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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을 탈출하여,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이야기를 쓰다
탈시설-자립생활운동 1세대로 시설의 빗장을 연 사람, 고 박정혁
“박정혁을 봐라” 탈시설한 장애인들의 롤모델이자 멘토로 활동
등록일 [ 2019년07월26일 15시32분 ]

탈시설자립생활운동가 고 박정혁 씨가 지난 6월 22일 대장암으로 숨졌다. 6월 23일 열린 추모제에서 그의 영정 사진 옆에 중증장애인 현장 글쓰기 모임 ‘글텍’에서 2009년, 2010년에 발간한 책이 놓여 있다. 사진 박승원


6월 23일 저녁 6시, 서울대병원 추모관. 그의 영정 사진 양옆에는 오래된 책이 한 권씩 놓여있었다. 중증장애인 현장 글쓰기 모임 ‘글텍’에서 2009년, 2010년에 발간한 책이다. 그 책에는 그의 시와 소설, 수필이 담겨 있다. ‘장애인 탈시설-자립생활운동 1세대’로 시설의 빗장을 연 사람, 중증장애인의 정치세력화를 꿈꾸었던 사람, 그러나 무엇보다 시인의 정체성을 가지며 살았던 사람. 이것은 고(故) 박정혁에 대한 이야기다. 

 

- 지옥을 탈출하여,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이야기를 쓰다

 

26살(1996년), 사람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때 그는 강원도 철원의 은혜장애인요양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7년을 살았다. 시설은 “사람 장사”를 하는 곳이었다.

 

시설 거주인 대부분은 중증장애인으로 식사나 신변처리에 생활교사의 지원이 필요했다. 그러나 시설은 생활교사뿐만 아니라 움직임이 가능한 경증장애인들에게까지 강제 노역을 시켰고, 이로 인해 대부분의 중증장애인은 시설 안에 방치되어 있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식사는 유통기한이 지나거나 썩은 음식들로 채워져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다. 겨울에는 난방조차 떼지 않아 철원의 칼바람에 동상 등으로 사망자는 속출했다. 사회복지법인 성람재단을 관할하는 종로구청에 따르면, 1992~2004년까지 재단 산하 은혜장애인요양원, 문혜장애인요양원(아래 은혜요양원, 문혜요양원)에서 사망한 사람은 총 249명(은혜 169명, 문혜 80명)에 이른다.

 

시설은 거주인들에게 돈을 쓰지 않았다. 2003년 성람재단 산하 시설 중 은혜요양원, 문혜요양원, 문혜장애인보호작업장, 서울정신요양원, 네 곳에 투입된 국고보조금(구청보조금 제외)만 해도 100억 원에 이른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은혜요양원에만 44억 5190만 원, 문혜요양원에는 22억 5791만 원이 들어갔다. 시설 거주인들을 위해 쓰여야 할 돈이 시설장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가 살았다. 그는 ‘착한 장애인’이었다. 무료함을 견딜 수 없어 참석한 교회 예배에서 지영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영을 만나면서 그의 삶은 변했다. 지영은 당돌한 사람이었다. 지영은 시설 내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원생에 대한 직원들의 폭력에 문제제기를 하고, ‘사람이 어떻게 밥만 먹고 살 수 있느냐’며 시설 내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지영의 당돌함에 박정혁은 물들었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2012년의 어느 날, 고 지영 씨와 박정혁 씨. 사진 제공 김탄진
 

33살(2003년), 박정혁은 우연히 ‘삼육 장애인자립생활 지도자 대학’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는 장기 외출을 허락받아 시설을 나가 수업을 들으면서, 그 길로 다시 시설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당시 한국 최초 자립생활센터인 피노키오장애인자립생활센터(2000년 9월 개소, 아래 피노키오센터)에서 운영하는 체험홈에 3개월 살다가, 정만호(현 피노키오센터 소장)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시설에서 나와 그가 처음 한 일은 지하철을 타는 것이었다. 33년 만에 그는 처음으로 지하철을 타고, 노래방을 가고,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셔본다.

 

그리고 34살 되는 이듬해인 2004년, 박정혁의 지원으로 지영도 탈시설하여 이들은 그해 12월에 결혼한다. 당시 언론은 “국내 최초 자립생활 중증장애인 부부 1호”로 이들을 소개했다. 시설에서 중증장애인이 나와 지역사회에 산다는 것,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와 같은 동화 속 결말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던 스토리였다. 이들은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단지 지옥을 탈출했을 뿐”이었고, 현실은 동화처럼 서정적이지 않았다. 활동지원서비스가 없어 아침에 눈을 떠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꼼짝없이 누워 봉사자들의 손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노동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에게 주어지는 기초생활수급비도 두 사람의 몫을 다 합쳐도 월 70만 원 남짓했고, 둘이 살 신혼집 구하는 것도 녹록지 않았다.

