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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장애등급제 폐지’ 발표, 끝이 아닌 시작인 이유
장애등급제 폐지의 본질은 제도 변화와 ‘복지 예산 확대’
실질적인 효과 보려면 ‘예산 5배 증액’ 필요하지만 정부 의지는 ‘미지수’
등록일 [ 2018년03월08일 21시13분 ]

지난 5일 이낙연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제19회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 ⓒ국무조정실.

 

정부는 지난 5일, 제19회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를 열고 제5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18~22년)을 심의·확정하고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장애등급제 폐지는 장애계의 오랜 요구로 지난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공약 사안이기도 했다. 정부의 이번 발표로 장애계의 오랜 숙원이 해결되는 듯 보였으나 기뻐하기엔 이르다. 왜냐하면 애초 장애등급제 폐지의 목적은 필요한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에게 권리로서 보장될 수 있도록 새로운 복지 제도를 만듦과 동시에 전폭적인 장애 복지 예산의 확대였기 때문이다.

 

정부는 내년 7월 장애등급제의 단계적 폐지와 함께 종합판정도구를 도입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 보도자료 어디에도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 도입된다는 종합판정도구에 관한 구체적 내용은 없으며 대략적인 예산 추계도 없다. 심지어 제5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에도 연도별·분야별 추진 계획만 나와 있을 뿐, 종합판정도구가 대체 무엇인지에 관한 설명은 없다.

 

복지부 관계자는 8일 비마이너와의 통화에서 “3차 시범사업에서 종합판정도구를 모의 적용했는데 현재 조사표를 수정, 보완하고 있다”면서 “모의적용한 결과로 예산을 확정할 예정이다. 상반기 중에 예산을 확정해야 내년 예산안에 편성할 수 있다”고 밝혔다. 따라서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 도입될 종합판정도구의 정부안은 이미 나와 있다. 세부적인 부분은 향후 수정될 수는 있으나 큰 틀에서는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종합판정도구의 내용에 관한 물음에 복지부 관계자는 “복지부에서 실무적으로 준비하는 내용은 민관협의체에서 공유하나 정부안에 대한 민관협의체 피드백이 없는 상태에서 오픈할 순 없다”며 말을 아꼈다. 지난 2017년 8월 25일,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요구하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등이 5년 넘게 농성하고 있는 광화문 농성장에 박능후 복지부 장관이 방문하면서 장애등급제 폐지를 논의하는 민관협의체가 꾸려진 바 있다.

 

지난 5일, 장애등급제 폐지를 발표한 정부 보도자료 일부
- 장애등급제 이후 도입될 ‘종합판정도구’란 대체 무엇인가?

 

복지부는 앞서 1월 26일 열린 6차 민관협의체에서 종합판정도구 개요에 대해 대략적으로 장애계와 공유했다. 비마이너가 입수한 6차 민관협의체 회의자료에 따르면, 종합판정도구는 △초기상담 △복지욕구 조사 △일상생활지원 필요도 평가라는 3개의 영역으로 구성된다.

 

초기상담에선 장애인 대상자의 전반적 상태·환경 파악을 위해 장애 정도, 가족 상황, 주요문제 등을 조사한다. 복지욕구 조사에선 공공·민간서비스 지원과 사례관리 실시를 위해 서비스 이용현황 및 필요한 서비스를 조사한다. 일상생활지원 필요도 평가에선 일상생활 수행능력, 인지·행동 등 장애특성, 사회·환경요인을 계량적으로 평가한다. 이는 활동지원서비스 외에도 보조기기, 거주시설 등 각종 지원 기준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종합적으로 이뤄질 예정이다. 복지부 관계자에 따르면, 종합판정도구로 바뀌면 현재 활동지원서비스 급여량 책정을 위해 사용되는 인정조사표는 없어진다. 새로 도입될 일상생활지원 필요도 평가에선 성인과 다른 장애아동의 발달단계를 고려한 아동용 평가도구가 별도 마련되고, 기존 인정조사표가 신체장애인 중심이어서 발달장애인의 특성을 감안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수용해 발달장애인의 특성을 반영한 평가항목이 추가된다.

