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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려받은 가난에는 연고가 없다
[무연고사 기획] 애도 되지 못한 슬픔, '처리'되는 죽음 ⑩
무연고자 유가족의 이야기 _ 아버지 시신 인수를 포기한 아들
등록일 [ 2019년01월21일 18시46분 ]

지난 6월 1일, 서울시립승화원 2층에서 김한석 씨(63세, 가명)의 장례식이 엄수됐다. 김한석 씨의 아들(가운데)이 장례식에 참석한 모습.

그는 발목이 보이는 스키니한 세로줄무늬 검은색 바지와 하얀 남방, 검은색 재킷을 입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 바지는 평소 캐쥬얼하게 입는 바지인 듯했다. 그는 눈이 컸는데, 그 눈엔 긴장과 어찌할 바 모르는 당혹스러움이 서려 있었다. 그는 그날 장례식의 상주였다.

 

여름의 첫날인 2018년 6월 1일, 서울시립승화원 2층에 준비된 서울시 무연고자 장례추도식에서 김한석 씨(63세, 가명)의 장례식이 엄수됐다. 김한석 씨는 지난 5월 5일 간경변으로 성북구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에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들이 그의 시신 인수를 포기하면서 그는 무연고자가 됐다. 그 아들이 이날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했다.

 

아들은 “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느냐”는 사람들의 물음에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응답했다. “아버지가 같이 살고 싶어 하셨을 거 같아요”라는 말에는 “네”라고 힘있게 답하기도 했다. 답변 후엔 얼마간의 침묵이 감돌았다. 그는 “경제 사정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아버지를 기억하는 아들의 목소리와 표정은 온화했고, 그리움이 묻어났다.

 

장례식을 하고 두 달 반이 흐른 8월 여름의 끝자락에 그를 다시 만났다. 혹독한 여름 더위를 보내고서 만난 그는 아버지의 삶과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는 자신의 삶에 관해 이야기했다. 아버지를 많이 원망하며 살았으나 어찌할 수 없는 핏줄의 이끌림인지 그에게 아버지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내 편’이었다. 그 존재의 부재가 주는 허망함과 무너짐을 겪어내며 그는 그해 여름을 살아나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파산 신청으로 자기 대에서 빚을 끝냈으나, 물리칠 수 없는 가난의 대물림으로 아들은 자기 삶에서 또다시 빚질 수밖에 없었고 그 빚은 가속도가 붙어 도저히 갚아나갈 수가 없어 ‘빚 없는 삶을 살아보는 것’만이 아들의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그때 그는 고작 스물일곱이었다.

 

- 빚 때문에 아버지랑 헤어지고 할머니랑 살았어요.

 

아버지가 초등학교도 안 나오셨을 거예요. 집이 힘들어 가지고. 어렸을 때부터 재단을 배우셨다고 들었구요, 줄곧 공장에서 옷 만드는 일 하시다가 아이엠에프(IMF) 때 경기가 많이 나빠져 빚에 휘둘리면서…. 자기 딴엔 가족들한테 최선을 다한다고 했는데, 막상 금전적으로 많이 힘들다 보니 잘 챙기지 못한 형편이었구요. 그래도 마음이 따뜻하셨거든요.

 

저는 어머니도 안 계세요. 어머니 생사여부조차 제가 모르고 있거든요. 너무 어렸을 때 헤어져서. 저는 할머니 밑에서 컸구요. 할머니도 지금 신부전 때문에 몸 상태가 안 좋으셔서 인천에 작은아버지가 모시고 요양병원에 계세요. 할머니는 아버지 돌아가신 거 모르세요.

 

아버지랑 따로 살게 된 건 초등학교 2학년 때쯤. 빚 때문에 신용불량자 되시고 금전적으로 힘드니 저를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하셔서. 그때 당시 5000만 원이면 큰돈이었다고 하더라구요.

 

아버지랑은 계속 연락하며 지냈지만 금전적인 도움은 못 받았어요. 그런데 그걸 떠나서 사람이, 항상 여쭤보시는 거예요. ‘밥은 먹고 지내냐.’ 밥을 먹어야 힘이 나니깐, 그래야 일도 열심히 할 수 있고. 그때 당시엔 못 느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은 자기 때문에 이렇게 힘들게 살지 않나, 그런 마음이었을 것 같아요.

