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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리스 생애기록-②] 동자동에서 만난 고아원 동지들 - 故유철동
등록일 [ 2017년12월28일 14시57분 ]

12월 18일부터 동짓날인 22일은 '홈리스 추모주간'이었습니다. 홈리스와 무연고자를 애도하고 이들의 존엄한 삶과 죽음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 마련을 촉구하는 한 주였습니다. 비마이너는 '2017 홈리스 생애기록팀'이 엮은 '홈리스 생애기록집 III-소리 없는 이들의 삶의 기록' 중 다섯 편을 발췌해 공유합니다. 굴곡진 한국사를 온 몸으로 헤쳐온 사람들의 삶을,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피하고 싶은 미래를 현실로 살았고,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야말로 우리 사회의 운영 원리를 거짓 없이 보여주는 창이 될 것이기 때문('소리 없는 이들의 삶의 기록' 여는 글 중)'입니다. 

 

▶[홈리스 생애기록-①] 숨죽인 채 반짝이던 반딧불 하나 - 故김한기


망자를 불러내는 일은 조심스럽다. 그에 대한 기억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살아생전 자신이 겪은 일을 구술하는 데도 긴가민가하는 경우가 있는데 타인에 대한 기억이야 오죽하랴. 더구나 부와 권력이 있어서 부러움을 사던 이도 아니고, 대중의 인기를 얻고 살아 온 존재도 아니니 기억하는 이도 적고, 그 기억도 미약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흔적 없이 사라진 이에 대한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기 위해 인터뷰를 한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존재인 그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다. 고 유철동 님이 수백 번 수천 번을 오르내렸을 동자동에서 그의 지인인 김정길 님과 김선미 님, 그리고 조두선 님을 만났다.


아동보호소, 그리고 형제 같은 동료들과의 만남


유철동 님은 어린 시절을 아동보호소에서 보냈다. 당시는 거리에 부모를 잃고 집이 없는 아이들이 많던 시절이었다. 아동보호소는 대규모 인원을 수용하느라 입을 것도, 먹을 것도 부족했고, 구타가 횡행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고 한다.


“유철동이는 나하고 같이 고아원에서 있었어요. 나는 25동, 이거는 18동에. … 그때 인원이 700명 있었을 거예요. … 한 방에 50명, 30명씩 잤어요. 그때는 이도 많았잖아요. 방마다 이가 무척 많았어요. 유철동이는 더 그랬어. 코 찍찍 해 놓으면, 코 닦으면은 여기가 번질번질 광이 났어. … 도망을 가다 걸리면 뒤지게 맞고 그랬어요. 엎드려뻗쳐. 옛날엔 구타가 많아요. 지금은 때리면 막 신문에 나잖아요. 옛날에는 때리면 궁둥이가 막 피로 멍들어 갖고피가 나와도 말을 못 했어. 그렇게 고아원 구타가 심했다고.” (김정길)


아동보호소를 나오고 나서도 유철동 님과 김정길 님은 한 동안 함께 다녔다. 그 이후 소식을 모르다가, 동자동에서 만난 이후 그간 어떻게 살았는지를 들을 수 있었다. 서울역 인근의 서소문공원에서 노숙생활을 했다는 것, 노가다 등 여러가지 일을 했다는 것. 고인이 형처럼 따른 김정길 님 이지만, 털어놓지 못한 사연도 있는 듯 했다.


