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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와 달력을 빼앗긴 삶...‘선한 사마리아인’은 없었다
소년, 섬에 갇히다 - 선감학원 피해자의 이야기 ⑧-2
김성곤 씨의 이야기, 두 번째
등록일 [ 2018년01월15일 15시18분 ]

>> 지난 연재 기사 먼저 보기 (▶7살 나이에 전국을 떠돌던 아이, 그에게 국가는 없었다)

 

 

시계와 달력이 없는 곳


그의 증언이 아동보호소 기록과 불일치하는 문제 말고도 의아스러운 점이 또 있었다. 그는 첫 인터뷰에서 선감학원에 66년도에 입소해서 4년간 생활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그가 국가인권위에 제출했다는 탄원서에는 62년도에 입소해서 8년간 생활했다고 적혀 있다. 두 번의 증언 모두 그가 선감학원에 들어가기 직전에 있었다는 아동보호소 기록(69년 입소한 것으로 적혀 있다)과 차이가 많이 나기에 두 번째 인터뷰에서 이 점에 대해 다시 물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9살(64년도 경)에 선감학원에 들어가서 6년 정도 생활했다고 정정했다.


수사를 하는 검사가 아닌 이상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입소시기와 퇴소시기 정도는 정확하게 알아야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매번 증언이 달라지면 어떤 말을 믿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종종 “내가 기억력은 꽤 좋아요”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 말이 가장 믿기 어려웠다. 두 번째 인터뷰에서 입소시기와 관련된 질문을 반복적으로 던지자, 그는 기억을 더듬어 이렇게 말했다.


(아동보호소 기록대로) 내가 14살에 들어갔다는 건 말이 안돼요. 그러면 내가 대충 선감학원에 6년 있었다 치면 벌써 스무살이잖아요? 그런데 그 정도 나이가 되면 선감학원에서는 다른 데로 팔아먹든가(취업 명목으로 대부도나 인근 육지 주민 집에 머슴살이 등을 보내는 것을 말함-편집자 주) 그냥 퇴소시켰단 말이에요. 탈출할 이유가 없단 말이에요. 그런 것만 생각해도 맞지 않죠. 그리고 (피해생존자 중에) 김성환이라고 있죠? 성환이랑 내가 다 친구인데, (선감도에서) 성환이가 중학교 2학년인가 다니는 것을 볼 때 쯤에 내가 탈출을 했단 말이에요. 내가 그건 안 잊어 먹어요. (김성환 씨 증언 관련 기사 바로 보기 : “빌어먹을 삶, 나머지 인간” / “불시착한 삶, 독방을 나가다”)


그는 직접 국가인권위에 탄원서도 내고, 2017년 11월 선감학원 피해자들과 진상규명 요구 기자회견을 열었던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도 자신의 피해규명을 호소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 정도로 선감학원 진상규명에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정말 일이 잘 되어서 정부가 주도하는 진상조사가 시작된다면, 최소한 자신이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단이 있어야 할텐데 지금처럼 증언이 안 맞거나 자신의 어렴풋한 기억에 의존한 퍼즐 맞추기만 반복한다면 누가 그의 말을 믿어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건 단지 김성곤 씨 한 명만의 문제가 아니다. 선감학원의 운영주체였던 경기도가 당시 서류를 온전히 공개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피해자임을 증명하는 것은 현재로선 본인의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적잖은 피해자들이 자신의 입소시기에 대한 기억조차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증언의 신빙성을 향해 의문을 던지던 나는 얼마 못 가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일전에 다른 피해자 분이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거기엔 시계와 달력이 없었어요.” 지금껏 시계와 달력이 없다고 들어본 곳은, 사람들의 중독적 소비와 도박을 부추기고자 만들어진 백화점이나 카지노 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어린 아이들 수백 명이 살아가는 공간에 시계와 달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김성곤 씨에게는 자신의 생이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기억조차 망가져 있었다. 그의 생일은 11월 29일. 그러나 이는 진짜 생일이 아니라 선감학원에 들어올 때 선생들에 의해 임의로 부여된 것이었다. 그래서 원생들 중에는 생일이 같은 사람이 많았다. 그 중 상당수는 선감학원 개원일인 5월 29일로 통일되어 버렸다. 즉, 그들은 입소 시점부터 자기 삶의 고유한 달력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아니, 어쩌면 선감학원의 운영 원리상 시계와 달력은 처음부터 필요 없었는지도 모른다. 근대의 시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계와 달력은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준거점이다. 하지만 선감학원은, 하루의 시작과 끝은 기상 명령과 취침 점호로 알리면 그만이고, 이 섬을 언제 나갈 수 있을지 기약도 없이 주어진 노역만 말없이 수행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달력을 보며 내일, 내년의 삶을 계획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었으리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에게서 피해를 입은 정확한 날짜를 듣고자 추궁하기 바빴던 나의 질문들이 얼마나 민망한 질문이었는지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박태원 경기도지사(재임기간 1964 ~ 1968, 사진 맨 앞 가운데 인물)가 선감학원을 방문해 원생들이 생활하는 기숙사 건물을 시찰하고 있다. (사진제공 :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 소장)