 

아버지도 저와 똑같이 어릴 때 원망을 많이 하시더라구요.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거든요. 자기 삶에 대해서 긍정적이지 못하셨어요. 그로 인해서 술도 많이 하셨고. 저는 잘 몰랐는데 저가 어렸을 때부터 계속 술 좋아하셨어요. 가정폭력도 있었죠.

 

원망을 많이 했죠. 복지 끊기고 나서 저소득층 근로자 혜택을 많이 못 받았거든요. 할머니랑 살 때는 기초생활 수급을 받았는데 고등학교 이후로 단절됐어요. 막막하더라구요. 제가 안정적인 상황도 아닌데 너 스무 살이다, 이제 복지 끊긴다, 이러면 솔직히 앞이 캄캄하죠.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나. 당장에 집도 없고 내 재산도 없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나. 결국에는 너 막노동해서 어떻게든 일해서 먹고 살아라. 이렇게 되어버리는 거죠.

 

대학 들어가면은 다니는 동안 기초생활 수급 유지가 된다고 하는데 대학 다닐만한 여건이 안 되죠. 제 주변 친구들도 그래요. 대학 다니고 싶어 하는데도 돈 때문에 못 다니는 경우가 태반이죠. 대학 등록금은 어떻게 마련해야 하나. 혹여나 공부 잘해서 등록금 지원받는다고 해도 그거 받다가 못 받으면 빚으로 남잖아요. 저는 빚을 더 지고 싶지 않았어요. 현재 있는 것도 버거운데.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 안 가길 잘했다는 생각을 더 많이 들게 하더라구요. 막상 대학 갔는데도 일 못 하고 있는 친구들이 태반이구요, 좋은 중소기업 다니는 친구들 한 번도 못 봤어요. 주변에 ‘인서울(In Seoul)’ 대학교를 많이 가더라구요. 예를 들면 경희대, 고려대, 국민대, 건대, 홍대 갔는데도 취직을 못 하고 있죠. 삼성, 엘지, 농심, 씨제이 대기업이라는 대기업에 다 해봐도 되질 않죠. 취업이 힘들죠.

 

작은아버지도 얘기하더라구요. ‘여건이 만약 좋았으면 도와줄 텐데.’ 초등학교 때 부도를 맞으셨거든요. 부도 맞고 빚더미가 너무 많다 보니깐 현재도 가족들이랑 힘들게 지내고 있어요. 그런 와중에 할머니 챙기시느라 버거우시겠죠. 아버지 형제분이 네 분이세요. 그런데 첫째는 연락이 안 되고, 아버지가 둘째, 셋째도 집안이 안 좋은 상황이고, 할머니 요양하고 계신 작은아버지가 막내.

 

영정 사진 없이 위패만 놓인 김한석 씨의 장례식.
 

- 고등학교 졸업 후 수급 끊겨 군대로… 그러나 제대 후에도 나아지지 않았어요

 

제가 92년생, 올해로 27살, 군대는 21살 때 갔어요. 일찍 간 편이죠.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수급 끊긴 후에 1년 동안 어떻게든 발버둥 치고 살다가 군대 갔다 오면 어느 정도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가게 된 거예요. 그런데 갔다 와도 상황은 여전히 그대로, 살 집도 마련 못 했죠.

 

전전긍긍하고 있거든요. 복지 담당하는 분께 많이 여쭤봤거든요. 구청에도 물어보고, 복지부에도 많이 알아봤는데 결국에는 월세 한 달 치 도와줄 수 있고 그 외에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하더라구요. 거기서 많이 실망할 수밖에 없고, 너무… 일해서 월급 받지 않냐, 이런 식으로 이야길 하더라구요. 빚도 있고 그러다 보니깐.

