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10월22일tue
기사최종편집일  최종뉴스편집일
비마이너로고
news
뉴스상세검색 버튼
기사등록 기사제보
전체메뉴 펼침
HOME 뉴스홈 > 기획연재 > 교차적 관점으로 시설화 비판하기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쪽지신고하기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좋은 왕과 나쁜 왕’이 사라진 자리
[교차적 관점으로 시설화 비판하기] 16
등록일 [ 2019년09월02일 21시55분 ]

/기획의도/
 
장애여성공감은 [IL과 젠더 포럼]을 통해서 장애인 탈시설 운동의 문제의식을 확장하고자 시도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삶을 통해 증명하듯이, 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지난한 ‘과정’을 의미합니다. 단지 삶의 장소를 옮기는 것뿐만 아니라 시설에 수용된 역사를 재해석하고, 지역사회 안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과 관계 맺기를 해나가며,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인 조건과 권력의 변화가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시설을 폐쇄해서 더이상 시설에 갈 필요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또한 이 ‘과정’에 참여해야 하는 사람은 등록된 장애인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부랑인, 홈리스를 비롯해서 정신병원에서 심지어 지역사회와 집에서 사실상 감금된 채로 살아온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함께 드러내고 변화의 주체가 되는 과정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장애인에 대한 억압뿐만 아니라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에 대한 억압과 정상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동시에 필요하며 다양한 해방의 관점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장애여성공감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설화에 저항하는 동료들을 만들고, 누구도 시설에 수용되지 않는 사회를 그려보고자 합니다.
 
이번 기획연재를 통해서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방식과 집단(부랑인, 정신장애인, 소위 요보호 아동, 여성, 성폭력 피해자, 난민,  HIV 감염인 등)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시설화의 양상들을 살펴보고, 이와 관련된 문제점과 대안을 찾아 나가는 시도를 해보고자 합니다.
 
/연재순서/
 
1. 시설화를 넘어서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며 : 나영정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2. 사회복지체계에서 탈시설 운동의 의미: 김지혜(강릉원주대학교 다문화학과)
3. 탈시설 운동의 확장: 조미경(장애여성공감)
4. 홈리스 시설: 김윤영(빈곤사회연대)
5. 한부모 시설: 오진방(한국한부모연합)
6. 입양/미혼모 시설: 김호수(뉴욕시립대학교 사회학과)
7. 정신병원/요양시설: 노다혜(장애여성공감)
8. 성폭력 피해자 쉼터: 여름(장애여성공감)
9. 난민 시설: 고은지(난민인권센터)
10. (탈가정) 청소년 시설: 변미혜(함께걷는아이들)
11. 요양병원: 권미란(에이즈환자 건강권 보장과 국립요양병원 마련을 위한 대책위원회)
12. 가족: 김순남(가족구성권연구소)
13. 성매매피해자 자활시설: 김주희(서강대학교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연구소)
14. 시설의 경계: 김현철 (토론토대학교 지리학과)
15. 탈시설, IL센터의 역할은 무엇인가: 노다혜(장애여성공감)
16. 시설의 문화적 재현과 이미지: 김은정 (시라큐스 대학교 여성과 젠더학, 장애학)
17. 탈시설과 중증장애인 노동권: 정다운(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18. 탈시설과 난민: 김연주 (난민인권센터)

 