 

“집이 괜찮으면 돈이 안 되고 집도 괜찮고 돈이 되도 집주인들이 우리 모습을 보고는 돌아서 버리기 일쑤였다.” (시설에서 나와 결혼하고 집도 구했죠, 에이블뉴스, 2008.4.17.)
 
한 달 넘게 집이 구해지지 않아 낙담하고 있을 때, 아는 장애인콜택시 기사분의 도움으로 어렵게 둘이 살 집을 구할 수 있었다. 과거 문방구로 쓰이던 공간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지원을 받아 중증장애인 두 사람이 생활할 수 있는 집으로 크게 고쳤다. 그렇게 지역사회에 두 사람의 자리가 마련됐다.

 

-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은 ‘이념’이다

 

시설에서 나온 박정혁은 피노키오센터에서 간사로 활동하며 장애인자립생활 이념과 장애운동을 접하게 된다. 장애인이 누군가의 간섭을 벗어나 스스로 서는(自立) 생활을 선언한다는 것 자체가 ‘이념’이 되던 시기였으니, 그것은 곧 장애운동의 방향이 되었다. 그는 빠른 속도로 그것들과 교착된다. 2005년 “참여정부의 사회복지시설정책, 이대로 좋은가”라는 토론회에서 박정혁은 “장애인자립생활은 가족과 관리자에게 맡겨진 장애인 당사자의 권리를 당사자에게 되찾아 주는 이념”이라고 소개한다.

 

2012년 9월, 시설에 사는 장애인들과 인사동으로 이음여행을 떠났을 때 모습. 맨 앞 가운데 박정혁 씨가 있다. 이음여행은 2박 3일 동안 시설 거주 장애인과 탈시설한 장애인이 만나 자립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다.
 

박정혁이 시설에서 나왔을 당시 같이 살았던 정만호 피노키오센터 소장은 “시설 생활을 하며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정혁은 자립생활 이념을 접하는 순간 그냥 꽂혀버렸다”고 한다. 정 소장은 “그때 자립생활 이념을 접한 비장애인들은 이걸 어떻게 하냐고 했는데 중증장애인들은 다른 길이 안 보이니 그냥 꽂혀버리게 된다”라면서 “당시 정혁과 ‘이건 모험이고 무척 고생스럽지만 의미 있는 일이다. 하다가 죽는 일이 있어도 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런 가치를 공유하며 활동했다”고 전했다.

 

자립생활운동은 자연스레 장애인을 가두는 시설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졌다. 특히 자신이 7년간 살았던 성람재단 산하 시설 비리가 터지고, 그에 대한 투쟁이 본격화되던 2006년, 그는 누구보다 투쟁에 앞장섰다. 그해 ‘성람재단 비리 척결과 사회복지사업법 전면 개정을 위한 공동투쟁단’이 꾸려지고, 관리감독기관인 종로구청 앞에서 무기한 농성이 시작됐다. 2003년부터 성람재단 산하 시설 직원들은 노동조합을 꾸려 내부고발자로 나서며 성람재단의 실태를 폭로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거대한 사회복지법인과의 싸움은 쉽지 않았다. 박정혁과 지영은 성람재단 시설 출신으로 143일간 이어진 농성에 매일 같이 나와 투쟁하며, ‘증언자로서’ 시설에서의 삶을 이야기했다.

 

같은 해, 박정혁은 5·31 지방선거에 희망사회당 소속으로 서울시의회 동대문 제1선거구 예비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탈시설 운동을 해온 김정하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는 “중증장애인이 어느 정당의 후보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사회가 감히 상상도 못 하던 시절이었다”면서 “그는 중증장애인도 정치 세력화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활동했던 멋진 후보였다”고 회상했다. 이때 출마한 당과의 인연으로 그는 2007년 ‘장애인배움터 너른마당’을 만들어 장애인야학 운동을 하고 너른마당 초대 교장으로 2011년까지 활동했다.

 

탈시설 장애인에 대한 어떠한 정책도 없던 2003년, 그가 홀로 나왔다면 그로부터 6년 뒤인 2009년 김포 석암재단 베데스다요양원에서는 중증장애인 8명이 단체로 탈시설한다. 이들은 재단 비리와 인권침해를 폭로하고 탈시설-자립생활 정책을 요구하며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에서 62일간 농성했다. 탈시설 정책의 초석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는 ‘마로니에 8인의 투쟁’이다. 박정혁도 이 싸움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마로니에 8인’이 시설을 나오기 하루 전인 2009년 6월 3일, 에이블뉴스에 기고한 글에서 이 투쟁은 “장애인들을 이용해 정부 상대로 장사해왔던 사회복지 마피아들 앞에서 더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먹잇감이 될 수 없다는 선언”이라며 “사람이 사람을 가둠으로써 돈벌이가 되는 야만의 사슬”을 끊어내자고 말했다.