“같이 있었어요. 병 줍고. 한 7년인가? 그렇게 있었죠. 우리는 따른 일을 할 수가 없죠. 주민등록증도 없고. …(노숙을) 다 했지. 안 해본 사람이 어딨어요. 노가다 일도 다니고 했다는 말을 들었죠, 내가. 근데 인자 내가 아는 거는 같이 있을 때잖아요. 아동보호소 있을 때. 열다섯 되면 열다섯 된 데까지는 방을 같이 썼고. … 사생활에 대해서는 깊이는 내 형제간에 핏줄이 아니기 때문에 몰르지 그것까지는. 어렸을 때 고아원에서 만났으니까. 근데 여기 오니까 다 만나게 되드라고.” (김정길)


김정길 님도 미처 몰랐던 뒷이야기는 김선미 님께 들을 수 있었다. 김선미 님은 노숙인인권공동실천단 활동을 하다가 유철동 님을 만났다. 당시 유철동 님은 노숙 생활을 하며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다리를 다친 상태였다. 치료비가 없어 병원에 갈 수 없는 상황. 돈을 벌게 해준다는 말은 나중에 알고 보니 명의도용 사기였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수급 신청을 거절당하자 유철동 님에게는 거리생활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2009년 5월쯤일 거예요. 아저씨를 처음 만난 게, 남대문 지하도에서 만났어요. … 그런데 이제 계속 떠돌이 생활을 하고, 이제 뭐 건설 일도 하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는데, 노숙하기 전에 일하시다가 다치셨대요, 다리를. 그래서 한쪽 다리가 되게 많이 부어있었어요. 다리가 되게 심해 보여서 아저씨한테 치료를 좀 받지 않으시겠냐 이랬더니, 자기도 그러고 싶어가지고, 어디 수급 신청하는 거 문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공무원이 자기한테 차가 있다고 그러면서 거절을 한 번 당하셨다는 거예요. … 혹시 누구한테 명의 빌려 준 적 없었냐 그랬더니 자기가 다리를 다쳐가지고 몸이 안 좋은 상태라서 다리가 자꾸 부어오르니까 누가 50만원을 벌게 해주겠다, 근데 본인은 다리 때문에 자꾸 걱정이 되니까 그걸 치료 받고 싶어서 그래 좋다, 하고 따라가서 주민센터에서 서류를 떼달라고 해서 서류를 떼 줬다는 거예요. 그게 다래요. 그게 그렇게 쓰인 걸 전혀 모르고, 본인은 그 돈 가지고 한 번 치료받고 다시 또 거리로...” (김선미)


유철동 님의 건강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노숙인인권공동실천단의 도움으로 집을 구했다가도 병원에 장기간 입원해야 해서 집을 나오기를 반복했다. 몇 달이나 병원 신세를 질만큼 몸이 좋지 않았던 유철동 님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충분한 치료와 요양, 그리고 안정적인 주거였을 것이다. 하지만 김선미 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당사자의 절박한 외침을 외면하고 수급 신청을 자꾸만 지연시키는 복지제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거리에서 혼자 힘들어 했을 유철동 님의 모습에 질병과 가난이 얽혀 거리를 벗어날 수 없는 홈리스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아저씨가 2010년 2월, 3월경에 병에 걸려가지고, 되게 질환이 많아요. 척추 협착, 다발성 합병증, 당뇨병, 관절 이거 되게 심하셨거든요? 이거 수급신청을 하려면 근로능력평가용 진단서가 필요해요. 그래서 저희가 동부시립병원까지 동행을 했는데, 의사가 진단서를 잘 안 써주는 바람에, 이것도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아저씨는 딱 보기에도 먹는 거 부실해, 몸이 아파, 다 안 좋은데. 자동차  명의도용 건이 있다, 뭐 이것(진단서) 때문에도 그렇고, 계속 다 지연이되는 거예요. 이 분 참 안타까웠던 분 같아요.” (김선미)


“처음에 방을 잡고 아저씨가 몸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셨는데, 병원에 가봤더니 결핵이었어요. 그래서 다시 병원에 입원하셨어요. … 그래서 병원에서 2, 3개월 있다가 다시 연락이 와서 10월 달쯤에 고소고발장 쓰고 수급 신청을 하게 된 거예요. 그러면서 이제 수급이 확정이 되가지고 두 번째 방을 얻으셨을 때에는 중구 쪽에 얻으셨어요. 회현동. 거기 얻으셔가지고 한 집에 꽤 오래 계셨어요. … 그러다가 몸이 다시 안 좋아지시면서 다시 또 병원을 가셨어요.” (김선미)


