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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천 바다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던 소년, 고기잡이배에 던져지다
소년, 섬에 갇히다 - 선감학원 피해자의 이야기 ①-1
김춘근, 그의 22년을 기록하다
등록일 [ 2017년09월11일 19시24분 ]

12살 아이는 고기잡이배에 태워졌다고 했다. 그 말의 무게감을 첫 인터뷰 때는 별로 체감하지 못했다. 첫 인터뷰 이후 몇 달 뒤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여러 사람을 앞에 두고 해설사로 나섰다. 자신이 어찌하여 이 섬에 오게 되었는지, 이 섬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자신이 이 섬에 도착했을 때 처음 마주한 선착장 터에 서서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예순이 훌쩍 넘어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사내는 그날이 정확히 몇 년도 몇 월 며칠이었는지, 계절이 언제였는지조차 이젠 기억이 아득해져서 그날의 풍경만 어렴풋하게 떠올릴 뿐이었다. 그러다 그의 이야기 중에 귀에 선명하게 꽂히는 한 마디가 있었다. “내가 고기 창고에 들어가 있었다고.” 어차피 길에서 부랑아로 잡혀온 아이가 어디에 어떻게 실려 왔는지가 뭐 그리 중요할까 싶어 첫 인터뷰 때는 귀담아 듣지도 않았던 ‘고기잡이배’라는 단어가 그때서야 무겁게 다가왔다. 12살 아이는 고기잡이배, 그것도 바다에서 건져 올린 고기들을 모아놓는 창고에 실려 이 섬에 왔다는 것이다.


물고기들의 비릿한 냄새가 짙게 베어 있을 그 창고 안을 상상해 보려다 그만 두었다. 내 인생의 경험치로는 생선 창고에 실려 어디론가 보내진다는 것을 상상하고 감정이입 해 낼 재간이 없다. 남의 식탁 위에 올려질 고깃덩이처럼 한 인간의 육신이 창고에 내던져졌다. 그 안에서 12살 아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렇게 섬에 버려진 채 22년을 살았던 타인의 삶을 충분하고 정당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고민과 두려움을 가득 안고 그와의 인터뷰 녹취록을 꺼내든다.

 

선감도 길을 둘러보고 있는 김춘근 씨. 사진 가운데.


1961년 가을, 아이들 300명이 순식간에 섬으로


김춘근, 선감학원의 기록상 그의 생년월일은 1949년 10월 13일. 그는 전쟁통에 어머니를 잃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고향인 황해도로 배를 타고 가다가 배가 침몰해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배 부리는 일을 하는 아버지, 그리고 여동생과 함께 인천에서 살았다. 어린 나이에 그에게 닥친 삶은 팍팍했다. 우물물을 떠오기 위해 지게를 지고, 지금 기억으로 500미터는 되어 보이는 길을 오가야 했다.


어느 날, 그는 동생과 함께 하인천에 나갔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세 시간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쳐 우선 동생을 근처 큰 집에 보냈다. 그리고 그는 하릴없이 발길 닿는대로 걸었다. 동생이 가고 나서 10분인가 지나서였을 때였다. 누군가가 그의 뒷덜미를 잡았다. 경찰이었다.


“왜 그러세요?”
“너 엄마 아버지 없지?”
“아버지가 데리러 온다 그랬는데….”


그러나 경찰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경찰은 그저 좋은데 보내주겠다고만 했다. 파출소에 도착하니 그와 비슷한 또래의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더 있었다. 그는 근처에 큰 집이 있으니 그리로 보내 달라 애원했지만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파출소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아침 10시 쯤 되었을까, 아이들은 고깃배에 올랐다. 배에 오른 아이들은 30명은 되어 보였다. 배 안에선 주먹밥을 먹었다. 어딘가에 도착한 배는 아이들을 내려놓고 다시 인천으로 떠났다. 다시 작은 나룻배에 옮겨 탔고, 조그만 선착장에 도착했다. 누군가가 던져 준 같은 색깔의 옷을 들고 목욕탕에 들어갔다. 단체로 목욕을 했다. 그렇게 기약없는 섬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그 때를 1961년 가을 쯤으로 기억했다. 그리고 얼마 뒤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서 250명 가량의 아이들이 더 들어왔고, 수원에서도 수십명이 들어왔다. 아이들은 ○○사(舍)라 이름이 붙은 기숙사 건물에 수용됐다. 한 건물에 대략 100명 씩 꽉 채워졌다.