 

비슷한 시기, 그는 석암투쟁을 둘러싸고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과 인터넷상에서 논쟁이 붙기도 했는데 그때 그는 시설이라는 장소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시설은 분명 장애인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준다. 때 되면 목욕도 시켜준다. 또 때가 되면 소풍도 보내준다. 24시간 케어해주고 자원봉사자가 오면 때론 외출도 시켜주는데 뭐가 불만이냐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도 그런 대접은 받는다. 개나 고양이 등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 역시 자신의 애완동물을 그렇게 대접한다.” (시설 관리자에게 장애인은 애완동물일 뿐, 에이블뉴스, 2009.6.25.

 

2009년 석암재단 투쟁할 당시의 박정혁 씨의 모습. 고 박종필 감독의 다큐 ‘시설 장애인의 역습’ 캡처
 

- 금지된 가능성의 영역을 확장시켜준 사람

 

장애인은 시설에 사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장애인 복지’라는 생각이 지배했던 시절, 박정혁은 시설에서 사는 삶이 얼마나 인간성을 거세당하는지 당사자의 언어로 진술했다. 그 글들을 한 자 한 자 적기 위해 그는 마우스스틱을 입에 물고 타자를 쳐야 했다. 김정하 활동가는 그 모습이 “그의 상징 같았다”고 말했다.

 

“마우스 스틱을 물고 자판 치고 발로 운전하는 모습이 그의 상징 같았다. 시설장애인이 사회생활 못할 때 박정혁은 그들의 롤모델이었다. 휠체어 운전 손으로 못해요, 박정혁 봐라, 발로 운전한다. 핸드폰 못 만져요, 박정혁 봐라, 자판 치고 다한다. 나 공부 못 배웠어요, 박정혁 봐라, 끝까지 공부한다. 그리고 그의 많은 활동들을 봐라. 그래서 동료상담 같은 거 제일 많이 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정혁형이었다.”

 

김탄진·장애경 부부도 박정혁의 손에 이끌려 시설을 탈출한 사람이었다. 박정혁이 문혜요양원(은혜요양원 바로 옆 건물)에 있던 시절, 김탄진은 그와 3년 정도 함께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박정혁은 탈시설에 대한 욕망이 강한 사람이었다. 많은 거주자들이 “나가고 싶다”는 말을 종종 내뱉었지만 어쩐지 박정혁의 “나가고 싶다”는 말은 다른 이들과 맛이 조금 달랐다. 시설에서 박정혁이 나가고, 이듬해 지영도 나갔다는 소식을 들었던 그때, 그는 이제 혼자 남았다는 생각에 조금 무서워졌다. 그는 ‘이곳에 더 있으면 나도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설 바깥이 아닌 다른 시설로의 이동을 택했다. 봉사오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그는 2004년에 경기도 남양주의 신애원으로 도망치듯 옮겨갔다. 그곳에서 탈시설 동지이자 미래의 아내가 되는 장애경을 만났다.

 

신애원에 있을 당시,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탈시설 다큐멘터리에 나온 박정혁을 보았다. 그걸 본 김탄진이 ‘한번 만나고 싶다’며 연락했고, 박정혁은 ‘내 집에 놀러 오라’고 흔쾌히 답했다. 김탄진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시설 봉사자들의 도움으로 박정혁네 집을 오갔던 김탄진은 네 번째 외출 때, 다신 시설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도 애경과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 만큼 박정혁은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 2009년 5월 김탄진이 먼저 탈시설했고, 두 달 후인 7월에 장애경이 밤에 “네발로 기어서” 시설을 탈출했다.

 

두 사람에게 박정혁·지영 부부는 인생 선배이자 롤모델이었다. 그 둘을 보며 ‘저들처럼 살아야겠다’고 늘 생각했다. 장애운동현장의 선두를 지키는 모습도 그들 부부의 영향이 컸다. 

 

2012년 어느 봄날, 함께 나들이를 갔다. 왼쪽에서부터 김탄진, 지영, 박정혁. 사진 제공 김탄진.
 

“나라를 바꾸고 싶다”던 박정혁의 목소리를 김탄진은 기억한다. 그때마다 박정혁은 김탄진에게 “너도 할 수 있어, 너도 해”라고 말했고, 그 말에 김탄진은 ‘나는 중증장애인인데 이게 가능할까?’ 스스로에게 되물었으나 자기 앞에 있는 상대방도 자신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중증장애인이었기에 그 말은 충분히 설득력 있었다.