수급 자격을 인정받은 뒤 유철동 님이 마지막으로 방을 얻은 곳이 동자동 쪽방이었다. 그곳에는 반가운 얼굴들이 있었다. 김정길 님을 비롯한 고아원 동지들이었다. 당시에 유철동 님을 포함해서 친형제처럼 지낸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는데, 놀랍게도 모두 동자동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김정길 님이 기억하는 고아원 당시의 고인의 모습은 자신을 형처럼 따르던 착한 동생이다. 이후에도 유철동 님과 동료들은 동자동에서도 서로 동무가 되어 친하게 어울렸다.


“유철동이는 쪼그만 했어요. 그때 한 9살? 나는 지금 46년생, 개띠. 유철동이는 동생 같아서 그래도 내가 잘했고. 나하고는 20년 25년 차이. … 여기서 또 만나게 되더라고요. 인연이라는 게 그래. 그니까 아동 보호소에 있을 때 90년? 그때 92년인가(80년대를 잘못 기억) 그때 5·18 터지고 나서 바로 여기 오니까 여기가 살고 있더라고. 유철동이가 먼저 여기 살았지. … 여기서 만나게 되니까 형제간보다 더 반갑고, 사람들 있는 데서 그러면 쪽팔리잖아요. ‘야 우리 아동 보호소에 있었다.’ 자존심이라는 게 있잖아요. 나이도 먹고 인자 사회 물정을 아니까 말은 못하지. 근데 우리끼리는 아동 보호소에 있었다는 거를 얘기를 하죠. 인자 같이 만나면 골목에서 담배피면서 야 우리 고아원에 있을 때 참 좋았다 이? 쌈도 하고 이렇게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렇게 허고.” (김정길)

 

유철동 님이 생전에 사시던 쪽방 입구. 지금은 다른 분이 살고 있다.


그때만 잘해주지, 다 먹고 돌아서면 나 몰라라 허데요


고인에 대해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성격이 착하고 순했다는 것이다. 성인이 되서는 싸움도 많이 해서 별명이 “꼴통”이었지만, 어린 시절에는 정말 착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동자동에 와서도 정이 많아 남들을 챙겼다. 본인이 먹을 것도 남기지 않고 남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답답한 마음에 고아원 시절 동료들이 말려도 막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착해요 얘가. 근데 이렇게 20살 넘어서는 남한테 꿀리지 않을라고 싸움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어렸을 때는 굉장히 착했어. … 눈물이 많아 얘가. 누가 해주면 막 울면서 자기 호주머니에 있는 거 다 털어주고. 사줘버려. 그러고 없으면? 말도 못해 이제. 이제 나나 보고 그 두천이라는 애 있으면은 형님 저거 돈 없으니까 돈 좀 만원이나 이 만 원이라도 줘 또 안 줄 수도 없어 왜 그러냐면은 어렸을 때 우리랑 같이 자랐기 때문에. 그 정이라는 게 있어가 지고 ‘야 이 새꺄 그 돈 엷게 쓰지 왜 주냐?’ 그랬다면서도 한 이틀이나 이따 보면 주게 되드라고.” (김정길)


“그래서 니가 언제 아플지 몰라도 언제 죽을지 모르겠지만 돈을 아껴서 써라. 남한테 조금만 베푼다 해갖고 다 사줘버리면, 니 새끼 약 사 먹을래도 손 벌려야 되잖아. 누가 주디? 안 주잖아. 그러면 얘가 그래요. 아이고 형님 찾을 때만 잘해주지 먹고, 술도 다 먹고 돌아서면 나 몰라라 허데요. 그래, 봐, 너 이태 고아원에서 자랐고 고생도 많이 했으면서, 왜 그렇게 베푸냐 그러니깐 이 얘기를 하더라고요. 형님 나한테 이렇게 잘하는데 뜨뜻하게, 응? 안 사줄 수가 있어요? 우리 고아원에서도 그랬잖아요.” (김정길)


이런 유철동 님을 보며 안타까워한 것은 아동보호소 시절 동료들만이 아니다. 조두선 님은 동자동으로 오시기 전에는 유철동 님을 몰랐다. 조두선 님은 동자동사랑방에서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챙겨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다 꽃동네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이 있다고 해서 전담하게 된 것이다.