그 시절은 이제 막 군인들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때다. 군정은 혼란한 사회질서를 바로잡고 온갖 구악(舊惡)을 일소하겠다는 것을 쿠데타의 명분으로 내걸었다. 정치깡패, 용공분자, 부정축재자 등이 일소되어야 할 대상으로 지목되었고, 또한 부랑아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른바 혁명정부는 부랑아를 ‘악의 구렁에서 헤어날 길’이 없는 존재로 여기고 도심에서 쫓아내기에 급급했다.


서울 응암동에 있던 서울시립아동보호소는 도시의 부랑아를 ‘쓸어 담아’ 모아놓는 대표적인 집결지였다. 해방 직후인 1947년 사직공원 내에 ‘부랑아보호소’라는 이름으로 개원한 이 시설은 한국전쟁으로 건물 상당수가 파괴되자,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의 원조 등을 받아 응암동에 건물을 새로 지어 1960년 11월 15일 재개원했다.


그러나 이곳에 오게 된 아이들이 모두 고아나 부랑아였던 것은 아니다. 60년 수용연인원 1831명 중 45%에 달하는 824명이 실제 부모가 생존해 있는 경우였다. 이들을 수용하게 된 원인 또한 모호하게 명기되어 있다. “생활고, 엄격한 생활, 악우(惡友)관계, 허영심, 사소한 과오에서 오는 공포심, 자주적인 의식, 주위환경의 불순”(*서울시립아동보호소, 「槪況」, 1961년 자료) 어린 아이들에게서 흔히 나타날 수 있는 이런 특성들은 쉽게 부랑아의 특성으로 분류되어 이들을 수용하는 근거가 되어버렸다.


당시 아동보호소의 수용규모는 1000명. 그러나 아동보호소는 언제나 과밀상태였는데, 61년 내내 동시에 수용된 아동 수가 1500명을 넘었다. 당국은 이렇게 ‘쓸어 담은’ 아이들을 부모를 찾아 돌려보내주기 보다는 지방에 분산 수용하는데 열을 올렸다. 당시 신문 보도만 보아도, 61년 8월 10일에 ‘소행이 극히 나쁜’ 부랑아 70명을 목포 고하도의 국립감화원에 보냈고, 18세 이상 노동력 있는 부랑자 450명을 대관령 개간지에 강제노역 보냈다.(경향신문, 61.08.11) 61년 10월 말에는 아동보호소 수용인원 중 400명을 광주, 대전, 충주, 인천 등으로 분산시켰다.(동아일보, 61.10.24)

 

1961년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부랑자 수용 모습. 아동 뿐만 아니라 성인 부랑자들도 다수 눈에 띈다. ⓒ국가기록원


김춘근과 그의 동료 원생들도 이런 무자비한 단속에 의해 외딴 섬으로 내몰렸다. 부모님에게 보내달라는 호소는 통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기록도 ‘소행이 극히 나쁜 부랑아’라 적혀 있었기 때문일까?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그 이유 또한 전혀 알 수 없다. 동생을 먼저 보내고 홀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인 12살 어린 소년은 그저 영문도 모른 채 세상과 단절된 섬에 내던져졌다. 그것이 22년간 이어질 선감학원에서의 그의 인생의 시작이었다.


얻은 것이라곤 누에 키워 얻은 피로 뿐...원생을 거쳐 취사반장으로


우리가 거기서 뭘 먹었냐면, 국도 그냥 소금국이야. 파가 들어가 뭐가 들어가? 그런 걸 먹고 자면 애들이 얼굴이 다 부어요. 먹는 게 부실한데 짠 것만 주니까.
밭도 어마어마하게 많았어. 논도 많고. 그걸 우리가 다 농사를 짓는 거야. 어느 날 모심기를 하는데, 모를 잘못 꽂으니까 줄이 틀어지는 것을 보고 선생이 “나와” 그러는 거지. 나갔더니 주먹으로 여기(얼굴)를 퍽 치는 거야. 한 대 치니까 저기 가서 뚝 떨어지지. 그렇게 매 한 대 맞고 다시 모 심으러 들어가는 거야. 해만 뜨면 밭에 나가서 일하지, 논에 가서 일하지, 가을에 추수하면 우리가 다 베어야지. 그렇게 농사지은게 다 어디로 갔겠어? 우리는 그 농사지은 거, 쌀밥도 못 먹어봤어.


소년들의 일상은 매질과 노역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직원들이 직접 매질을 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각 사(舍)와 방을 관리하는 간부급 원생, 그러니까 사장과 방장에 의해 가해졌다. 단체생활과 규율이 항상 우선이었고, 방장과 사장의 말은 곧 법이었다. 그곳은, 하나의 작은 군대였다.


