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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진, 살아서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던 사람
고 권오진 씨, 활동지원 24시간 받다가 ‘중복사업’이라는 이유로 끊겨 패혈증으로 사망
인천시, 권오진 씨가 죽자 활동지원 24시간 시범사업 시작
등록일 [ 2018년08월08일 21시00분 ]

사람들은 고 권오진씨의 영정 앞에 헌화했다. 고인의 영정사진은 그가 420 투쟁 당시 썼던 플래카드를 목에 걸고 선글라스를 낀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권오진은 ‘살릴 수 있었던’이 아니라 ‘살 수 있던’ 사람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군가 죽으면 반드시 그 사람을 이야기한다. 그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하며 그의 인생을 톺아본다. 그 시간 동안 누군가는 울기도 하고 다른 이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죽은 자의 모습을 알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산 자들이 죽은 자를 향해 반드시 던지는 질문 하나가 있다. ‘그 사람 왜 죽은 거야?’ 누군가는 호기심에 묻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들을 말하며 죽은 자를 애도하고 그가 더 살아내며 가질 수 있었던 삶의 가능성을 추모한다.

 

이날 고 권오진 씨의 죽음을 말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도 그랬다. 이들은 그의 몸을 통제하고 있던, 그에게 턱없이 부족했던 장애인활동지원을 이야기했다. 권오진 씨는 장애인활동지원을 24시간동안 받지 못해 죽었다. 사람들은 그가 살아있었다면 더 할 수 있었던 것들, 손에 더 쥘 수 있었던 것들을 이야기했다. 그의 영정 앞에는 평소에 좋아했던 커피가 있었고 그와 함께 인천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은 계속 울었다.

 

권 씨는 20대 중반이던 96년 뺑소니 교통사고로 경추 4~7번이 손상되어 목 아래 전신이 마비됐다. 국립재활원에서 3개월간 재활훈련을 받고 한동안은 집에서 생활했지만, 2002년 결국 장애인시설인 가평 꽃동네에 입소했고 10년 뒤인 2011년, 탈시설했다. 시설에서 함께 나온 오명진 씨와 민들레자립생활센터 체험홈에 입주했고, 2014년에는 임대아파트를 얻어 혼자 생활하게 됐다. 그해 11월, 그는 인천시가 시범사업으로 시작한 24시간 활동지원서비스 대상자가 됐다. 이 서비스는 그의 자립생활의 기반을 다져줄 중요한 제도였다.

 

420 투쟁 플래카드를 목에 걸고 선글라스를 낀 채 환하게 웃고 있는 고 권오진 씨.
 

하지만 2016년 2월, 인천시는 24시간 활동지원서비스 중단을 선언했다. 당시 박근혜 정부가 지자체 복지사업 중 유사·중복사업을 통폐합하겠다고 내놓은 ‘사회보장 정비방안’에 인천시의 24시간 활동지원이 포착된 것이다. 권 씨는 이를 막기 위해 같이 24시간 활동지원을 받던 유명자 씨와 1인시위도 벌였지만 그의 하루 활동지원시간은 14시간으로 축소됐다. 야간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야간순회서비스 방문이 이뤄졌으나 그의 체위를 변경해 욕창을 방지하기에는 불충분했다. 결국 권오진 씨는 욕창이 심해져 지난 6월 17일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권오진 씨의 죽음 후 장애계가 ‘이는 사회보장 정비방안에 의한 죽음’이라며 분노하자, 인천시는 그제야 올해 하반기에 10명에 대한 24시간 활동지원 시범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8일, 그의 49재를 기리는 추모제가 종로복지관 앞 청와대 농성장에서 열렸다.

 

고인과 함께 활동했던 김순미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은 마이크를 들었지만 말을 잇지 못한 채 한참을 망설였다.
 

고인과 함께 활동했던 김순미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은 마이크를 들었지만 말을 잇지 못했다. 다리 사이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는 입을 열고 말을 하려다가도 입술을 닫았다. 한참을 망설이다 말을 시작했다. 그는 “누군가 죽기 전에 우리의 이야기를 좀 들어주면 안 되는가. 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을 떠나야지만 말을 들어주고 몸부림치는지 모르겠다”며 울먹였다. 이어 “활동지원 24시간이 끊기자 그는 ‘빨리 24시간 활동지원이 되어야 내가 살아갈 수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처럼 시설에 있었던 장애인들이 시설 밖으로 나와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했다. 그가 하려고 했던 일, 우리가 다시 꼭 해야겠다”며 더 이상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박길연 민들레장애인야학 대표는 눈이 빨개진 채로 발언을 시작했다. 권오진 씨의 삶을 이야기하며 무엇이 문제인지 이야기하고 싸워나가야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의 이름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처럼 더웠던 15년도 여름날 활동지원 24시간을 얻어내기 위해 인천시청 앞에서 농성했다. 그는 자신이 죽음으로써 24시간을 얻어내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절실해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원했던 활동지원 24시간을 얻어냈다. 그런데 이 서비스를 이용할 오진은 우리 곁에 없다. 오진이 병원에 있을 때 꼭 나아서 함께 예전처럼 활동하자고 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조차 없게 됐다”며 고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와 함께 같은 곳에서 탈시설했던 유명자 씨는 인천시가 활동지원 24시간을 중단하자 같이 1인시위를 했었다. 그런 그의 이야기를 전하며 “만약 활동지원 24시간이 중단되지 않았더라면 오진오빠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을 거다. 평소 좋아했던 아이스크림도 먹을 수 있었을테고…. 같이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오진 오빠는 시설에서도 그곳에서 나왔을 때도 제 옆에서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볼 수도 없어서 너무나 힘들다”며 울었다.

 

이형숙 3대적폐폐지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은 권오진 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를 놓친 죄인이 된 것 같았다고 이야기했다. 이 위원장은 “박근혜 정부가 활동지원 24시간을 없애려고 할 때 권오진 씨가 누구보다 앞장서 싸우며 말했다. ‘나는 활동지원 없으면 죽을 거다. 꼭 필요하다’고. 그는 서울, 경기, 지방으로 다니며 애원했다. 지금도 생생하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그러면서 그는 “권오진 동지에게 활동지원 24시간이 보장됐다면 오늘 이곳은 그의 추모제가 아니라 다른 구호들을 외치며 같이 싸우는 자리가 됐을 거다. 하지만 여기에 그는 없고 우리는 여전히 활동지원 24시간을 쟁취하자고 외치고 있다”면서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발언이 끝나자 사람들은 그의 영정 앞에 헌화했다. 고인의 영정사진은 ‘420장애인권으로 함께 하겠습니다’라는 피켓을 목에 걸고 선글라스를 낀 모습이었다.

 

고 권오진씨를 기리는 추모굿이 열리고 있다.

고 권오진씨와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은 추모제가 진행되는 내내 울음을 참지 못했다.

사람들이 헌화하기 위해 줄지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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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혜미 기자/사진 박승원 기자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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