 

빚은 원룸 얻고자 해서 생긴 거라서… 군대 전역하고 고시텔에서 전전긍긍하다가 ‘아, 이건 아니다’, 불편한 것도 많고 해서 보증금 대출받았어요. 보증금 200만 원인데 대출 200만 원 받아서 갚지 못했죠, 아무래도. 은행 대출이 안 나와서 제3금융권에서 빌렸어요. 지금은 원금 포함해서 이자까지 400만 원으로. 월세는 공과금까지 해서 41만 원. 수유에 거주하고 있어요. 신용불량자 되더라구요. 안 그래도 신용회복위원회에도 많이 알아보고 했거든요.

 

‘투잡’ 뛰기에도 너무 힘들고. 요새 보면 알바도 아예 없잖아요. 시급 올라서 알바 안 쓰는 자영업자들 되게 많아요. 물가는 계속 오르고, 그렇다고 저소득층 근로자들이 열심히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되게 열심히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빚을 끼고 살고 있죠. 대한민국 사람들 보면은 열에 아홉은 빚 가지고 있고. 잘 사는 사람은 계속 잘 살고 빚이 없죠. 가난은 대물림처럼 계속 이어져 나가는 것 같아요. 아무리 꾸준하게 살아도 빚은 없어지지 않더라구요.

 

배운 것이 없다 보니깐 동대문에서 전전긍긍하고 있거든요. 원단 일 배워서 어떡하든 간에 내 생활을 좀 바꾸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하고. 원단 판매직이라고 옷 만드는 디자이너분들이나 소규모 브랜드 업체에서 원단 사시곤 하시거든요.

 

군대 전역하고 23살 때부터 바로 이 일 시작 했어요. 정규직으로 들어가긴 했는데 4대 보험은 안 되고 월급만 해봤자 170만 원 아래일 거예요. 최저임금 정도. 아침 8시부터 5, 6시쯤 퇴근해요. 대략 10시간, 11시간 정도 일해요. 토요일엔 격주로 출근하니깐 주 5.5일 근무죠.

 

아버지 생각 그렇게 많이는 안 나는데 힘들 땐 생각나긴 해요. 눈물 날 때 많고. 일 끝나고 집 들어올 때나 정말 힘들거나. 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겠구나…. 저 같아도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같이 지내게 되면은 내가 쓰는 돈에서 두 배 이상 나가기 때문에. 학원 보내고 학교 준비물 사거나 그러면 돈 되게 많이 들어가잖아요. 저 같아도 그랬을 것 같아요. 떨어져 살아야겠다. 그런데 결국에는 피해자가 제가 되는 거죠. 자식이.

 

- 아버지 병원비만 오천만 원, 당연히 포기할 수밖에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살이 쑥 빠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이다. 처음이자 마지막 병문안이었다. 그날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물었다. ‘잘 지내고 있니, 밥은 먹고 다니냐, 어떻게 지내니.’ 

 

아들이 병원과 구청으로부터 연락받은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였다. 두 달가량 입원해있었던 아버지는 입원비와 수술비, 병원 안치료 등을 합해 약 5천만 원가량의 계산서를 남겼다. 그것을 갚는 것은 아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이십대 청년이 감당할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그래도 아버지니깐.’ 이리저리 백방으로 뛰며 돈 구할 수 있는 곳을 알아봤다. 그러나 목돈을 빌려줄 수 있는 친구는 없었고, 은행 대출은 자격 미달이었다. 그렇다고 더는 제3금융권에 빚을 질 순 없었다. 그에겐 이미 수년째 갚지 못한 400만 원의 빚이 있었다.

 

병원비를 내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시신 인수를 포기하여 아버지를 무연고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아버지더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가 읊조렸다. 처음엔 어떻게 아버지를 무연고자로 만들 수 있느냐며 거절했으나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시신처리위임서를 작성하며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마 깊이 후회할 테지, 알면서도 서명했다.

 

구청에서 무연고자 장례를 지원하는 시민단체 ‘나눔과나눔’에서 아버지의 장례식을 한다고 하여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영정사진도 없이 위패만을 모신 아버지 장례식이 믿기지 않았다. 오히려 부재를 실감한 것은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시간이 흐른 뒤였다. 진짜 돌아가셨구나. 아버지가 정말 가셨구나. 장례식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후회했을까.

 

“정말 좋았어요, 정말.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내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그렇게 보내드릴 수 있다는 것에서 정말 좋았어요.” 

