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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원은 어떻게 ‘총체적 기관’이 되는가?
[서평] 어빙 고프먼의 『수용소』
등록일 [ 2018년07월22일 18시54분 ]

미시사회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의 역작 『수용소』(1961년 출간)가 반세기를 훌쩍 넘어 지난달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다. 고프먼은 워싱턴D.C. 성 엘리자베스 병원에서의 참여 관찰을 바탕으로, 정신병원의 특성을 연구했다. 이 책의 원제는 피난처, 보호소, 구호시설 등의 의미를 갖는 ‘Asylums'이지만, 고프먼이 발견한 특성을 가장 잘 집약해주는 말은 ‘총체적 기관(total institution)’이다.


총체적 기관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생활의 모든 측면, 즉 잠자고sleep, 활동하고play, 일하는work 모든 것들이 동일한 장소 안에서 행해진다. 둘째, 시설 내의 구성원들이 모두 똑같이 취급되고 같은 일을 하도록 요구되어 진다. 셋째, 모든 생활이 명백한 형식적 규칙과 단일한 관리자 집단에 의해 엄격하게 규율된다. 넷째, 요구되는 행위들은 결국 그 기관의 공식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돈’되고 ‘프로그래밍’된다.


‘총체적 기관’이라는 개념은 등장할 때부터 지금까지 여러 논쟁을 불러왔지만, 이미 반세기나 지난 시점의 한국 사회 실상을 고려해보면 그리 신선할 것도 없다. 이미 우리는 정신질환자를 수용하는 시설이 그들의 존엄을 어떻게 해치는지를 여러 사례를 통해 알고 있다.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가 수행한 <중증·정신장애인 시설생활인에 대한 실태조사>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인권위의 정신요양시설 거주인 설문조사 결과 중 일부를 보면, 우선 한 방에서 함께 먹고 자는 사람의 수는 평균 6.2명이나 된다. 이런 조건이니 당연히 사생활이 온전히 보장되기는 힘들다. ‘개인사물함이 있고 내 물건을 넣어놓지만, 열쇠는 없다’는 사람이 60%에 달한다. 또한 본인이 원한다고 룸메이트를 바꿀 수 없다는 규칙 하에 사는 사람이 34.1%였고, ‘타인에게 노출되지 않은 상태로 신변처리를 할 수 없다’ 10.3%, ‘목욕시설 이용 시 타인에게 노출되지 않은 상태로 할 수 없다’ 58.3%다. 그 외에도 본인이 원할 때 식사할 수 없고(77.7%), 시설 밖 외출은 제한되어 있으며(55.1%), 본인의 일과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59.8%).

 

어빙 고프먼, 『수용소』 (문학과지성사, 2018, 심보선 옮김)
 

고프먼은 이런 조건은 “필연적으로 자아 정체성을 이뤘던 기존 토대들을 무시”(p.31)하는 것이며, 정신질환자를 “통상적 기관 운영이 다스릴 수 있는 사물로 규격화하고 약호화”(p.30)한다고 말한다. 물론 시설 밖 생활인들도 어느 정도는 일정한 규율체계 하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생활 질서에 따르자면 일터의 권위는 노동자들이 봉급을 받는 지점에서 멈춘다. 가정과 여가 생활에서 봉급의 처분은 노동자의 사생활에 속하며 이를 통해 일터의 권위는 분명한 한계 안에서만 유지된다.”(p.23) 그러나 ‘총체적 기관’에서는 아침에 눈 떠서 잠잘 때까지, 아니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강요된 규율이 작동된다.