 

김탄진에게 박정혁은 중증장애인에게 금지되었던 가능성의 영역을 확장시켜준 사람이었다. 그를 보며 옛날의 자신이라면 감히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것을 시도해볼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김탄진은 컴퓨터를 배우고, 검정고시로 대학에 진학해 이젠 미래를 꿈꾼다.  그는 그와 같이 중증의 언어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만들고 싶다. 이를 위해 그는 사이버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여 현재 4학년 1학기까지 마쳤다.

 

김탄진은 중증의 언어장애로 AAC(보완대체 의사소통)를 이용해 소통한다. “언어장애로 하고 싶은 말의 일부분밖에 하지 못해 너무 답답”한데 그런 그와 유일하게 소통이 잘 되는 사람 중 한 명이 박정혁이었다. 삶에서 너무 큰 사람이 사라져버린 황망함에 김탄진은 “외롭다”며 눈물을 보였다. 그는 정혁의 죽음을 두고 “아깝다”는 말을 반복했다.

 

“너무 많이 아까워. 너무 보고 싶다. 아까워, 아까워. 아까운 사람이 죽었어. 진짜 아까워.” 

 

쇠약해진 모습 보는 게 너무 아파 병문안도 자주 가지 못했다. 지난 6월 6일, 병원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다.

 

- 삶으로 시를 쓰다

 

2017년 1월 대장암 4기 선고를 받고 힘겨운 항암 투쟁을 해오던 박정혁은 6월 22일 오후 8시경에 끝내 숨졌다. 그의 나이 만 48세였다.

 

박정혁에게 죽음은 낯설지 않았다. 2013년 4월 16일, 아내 지영이 패혈증으로 그보다 먼저 떠났다. 그는 그녀를 “삶의 동반자였고 스승이었다”고 말했다. 지영의 죽음은 그에게 너무 아픈 이별이었고, 큰 상실이었다. 지영의 죽음 이후, 더는 투쟁 현장에서 그를 보기 힘들어졌다. 모든 외부 활동을 접고 은둔하듯 살던 그는 2016년 새로운 인연을 만나 재혼했다.

 

지영을 비롯해 많은 벗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2013년 끝자락에 그는 이별에 대한 글을 썼다.

 

“생명은 누구나 어떤 것이든 죽습니다. (...) 언젠가는 나도 그들의 뒤를 따를 것입니다. (...) 우리 모두가 서로의 친구가 되어 서로의 안부를 묻고 마음 놓고 걱정거리를 털어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죽음의 그 순간까지도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나 또한 행복한 죽음을 맞기 위해 열심히 서로의 친구가 되겠습니다. 열심히 살 것이고 글도 열심히 쓸 겁니다.” (우리 언제 이별할지 몰라도, 비마이너, 2013. 12.19.)

 

6월 23일에 열린 고 박정혁 활동가의 추모제. 유가족이 고인의 영정을 어루만지고 있다. 영정 사진 옆에는 고인의 글이 담긴 책이 놓여 있다. 사진 박승원

 

시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던 그에게 삶을 열심히 사는 것은 열심히 글을 쓴다는 것과 동일한 듯 보였다. 그는 과거 “장애인이 차별당하는 구조 중 하나는 비장애인 곁에 장애인이 안 보이기 때문”이라면서 “비장애인 틈 속에서 장애를 드러내는 글을 쓰고 싶다”고 하였다. “문학으로, 시가 되었든 소설이 되었든 나의 작품 속에서 장애가 자연스럽게 사회 속에 스며들어 갈등을 일으키고 승화되는 글”을 쓰는 것을 목표라고 밝혔으나, 그의 목표가 실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중증장애인의 삶’이라는 정형성을 벗어나, 사랑과 우정의 서정시와 투쟁의 서사시를, 탈시설의 자유시를 종횡무진 썼던 그는 자기 삶에 있어서만큼은 제법 괜찮은 시인이었던 듯하다. 지난 6월 23일 추모제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그의 삶은 장애와 비장애를 가로질러 사람으로서 관계 맺기 위한 시도가 일정 부분 성공했음을 감히 짐작할 수 있었다. 직접 지은 추모시 낭독으로 고인의 삶에 화답하기도 했던 사람들은 그가 남긴 시를 생동하는 삶, 그 자체로 기억하고 있었다.


6월 23일 서울대병원에서 탈시설자립생활운동가 고 박정혁 씨의 추모제가 열렸다. 사진 박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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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민 기자 skpebbl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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