* 필자의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미국 시카고 자립생활센터에서 10대 장애여성들과 오랫동안 일해 온 장애운동가이며 작가인 수전 너스바움은 2012년 소설 『좋은 왕 나쁜 왕』1)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장애인 시설2)에서 일어나는 삶과 폭력, 생존과 투쟁을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의 제목은 작가가 수집했던 신문기사에서 비롯되었다. 뉴욕주 한 시설의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 뒷좌석에서 계속 일어서는 13세 소년을 ‘보조인’이 깔고 앉아 제압했고, 결국 이 아동이 숨지는, 아니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기사에 따르면, 몸부림치며 저항하는 아이에게 ‘보조인’은 “난 너에게 좋은 왕이 될 수도 있고, 나쁜 왕이 될 수도 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너스바움은 아동과 감정적인 유대가 없는 성인 혹은 시설의 손에 아동의 복지가 달려 있을 때 아주 끔찍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3) 이 소년이 복종했다면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다는 순진한 생각을 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장소가 시설이든 쉼터이든 가정이든 지역사회이든 어떤 존재가 누군가에게 “좋은 왕” 혹은 “나쁜 왕”이 될 수 있는 권력을 가지는 곳이라면 폭력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소위 ‘나쁜 왕’들에 의한 강제수용, 고문, 통제, 폭력과 착취는 탈시설운동과 저널리즘을 통해 시설 비리와 인권유린의 이름으로 폭로되어 왔고, 소설과 영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로도 재현되어 시설 내 인권유린에 대한 문제의식을 증폭시켰다. 하지만 시설 내에서 일어나는 인권유린을 폭로하는 르포나 영화들이 모든 시설의 폐쇄를 지향하는 텍스트라고 보기 어렵다.4) 오히려 특정한 시설에서 일어난 특정한 범죄로 조명되기 때문에,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시설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작동시킨다. 영화 ‘도가니’는 광주인화학교의 기숙시설에서 실제로 벌어진 청각장애아동 성폭력과 사법계의 무능과 부패를 다룸으로써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장애인 성폭력 범죄 대응 체계와 법률 등에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도가니 신드롬’은 광주인화학교의 폐쇄와 형사처벌로 이어졌지만 모든 장애인시설 폐쇄의 필요성을 확장시키지 못했다. 특정한 시설에서 일어난 성폭력 범죄와 사법정의의 부재가 문제의 핵심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5)
 
이 글은 한국에 소개된 영화 및 문화 텍스트 속에서 등장하는 이미지로서의 시설과 지역사회가 어떻게 시설의 존재를 정당화하는지, 혹은 어떻게 탈시설의 가능성을 상상해 내고 있는지 질문한다. 문화적 재현으로 형성된 이미지로서의 시설은 시설을 권력 관계의 은유로 보게 하여 그 실재를 증발시키기도 하고,6) 시설수용이 누군가에게는 견딜 수 없는 폭력이지만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펴기도 한다. 이미지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시설이 좋은 곳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필요한 환경이라는 판단을 하는 권력을 가지게 되고, 또 어떻게 하면 시설을 좋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시설은 내가 “가는” 곳, 혹은 “갈” 곳이 아니라, “보내지는” 곳이고 “데려가는” 곳7)이라는 사실은 이러한 판단과 고민이 타자화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미지로서의 시설을 분석하는 과정은 ‘좋은 왕’에 대한 미련이 어디에서 오는지, ‘좋은 왕’이 되고 싶은 욕망이 떠오르는 순간은 언제인지 들여다보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스틸컷. 하얀색 환자복을 입은 남성들이 서 있으며, 일부는 웃으며 손뼉을 치고 있다.
 

- 죽음을 구원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정신병원을 다룬 고전이 된 영화부터 살펴보면,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5)가 있다. 이 작품은 한국에서도 개봉되어 흥행에 성공했고, 20년 뒤에도 "감옥보다 못한 정신병원"이라는 기사8)와 함께 텔레비전에서도 방영되어, 정신병원이 치료의 이름으로 통제와 처벌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폭력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있던 맥머피(잭 니콜슨)는 교도소에서 강제노동을 피하고자 정신질환이 있다고 주장하여 정신병원으로 옮겨진다. 교도소와 정신병원은 상이한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지만 상호대체 혹은 통합이 가능한 시설들이며, 강제노동과 치료는 자유가 박탈된 같은 조건에서 행해짐을 말해준다.9) 맥머피는 병원의 통제에 저항하며 자유를 찾고자 다른 환자들을 리드하여 일탈을 주도한다. 맥머피는 이후 강제 전기충격요법과 로보토미(대뇌백질절제수술)를 받고 무기력한 상태가 된다. 원주민 브롬든(윌 샘슨)은 그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그를 살해하고 병원을 탈출한다.