고프먼은 이런 규율 적용의 권리를 직원-계급 구성원 누구나 갖고 있으면서 재소자-계급 구성원을 향해 행사되는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규율 유지는 오직 “일부 작은 미국 마을에서 성인이라면 누구나 부모의 부재 시 아이를 훈계하거나 아이에게 일을 시킬 권리가 있는” 경우에나 찾아볼 수 있다. 예외적으로 성인에게 적용되는 경우가 있다면, “교통법을 집행하는 경찰을 만났을 때”(p.62) 정도이다. 즉, 총체적 기관에서 입소자의 지위는 그의 나이가 몇 살이건 ‘마을 어른에게 훈계받는 아이’ 수준으로 강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프먼의 연구와 인권위 조사가 유사한 것은 단지 연구 내용 자체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를 둘러싼 논쟁도 판박이처럼 닮았다. 우선, 고프먼의 연구를 부정적으로 본 학자들은 고프먼이 정신병원 입소자들이 ‘환자’라는 사실을 보지 못했고, 그 때문에 병원이 가진 치료적·재활적 기능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또 다른 비판자들은 ‘자아에 대한 모욕’과 같은 입소자들의 경험을 고프먼이 지나치게 과장했다면서, 그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별도의 평가 척도를 적용한 정신병원 입소자 조사를 수행했다. 그 결과 입소자들은 오히려 정신병원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주장했다.1)


한국에서는 정신병원 강제입원의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 2016년에 제정된 「정신건강복지법」이 까다로운 강제입원 요건을 제시하자, 정신의학계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정신의학계는 법 개정으로 인해 대량의 퇴원환자가 갑자기 지역사회로 쏟아져 나와 혼란을 야기할 수 있으며, 이들에게 제때 적절한 치료가 제공되지 못해 오히려 환자의 권리가 침해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정신병원의 의료적 순기능’을 강조하는 고프먼 비판자들의 논리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런데 고프먼은 『수용소』의 어디에서도 정신병원의 ‘질병 치료’라는 기능적 측면을, 굳이 상세히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지, 평가절하하고 있지는 않다. 물론 몇몇 비판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그는 입소자들의 ‘환자’라는 정체성에 크게 주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것을 고프먼의 연구가 가진 결점이라고 볼 수는 없다. 사실 어떤 종류의 ‘환자’도 환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기 몸 또는 정신, 심리 중 특정한 아픈 부분을 제외하면 환자 정체성만으로 그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고프먼이 천착하는 문제는, 그 아픈 부분을 다룰 때 ‘환자’ 자신과 의료 서비스 제공자가 맺는 관계(“서비스 모델을 정신 치료에 적용하는 데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수용소』의 4장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이 문제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정신장애인 인권 문제를 고민하는 이들도 진지하게 토론해봐야 할 주제라 하겠다.


고프먼은 4장을 근대적 서비스업의 특징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어떤 고객이 자신의 소유물에 하자가 생겨 서비스 제공자에게 맡기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이를테면, 핸드폰이 고장 나서 AS센터에 맡기는 상황이라면, 고객은 직원에게 “화면이 깜빡거려요”(증상)라고 설명하고, 직원은 핸드폰의 여기저기를 살펴본 후 “너무 오래 사용하셔서 그런 것 같네요”(징후)라고 답한다. 이때 직원은 핸드폰을 수리하는 게 나은지 아니면 교체하는 게 나은지 정보를 제공할 수 있지만, 최종적인 판단 권한은 고객에게 있다. 즉, 직원은 고객을 자기 결정권을 지닌 존재로 여기고 적절한 존중과 의례를 통해 대우해야 하며, 반대로 고객의 소유물에 대해서는 의례적 관점이 아니라 기술적 관점에서 다루게 된다. 고프먼은 “서비스의 성공은 이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실체를 분리시키는 동시에 각각을 적절히 취급하는 것에 달려 있다”(p.377)고 강조한다.


