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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권도, 미래도 없던 시설의 삶
[제1회 대구지역 장애인 탈시설 증언대회] ⑤ 이수나
등록일 [ 2019년09월16일 16시54분 ]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등은 2019 사회복지의 날을 맞아 ‘제1회 대구지역 장애인 탈시설 증언대회’를 했습니다. 시설에서 나와 탈시설하며 살아가는 장애인 당사자 여덟분의 이야기를 글로 전합니다.

 

왼쪽에는 꽃이 피어있고 아스팔트 바닥에는 낙엽이 있는 길 위에서 이수나 씨가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 제공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기억이 있어요. 친구들이 유치원에 다녔으니까 일곱 살쯤 된 것 같아요. 부모님께 나도 유치원에 가고 싶다고 졸랐었어요. 부모님이 맞벌이하시니까 집에 혼자 있었거든요. 밥 먹여놓고 제가 잘 때 일을 하러 가시곤 했어요. 외동이었어요. 위에 언니나 오빠나 동생도 없었어요. 몇 살이라고 부모님이 얘기해 준 적이 없어서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어요. 제가 집에만 있었다고 했잖아요? 부모님이 연탄배달을 하셨어요. 배달을 마치고 늦게 오시는 날이 많았는데 기다리다가 못 참고 오줌 싸거나 울다가 지쳐서 잠들곤 했어요. 그런 날들이 반복되었겠죠. 모든 장애인들 부모님들은 자식의 장애를 고쳐보려고 여기저기 안 가본 병원 없이 한의원도 다니고 하시잖아요? 제 부모님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셨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이웃 사는 아줌마가 힘들지 않냐고 애들 맡기는 데가 있으니까 한번 가보라고 한 것 같아요. 부모님과 같이 기차를 타고 대구에 온 거로 기억해요. 여덟 살쯤 될 것 같아요. 시설에 오니까 친구가 많아서 처음에는 그냥 좋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부모님하고 떨어질 거라는 생각은 미처 못 하고요. 친구들이 많아서 울지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시설에 처음 왔어요.


처음 입소한 (가)시설은 갓난애기부터 아홉 살 어린이까지 있었어요. 장애아, 비장애아들이 섞여서요. 생활교사를 만화 캐릭터 주인공 이름을 붙여 엄마라고 불렀어요. ‘캔디 엄마’ 이렇게요. 그곳에서는 1년에서 2년 정도 살았어요. 정확히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가)시설은 다른 곳에 비해 개방적인 편이었어요. 입양을 보내야 하니까 외부에서 손님들이 많이 왔거든요. 외국에서도 사람들이 와가지고 사진 찍고 했던 게 기억이 나요. 장애가 나아지는 병은 아니잖아요? 그러다 장애인거주시설 (나)로 이전했어요. 아무도 저한테 갈 거냐고 물어보지 않았어요. 제 허락도 없이 무턱대고 좀 컸다고 이전하고 장애가 심하다고 이전됐어요. 제 선택권은 전혀 없었어요.

 

밥, 반찬, 국, 분유를 섞어서 줬어요


(나)시설은…… 환경이 말도 못 했어요. 네 평 정도밖에 안 되는 공간에 스무 명 가까이 살았어요. 거주인들이 자식처럼 딱 붙어 있었어요. 다 장애가 있는 분들이었어요. (가)시설과 달리 좀…… 폐쇄적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뇌병변 장애라 경직이 심해요. 몸에 힘이 항상 들어가거든요. 당시는 지금보다 힘이 정말 많이 들어간 상태였어요. 이게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데다가 딱히 나아지는 것도 없었어요. 경직이 정말 심한 날은 밤새도록 울고불고했어요. 아파가지고요. 몸에 계속 힘을 주고 있는 거니까 온몸이 다 아팠어요. 잠들지 않는 이상 힘이 계속 들어가니까요.


자주 맞았어요. 제가 경직이 심하다고 했잖아요? 밤에 아프니까 저도 모르게 낑낑댔는데 다른 거주인들 자야 한다고 저를 복도에 재웠어요. 재우는 것까지는 괜찮아요. 종사자들이 자기네들도 자야 되는데 시끄럽다고 저한테 소리 지르고 아침이면 빨랫방망이로 때리기도 했어요. 씻을 때 얼굴을 물고문하듯 물속에 제 얼굴을 집어넣은 적도 있고요. 오줌 쌌다고 맞은 적도 있어요. 다친 적도 있었어요. 제가 앉을 때 양반다리를 해야 해요. 그래야 중심이 잡혀서 앉을 수 있거든요. 생활교사가 가부좌를 억지로 시키다가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어요. 병원 가서 깁스를 했거든요. 원장님한테 불려가서는 자기가 안 그랬다고 하시더라고요.


방에서 제가 가장 어렸어요. 욕심부리면 안 됐어요. 제 물건이 하나도 없었어요. 시설에 살면 원래 자기 물건이 없어요. 하물며 속옷도 같이 입거든요. 예쁜 옷이 하나 들어와서 내가 입어야지 하면 이미 다른 사람한테 가 있어요. 제가 장애가 있다 보니까 선생님들이 항상 “너는 입기 편한 바지 입어라.” 그러시죠. 멜빵바지 같은 것도 입어보고 싶었는데 못 입어봤어요.


