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12월06일fri
기사최종편집일  최종뉴스편집일
비마이너로고
news
뉴스상세검색 버튼
기사등록 기사제보
전체메뉴 펼침
HOME 뉴스홈 > 기획연재 >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쪽지신고하기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이덕인 ②] 지금, 여기, 아암도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이덕인의 삶과 죽음 ②
등록일 [ 2019년10월23일 14시59분 ]

▷ 이덕인의 삶과 죽음 ①부 : 그날의 아암도


혁명, 혁명하라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그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 없는 오늘이 있을 수 없고
오늘이 없는 과거가 있을 수 없다.

_ 이덕인의 일기에서

 

지난 10월 8일, 1017 빈곤철폐의날 조직위원회가 마석 열사묘역 참배를 했다. 마석에 있는 이덕인 열사 묘역. 사진제공 최인기
 

1995년의 빈곤 가족. 그리고 인천이라는 욕망의 땅

 

그의 가족은 1983년에 인천으로 왔다. 이덕인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전남 신안군 지도읍에서 태어난 이덕인은 다섯 남매 중 딱 가운데였다. 이덕인은 소아마비 장애인이었는데 그의 맏형 또한 장애인이다. 그의 가족이 연안부두 앞 음식점을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 출발은 노점이었다. 연안부두 앞 포장마차를 운영하던 노점상들이 단속에 격렬하게 저항하자 인천시는 점용허가를 내주고 풍물의 거리를 조성해 영업을 허용했다. 연안부두 여객, 화물 이용객과 관광객들의 방문으로 이곳은 하나의 명물이 되었고, 이덕인의 가족은 인천이라는 도시의 일원으로서 분주히 일하며 먹고 살았다. 이덕인의 어머니는 칠순을 훌쩍 넘긴 아픈 몸으로 지금도 가게에 나와 손님을 기다리고 이덕인의 두 동생이 함께 일하고 있다. 미장일을 했던 아버지는 이덕인의 죽음 이후 일을 접고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거리 곳곳을 헤맸다. 가난을 벗어나고자 인천 땅을 밟은 그의 가족은 조그마한 삶터를 얻기 위해 기를 써야 했고 가족을 잃은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

 

“(신안) 거기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가지고, 우리가 여기가 이렇게 있다가는 굶어 죽겠다, 우리 어디로 가야 되겠다 하고는, 이제 정처 없이 인천으로 올라온 거예요. 그때만 해도 내가 좀 젊으니까. 허다 못해 쪼끄만하게 국수장사만 해도, 먹고 살 수 있는 생활이 되었어. 내가 그때는 건강항께 새끼들은 안 굶어죽이겠구나, 그래갖고 무조건 올라왔지. 올라와서도 돈이 없어가지고 굉장히 어려움을 당했어요. 아버지는 일 댕기고 나는 파출로 식당 같은 데 가서 일해주고.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너무 힘들어가지고.” (어머니 김정자)

 

곳곳에서 새로운 땅들이 속속 생겨났다. 사람들은 새로 만들어지는 땅 어디쯤 비집고 들어가 살만한 땅 한 뙈기 정도는 허락될 거라 믿었다. ‘민주화’ 이후 정치권들은 저마다 모두를 위한 개발과 진보를 약속했다. 1995년은 전국적으로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어 민선 지자체장이 선출된 해였다. 지역마다 앞 다투어 개발사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던 때였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등 대형재난참사가 이어졌지만 개발의 신화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인천은 육지를 넘어 바다와 갯벌을 메우며 확장되고 있었다. 1995년 3월 직할시에서 광역시가 된 인천은 “세계화에 부응하고 미래를 향한 광역시의 부푼 꿈을 이루기 위하여” 구시가지는 상업, 업무, 행정, 문화의 중심권으로, 강화군은 통일 거점의 도시 해양사적 관광지로, 검단면은 최첨단 무공해 공단과 전원도시로, 영종도와 옹진군은 공항 및 해양 등의 천혜자원을 이용하는 관광도시로, 송도 신도시는 국제무역, 금융, 정보통신 서비스의 최첨단도시로 만든다는 개발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중소규모 간척사업이 줄을 이었고 영종, 청라, 송도 등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의 신대륙이 만들어졌다.

 

인천광역시의 초대 민선시장으로 선출되어 8년간 재임한 최기선 전 인천시장이 주력한 송도신도시 건설사업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2003년 경제자유구역 지정, 국제도시를 조성하기 위한 송도 공유수면 매립공사는 2020년까지 53.45㎢의 육지를 만드는 거대한 개발계획을 여전히 추진 중이다. 송도는 없었던 섬이었다. 일본인들이 자국의 명승지 송도(松島, 마츠시마)라는 이름을 붙인 해안가에 송도유원지가 조성되어 불리던 이름이었다. 아암도는 송도유원지에서 바닷물이 빠지면 건너갈 수 있는 작은 바위섬이었다. 1994년, 아암도 갯벌 바로 앞까지 송도 3공구 매립공사가 완료되면서 아암도는 섬 아닌 섬이 되었다. 해안도로가 뚫리고 군사 철책선이 제거되자 탁 트인 바다의 석양과 갯벌을 체험할 수 있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거기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아래 장자추) 회원들이 마차를 꾸려 노점을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이덕인은 목숨을 잃었고 그 후 다시 철책선이 쳐졌다.