그런데 이런 서비스 모델을 의료분야로 가져오면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고객의 신체란 서비스 제공자에게 관리를 맡기고 다른 일을 보러 갈 수 있는 종류의 소유물이 아니다. 또한 다른 기계적 대상물처럼 신체의 어떤 부분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이를 폐기하거나 교체하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고객을 하나의 인격으로 다루기 위해, 다소 모순적이지만 ‘비인격 치료’가 필요하다. 환자를 맞이할 때는 예의를 한껏 갖추되, 치료가 시작되면 환자는 마치 사회적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저 누군가 놓고 간 소유물인 것처럼 다뤄지는 것이다.(p.389-p.393) 따라서 의료서비스 모델에서는 고객-소유물-서비스 제공자를 둘러싸고 언제나 윤리적인 긴장과 갈등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의료서비스 모델이 정신치료 분야로 들어오면 이 긴장 관계가 한쪽으로 심각하게 기울어져 버린다. 정신치료에서는 ‘서비스 대상물과 고객 자신의 분리 불가능’이라는 불가피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서비스 제공자는 환자의 어려움을 관찰하고 치료하기 위해 그가 처한 상황 전체를 병원으로 끌고 와”(p.413) 버리는 것이다.


이에 정신병원이 전제적(despotic) 권력을 가진 ‘총체적 기관’이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정신과 의사는 “재소자가 무엇을 가질 수 있고 무엇을 박탈당할지에 대한 운명을 결정하는 위치”에 서게 되고, “정신의학적 설명만 주어진다면, 정신과 의사는 환자의 일과를 조직하는 생활 질서의 거의 전부를 자신의 의지대로 바꿀 수 있다.”(p.408-9) 정신과 의사가 환자에 대해 ‘몰라도 되는 일’이란 없다. 정신과 의사는 병원 내의 인턴, 심리학자, 신경생리학자, 사회복지사, 간호사 등을 통해 환자의 삶 모든 영역에 관여한다. 이처럼 비대칭적으로 환자의 주체성과 독립성은 박탈되고 그의 삶이 전적으로 정신과 의사의 권한 하에 놓이게 될 때, 환자가 하는 말 또는 행동은 질환으로 인한 증상 아니면 회복의 징후로만 여겨질 뿐이다. 회복의 징후로 읽히려면, 병원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어빙 고프먼
 

『수용소』는 미셸 푸코의 저작처럼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정신병원의 계보를 그려내는 역사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정신병원 입소자들의 열악한 인권실태에 대한 보고서도 아니다. 고프먼은 자해 또는 타해의 위협이 있는 정신질환자가 있다는 사실, 그런 위협이 현저한 이들에게는 강제입원이 필요하다는, 우리 사회의 암묵적 합의를 애써 부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는 자신이 관찰한 대로 정신병원 입소자와 직원들의 행동과 말을 분석했다. 철저하게 미시사회학적 방식의 접근을 택한 것인데, 그럼에도 정신병원 내에서 작동하는 권력 구조를 명백하게 드러냈다.


그가 발견한 구조의 핵심에는 ‘전문가 서비스 모델’의 모순이 있다. 정신병원 입소자는 주체적인 고객으로 행동할 여지를 빼앗기고, 병원에서 나오기 위해 혹은 병원 안에서의 삶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정신병원의 규율을 수용해야만 한다. 그 결과 고프먼이 책을 끝맺으며 말했듯, “정신병 환자들은 서비스라는 이상에 짓눌려 자신의 자아가 파괴됨을 경험한다. 다른 사람들의 삶은 같은 이상 때문에 안락해지는데 말이다.”(p.440)


『수용소』가 여전히 중요한 저작으로 읽혀야 하는 이유가 저 마지막 문장이 집약되어 있다. 한국 사회 역시 ‘사회의 안전’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정신질환자를 ‘전문 서비스’라는 간판을 내건 수용소(Asylum)로 내몰고 있다. 그러나 ‘전문 서비스’에 내재된 구조적 모순에 대한 진지한 질문은 제기되지 못했다. 반면, 고프먼은 이미 반세기 전 다소 건조한 참여 관찰 연구를 통해 그 질문을 던졌다. 지금이야말로 고프먼의 질문에 대한 뜨거운 토론이 이어져야 할 때이다.

 

 

*각주

 

1) Weinstein, R. M. (1982). Goffman's asylums and the social situation of mental patients. Journal of Orthomolecular Psychiatry, 11(4), 267-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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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철 기자 rollingston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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