“당뇨도 있고 그래가지고, 우리 이사장이 여기 오신 다음에 한 번 꽃동네를 보냈어요. 치료도 받고 오게끔 할려 그랬는데, 이 양반이 못 있겠다고 그냥 와버린 거예요. 그래 가지고 그 뒤부터 이제 알게 된 거죠. 그전에는 잘 몰랐다가. 꽃동네 갔다 온 다음부터 알게 된 거죠.” (조두선)


그런데 그뿐이 아니었다. 조두선 님은 유철동 님이 자꾸 밥을 안 먹고, 약을 안 먹어서 속을 썩였다고 기억한다. 그런데 유철동 님은 원래 잔병이 많고 당뇨를 앓고 있었기에 더욱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것이 중요했는데, 자꾸 밥을 먹지 않으려고 했다. 주위에서 말해도 잘 듣지 않았다. 유철동 님이 동자동으로 오는 것을 도와준 김선미 님도 그렇게 기억한다.


“아저씨가 먹는 게 되게 부실하셨어요. 스스로 뭐 만들어 드시거나 이런 걸 전혀... 그래서 늘 가보면, 뭘 사 드신 비닐봉지가 이렇게 놓여있거나 … 그래서 밑에 할머니가 봐 주실 수가 있으니까 쪽방 할머니께 부탁을 했는데 할머니도 자기 기력이 딸리니까 잘 돌보시지를 못하더라구요.” (김선미)


“사실은 이 양반이 뭘 먹으면 설사를 해요. 근데 안에 보면은 위 내시경까지 해보면은 깨끗해. 본인 생각에, 한 번 설사하니까 뭘 먹으면 설사를 한다, 그래서 안 먹는다, 이런 생각을 자꾸 갖고 있는 거예요. … 원체 이 양반이 잘 안 먹고 먹었어도 담배 많이 피우고 그리고 바나나 같은 거 먹고 … 밥 먹고 약 먹고 이러면 되는데 본인 생각에도 자꾸 그러니까. 우리도 아프다 생각하면 아프잖아요. 그러니까 먹으면 그냥 설사하는 거야. 특별한 병명이 없는데.” (조두선)

 

무연고, 홈리스 사망자 154명을 기리는 '홈리스 기억의 집' (12월 18일 홈리스 추모주간 선포 기자회견)


가족에 대한 그리움


남들에게 밥을 사주면서도 본인 몸은 챙기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까. 조두선 님은 고인에게는 보살핌을 받고 싶은 욕구가 강했다고 한다.


“우리 어렸을 때에 죄 지면은 부모 눈을 피해서 가다가 배고프면 막 못 들어오잖아요, 그러면은 일부러 눈에 띄는 데에 있는 거지. 그런 행동을 하는 거죠. 이게 내 눈에 봬. 그래서 가다가 지가 그런 일도 있었어요, 밥 먹으러 가자해서 끌고 내려왔는데 픽 쓰러지는 거예요. 딴 사람들은 어유, 저 사람 위독한가보다 했는데 저는 여기서 119 불러줄 테니까 그거 타고 가고, 나하고는 인제 인연 끊자, 나한테 어떤 도움도 바라지 말고 이대로 그냥 병원 실려가. 밥 먹으러 가던가 둘 중에 하나만 택해, 119 부른다, 그러니깐 벌떡 일어나는 거야. 그게 내 눈에 보인다니까.” (조두선)


