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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리스 생애기록-①] 숨죽인 채 반짝이던 반딧불 하나 - 故김한기
등록일 [ 2017년12월27일 11시31분 ]

12월 18일부터 동짓날인 22일은 '홈리스 추모주간'이었습니다. 홈리스와 무연고자를 애도하고 이들의 존엄한 삶과 죽음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 마련을 촉구하는 한 주였습니다. 비마이너는 '2017 홈리스 생애기록팀'이 엮은 '홈리스 생애기록집 III-소리 없는 이들의 삶의 기록' 중 다섯 편을 발췌해 공유합니다. 굴곡진 한국사를 온 몸으로 헤쳐온 사람들의 삶을,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피하고 싶은 미래를 현실로 살았고,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야말로 우리 사회의 운영 원리를 거짓 없이 보여주는 창이 될 것이기 때문('소리 없는 이들의 삶의 기록' 여는 글 중)'입니다. 

 

2017 홈리스 추모제 ⓒ빈곤사회연대 (사진은 본문 내용과 무관)

무뚝뚝했지만 참 좋은 사람

 

2017년 7월 17일, 서울 동자동 9-20. 김한기는 갑작스런 심부전으로 고통을 호소하며 계단 앞에 쓰러졌다. 주민들의 신고로 적십자 병원에 실려 갔지만, 그는 쪽방촌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동자동의 많은 사람이 그렇듯이 장례를 치러줄 만한 가족도, 일가친척도 없었다. 숨을 거두고 나서도 그는 17일 동안이나 차가운 병원 영안실에 누워있었다. 결국, 동자동 사랑방을 통해 벽제의 화장터에서 무연고 장례를 치렀다. 유골은 어딘지 모를 바닷가에 뿌려졌다고 했다.

 

원체 무뚝뚝하고 고집이 셌던지라 가끔 냉정하다는 인상마저 풍겼기 때문이었을까. 생전의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그에게 친구가 별로 없었다고 했다. 본인도 다른 쪽방촌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거의 유일하다시피 했던 동료 문봉열은 그를 “무뚝뚝했지만 참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양반은 원래 술을 안 드셨어. 담배도 안 피우고.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야. 참 좋은 사람이었지. 절대로 남한테 밥 한 그릇 사 달라는 말도 안 하고 사줘도 안 먹고. 자기 꺼 자기가 먹고.” (문봉열 인터뷰)

 

그는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남한테 신세 지는 것도 싫어했다. 그래서 남에게 밥 한 그릇 사달라는 말 한 번 한 적이 없고 누가 사줘도 먹지 않았다. “나는 죽어도 남을 안 믿는다.” 그가 늘 하던 말이었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1500원짜리 노란 빵을 싸 들고 “형님”을 찾아갔다. “어디 갔다 왔어?” 하면, 양평도 갔다 오고, 춘천도 갔다 오고, 천안도 갔다 오고, 문산도 갔다 오고…. 형님에게 낮에 있었던 일들,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죽어도 남을 믿지 않는다던 그가 ‘문 형’과는 이따금 돈거래도 했다. “어제 다 잃었는데 십만 원만 꿔줘.”하고 돈을 빌려 가서는, 조금 지나서 “자 이자야, 12만 원”하고 이자까지 얹어 돌려주었다.

 

생전의 그는 어떤 삶의 궤적을 가지고 있었을까. 어떻게 해서 동자동이라는 공간에 흘러들어와 친구도, 가족도 없이 그렇게 홀로 살다 떠났을까. 그의 삶 구석구석에 박혀있는 역사의 파편들을 어떻게 그려내야 할까.

 

전쟁의 시대: “먹고살려니까 별수 있나요. 우리가 그랬잖아요.”

 

그의 삶은 6.25 전쟁이라는 한국사의 거대한 국면에서 출발한다. 이 시대를 관통해온 대부분 사람들의 삶이 그러하듯이 그의 삶도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936년 태어난 김한기는 한국전쟁 무렵 만 14세였다. 집이 가난하여 국민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고, 두 형은 전쟁통에 징집이 되었다가 소식이 끊겼다. 인민군에 끌려가든 국방군에 끌려가든, 전쟁통에 끌려가서 다 죽었다던 시절이었으니 소식이 없다는 것은 곧 죽었다는 말이나 매한가지였다.