‘선한 사마리아인’은 없었다


선감학원을 탈출해 인천에 들어온 그는 ‘선한 사마리아원’에 다시 찾아갔다. 그곳의 주소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인천 부평동 674번지. 그곳에서 가족들을 다시 만났다. 가족을 다시 만난 건 74년도라고 했다. 고아원을 떠난 7살 아이가 다시 돌아오는데 12년이 걸린 셈이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신과 적대관계에 있던 유대인이 강도를 당해 쓰러진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유대인을 구하지만, 상류계급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쓰러진 유대인을 외면했다. 12년 만에 ‘선한 사마리아원’에 다시 돌아오기까지, 김성곤 씨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만나지 못했다. 그의 주변엔 제사장과 레위인들 뿐이었다. 그가 선감학원에 있는 동안 유일하게 기대를 걸었던 ‘쎄모’(별명)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쎄모 선생의 집도 인천 부평이었다. 그래서 그는 쎄모 선생에게 ‘선한 사마리아원’ 얘기를 많이 했다. 그러나 쎄모는 그를 사마리아원에 보내주지 않았다.


내가 거기 있으면서 쎄모 선생한테 기대를 많이 했었어요. 혹시 가족을 찾아주지 않을까 해서. 그런데 안 찾아주는 거예요. 진짜 많이 미워했었죠. 그래도 같은 동네 사람이라고 말이라도 친절하게 해주긴 했던 것 같아요. 그 사람한테 맞은 기억은 없어요. 하지만 서운하고 야속하다는 마음은 굴뚝같지.


그는 선감학원에 있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일을 벽돌 만드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부원장이 운영하는 벽돌공장에서 손과 어깨가 다 까져가면서 벽돌을 날랐다. 그렇게 만들어진 벽돌은 경운기에 실려 선착장으로 옮겨졌다. 벽돌은 육지의 어느 공사장에 팔려갔을 것이다. 가치를 인정받아 육지로 나갈 수 있는 건 오직 벽돌이고, 그 벽돌을 만들었던 아이는 폐품 취급을 받다가 몰래 탈출해서 겨우 육지에 닿을 수 있었다. 그러나 12년간 어디서도 환대받지 못했던 소년은 복수하듯 세상과 불화하는 길을 택했다.


어릴 때부터 제 별명이 깡다구이기도 했지만, 말썽을 많이 피우고 살았던 것 같아요. 인천 자유공원 같은 데 올라가서 패싸움도 많이 하고. 그러다 보안사에 끌려가서 걔들한테 또 다구리 맞고 그랬다니까요. 그 때 다 도망갔는데 나만 잡혔어. 나중엔 또 복수한다고 차 두 대를 야구방망이로 다 때려 부수고.


그러나 복수의 대가는 혹독했다. 신군부가 장악한 세상은 그를 ‘사회악’이라며 삼청교육대로 내몰았다.