 

백인 비장애남성 중심의 전문가성을 보존하기 위해, 남성환자들에게 직접적인 통제와 폭력을 가하는 주체들은 백인남성 의사가 아니라 백인여성 간호사와 흑인남성 직원이다. 환자들과 함께 이들 또한 관객들과 감정교류를 할 수 없는 타자로 재현된다. 이 영화는 미국 정신의료 세팅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보여주었고 비슷한 시기 등장한 정신의학 반대 운동과 지역사회 정신장애 의료 서비스 확대에 힘을 보탰다고 평가되며 교육현장에서도 이용되지만, 시설수용 자체가 폭력적이라고 주장하는 영화는 아니다. 맥머피가 비정신장애인으로서 구원자의 역할을 하기 전까지, 다른 환자들은 통제에 순응하는 존재로 등장하며, 맥머피가 사라진 후 일상으로 복귀하여 정신병원에 수용된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여진다. 하지만 맥머피는 ‘원래’ 정신장애인이 아니었지만 병원에 수용되면서 정신장애인이 된 사람, 즉 시설에 가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에, 수술 후 신체 및 정신 장애를 가지게 되는 순간 안락사를 통해 죽어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환상을 제시한다. 한국의 한 시인은 맥머피의 죽음을 "건강한 죽음"이라고까지 평했다.10) 결국 자유와 장애는 공존할 수 없다는 논리가 된다. 이 때문에 정신병원 자체가 문제라는 인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시설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그리는 영화들은 시설에 소위 ‘잘못 보내진’ 사람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관객의 감정을 움직인다.11) 주인공이 시설에 잘못 보내졌다고 믿는 순간, 그 안에 이미 수용되어 있던 다른 사람들은 시설 환경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되기 때문에 시설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인권영화 ‘여섯개의 시선’에 실린 박찬욱의 단편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는 한국어를 모르는 네팔인 노동자가 "횡설수설하는 정신 나간 한국사람"으로 오인되어 경찰을 통해 청량리 정신병원, 서울시립부녀보호소, 용인정신병원을 거치면서 각종 정신질환 및 장애 진단을 받고 6년 4개월간 강제수용된 실제 사건을 재구성한다. 사건을 보도한 기사 제목 "멀쩡한 네팔인 정신병원 감금"12)처럼 찬드라의 동료 노동자와 고용주는 찬드라가 "멀쩡하고 일 잘하고 말 잘 듣는" 사람이라고 증언하며, "정신병잔 줄 알았으면 우리가 채용을 했겠어요?"라고 말한다. 감금과 차별이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오판"이 인권유린인 것으로 재현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강제감금을 가능하게 했던 시설과 기관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는다.
 
- 시설과 쉼터 사이에서 내뱉는 저항 : ‘숨’

 

함경록 감독의 영화 ‘숨’은 전북 기독교 영광의 집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2010년 영화로 남성목사와 그 부인인 원장이 운영하는 시설에서 다섯 살 때부터 살고 있는 장애여성 수희(박지원)가 주인공이다. 수희에게는 같은 시설에 거주하는 민수라는 애인이 있다. 성인의 사생활과 성적 권리를 박탈하는 시설에서 이들은 그들만의 숨은 공간인 설비실에서 성적 친밀함을 나눈다. 이곳은 수희가 힘들 때 찾아가는 공간이기도 하다. 거울은 수희가 어떤 꿈과 욕망을 가진 존재임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치이다. 카메라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수희의 몸 가까이 머물며 거리를 두지 않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희의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관객들도 명확히 볼 수 없다. (이 영화의 카메라 기법은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에서 찬드라의 얼굴을 처음과 마지막을 제외하고 전혀 보여주지 않고 영화 내내 찬드라의 시선 카메라로 처리한 장면들 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목욕 봉사를 오는 여성은 멍이 든 장애여성을 발견하고 원장의 아들에게 상습적으로 성폭력을 당해왔음을 알게 되고, 수희가 임신한 것도 성폭력에 의한 것이라고 짐작한다. 조사관들의 방문에 앞서, 자신을 아빠라고 칭하는 목사는 수희를 불러 자신이 수희에게 행했던 폭력, 다른 장애여성들에게 가한 성폭력, 신체적 폭력 등에 대해 입을 다물 것을 강요하며, 그 대가로 민수와 결혼하여 살 수 있게 집을 지어준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결혼생활과 아기에 대한 수희의 꿈은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던 자원봉사자가 시작한 고발과 구원과정에 의해 막히게 되고, 피해자로 호명된 수희는 쉼터로 옮겨진다. 수희는 낯선 쉼터에서 한밤중에 뛰쳐나가 보지만 “선생님”이라고 자신을 칭하는 사람에 의해 잡혀 쉼터에 머무르게 된다.