 

또한 현재 읍면동에서 기초생활수급 탈락 등 일부 저소득층에 한해 실시하는 ‘찾아가는 상담’을 개편 후엔 중증장애인, 장애인으로 구성된 가구, 중복 정신장애인 등으로 대상을 확대해 지원하고, 시군구에선 장애인 전담 민관협의체를 구성해 민간서비스를 발굴·연계하며 전문사례관리를 실시할 계획이다.

 

즉, 복지서비스 접근에 대한 칸막이 구실을 한 장애등급이 사라지고 개인의 욕구와 사회·환경적 요인을 보다 종합적으로 고려한 판정 체계가 내년 7월 장애등급제의 단계적 폐지와 함께 도입된다. 복지부 계획에 따르면, 장애등급제는 내년 7월부터 활동지원서비스를 비롯한 일상생활 분야, 20년에는 장애인콜택시 등 이동 분야, 22년엔 장애인연금 등 소득 분야에서 단계적으로 폐지된다. 종합판정도구에 대해 복지부는 장애계와 내용 공유만 했을 뿐 자세한 논의는 7차 회의(날짜 미정)에서 진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 장애등급제 폐지 발표한 정부, 정작 ‘예산 확대’는 미지수

 

그러나 정부 발표에 대해 민관협의체에 참여하고 있는 전장연은 7일 “과연 ‘장애등급제 폐지(廢止)’라는 장애인들의 숙원이 정치적 쇼에 의해 ‘쓰고 버려지는 폐지(廢紙)’가 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며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장애등급제 폐지의 핵심이 ‘필요한 서비스(제도)가 필요한 사람에게 권리로서 보장될 수 있느냐’인 점을 상기한다면 전폭적인 예산 확대가 필수적인데 정작 껍데기만 바뀔 뿐 현재 논의되는 수준에선 예산 확대가 전제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활동지원서비스의 경우, 현재는 1~3급만 신청할 수 있으나 내년 7월부터는 4급도 신청할 수 있다. 기존 이용자들의 이용이 침해되지 않고 “장애인의 욕구와 환경에 맞는 맞춤형 서비스 지원”이라는 종합판정도구의 의도에 부응하기 위해선 예산 확대가 필수적이다.

 

2014년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일상생활 대부분에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답한 사람은 14.5%에 달한다. 타인의 도움이 조금이라도 필요한 사람까지 합치면 32.3%다. 그러나 전체 장애인 251만 명 중 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하는 장애인은 6만 7500명(2016년 말 기준)으로 전체 장애인의 2.6%에 불과하다. 단순 계산해도 최소 5배 이상의 예산 증액이 필요하며, 현재 활동지원제도 수가가 최저임금과 근로기준법을 위반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그 이상의 예산 확대가 요구된다. 올해 보건복지부 총예산은 57조 6628억 원으로 이중 장애인활동지원 예산은 6907억 원이다.

 

또한, 전장연은 “문재인 정부의 공약인 최중증장애인에 대한 활동보조 24시간 보장과 활동보조 자부담폐지, 65세 이상 대상 제외 문제가 이번 추진 방향 및 종합계획에 실행계획으로 담기지 않았다”는 점도 비판했다. 현재는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니면 재산과 소득 수준에 따라 활동보조 급여량의 15% 이내에서 자부담비를 내야 하는데 이러한 부분이 활동지원 이용에 대한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65세 이상이 되면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노인장기요양서비스로 전환되면서 급여량이 대폭 줄어드는 것도 활동지원 제도의 심각한 문제로 꼽히고 있다.

 

활동지원서비스 개편과 함께 장애계가 주시하고 있는 것은 장애인연금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끝나는 2022년에 개편될 예정이다. 정부 보도자료에 따르면 “정신장애 3급인 C씨는 직장생활이 불가능해 생계에 어려움이 있지만 장애인연금이 1·2급 및 3급 중복 장애인으로 한정되어 있어 장애인연금을 받을 수 없지만“ 22년엔 ”종합조사(소득·고용 분야)에 따라 실제로 근로가 어려워 소득수준이 낮은 장애인으로 변경됨에 따라 C씨도 장애인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마치 22년이 되면 ‘중복장애 3급’이 아닌 ‘장애 3급’도 장애인연금을 받을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민관협의체에서도 매우 논쟁적인 사안이다. 전장연은 장애인연금 기준 대상 변화 시기를 22년이 아닌 종합판정도구가 도입되는 내년 7월로 앞당길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전장연은 “(복지부는) 기획재정부의 반대 때문에 못 하겠다고 하는데 과연 정부 임기 말(22년)에 예산이 반영되어야 할 장애인연금 기준 변화가 가능할 것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며 “핵심은 문재인 정부의 예산 반영 의지”라고 강조했다.