 

10대 중반의 어린 나이에 그는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미군 부대 앞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들어가 추위를 피하다가 한 미군의 눈에 띄게 되었다. 미군의 소개로 김한기는 오산 미군기지에서 하우스보이로 일을 하게 됐다. 미군 부대 내 숙소를 청소하고, 식당에서 밥을 나르고, 스낵바에서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안정적인 일감은 아니었다. 전쟁 중이라서 부대가 북진하면 곧 실직하고 다시 남쪽으로 퇴각하면 일자리가 생기던 때였다. 그렇게 그는 미군 부대에 의지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는 기지촌 ‘양공주들’을 바라보며 종종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모두가 춥고 배고팠던 시대. 하우스보이였던 김한기와 기지촌에서 일하던 양공주들이 ‘나’와 ‘너’가 아니라 ‘우리’였던 동병상련의 시대였다.

 

“오산 미 공군기지에서 하우스보이도 하고, 식당일도 하고, 스낵바에서 아이스크림도 팔았어요. 기지촌 ‘양공주들’을 보고 있으면 눈물 났어요. 피란 나와서 먹고 살려니까 별수 있나요. 우리가 그랬잖아요.” (이문영 기자의 ‘가난의 경로 4부: 개발의 환부를 걷다’ 중 김한기 님 인터뷰)

 

정치의 시대: “내 인생 말할 게 뭐가 더 있겠소.”

 

그가 이십대로 접어들던 1950년대 말, 김한기가 살아냈던 삶의 단면들은 이제 색깔을 바꾼다. 전후 50년대 말, 자유당 정권시절은 요정정치가 판치던 시절이었다. 효자동의 ‘청운각’, 익선동의 ‘대하’, 청진동의 ‘장원’. 정치인과 고급 관료부터 군장성과 재벌까지, 정치판에 얽힌 사람들이 사무실 드나들듯 요정을 들락거렸다. 왜소한 체구에 곱상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김한기는 요정 대하에서 처사(종업원)로 일하 게 됐다. 이기붕, 이후락, 김종필...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를 쥐락펴락했던 거물들이 그의 눈앞을 지나갔다.

 

마담을 따라 술집을 옮겨 다니면서 그는 청진동 요정 ‘새집’에서도 일했다. 새집은 대하보다 한 급 낮았다. 정치 권력의 손발이었던 주먹들이 드나들었다. 그는 여기서 이정재 와 김두한의 술시중을 들었다. 요정에서 일하던 처사들은 종종 외상값을 받으러 다니기도 했다.

 

1959년, 세금 포탈로 구속적부심사를 받던 대하 마담 김복희는 “3천여만 환에 이르는 국회와 행정부처의 외상값 때문에 세금을 내지 못했다”며 외상장부를 읊었다. 자유당 11만1천 환, 국회 10만1천 환, 내무위 56만8천 환, 농림위 11만9천 환…. (이문영 기자의 ‘가난의 경로 4부: 개발의 환부를 걷다’ 중에서)

 

김한기도 요정 마담의 심부름으로 외상값을 받으러 다녔다. 외상 수첩을 들고 대학교수들에게 외상을 받으러 가서 처음으로 대학 교정과 거기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봤다. 전쟁통에 국민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던 그는 배움이라는 건 자신의 팔자와 그닥 인연이 없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래도 대학생들을 보니 배움이라는 기회를 누릴 수 있는 그들이 그저 부러웠다. 외상값을 받으러 가서는 강의실에 앉아 강의를 훔쳐 들었다.

 

“운명이라고 생각했지만 배우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학생도 아니면서 좋은 강의다 싶으면 그냥 앉아서 듣는 거예요. 그들의 배움이 내 것이었다면 내 삶도 달라졌을까요? 내 인생 말할 게 뭐가 더 있겠소.” (이문영 기자의 ‘가난의 경로 4부: 개발의 환부를 걷다’ 중 김한기 님 인터뷰)

 

자본의 시대: ‘제발 그냥 살게 해 주세요’

 