 

“쉼터의 시설화를 넘어서는 변화,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글에서 여름은 “어떠한 지원에 있어서 그 대상이 장애가 있고,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는 것만을 중심으로 상담과 치료에만 집중하고 관계 맺기를 위한 상호적인 고민을 건너뛰고 일방적인 지원 매뉴얼을 요구하는 방식은 장애여성 피해자의 주체성을 높이는 효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숨’에서 수희를 성폭력 피해자로만 호명한 사람들은 수희가 피해자임과 동시에 성생활을 영위하면서 이미 성적 주체로서 친밀성을 맺고 있으며 재생산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지 않는다. 수희는 시설에서 끊임없이 노동하며 다른 장애인들을 씻기고 보조했지만, 쉼터에서는 선생님이 수희를 씻겨 주고 수희가 방 청소를 하면 걸레를 빼앗는다. 착취당하거나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이분법으로 갈린 두 공간에서 수희는 다르지만 비슷하게 존재한다. 그 안에서 수희는 십자가 목걸이를 건 자신의 모습을 거울 앞에서 바라본다. 자신을 구원할 유일한 존재로서 자신을 바라보게 된 것일까. 이 영화에서 폭력 없는 삶, 애인과의 친밀한 관계와 출산, 양육이 가능한 공간은 수희가 들어가지 못하고 경계 밖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공사장처럼 아직 지어지지 않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하지만 그 세계의 가능성을 아직도 꿈꾸는 수희는 조사실에서 답변을 거부한다.
 
영화 ‘숨’의 한 장면: 수희가 시설의 담 밖에서 공사장을 바라보고 있다. 수희의 얼굴 옆면이 화면 오른쪽으로 보이고 공사장에는 포크레인과 흙이 보인다.

 

쉼터 선생님과 산부인과에 다녀온 뒤 아기를 엄마 아빠가 있는 가정으로 보내주어야 한다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다. 수희는 선생님이 있는 방으로 달려 들어가 숨소리에 더해진 목소리로 발화하며 “나 안 해!”라고 외친다. 시설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과 그 가운데 공존하는 수희의 삶과 꿈, ‘보호조치’로 보내진 쉼터에서의 제재와 권리 박탈을 함께 보여주는 ‘숨’은 나쁜 왕과 좋은 왕이 공통으로 가진 권력의 폭력성을 수희의 숨과 몸, 목소리를 통해 보여주는 수작이다.

 

- 커뮤니티 안에서의 고립과 고통이 불러낸 원혼 : ‘아파트’

 

김순남은 “시설은 어디인가”라는 물음에 “인간을 인간의 삶으로 환대하지 않는 그곳, 존재를 사회적 시민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기능으로 소환하는 그곳은 삶의 존엄이 단절되는 시설과 분리되지 않으며, 이때 가족과 시설의 경계는 불분명해진다”13)고 말한다. 이러한 단절은 가족 없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에도 일어난다. 2004년 영화 ‘아파트’에서 지체장애여성 유연(장희진)은 부모님을 사고로 떠나보낸 후, 혼자 남게 된다. 영화는 아파트 주민들이 “딸이나 마찬가지인” 유연을 돌아가며 “돌봐주기로” 한 뒤 일어나는 일을 그렸다. 이렇게 자신들을 ‘좋은 왕’으로 추대한 자들은 “살기 좋은 아파트”의 따뜻한 이웃으로 선정된다. 하지만 유연이 고립되어 살아가는 환경에서 이들은 자유롭게 집에 들락거리며 마음껏 폭력을 가한다. 중년여성, 중년남성, 노인여성, 청년 할 것 없이 각각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유연의 몸에 약물을 투여해 실험하고, 강제로 밥을 먹이며, 구타하고, 강간한다. 유연은 자살을 하고 귀신이 되어 자신이 사망한 시각에 이들을 차례로 방문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다. 한 아파트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심장마비, 투신자살의 미스터리를 풀어 죽음을 막으려는 세진(고소영)의 앞에 나타난 유연은 자신이 당한 폭력보다 사람들이 자신을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더 견딜 수 없었다고 말한다. 영화 ‘아파트’는 시설, 혹은 지역사회라는 주거의 물리적인 환경과 위치가 문제가 아니라 고립과 단절, 타인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이 폭력의 근본임을 극대화하여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권력 구조가 아닌 혼자 사는 장애여성의 취약함 때문에 피해자가 된다는 위험한 고정관념을 강화시켜 시설화를 떠받친다.