아침 일과는 점호로부터 시작됐다. 방장과 사장의 통제 하에 하루에도 몇 번씩 인원파악이 계속됐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면 각자 맡은 자리로 흩어졌다. 일부는 학교에 가기도 했다. 학교에 원생 모두를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열 명 중에 한 명 정도만 학교에 갔다고 한다. 학교에 보내고 안 보내고의 기준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김춘근 씨 또한 원생으로 있으면서 국민학교만 간신히 졸업했다.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은 각 사별로 정해진 밭으로 나가 일을 했다. 벌거숭이였던 선감도의 산을 우거진 숲으로 만든 것도 아이들이었다.


배가 고프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느 날은 배가 고파 나무에 달린 앵두를 하나 따 먹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뺨을 휘갈겨 맞아야 했다. 앵두는 수확할 작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맞았다. “너만 입이냐”는 게 이유였다.


아이들이 농사지은 작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는 “(어린 나이에) 그걸 우리가 어찌 알겠냐”고 했다. 그저 벼를 털어서 가마니에 담아놓고, 소달구지에 실어서 창고에 쌓아놓는 것 까지만 봤다고 했다. 우리는 그저 여러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그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김춘근 씨와 비슷한 시기에 선감학원 생활을 했던 정일호(가명, 59년 입소) 씨는 직원들이 미군에서 들어온 구호물자(K-Ration)를 빼돌리는 것을 봤다고 했다. 어느 날 밤, 창고에 들어가 있던 레이션 깡통을 원생들을 시켜 다시 배에 실어 육지로 가지고 나갔다는 것이다.


한겨울에 내복도 지급되지 않았다. 양말도 그저 한 사람 앞에 하나씩 지급될 뿐이었다. 수백명 아이들이 사는 곳에 의사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것도 사람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수의사였다. 그의 주 업무는 축산부에서 키우는 소, 돼지, 닭을 돌보는 일이지 아이들을 돌보는 게 아니었을 터이다.(정일호 씨 증언)

 

지난 5월 27일 경기도 안산시 선감도에서 열린 선감학원 희생자 추모제. 이곳이 선감학원의 원생들이 섬에 잡혀와 처음 도착한 선착장 자리다.


원생으로 생활하는 동안 섬 바깥으로 나가 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소풍 비슷하게 날을 잡아 놀러 간다고 해도 선감도 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그나마 멀리 나간 것이 선감도 바로 옆에 있는 대부도에서 열린 4H대회*에 나가거나, 수원에서 열린 전국 보육원 체육대회에 나간 것 정도였다.

 

*4H 운동 - 4H란 명석한 머리(Head), 충성스런 마음(Heart), 부지런한 손(Hand), 건강한 몸(Health)을 의미하는 네 가지의 이념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지(智)ㆍ덕(德)ㆍ노(勞)ㆍ체(體)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운동은 농촌 청소년을 지역과 국가에 기여하는 미래세대로 육성하는 사회운동으로 20세기 초 미국의 농촌 젊은이들 사이에서 시작하여 세계로 퍼져 나갔다. 우리나라에선 미군정시기 처음 도입되어 1960년대 이후 국가 발전을 위한 총력체제에 들어서면서 새마을운동과 함께 각 농촌지역에 보급되었다.

 

고립된 섬, 그곳에서 10년을 지냈다. 하지만 김춘근 씨는 섬 바깥을 상상하는 법을 몰랐다. 더러는 죽음을 무릎쓰고라도 섬을 탈출하려 했지만, 그는 감히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다. 선감학원은 일제강점기부터 소년 감화원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성인이 되면 퇴소가 원칙이다. 71년이 되니 학원에선 이제 나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 갈 곳은 없었다. 나간다 한들 먹고 살 방법도 없었다. 섬에서 그나마 배운 기술이라고는 누에 키우는 것 뿐이었다. 밤잠까지 반납하며 누에를 키워 얻은 것이라곤 온 몸에 각인된 피로 뿐이었다. 결국 섬에 남기로 했다. 원생 신분을 벗고 취사반장이 되었다. 나중엔 경비, 살림감수 등의 일도 했다. 직원이 된 것이다.


하지만 직원이 된다 한들 그의 삶에 달라질 것은 없었다.


(다음 연재 기사 이어 보기 : ▶다시 만난 가족...그러나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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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철 기자 rollingston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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