 

그날의 장례식이 작은 위로였다.

 

지난 6월 1일, 서울시립승화원 2층에서 김한석 씨(63세, 가명)의 장례식이 엄수됐다.
 

- 처음 가본 장례식이 아버지 장례식이었어요

 

장례 치르고 나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구요. 어떻게 힘을 내야 하지? 막막함에 앞서서 조금 주저앉게 되더라구요. 한두 달가량 제가 일을 쉬었거든요. 많은 생각들을 많이 했어요. 생각 정리도 해보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산도 가보고, 강도 가보고, 바다도 가보고. 결국에는 뭐, 다시 일을 좀 더 열심히 해보자. 일을 그만두면 생계가 걱정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러진 못하겠더라구요.

 

아버지가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지 저도 상상 못 했고, 생각지도 못한 빈자리가 저한테는 좀 컸던 거죠. 버팀목이 없어진 거죠. 솔직히 부정적이 될 수밖에 없더라구요. 아무것도 하기 싫다, 이런 축 처지는 말들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렇게 살다가는 내가 죽겠구나. 결국에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빠도 이렇게 되셨고, 위에서 보시겠지, 위에서 보시겠지, 어떻게든 발악해서 성공해서 빚도 없애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결국에는 마음 다잡고 진짜 열심히 살고 있긴 해요.

 

그 전엔 장례식장에 가본 적 없어요. 아버지 장례식이 처음이었어요. (긴 침묵) 아버지 유품은 아예 없거든요. 아버지가 집도 없고 그러다 보니깐, 공장이나 고시텔에서 전전긍긍하셨거든요. 사진 한 장조차. 아버지랑 찍었던 사진……이 없어요.

 

- 그저 다만, 빚 없이 살고 싶다

 

결혼 계획은 없죠, 솔직히. 저한테 그건 먼 훗날의 얘기구요. 나도 무연고자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사실 결혼 못 하겠어요.

 

만약 결혼해서 애를 낳으면 저처럼은 안 키울 거예요(목소리에 힘을 준다). 저처럼은 만들고 싶지 않아요. 그러기 위해서 저가 더 빠르게 성장하는 게 답이겠죠. 어느 정도 재산도 모아서 애들이 좀 더 편하게 자랄 수 있는, 안락한 가정 꾸릴 수 있으면 그때 결혼을 생각하겠죠.

 

뉴스를 많이 보는데 결혼하려면 양가에서 3억까지는 필요하겠더라구요. 집을 월세로 들어갈 순 없잖아요. 그렇다고 지방 가서 살기엔 아무래도 조금. 서울은 주택도 요새 많이 없어지는 편이잖아요. 주택이 있다고 해서 싼 것도 아니고 비싸잖아요. 자기 집 마련이 일억오천부터 시작되더라구요. 결혼식은 대략적으로 이천만 원까지 필요할 수 있겠고, 자가 차량이 있어야 어디든 데려갈 수 있고. 그런 게 제일 필요하겠죠.

 

이런 생각하면 남의 일 같죠.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저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심지어 결혼은, 좀…….… 막막하죠.

 

제 목표가 빚 없이 살고 싶다, 라는 것밖에 없어요. 천근만근이죠. 남들 보면은 이 건물을 내껄로 하고 싶다, 나는 이 위치까지 올라가고 싶다, 많이들 생각하실 텐데 저는 그런 생각은 안 들구요. 솔직히 제 목표이자 꿈은 빚 없이 사는 거죠. 내년이면 법이 바뀌어서 좀 나아지겠지, 희망을 되게 많이들 하시는데 저는 그런 희망을 절대로 안 갖거든요. 결국에는 똑같이 돌아가기 때문에. 아무리 법이 개정되고 복지 사각지대가 괜찮아졌다고 하더라도 똑같을 거 같아요. 조금 더 머리 굴려서 열심히 살면 나아질 순 있겠죠. 그런데 제 생각은, 그런 거 생각 안 하고 무작정 살아가는 거죠.

 

그냥 운명이다, 생각하고 살고 있어요. ……견…, 뎌, 내야겠죠.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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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민 기자 skpebbl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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