 

영화 원작인 강풀의 웹툰 ‘아파트’에서 유연은 주민에게 신체적 폭력을 당하지 않는다. 대신 혼자 사는 유연은 철저하게 고립되어 고통받고 이를 견디지 못해 자살한다. 자신을 찾지 않았던 사람들을 원망하며 귀신이 된 유연은 이들을 찾아간다. 광장공포증으로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장애여성만이 유연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원한을 품고 떠도는 유연을 돕고자 하는 구원자로서 유연에게 접근하는 주인공 혁은 유연에게 감히 이렇게 외친다. “당신의 아픔!! …당신의 괴로웠던 일 내가 나눌게요!! 내가, 내가 가져갈게요!!” 하지만 자신에게 옮겨진 괴로움을 결국 견디지 못해 죽음에 이른다. 작가는 도와주고자 하는 욕망에서 오는 구원이 아닌,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때 고통의 고리가 끊어질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동정하지 않고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전한다. 김현철이 “끊임없이 유동하는 시설의 경계”14)라는 글에서 언급했던 시설의 사회적 경계가 어떻게 지역사회 안에서도 존재하고 물리적 경계로 이환되는지 보여주는 이 작품은 강제와 고립으로 만들어진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위계에 기반한 구원의 모습을 띨 때 고통이 재생산됨을 알려준다.
 
- 낭만화된 시설과 예외적인 자립생활 : ‘나의 특별한 형제’

 

시설화되는 사람들의 시설 밖에서의 삶을 그리는 데 자주 등장하는 실패와 위험의 모티프 또한 고병권이 말한 “시설의 원리 위에 구축된” “시설 사회”15)를 재현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시설 사회”에서는 시설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시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16) 화재의 이미지가 여러 텍스트에서 등장한다는 것은 그 좋은 예이다. ‘레인맨’에서 레이먼드(더스틴 호프만)가 시설 밖에서 동생과 머무를 때, 화재로 이어질 뻔한 사고가 일어나고, 이를 계기로 레이먼드는 다시 거주시설에 들어가게 된다. 올해 개봉한 ‘나의 특별한 형제’라는 영화에서는 이러한 논리를 비판하고 있다. (다음에서 영화 줄거리와 결말이 일부 노출됨을 미리 알린다.)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 스틸컷. 지체장애인 세하(신하균)가 음료 마시는 것을 발달장애인 동구(이광수)가 보조하고 있다.
 

