만 됐어도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안 했을거야!” 등등의 말을 들으며 ‘나는 정말 왜 태어났을까’를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화를 내셔도, 어머니가 나를 부정하는 푸념을 늘어놓으셔도, 나는 학교에 다니는 것이 좋았다. 나는 집에선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졌지만 학교 안에서는 활달하고 호기심이 많으며 열정적인 아이로 생각해 주는 선생님들이 계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버지를 비롯해서 온 가족 반대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반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뿐인데, 등하교 시켜주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이유만으로 학교를 그만두라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부당하다고 느꼈다.


아마도 가족은 나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었던 거 같다. 힘들게 공부시켜봤자 결국 방구석에서 주는 밥이나 먹는 무능력한 장애인이 될 것이라고 추측했을 것이다. 내가 장애인이라고 판정받는 순간부터 가족은 나의 미래까지 생각을 해놓았던 것 같다. 어머니는 언니들에게 늘 말씀하셨다. “내가 죽기 전까진 상희를 돌볼테니까 걱정마라. 그리고 좋은 시설에 보낼 것이니 니네들은 가끔이라도 시설에 찾아가봐야 한다!” 라고 틈만 나면 언니들 붙잡고 말씀하셨다. 내 생각은 다른데 말이다. “넌 어떻게 살고 싶니?” “넌 무엇을 하고 싶니?” 라고 내게 한마디도 묻지 않은 채 나의 일생을 결정 지어 놓는 건 인정하기 싫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 둘씩 저항하기 시작했다.

 

필자 김상희 씨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

나에게 활동(노동)이란?


나는 가족이 정해놓은 삶의 시나리오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갇혀 지내는 동안 생각했다. 이 집에서 나가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집을 나가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도 집에서 일할 수 있다는 정보를 인터넷에서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언어장애가 있고, 손에 장애가 있는 내게 맞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장애인 고용을 많이 한다는 전화 상담원도 할 수 없었고. 워드 작업 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절망스러웠다.


그러다 아는 장애인이 내게 웹디자인을 배우면 일을 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해 주었다. 웹디자인을 배우기로 결심을 했고, 웹디자인을 다 배우고 나면 어딜 취업할 수 있을지 궁금해서 취업 사이트를 둘러봤다. 그런데 취업 사이트에서 나온 웹디자이너 공고문 속에 나는 아무것도 해당이 안 되었다. 첫째는 학력미달이었고 둘째는 장애인을 고용하겠다고 하는 곳은 거의 없었다. 나는 큰 착각에 빠졌던 것이다. 그래서 웹디자인 배우는 것을 그만두고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검정고시를 공부하면서 장애인야학을 알게 되었다. 야학에서는 온갖 자원을 끌어다 나를 이동지원을 해 주었지만 가족은 나를 외출 준비를 해 주어야 한다는 이유로 반대에 나섰다. 가족의 반대가 있어도 나는 계속 야학에 나갔다. 그리고 나의 사회적 지지망이 형성되었다. 그 사회적 지지망은 지금껏 내가 가족 안에서, 사회 안에서 겪어왔던 불편한 경험들을 다르게 생각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내가 겪어온 불편한 경험은 장애차별이었고 젠더차별이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나의 차별받았던 경험을 토대로 활동을 했었고 좋은 기회를 얻어서 장애여성단체에 상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장애여성단체에 활동을 하면서 이 사회에 중증장애를 가진 여성인 내가, 나라는 한 사람이 사회 안에서 인간으로서 존재한다고 느낄 수 있었다.


활동을 노동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필요하고 운동단체 성격과 구조상 완전히 노동하는 공간으로 보기 어렵겠지만 나에겐 나를 필요로 하는 그 곳이 세상을 바꾸는 저항의 현장이자 나의 노동력을 쏟을 수 있는 노동의 공간이기도 했다.


장애여성단체에 상근활동을 하기 전까지 여성주의란 단어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고, 공부라곤 검정고시 교재만 봐 온 것이 전부이었기에 많은 여성주의 활동가들 앞에서 주눅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자격지심도 많았다. 아마도 그 때 자격지심이 있는 상태에서 내가 나를 포기했다면 다시 나의 삶은 멈추거나 사회에서 삭제되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있는 위치에서, 갖고 있는 조건에서 할 수 있는 공부와 활동을 하였고, 생각보다 많은 걸 할 줄 아는 사람임을 느끼게 되었다.