부모자식 간의 비유를 들었던 것처럼, 보살핌에 대한 욕구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유철동 님도 결혼생활을 한 적이 있다. 동자동으로 흘러들어오고 나서 그 그리움이 남아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 것도 없잖아 있죠. … 한 번은 종로3가에서 조카를 만난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 조카가 포천에서 미용실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정확한 위치나 전화번호나 이런 것을 안 받고 그냥 막연히 조카가 포천에서 미용실을 한다는 거만. … 어느 날 갑자기 조카가 보고 싶다, 포천에 가야 되겠다, 자꾸 그런 얘기를 해서 정확하게 위치가 어디냐, 그런 걸 물어봐도 모른대요. 근데 자기가 가면 알 수 있대요. 자기가 옛날에 포천에 살았던 모양이에요. 근데 포천도 옛날 포천이지, 지금 많이 바뀌었잖아요, … 미용실을 열 군덴가 돌아다녔어요. 정확한 위치나 전화번호도 모르고, 그냥 얼굴만 보는 거죠. 문 열고 얼굴만 확인하고 없으면 그냥 나오고. 결국 못 찾고, 갑시다, 해서 돌아왔죠.” (조두선)


“예, 결혼 했어요. 결혼 했죠. 자식이 있긴 있지. 근데 찾지를 못 하는 거예요. 부인도 살아있어요. 천안에 어디 산다는 얘기를 내가 듣긴 들었어요. (왜 헤어졌는지까지는) 모르죠, 내가 그것까진. 결혼 한 거는 지가 술 먹으면서, 밥 먹으면서 얘기를 하니까. 눈물바람되면서 얘기를 하니까 내가 알았지. 그런 거는 다 감추는 게 있잖아요. 아무리 부모라 해도 친형제 간이라 해도 다 숨기는 게 있지 그렇잖아요. 한때는 행복하게 살았더라고요.” (김정길)


유철동 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하자 남동생과 누나가 병원에 찾아왔다. 그래도 돌아가시기 전에 그토록 그리던 가족들을 볼 수 있었기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철동 님은 결국 입원상태에서 돌아가신 꽃동네 병원에 안치되었고, 이후에 가족이 동네에서 빈소를 차렸다고 한다.


“철동씨가 좀 위독하다 그랬더니 남동생이 한번 방문하고 그렇게 연결해가지고 꽃동네로 왔었어요. … 얘기를 하고 직접 가서 동생을 만나서 데리고 갔으니까. 부천에서 만나서 같이 가고. 그리고 나서 누나하고 연락이 되서 같이 병원에 가고.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 누나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리고 동생이 여기 와서 보고 자초지종을 다 얘기했더니 고맙다고. … 다 장례 치르고 나서 남동생이 동자동 방문했고. 동네에 안치했어요. 납골당 짓고 있는데 그전에 따로 안치하는 데가 있어요.” (조두선)

 

실제 쪽방 크기 모형을 가지고 쪽방에서의 하루를 재연하는 퍼포먼스. (12월 18일 홈리스 추모주간 선포 기자회견 ⓒ빈곤사회연대)


어린 시절 꿈, 그리고 좋아하던 노래


유철동 님의 어린 시절 꿈은 선생님과 택시기사였다. 그래서 전기기술을 배우고 열심히 살아보려 했지만 잘 안 되어 노숙생활을 하다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아, 꿈이... 자기는 어려서 나중에 선생도 되고 싶고, 그 정비, 옛날에 새나라 택시라고 옛날에 있었어요. 옛날에. 지금은 이제 모르지. 새나라 택시가 최고 오래된 데 그 세발 차. 지금은 없잖아요 시골 가야 있지. 세발 차라고 연탄차라고. 그래서 그거를 운전하고 싶어가지고. 그걸 굉장히 원했드라고 얘가.” (김정길)


유철동 님을 회상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고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많았다. 고인이 생전에 좋아하던 노래를 회상하다가도 더 해주지 못한 기억을 떠올렸다.