발달장애인 동구(이광수)가 함께 살 사람을 정하는 재판에서 어머니의 변호사는 동구와 함께 살고자 하는 지체장애인 세하(신하균)에게 질문한다. “둘이 살다가 만약에 불이 날 수도 있잖아요. 그건 정말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이에 대해 세하는 "불이 나면 119에 신고를 해야죠. 비장애인은 불이 나면 안 위험합니까"라고 반문한다. 하지만 이후에 일어나는 화재의 이미지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동구의 생활이 이상적인 환경이 아님을 증명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치로 등장한다. 동구는 어머니의 식당에서 큰 화재로 이어질 뻔한 실수를 하게 되고, 혼란의 가운데 거리로 나가 예전에 살던 시설이 있던 곳으로 향한다. 즉 화재는 동구의 시설수용으로 이어지지 않지만, 시설에서 세하와 함께 살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동구를 스스로 시설로 가게 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시설을 나와 자립생활을 하는 두 장애남성의 친밀한 유대를 보여주지만, 탈시설의 윤리를 제시한다기보다는 ‘좋은 시설’의 이미지와 함께 ‘자립생활’을 예외화하고 있는 듯하다. 신부님이 운영했던 시설에서 자란 두 장애남성, 한 명은 지적 능력이 있는 지체장애남성과 그에게 활동보조를 제공할 수 있고 수영을 잘하는 지적장애남성은 신부님이 사망한 후 시설이 강제로 문을 닫게 되면서 자립생활을 계획하게 된다. 두 사람과 달리, 이 시설에 거주하던 다른 장애인들은 소지품 하나도 챙기지 못한 채, 어느 날 갑자기 차에 실려 다른 시설로 옮겨진다. 이들의 이런 운명은 어떤 식으로도 문제화되지 않는다. 탈시설은 서로를 보완하여 자립이 가능한 짝을 이룬 동구와 세하에게만 예외적으로 허락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 과정에서 갑자기 나타난 동구의 어머니는 이 두 남자의 자립생활을 방해하는 존재이고, 동구의 수영강사 미현은 세하와 친해보였다는 이유로 동구를 주저하게 해 의도치 않게 이들의 자립생활을 막는 존재가 된다. 하지만 이후 두 남자가 꾸려가는 삶은 어머니와 그리고 미현과도 공존하는 연결된 삶으로 그려진다는 점에서 시설과 장애남성, 주변의 여성을 그린 영화의 뻔한 전개와 반복되는 장치들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주인공들이 떠나야 했던 시설은 그들의 진정한 ‘집’으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낭만적인 곳으로 남아 있고,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했던 동료들은 탈시설을 위한 연대의 공동체가 아니라, 이 두 사람의 삶을 응원하기 위해 시설에서 가끔 외출할 수 있을 뿐이다.

 

- 구원을 청하지 않는 불온한 자들의 연결 : ‘타자’
 
그렇다면 시설을 낭만화하거나, 시설에 ‘잘못’ 보내진 주인공의 비극을 그리거나, 특정 범죄의 장소로 재현하거나, 사회 시스템의 은유로 만드는 방식이 아닌 재현은 어떻게 가능하고 그 재현을 통해 탈시설은 어떻게 상상될 수 있는가.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다원예술로 소개된 ‘타자’(El Otro)라는 공연에서는 어떤 정신병원의 마당처럼 보이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7명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칠레의 극단 테아트로 니뇨 프롤레타리오의 이 작품은 결핵 치료시설이었다가 정신장애인, 노숙인을 수용하게 된 칠레의 한 시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담은 사진집 ‘영혼의 멈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 60년대 발달장애인 수용 시설의 실태를 폭로했던 ‘연옥에서 보낸 성탄절’17)이라는 사진집에서 피해자이기 때문에 눈이 가려진 채 등장해야 했던 이들과는 대조를 이룬다. <타자>는 시설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랑, 관계, 육체, 광기를 분절적으로 보여주지만, 관객으로부터 구원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수용공간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차이와 공간 자체의 소외를 숨기지도 않는다. 정상성의 기준에 따라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서사를 통해 타자가 지닌 감정과 능력을 강조하거나 “이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라는 메시지를 주지도 않는다. 이는 누군가가 인간이라고 인식하기 전까지 타자는 ‘비인간’이라는 전제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공연은 ‘인간화’의 시도가 인간임을 하나의 자격으로 만들어 버리는 비윤리적 작업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듯하다. 그래서 목적 없어 보이는 몸짓, 벽에 써 내려가는 글씨, 소리들, 몸들의 마찰, 흐르는 침과 드러나는 육체, 침묵, 집착과 울부짖음, 젖어 있는 몸, 물건들과의 공존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하고 분절된 연결은 인간이 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동시에 웹툰 ‘아파트’에서 이야기하는 “고통을 이해하라”는 명령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알려준다.