친구랑 사고를 쳐서 경찰관을 폭행했어요. 친구는 재판 받아서 집행유예로 나오고, 나만 징역 1년인가를 받았죠. 징역 끝내고 다시 경찰 지구대를 찾아갔어요. 그래갖고 거기를 또 작살내 버린 거죠. 나중에는 경찰 한 명이 튀어나가서는 신고를 한 거예요. 그 때가 계엄령이었단 말이에요. 헌병 지프차가 와가지고 끌고 간 데가 삼청교육대였죠.


나는 대구 50사단으로 가서 12월부터 1월까지인가 교육을 받았는데, 거기를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아요. 근로건설단이라고 하는데로 끌려가서 일을 했는데, 너무 맞다보니까 장이 꼬여버린 거예요. 이틀 동안 군의무대에 있었는데 의무관 대위가 진단을 내리더니 장파열이래요.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저놈은 괜히 여기 뒀다가는 송장 치르니까 석방시키라는 거예요. 그래서 겨우 나올 수 있었죠.

 

김성곤 씨.


이후에도 그의 삶은 이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부산에 놀러갔다 취한 채로 역전에서 잠이 들었더니 끌려간 곳이 형제복지원이었다. 그곳에서 3개월간 건물 짓는 노역에 동원되었다가 몰래 탈출했다. 안정적이고 평온한 삶은 그에게 사치였다. 감금과 노역, 그리고 이를 벗어나기 위한 탈출만이 반복되었던 삶의 끝에 남은 것이라곤 공포뿐이었다. 그래서 세상과 끝없이 겉돌면서 불화했다. 자신을 반기지 않는 세상을 향해 수틀리면 주먹부터 휘둘렀다. 결국 약 36년의 세월이 반복된 교도소 생활로 훌쩍 지나가 버렸다. 하지만 그 허망하게 날려버린 나날들 속에서, 다시 만난 가족조차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어주지 못했다. 애초에 자신을 고아원에 버린 사람들에게 다시 정 붙일 수 없었던 것이다.


교도소에 사는 동안에 어쩔 때는 가족들이 면회도 오고 했지만, 내가 오지 말라고 보내버렸어요. 그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워서 못 오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싫은 거예요. 어머니도 싫고 형제들도 싫고. 같은 핏줄이라고는 하나, 나는 저 식구들하고 아주 먼, 보이지 않는 사람이구나, 생각을 했어요. 어느 날은 어머니가 누나들하고 면회를 오기도 했어요. 근데 내 앞에서 막 울어요. 그럼 내가 ‘왜 우냐고, 당신이 대체 누구냐고’ 했어요. 누나들한테도 이 사람 데리고 올 거면 당신들도 오지 말라고 했어요. ‘성곤아 왜 그러냐, 엄마 이제 용서할 때 되지 않았냐’ 그러는데, 나는 ‘용서? 용서가 뭔데?’ 이랬어요.


또 한 가지 내가 가장 원통했던 게 뭐냐면, 사마리아원에 있을 때 나를 양아들 삼은 미국 사람이 있었어요. 미군 대령인데, 미국에 들어갈 때 나를 데리고 들어가려고 했어요. 나한테 미군부대 구경도 자주 시켜주고 그랬죠. 어느 날 (고아원에 같이 살던) 우리 막내 누나가 내 다리에 실수로 뜨거운 물을 쏟아서 데인 적이 있었어요. 병원 가서 응급조치만 하고 나왔는데, 그 때도 양아버지가 미군부대 데리고 가서 한동안 치료 마치고 나오기도 했어요. 그러고 나서 양아버지가 나를 미국에 데리고 가려고 코스모스 피는 가을에, 나를 가슴에 안고 사진도 찍고 그랬는데... 그런데 어머니가 나를 보내지 말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 자식이 어떤 자식인데, 이러면서. 그 이야기를 나중에 큰어머니한테 듣고 내가 얼마나 통곡을 하고 울었는지. 내 인생을 이렇게 망가뜨렸다는 생각을 하니까 너무 괴로운 거예요. 큰어머니도 “너희 어머니가 반대했어도, 그 때 너를 보냈어야 하는 건데...”라면서 안타깝게 생각하더라구요.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때가 늦었잖아요.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보고 싶다는) 꿈은 천지인데, 그건 나에게 이뤄질 수 없는 꿈일 뿐이에요. 나는 지금껏 혼자 살아온 거예요. 삶의 의지력 같은 거, 이런 게 딱히 와 닿지 않더라고.