그렇게 20대와 30대를 살아온 김한기는 40대 후반까지 유흥업 쪽에서 지배인으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나이가 들수록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졌다. 50대가 넘어서자 건설현장에서 나가거나 숙박업소에서 장부를 관리했다. 나중에는 행상을 다니면서 암표도 팔고 금붕어도 팔았다. 노숙 생활도 했다. 60세 무렵 돈의동 쪽방촌을 거쳐 동자동 쪽방촌으로 흘러들어왔다. 한국 현대사의 파도에 휩쓸려 그가 마침내 도착한 곳은 한 평 남짓의 자그마한 쪽방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22년 동안 고인은 이 가난의 공간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 공간도 완전히 허락된 공간은 아니었다. 2015 년 2월, 김한기가 9-20에 이주한 지 10개월 만에 건물에 강제 퇴거 딱지가 붙었다. 건물을 리모델링할테니 비우라는 건물주의 일방적인 통보였다. 안전평가에서 낮은 등급을 받았다는 핑계로 건물주는 쪽방을 강제퇴거하고 건물의 용도를 게스트 하우스로 바꾸어 수익을 올리려 했다. 사람보다는 돈이 더 중요했다. 쪽방촌 주민들에게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퇴거 딱지가 붙은 지 3개월도 안 되어 전기와 물이 끓기고, 해머를 든 이들이 찾아와 방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콘크리트 덩어리가 방바닥을 덮고 회색 철근이 벽을 뚫고 튀어나왔다. 9-20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씩 건물을 떠났다. 김한기도 건물을 나와 동자동의 다른 쪽방으로 이주했다. 건물을 나온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여전히 또 다른 쪽방뿐이었다. 제발 그냥 살게 해달라는 쪽지 한 장만 방에 남았다.

 

2015년 동자동 9-20 퇴거사태 당시 김한기 님이 남긴 쪽지 ©2017 홈리스 생애기록팀

주민들이 낸 공사중지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지고 서울시가 개입하여 사태가 일단락되면서 9-20을 떠났던 주민 중 몇몇이 다시 돌아왔다. 2015년 11월, 김한기도 다시 9-20의 지하로 돌아왔다. 자본의 이해에 따라 거리로 내쫓기고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삶. 그것이 9-20의 삶이고 동자동의 일상이었다.

 

"18년 동안 거기 살았던 분들도 있었고…. 근데 그분들이 월세로 산다고 해서, 매달 한 달씩 방세 내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당장 한 달 안에 나가라고 한다는 게 상식적이진 않잖아요. 근데 ‘왜 그때 당시에 건물주는 그랬을까’라고 생각하면 그래도 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아무리 월세라도, 아파트나 오피스텔에서 건물주가 퇴거 시한을 일방 통보하면서 ‘이번 달 끝으로 여기서는 더 이상 계약갱신 없다’라고 할 수 있는 데가 어디에 있겠냐고 생각해보면, (...) 그게 가능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이문영 인터뷰)

 

내 삶을 마치고 떠나갑니다

 

그로부터 약 1년 반이 지난 2017년 5월, 계속해서 심장이 좋지 않았던 김한기는 동자동 사랑방 활동가들의 입회하에 연명 치료 포기서와 짧은 유언장을 남겼다. 생전에도 그랬듯이 그는 죽어서도 남에게 신세 지기를 싫어했다.

 

사망하기 두 달 전 김한기 님이 자필로 남긴 유언장 ©2017 홈리스 생애기록팀
 

“내 삶을 마치고 떠나갑니다.” 이 말을 남기고 그는 두 달 후에 세상을 떠났다. 또 다른 동료가 떠났으니 이제 자신의 차례라는 동료들의 한숨을 뒤로하고 그는 이제서야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를 모두 내려놓았다. 역사의 채찍이 남겨놓은 깊은 상처들은 고인의 몸에 고스란히 새겨 놓은 채. 그래서 그 삶은, 김한기 본인의 삶이었던 동시에 동자동 주민들의 삶이었고, 또 극빈의 시대를 통과해왔던 모든 이들의 삶이기도 했다.

 

“그 사람 교회 댕기다 안 댕기다 했어도 천당은 갈 거요. 마음이 악하지가 않아서. 참, 나쁜 놈은 빨리 안 죽고 좋은 사람은 빨리 데려가더라고요. 하나님이 그런가 봐요.” (문봉열 인터뷰)

 

그는 어디로 갔을까. 동료의 말처럼 정말 천당에 갔을까. 전쟁도, 가난도, 강제퇴거도 없는 그곳에서는 부디 편하게 쉬시기를….

 

글 | 정택진ᆞ권영실(생애기록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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