 

‘타자’는 미술관의 공연장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폐쇄된 공장, 감옥, 버려진 창고 등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이러한 공간들이 자본주의 사회, 시설 사회를 구성하고 있고, 그 안에 존재하는 타자가 그 사회를 지탱하고 있기에, 공연 마지막의 “나는 타자다”라는 선언은 깊은 울림을 준다. 탈시설의 실천은 타자를 타자성으로부터 구원하려고 하거나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소통불가능한 타자와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것, 그리고 나의 타자성에 대한 선언 자체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탈시설은 강제와 지배의 일상, 혹은 고립되고 위험한 삶이라는 이분법을 거부할 가능성을 위한 불온한 상태들의 연결이며, 타자성과 공존하는 반폭력의 실천이다.

 

*           *           *           *           *

 

1) Good kings bad kings : a novel, Chapel Hill, North Carolina : Algonquin Books, 2013.
2) 이 시설의 ‘일리노이 학습과 생활기술센터’라는 이름은 그곳이 수용시설이라는 본질을 숨김과 동시에 ‘학습과 ’생활기술‘이라는 것이 어떻게 장애인이 빠져나올 수 없는 덫으로 작동하여 삶 자체를 유예시키는지 잘 보여준다. 김순남은 사회복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삶의 유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많은 시설의 설립 목적이 ‘건전한 사회참여 유도’, ‘자활능력회복’이며, 무수한 프로그램을 통해서 ‘교정’하고 ‘치료’를 통한 인간사회화의 회복을 근간으로 할 때, 복귀할 사회는 어떤 곳이며, 복귀할 사회에서 상상하는 사회화된 인간의 모습은 어떠한 인간의 삶을 정상화하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동해야만 한다. 인간을 구분하는 위계에 대한 저항과 균열을 통해서 사회를 재구성하지 않는 이상 사회복귀 논리는 시설화의 논리와 정확히 일치하기에 사회복귀라는 목표는 영원히 불가능하다.” (「강제된 장소, 강제된 관계를 질문하는 탈시설 운동」, 비마이너, 2019/7/11)
3) Diane Slocum, “Susan Nussbaum Individualizes Institutionalized Children” Authorlink, Writers and Readers Magazine, June 13, 2018. https://bit.ly/2kncXbp
4) 베트남 전쟁을 그린 미국영화들에 등장하는 살인과 강간, 불타는 마을, 전투 장면들이 전쟁의 잔인함과 끔찍함을 대중에게 보여주어 ‘반전영화’로 불렸지만, 이러한 이미지는 폭력을 행하도록 훈련받은 자들에게는 감독의 의도와 상관없이 포르노그라피와 같은 쾌락을 주어 결국 전쟁 홍보 영화의 역할을 해왔다고 스워포드는 주장했다. A. Swofford (2003) Jarhead: A Soldier’s Story of Modern War, London: Simon and Schuster, p. 6~7.
5) 미국의 특수교육자 버튼 블랫은 대형 수용시설의 인권유린을 폭로하는 『연옥에서 보낸 성탄절』에서 네 개 시설의 이름을 공개하기를 거부했다. 이름을 공개하면 인권유린이 특정 시설만의 문제로 국한되고 그 시설들만이 폐쇄되거나 개선됨으로써 일단락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6)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지만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에서 등장하는 소록도가 독재정권 하 한국사회를 은유한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7)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기획, 서중원 기록, 정택용 사진, 『나, 함께 산다: 시설 밖으로 나온 장애인들의 이야기』, 오월의 봄. 2018. 31쪽, 106쪽.
8) 「감옥보다 못한 정신병원」, 한겨레, 1994/5/21
9) 실제로 시설에 수용된 분들은 여러 종류의 시설들을 거치게 되어 다중의 시설화 이력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7번방의 선물’ 또한 시설화를 그린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탈시설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교도시설의 철폐를 함께 고민하여야 한다.
10) 김종해, 「영화 수상,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동아일보, 1977/10/7