어머니는 ‘그 자식이 어떤 자식인데’라며 그를 미국에 보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기 품에서 키우지도 않았다. 그나마 어머니는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대놓고 원망이라도 쏟아낼 수 있었지만, 자식을 내다버리라고 했던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선한 사마리아원’을 운영했던 친척들은 나중에 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다. 다시 만난 형제들조차 이제는 낯선 사람들이었다. 그에게 형제들이란 “그들이 아무리 잘 살아봐야 나하고는 상관없는” 사람들이었고, “형제들 속에서도 나는 그냥 나일 뿐”이었다. 평생을 홀로 가족에 대한 원망으로 살아온 그를 일으켜주고자 손 내밀어주는 ‘선한 사마리아인’도 없었다. 그렇게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둘러싸인 세상 속에서 그는 보이지 않는 벽에 갇혔다. 

 

“인간답게 꽃필 나이에 다 꺾여가지고 살았잖아요”


김성곤 씨는 현재 기초생활수급자로 살고 있다. 정부에서 지급되는 65~70만 원 정도의 돈으로 한 달을 산다. 허리 디스크, 반복되는 어깨 탈골, 심장병, 간경화, 당뇨, 고혈압... 그가 지금 안고 있다고 말한 질병의 이름들이다. 얼마 전에도 열흘 간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면서 약만 한가득 받아왔다. 몸도 아프고 어디 돌아다닐 돈도 없으니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낸다. 이런 힘든 생활 속에서도, 그의 마음 한 켠을 가득 채워 잊히지 않는 이름들이 있다.


기자님 만나기 전에, 선감학원 나와 살면서 죽은 원생들 이름을 다 적어가지고 오려고 했는데... 지금도 내가 그 원생들 이름을 다 알고, 어떻게 죽었다는 것도 알고 있거든요. 그들이 나이 서른도 안 되어서 죽었단 말이에요. 왜 그렇게 일찍 죽었겠어요? 선감학원에서 살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맨날 구타만 당하니까 병이 생기고 육신도 다 망가진 거죠. 그게 괴롭고 힘드니까 그냥 술로 세월을 보내고. 지금 생각해보면 20대들이 술을 얼마나 먹었다고 죽겠어요? 결국엔 다 병으로 죽은 거라고요. 

 

지난해 5월 27일 열린 선감학원 희생자 추모제.
 

그는 이 말 끝에 “저 또한 여러 가지 병이 와서 얼마나 살지 모르겠어요.”라고 했다. 자신의 운명도 먼저 스러진 동료들의 삶처럼 끝나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어린 소년들이 암매장된 선감도 야산에 내려앉은 어둠처럼 낮게 깔렸다. 제사장과 레위인들로만 가득찼던 세상 속에 버려진 채 살아온 삶이었지만, 사람으로 태어나 이렇게 생을 끝낼 수는 없다는 호소가 그의 마지막 말에 짙게 배어 있었다.


우리가 선감학원에 어린 나이에 들어가서 모진 고생을 하고, 인간답게 꽃필 나이에 다 꺾여가지고 살았잖아요. 우리 생존자들 중에서도 거기를 다시 떠올리고 싶던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런데 이제 세월이 흘러가고 사회가 점점 잘못된 것을 잡아나가는 것을 보니까, 우리도 진짜 죽기 전에 바로잡고 싶은 거예요. 진짜 무서운 역사가 숨어 있었던 거잖아요. 금전적인 보상을 받고 싶은 것보다도, 우리가 고통을 안고 살아온 것에 대해 역사에 내놓고 싶고, 밝히고 싶은 거예요. 문재인 대통령이 되고 나서 이런 일들에 힘쓰고 이렇게 하시는데, 우리 일도 수면 위로 띄워 줄거라 생각하고. 나를 포함해서 생존자들도 하나같이 그렇게 잘 되길 바라고 있어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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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철 기자 rollingston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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