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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옥란, 그녀의 용기로부터 출발한 우리의 싸움
장애인이자 여성, 기초생활수급자였던 최옥란열사 17주기를 맞아
등록일 [ 2019년03월26일 08시03분 ]

2001년 12월, 최옥란 열사가 한 달 현금급여 28만 원을 국무총리의 집 앞에 반납하는 투쟁을 하는 모습.

 

한 방송사에서 사회적 지위에 관한 실험을 했다. 체스판처럼 생긴 넓은 공간에 같은 출발 선상에 선 여러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변에 따라 이동하는 실험이다. 4대 보험을 못 받는다면 한발 뒤로, 가족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당한 적이 있다면 한발 뒤로, 학창시절 과외를 받아 본 적이 있다면 한발 앞으로, 어디서든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으면 한발 앞으로. 총 56개의 질문이 끝나고 나면 사람들의 위치는 제각기 달라져 있다. 뒤에 있을수록 더 많은 차별을 경험했을 것이고, 앞에 있을수록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자원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만약 이 실험에 최옥란이 참여했다면 그녀는 가장 마지막 그룹에 속할 가능성이 크다. 2002년 3월 26일, 37세의 짧은 생을 마무리한 그녀는 장애인이자 여성, 노점상이고 기초생활수급자였다.

 

최옥란의 삶과 투쟁

 

66년에 태어난 최옥란은 경기로 인해 뇌성마비 장애를 갖게 된다. 배움에 대한 열의가 높았지만 초등학교도 교장의 허락하에 어렵게 입학해야 했고, 장애와 가난으로 졸업은 채 하지 못했다. 89년도 장애인 노동권 투쟁은 그를 장애운동으로 이끌었다. 현재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의 전신인 ‘ᄇᆞ롬’의 창립멤버로 장애인 노동권과 이동권 쟁취 투쟁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결혼과 출산, 그리고 이혼을 겪은 그녀는 사랑하는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기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즈음 장애인의 자립을 고민하는 활동가들과 함께 청계천에서 노점상을 시작해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나 노점상 벌이로는 생활이 해결되지 않아 2000년 시행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자가 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2001년 12월, 최옥란은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이때 최옥란이 제기한 것은 여전히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 꼽히는 것들이다. 부양의무자기준, 너무 낮은 수급비, 약간의 소득만 발생해도 급여가 삭감되는 문제 등. 이렇게 빨리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핵심적인 문제점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갖고 있는 다양한 ‘약자성’ 때문이었다. 장애를 가진 싱글맘, 노점상이기도 했던 그녀의 삶은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문제점을 투명하게 보여줬다. 그녀의 투쟁은 ‘전 국민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한다’던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허점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2001년 12월 3일,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명동성당 농성 돌입 기자회견(오른쪽이 최옥란 열사)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문제점을 고발한 첫 번째 사람

 

“김대중 정권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구걸을 하더라도 치사해서 수급권을 못 받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국무총리에게 26만 원을 반납하러 갑니다.”

 

당시 1인가구가 받을 수 있는 최대 생계급여는 26만원. 여기에 주거급여 2만 3천원과 장애수당 4만 5천 원을 더한다 해도, 그녀가 매달 지출해야 했던 의료비 26만 원과 임대아파트 월세 16만 원조차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빚이 쌓여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부족한 생계비를 보충하기 위해 노점상을 하고 싶었으나 이조차 발각되어 수급탈락 위기를 겪었다. 살기 위해 수급자가 되었지만 수급자로 살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이에 생명이나 다름없는 생계급여 전액을 국무총리에게 반납하고,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텐트 농성을 시작한다.

 

“제가 이렇게 명동성당에서 그것도 추운 겨울에 텐트 농성을 결심한 이유는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비단 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부터입니다. 많은 수급자가 그리고 차상위 계층이 말도 안 되는 제도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는 현실은 저에게 한편으로 힘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아직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문제점이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기 전, 이런 일상이 모든 빈곤층이 겪는 답답한 현실임을 알게 된 그녀는 용기를 냈다. 그녀의 농성은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한 악착같은 싸움이자 다른 이들에게 보내는 ‘더 이상 죽지 말자’는 메시지였다. 각자의 방에서 홀로 비참을 참지 말고, 잘못된 것을 우리 힘으로 바꿔보자는 뜨거운 호소였다.

 

가난한 이들의 투쟁, 우리의 기원이 된 그녀의 삶을 기리며

 

그녀는 아이를 찾아오기 위한 양육권 소송을 준비했다. 양육권을 찾기 위해선 경제력을 입증해야 했지만, 이를 위해 빌린 돈이 문제가 되어 수급탈락 위기를 재차 겪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절망 속에 결국 최옥란은 죽음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녀는 총 네 개의 유서를 일기에 남겼다. 첫 번째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두 번째는 함께 했던 동료들에게, 세 번째는 엄마께, 마지막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네 개의 유서에는 진한 절망이 담겨있다. 그녀는 결코 현실에 무릎 꿇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세상은 그보다 냉혹했다.

 

2002년 최옥란 열사의 노제. 정부는 열사의 마지막 가는 길마저 공권력을 앞세워 막아섰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세상은 녹록치 않다. 송파 세 모녀와 망우동 모녀가 그러했듯 가난한 이들은 닫힌 문 속에서 죽음으로만 발견된다. 지난 해 수급비는 고작 2.09%, 그 전년도에는 1.16% 상승했다. 물가상승률에도 한참 미달하는 수급비 인상폭은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옥란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의 삶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다. 기초생활보장제도 개정 투쟁이 끈질기게 이어져올 수 있었던 까닭도,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5년의 농성과 주거급여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라는 작은 성과도 바로 최옥란이라는 기원으로부터 출발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세상을 이끄는 이들이 아니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 세상이 바뀌어야 살 수 있는 가장 차별받는 이들로부터 변화는 시작된다. 오늘날 가난한 이들의 삶과 투쟁에 그녀가 깃들어 있다. 최옥란의 용기로부터 시작된 변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바라던 세상은 꼭 올 것이다.

 

1989년 장애인복지법 및 장애인고용촉진법 입법 쟁취를 위한 단식 투쟁(왼쪽에서 세 번째 빨간 옷이 최옥란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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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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