11) ‘장화, 홍련’, ‘채식주의자’,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등에서 정신장애가 있는 주인공들은 시설 밖에서 생존할 수 없다고 전제된다. 이들에게 정신병원은 마지막 종착역이거나 떠날 수 없는 장소로 등장한다.
12) 손원제, 「멀쩡한 네팔인 정신병원 감금」, 한겨레 신문, 2000/3/24
13) 김순남, 「강제된 장소, 강제된 관계를 질문하는 탈시설 운동」, 비마이너, 2019/7/11
14) 김현철, 「끊임없이 유동하는 시설의 경계」, 비마이너, 2019/8/5
15) 고병권, 「시설 사회에서 시설은 사라지지 않는다」, 비마이너, 2013/7/3
16) 박정수의 「장애인 영화제의 은밀한 장애 차별 영화들」(비마이너, 2018/1/22)에 소개된 ‘미운 오리’와 ‘파란 입이 달린 얼굴’의 분석은 억압된 자아의 해방을 위해 타자를 위한 시설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시설 밖의 공간도 시설의 그림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려준다.
17)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원작 소설 출간과 비슷한 시기였던 1965년 케네디 상원의원이 성탄절에 발달장애인 수용 시설을 예고 없이 방문했다. 오물 냄새가 가득하고 벌거벗겨진 채 늘어져 있거나 묶여있고 감금된 장애인들의 현실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함께 방문한 버튼 블랫은 이후 주립 대형시설의 실태를 더 자세히 알리기 위해 사진작가 프레드 캐플란과 여러 시설들을 방문하여 외부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공간까지 몰래 찍어 사진 에세이집 『연옥에서 보낸 성탄절』을 출판했다. 장애인을 수용하는 네 개의 대형 주립시설들에서 일어나는 인권유린은 사진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났다. Steven J. Taylor, “Christmas in Purgatory: A Retrospective Look,” Mental Retardation 44(2) (2006): 145-149. 버튼 블랫과 프레드 캐플란의 『연옥에서 보낸 성탄절』은 아래 링크에서 볼 수 있다. https://bit.ly/2lPgmA1
하지만 이 책은 잘 운영되고 있는 시설의 예를 대조하여 보여준다. 깨끗한 환경에서는 다양한 활동들이 일어나고, 친절하고 실력 있는 직원들이 장애아들을 교육하고 있다. 좋은 시설의 아동들은 야외에서 뛰어놀며 활짝 웃으며 카메라를 보고 있지만, 앞의 그렇지 않은 시설에서 찍은 사진에 실린 장애인들의 눈은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검게 가려져 있는 것이다. 블랫은 시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시설의 운영비를 두 배로 늘리고 외부 감독위원회를 만들어 주정부에 보고하도록 하고 직원채용과 훈련, 평가를 전문가가 실시할 것을 제안했다. 즉 블랫은 당시 시설 자체의 폐쇄를 주장했던 것이 아니라 시설의 개선을 제안했던 것이다. 이후 그는 모든 시설에 근본적으로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1973년에 출판된 책에서는 모든 시설의 폐쇄와 설립 중단을 주장했다. 대신 발달장애인을 위한 지역사회 프로그램들을 운영하는 센터들을 제안했다. Burton Blatt,  (1973). Souls in extremis: An anthology on victims and victimizers. Oxford, England: Allyn & Bacon.

올려 0 내려 0
김은정 미국 시라큐스대학교 여성·젠더학 및 장애학 프로그램 부교수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텔레그램 비마이너 구독하기 비마이너 paypal로 일시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비마이너 정기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무통장입금 정보입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난민은 어떻게 시설에 갇히는가 (2019-09-18 15:51:59)
장애인거주시설 연계 사업, 시설이 비협조적이어서 힘든 걸까? (2019-08-20 18:04:42)
비마이너의 아름다운 유혹, 독자 인터뷰 비마이너의 아름다운 유혹, 독자 인터뷰 더보기
신간소개기사보기 도서 구매하기
기고 칼럼 기자칼럼

기고 작은이미지
길을 잃고 헤매다 보니, 길을 찾았어요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등은 2019 사회복지의 날...

“나의 괴물 장애아들, 게르하르트 크레...
두 살에 와서 서른아홉까지 시설에서 살...
“시설에서 제일 좋았던 기억? 없어요”
Beminor SNS 비마이너 페이스북비마이너 트위터비마이너 텔레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