 

실제 복지부 관계자는 “민관협의체엔 정부 대신으로 참석하는 것이기에 기재부 입장도 듣고 가야 한다. 재정 부담이 있어 합의된 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만약 3급까지 풀면 지금보다 6000억 원 정도가 더 필요하다”고 밝혔다. 올해 장애인연금 예산이 6009억 원인 것을 감안하면 현재 예산의 2배가 필요한 것이다. 또한 이 관계자는 “3급 장애인까지 다 주는 것은 장애등급제 폐지의 취지와도 맞지 않는 거 같다”면서 장애인연금의 기초급여는 소득 보전의 목적이 있기에 노동 가능한 장애인의 경우 노동 연계 등의 방법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더불어 “장애인연금 제도 개선을 이야기하지 않고 대상 기준만 이야기하는 건 어렵지 않겠는가” 라고 전했다.

 

과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OECD 평균 수준의 장애인 예산을 요구하며 제시한 안
- ‘등급제 폐지’ 실질적인 효과 보려면 현재보다 예산 5배 증액되어야

 

이러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당장 내년 7월 장애등급제가 폐지되고 종합판정도구가 도입된다고 해도 실제로는 크게 변화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전장연이 “문재인 정부의 ‘장애등급제 폐지 추진방향’이 OECD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장애인복지예산의 대폭적인 확대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등급’을 ‘정도’로만 바꾸는 껍데기 ‘폐지’에 그칠 것”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한 이유다.

 

장애계는 장애인 복지 예산을 OECD 평균 수준에 맞출 것을 꾸준히 요구해왔다. 전장연은 과거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며 “복지부 장애인 정책국 예산이 현재 수준의 5배 이상으로 증액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장연은 활동지원 예산을 포함한 장애인 정책국 복지서비스 예산(약 1조 2천억원)을 5조 수준으로 증액하고, 이 과정에서 장애인시설을 폐쇄하여 기존 시설 예산을 지역사회 개인별 지원체계 마련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 또한 소득 보장(장애인연금과 장애 수당)도 “OECD 국가의 GDP 대비 장애인복지 현금급여 평균은 1.71%인 반면 한국은 0.39%에 불과하다”면서 이 역시 5조 수준으로 증액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를 정리하면 2017년 기준으로 보건복지부 장애인 정책국 예산 1조 9000억 원을 10조 수준으로 확대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보수적이다. 복지부는 장애등급제 폐지를 대대적으로 발표하며 보도자료에서 앞으로도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한 ‘민관협의체’를 통해 장애계와 지속적으로 소통”하겠다고 밝혔으나 실제 협의체에서의 논의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복지부 관계자는 활동보조 24시간 보장, 자부담 폐지, 65세 이상 대상자 제외 등에 대해 “박경석 전장연 대표가 논의 안건으로 제안은 했으나 아직 공식 의제로 다루진 않았다”면서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한 민관협의체인데 장애인 의제를 다 올려서 이야기할 순 없다. 전장연 요구 사안을 이야기하는 협의체도 아니다. 협의체의 주제와 범위는 정해져 있다”고 선을 그었다.

 

활동보조 24시간 보장, 자부담 폐지, 65세 이상 대상자 제외 안건을 ‘장애등급제 폐지’ 논의와 별개의 것으로 보고 테이블에서 밀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민관협의체 테이블 바깥에서 논의되어야 할 사안이 아니라, 장애등급제 폐지를 논의하는 목적과 의도를 상기한다면 마땅히 포함되어야 할 쟁점들이다. 복지서비스 접근 자체에 대한 칸막이가 사라진다고 한들 이용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따라서 정부의 장애등급제 폐지 선언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 장애등급제 폐지를 수년간 요구해온 장애계가 정부의 이번 발표를 “정치적 쇼”라고 날카롭게 비판한 것이 ‘예언’이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획기적인 예산 확대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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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민 기자 skpebbl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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