“‘홍도야 울지 마라’. 그러니까 술만 먹으면 홍도야 우지마라. 니가 우냐 이 자식아, 내가 그러고 그래서 유철동이 두천이랑 정선이 갈 때 최고로 많이 울었던 거 같아요. 생각을 안 하고 잊어버릴라고 하면 가끔가다가 고아원에서 자란 모습. 내가 때린 모습, ‘야 이 새꺄’ 뺨때기 때린 모습, 나쁜 모습만 생각나니까 미안하고. 여기 있을 때 조금이라도 말이라도 더 잘해주고 돈 만 원 이 만 원이라도 꿔서라도 줄 수 있는 걸 갖다 내가 안 준 게 마음이 아프더라고.” (김정길)


“유철동님 죽을 때도 사실은 정말 갔구나 생각하다가도 그날 저녁에는. 사람들 있을 때는 그러지 않는 척해도, 혼자 있을 때는 ‘아내가 그 양반한테 너무 모질게 했다.’ 마음 한구석에 아련하게 있죠. 못 했던 거, 잘 했던 거 이런 게. 나는 그때 당시에는 최선인데, 사실은 돌아가시고 나면은 ‘아 좀 더 챙겨도 될 거.’ 좀 더 후회스럽죠. 다른 분들도 보면 안 좋죠.” (조두선)


“저는 그냥 아저씨가 많이 아프셨을 때부터 가족을 좀 찾으셨으면… 저희가 그걸 도와드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친구분들한테도 위로 많이 받으셨겠지만 … 되게 그리움이 있으셨던 거 같거든요. 다른 형제분들 좀 만나도록 도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김선미)


어릴 적 추억을 함께 한 김정길 님도, 노숙생활 중에 만나 도움을 주었던 김선미 님도, 고 유철동 님의 자립적인 삶을 지원하고자 했던 조두선 님도 모두 “미안하다”고 했다. 원망을 남기고 간 이들도 많은데 유철동 님은 동료에게 미안함을 남기고 갔으니 참 ‘순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고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기술자로 살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아 빈곤한 삶을 영위해 오다가 동자동에서 둥지를 틀게 된 고 유철동 님. 외로워서 베풀고, 외로워서 엄살(?)피웠던 그를 기억하는 김선미 님, 김정길 님과 조두선 님은 인터뷰 내내 때론 웃고 때론 눈물지었다. 덕분에 우리는 짧은 시간이나마 순수하고 따뜻했던 망자와 함께할 수 있었다.

 

 

후 기


김정길 님을 인터뷰하고 나서 유철동 님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조두선 님을 만났는데 전혀 다른 캐릭터로 느껴져서 잠시 ‘멘붕’이 왔다. 특히 병원에 입원하여 사망하기 직전까지 그의 가족에 대한 기억이 전혀 달랐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가족에 대한 느낌이 달랐다. 당황스러웠지만 가족에 대한 기대 여부에 따라 실망의 정도가 달랐으리라 본다. 또한 인터뷰 도중 어떠한 제도적 지원이나 변화를 원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 의외의 대답을 들었다. 지원단체에서 사람을 존중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우선이었다. 국가나 교회 등의 단체에서 물질적인 지원을 했으면 하는 요구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빗나간 답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질문이 부끄러웠다. 구술자는 밥보다 존중이 중요했던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인 모멸감을 무엇보다 싫어했다. 인터뷰 본문에는 거론되지 않았지만, 모 대학교 학생들이 자원 활동을 하러 왔다가 동의도 구하지 않고 사진을 학보사 신문에 기재한 사건이나, 지원 단체 실무자가 동자동 주민을 무시한 일 등에 구술자는 몹시 분노를 느꼈다.


나는 ‘가난’과 만날 때 무엇으로 채울까를 고민하기 전에 존재에 대한 존중이 먼저라는 것을 잊지 않기로 했다.

 

 

글 | 안화영ㆍ최영선(생애기록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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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홈리스 생애기록팀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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