(나)시설은 거실이랑 방들이 있고 목욕탕이 따로 있었어요. 한 방에 스무 명 정도가 생활했는데 그런 방이 일곱 개 있었어요. 목욕은 일주일에 한 번 했어요. 목욕탕에 큰 욕조가 하나 있었어요. 다 들어가서 씻으면 위생상 안 좋아서 그랬는지 인원이 많아서 그랬는지 스무 명을 목욕탕에 벗긴 채로 앉혀놓고 우리에게 물을 끼얹었어요. 그다음에 한 명 한 명씩 씻기는 거예요. 씻기는 인원이 부족하다 보니까 첫 타자가 제일 좋아요. 스무 명 가까이 때를 밀고 씻긴다는 게 힘들잖아요? 그러다 보니 중간 이후부터는 대충 물만 끼얹고 하고 나온다고 생각을 해야 돼요. 거기서 열한 살까지, 한 2년 정도 살았어요.


(나)시설하면 딱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요. 개밥이요. 식사시간 때 방마다 배식을 하잖아요. 보통 밥하고 국, 반찬 세 가지 정도가 나오잖아요? 아무리 맛없는 반찬이라도 따로따로 주면 잘 먹을 텐데 그렇게 먹어본 적이 없어요. 거기선 모든 걸 대접에 함께 줬어요. 반찬으로 샐러드가 가끔 나왔어요. 채소를 마요네즈로 버무린 거 아시죠? 국이랑 밥이랑 김치에 그것까지 다 섞어요. 거기에다가 분유까지 넣었어요. 그나마 영양을 챙기려고 그랬는지 아기들 먹는 분유도 섞어줬어요. 매끼를 그렇게 먹었어요.

 

서른 살까지 살 수 있을까요?


11살에 중증장애인시설 (다)로 보내졌어요. 32살에 탈시설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어요. 제가 장애가 심하니까 중증장애인시설로 보낸 것 같아요. 그때도 저한테 물어보지 않았어요. 이전한 날 생활관에 들어간 순간이 기억나요. 동물원에 가면 동물이 밖에 못 나오게 하면서 사람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투명한 유리판으로 막아놨잖아요? 거주인들이 사는 방 입구가 유리판으로 되어 있었어요. 정말 동물원 같이요. 시설에 봉사자들이 자주 오잖아요. 국회의원들도 한 번씩 왔거든요. 외부인들 방문할 때 동물원 투어하듯이 우리를 구경해요. 그게 충격이었어요. 씻을 때도 다 보이죠. 몸이 다 노출돼요. 여성생활관인데 남성들도 자유롭게 왔다 갔다 했어요. 정말 사생활이라는 건 하나도 없었어요.


(다)시설에서도 자주 아팠어요. 열한 살 땐가 몸이 너무 아픈 날이었어요. ‘이렇게 아픈데 내가 서른까지는 살 수 있을까?’ 정말 서른 살 될 때까지라도 살고 싶었어요. 서른까지만 살자 이런 생각을 자주 들었어요. 몸이 너무 아팠거든요. 몸이 아프니까 미래를 그리기 힘들었어요. (눈물)


제가 말도 하고 생각을 할 수 있다 보니까 생활종사자들이 저한테 함부로는 못했어요. 저 말고 발달장애인분들이 많았어요. 종사자가 다른 거주인을 물고문하는 걸 목격했어요. 그 친구는 중증장애인이라 누워만 있었어요. 일어설 수가 없는 친구였어요. 나이가 어리다 보니까 오줌도 싸고 그럴 수도 있잖아요? 오줌을 싼다고 그걸 자기 말 안 듣는다고 생각한 것 같았어요. (다)시설에서는 매일 아침마다 샤워를 시켰어요. 선생님이 혼자서 스무 명, 열여덟 명 씻겼어요. 움직일 수 있는 발달장애인 거주인이 선생님을 도와주기도 했는데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애들을 씻기다 보니까 선생님도 힘들긴 하셨겠죠. 그래도 자기 일이잖아요? 자기 말 안 듣는다고 어린아이들을 물고문해도 돼요? 똑바로 누워있는 애 얼굴에 샤워기를 대고 물을 틀었어요. 애가 파닥파닥 뛰고 소리 지르고 난리가 났거든요. 그 소리를 아침마다 듣는다고 생각을 해봐요.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원장님한테 이야기를 했어요. 애는 살려야겠어서 용기를 많이 낸 일이었어요. 그 선생님이 퇴사를 했어요. 거기까지는 좋아요. 근데 선생님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서 제가 낙인이 찍혔어요. 신입종사자가 오면 기존에 있는 종사자가 “쟤 조심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 이후에 생활이 좀 힘들어졌어요.