만약 단체 상근 활동가들이 나의 장애와 처한 조건만 보고 내게 할당된 영역 안에서만 활동을 하게 했거나, 활동가로서 가능성 없음으로 판단을 했었다면 지금의 내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다른 것을 보고자 했고 다르게 의미부여했던 단체 활동가들의 관점이 있었기에 지금 나는 예전과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솔직히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나는 어느 노동에도 적합하지 않다. 노동은커녕 국가 지원금만 받아쓰는 쓸모없는 장애인으로 낙인찍었을 것이다. 나 또한 나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왜 인간의 쓸모를 스스로 정하거나 다양한 기준으로 정하지 못하는지 생각하지 못한 채 말이다.

 

장애인 최저임금 보장을 요구하는 국회 앞 기자회견 모습.

장애와 최저임금


장애계에서 최근까지 장애인 최저임금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이 얘기를 하려고 앞에 기나긴 나의 얘기를 먼저 꺼내본 거다. 나는 생산력의 측면에서 가치가 없는 몸으로서 가족 안에서 차별의 대상이 되었다. 가족 안에서 차별을 받은 것에 화가 나지만 한편으로 나의 가족만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장애인은 무가치하고 비생산적이라고 낙인을 찍어왔기에 나의 가족도 남들과 똑같은 생각을 해왔을 뿐일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을 할 수 있는 자와 없는 자 혹은 효율적인 몸과 쓸모없는 몸의 구분은 누가 해온 것인가?


나는 3~4년 정도 사회적기업에서 일은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노동에 대한 관심도 많고 장애인에게 노동은 어떤 의미가 있을지 가끔 생각한다. 사실 사회적기업이 아니고 나의 장애에 대한 편견이 있는 기업이었다면 나를 고용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산력을 중요시 하는 기업에서는 장애인을 노동자로 적절하지 않다고 바라본다. 그래서 최저임금법 제7조 ‘최저임금 적용제외’ 조항은 장애인에 대해서는 최저임금 적용을 안 해도 되도록 했다. 마치 장애인을 고용해 주는 것만으로 감지덕지 하라는 뜻인 거 같다. 사실 최저임금은 경제 개념을 넘어 그 노동에서 최소한의 받아야할 임금인 것이다. 윤리적인 가치가 기준인 것이다. 이 기준 또한 완전히 노동자 입장에서 정해진 것이 아니라 국가 경제 기반으로 자본가들이 가장 손해 안 보는 선에서 정해진 것이었을 거다.


그런데 장애인은 이 윤리적인 임금 기준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실제로 장애로 인해 생산력이 떨어진다고 해도 최저임금 지급과 별개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저임금의 기준을 정해 놓은 건 물가 상승에 비례하여 노동자가 최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정해주는 안전장치다. 이 안전장치에서 배제된 장애인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장애인은 쌀을 20원에 사고 병원비도 무료이며 사회 문화 활동은 할 필요없는, 자본주의 사회와 동떨어진 삶을 산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장애인실태조사 자료에 따르면 취업장애인의 월평균소득은 153만원으로 전국상용근로자임금 329만원('14년 2/4분기 기준)의 46.3% 수준이라고 한다. 논란의 핵심 중에 하나인 보호작업장과 근로작업장은 더 훨씬 열악하다. 사실 보호작업장은 일반적인 근로작업장으로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보호작업장 대상인 발달장애인이 대부분인 이 공간에서 가장 큰 역할은 발달장애인의 여가시간을 채워주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도 있다. 이 또한 누구의 관점이고 입장인 것인가. 나사 하나를 끼어도 노동은 노동이고 그것이 생산된다면 이윤창출을 하는 것인데 그것은 노동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떤 문제를 바라볼 때 지배계층, 힘이 있는 사람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답은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견고하게 짜여진 지배계층의 구조를 깨뜨리지 않는다면 사회적 약자들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다. 더불어 이러한 사회적 구조가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어느 누구도 결국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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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희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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