(다)시설 내에 그룹홈에 있었어요. 스물한 살 때 그곳으로 옮겨서 5년 정도 살았어요. 그룹홈에도 문제가 있었어요. 그룹홈에 방이 2개 있었는데 각각 남자 7명, 여자 7명이 한 방에 살았고 거실이랑 화장실이 있었어요. 씻을 때가 문제였죠. 몸이 노출이 되니까요. 화장실이 여자 방이랑 마주 보는 위치에 있었어요. 남자 거주인이 씻고 있을 때 방에 들어가면 서로 불편할 수밖에 없는 거죠. 화장실 문 앞에 커튼이 쳐져 있긴 했는데 다 보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인권을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 같아요.

 

기록자 홍세미 씨와 이수나 씨. 사진 제공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자립체험에서 자립으로


(다)시설에 대구 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아래 사람센터) 활동가가 자립에 대해 홍보하러 온 적이 있어요. 시설 종사자 중 마인드가 괜찮은 분이 계셨는데 저에게 단기체험을 해보지 않겠냐고 묻더라고요. 제가 그룹홈에도 있어 봤잖아요? 그룹홈에 있어도 자유가 없기는 마찬가지니까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큰 기대는 없었어요.


사람센터에서 단기체험을 했어요. 3주짜리도 하고 한 달짜리도 하고요. 처음에 나왔을 때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먹고 가고 싶은 것도 다 갔어요. 가보고 싶었던 놀이공원도 가고요. 몇 차례 시설 밖으로 나오다 보니까 자신감이 좀 생기더라고요. ‘혼자 살 수 있겠다’가 체험이 되더라고요. 제가 적응력이 좀 좋은 편이에요. 근데 시설에서 나올 때는 말이 좀 많았어요. 종사자분들이 활동지원사가 스물네 시간 지원되는 것도 아닌데 너 혼자 어떻게 살 거냐고 하더라고요. 사람도 없고 돈도 없고 집도 없는데 살 수 있겠냐고요.


완전히 자립하기 전에 사람센터 장기체험홈에서 1년 반 정도 살았어요. 솔직히 말하면 그때는 좀 힘들었어요. 제가 시설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관계 맺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돈이 없다 보니까 장기체험 때 저축을 좀 많이 해야 했어요. 임대주택 얻을 때 돈이 필요하니까 가능한 많이 모으고 싶었어요. 돈을 거의 안 썼어요. 스킨로션조차 안 샀어요. 주변에서 왜 그렇게 열심히 돈 모으냐고 할 정도였어요. 그렇게 모아서 임대주택에 들어갔어요. 그게 6년 전이네요. 임대아파트 들어가서 공부도 마저 했어요. 대구사이버대학에 들어가서 4년제 대학 졸업장이랑 사회복지사 자격도 따고요. 제가 지금 기초생활수급자예요. 기초생활수급자는 취직하면 수급 자격이 박탈돼요. 그래도 저는 취직하고 싶어요. 수급비만 받고 살면 나태해질 것 같아서요. 시설에 살 때처럼 퇴행할 것 같기도 하고요. 인권강사 과정을 막 수료했어요. 다음 달부터 강의도 나가요.


탈시설한 후에도 고민은 있어요. 제가 중증장애다 보니까 신변처리, 가사서비스, 사회서비스를 다 받아야 해요. 그러다 보니까 제가 없어요. 요구를 잘 못해요. 제가 입고 싶은 옷이 있는데 입히기 불편하다고 활동지원사분이 안 입혀줄 때가 있거든요. 그럼 그냥 입혀 주는 대로 입어요. 친구한테 농담 삼아 “우리 아직도 시설병 있는 거 아니냐?”고 했어요. 시설병은 다른 게 아니라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놔두는 걸 말해요. 그렇게 살아온 시간이 길다 보니까 그런 거 같아요. 조금씩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세요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힘들었지만 시설 안에서 살던 기억 때문에 더 힘들었어요. 시설에서의 삶은 제압 받고 억압받고 자유도 없고 내 선택권도 없고 그렇다고 목숨이 보장되는 것도 없고, 미래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최소한 살아남는 것도 보장이 안 돼요. 시설 안에서든 사회에서든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내 삶의 안전만이라도 보장해달라는 거예요. 최소한 살아남을 수 있게요. 그리고 저는 활동지원사가 없으면 안 되니까 지원사 시급이 만 원은 넘었으면 좋겠어요. 단가가 높아져야 전문성도 보장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반려동물을 키우다가 얼마 전에 지인한테 입양을 보냈거든요. 이름이 꽃분이예요. 얘가 저한테 생활이 맞춰진 데다가 저를 못 잊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다시 데려왔어요. 제가 반려동물 키우고 나서 부모님 마음을 알겠더라고요. 보내는 심정을 조금 알았어요. ‘이런 마음으로 보냈겠지. 오죽했으면 보냈겠냐?’라고 부모님을 이해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생겼어요. 부모님이 보고 싶지만 찾지는 않으려고요. 어디서든 잘 살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저도 잘 살아내야죠. 꽃분이가 있지만 그래도 안정된 가족 그리고 제 편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떠나지 않을 제 편이요. 그리고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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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이수나·기록 홍세미 saramcil@empas.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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