 

아암도 앞 갯벌은 인천시의 대대적인 개발과정에서 산란지를 옮겨 다니며 떠밀려온 철새와 텃새들의 먹이활동의 공간이자 수많은 바다생명의 삶터가 되어 왔다. 전 세계적으로 1만여 마리밖에 남지 않은 검은머리갈매기도 이곳을 찾았다. 하지만 이 갯벌도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해있다. 현재 인천시는 ‘인천판 사대강’이라고도 불리는 송도 워터프런트 개발사업을 추진 중인데 이 계획에 따르면 아암도갯벌은 아암호수가 될 예정이다. 아암도는 정작 사라졌지만 여기저기 벌어지는 개발사업의 이름으로 활용되고 있다. 뻗어 나갈 수 있는 만큼 뻗어 나가고 갈아엎을 수 있는 만큼 갈아엎는 개발의 역사 속에서 새들이 이리저리 내몰리듯,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삶도 이리저리 내몰려왔다. 뭇 생명의 신음을 덮어 새로운 땅이 만들어지는 가운데, 한 귀퉁이를 비집고 우리도 좀 함께 살자고 꿈틀대는 가난한 사람들은 다만 단속과 철거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송도국제도시 개발계획안내도. ⓒ인천경제자유구역
 

1995년,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나는 어려서부터 배우지 못했다.
부모님의 가난과 장애인이라는 편견은
나의 어린 시절을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아이로 성장하게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버텨 나가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강해져야 한다.
세상이 비록 우리를 어렵고 힘들게 할지라도
고생하시는 우리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미래의 내 자신을 위해서라도 약한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
공부를 잘하고 싶다.
지금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만 한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세상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니까...
_ 이덕인의 일기에서

 

이덕인은 사망 전까지 공무원시험을 준비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귀금속 세공, 전화음성사서함서비스 영업 등의 일을 하기도 하고, 취업을 위해 광고디자인학원에 다니기도 했다는 그는 가난과 장애로 인한 차별에서 벗어나는 길이 공부해서 출세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한편, 생계활동의 압박과 현실적 고민을 놓을 수 없었다. 아암도에 대한 단속과 탄압이 심해지면서 망루농성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의 갈등과 고민은 깊어졌을 것이다.

 

“엄마, 엄마 고생 쪼끔만 하라고. 내가 공부해서 출세를 하면, 남들이 그래도, 옛날에는 막 대하고 했던 말도 엄마한테 그렇게 안 할 거라고. 분명히 내가 공부해서 출세해서 엄마 고생 덜 시킬텐께 쪼끔만 더 고생하라고 맨날 그랬어요 걔가.” (어머니 김정자)

 

“눈이 맑잖아요. 또 그때 당시 서른이 안 됐을 때니까 피도 끓을 거고. 아마, 망루 쌓고 그런 상황에서 도서관에 있을 친구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이 친구는 오로지 살 길이, 공무원이 되거나 하기 위해 공부를 하는 거라 생각했을 수 있어요. 근데 어쨌든 아암도 들어와서 보니,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지 않았을까. 덕인이는 눈이 되게 맑으면서 우수에 차 있었어요. 말수가 적고 고민을 많이 하는 성격. 그 시기가 덕인이한테 굉장히 힘든 시기였을 거예요. 저처럼 운동을 접했던 것도 아니고, 본인은 이제 처음 접하는데, 너무 탄압은 심하고. 그 시절에 장애인들이, 뭐, 학교 들어가서, 학내 서클 같은 것을 접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실 일반 장애인들이 운동을 접하기는 굉장히 힘든 때였지만, 활동과정에서 많은 고민이 생겨났겠죠.” (조성남)

 

이덕인은 장자추 아암도지부 총무역할을 맡으면서, 노점상 생존권 싸움을 시작했다. 당시 노점상의 존재란 곧 단속과 탄압에 대한 저항의 일상이기도 했다. 이덕인은 노점 활동을 계기로 각종 연대집회에 참여하며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현실에 눈을 떴다. 그는 부모님의 기억 속에 공부를 열심히 하던 아들로 남아있지만, 그가 참여한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 투쟁, 8‧15 범국민대회를 비롯해 각종 연대활동은 청년 이덕인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장애인 차별과 가난한 사람들의 위태로운 삶이 그의 미래에 놓인 조건이라고 했을 때, 그가 접하게 된 저항과 연대는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장애인이 이 땅에 살기 위하여

 

장애인들의 치열한 투쟁은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위한 싸움과 직결되었다. 차별과 배제 속에서 장애인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으며, 장애인의 권리 실현을 위해서는 빈곤과 불평등을 낳는 사회 구조에 저항해야만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헌신적으로 싸웠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 비극적 여정 속에 1995년의 이덕인의 죽음이 또한 있었다. 장애인도 함께 살자는 목소리에 ‘사회’는 차가운 폭력으로 응답했다. 2000년 들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되면서 가난한 장애인들은 생활보호 ‘대상자’가 아니라 기초생활 ‘수급권자’가 되었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게 만드는 제도의 한계에 절망했고, 또 한 명의 장애인 노점상이었던 최옥란의 싸움과 죽음이 또한 있었다. 장애인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노동하고 살만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실상 수많은 편견과 장벽이 여전히 존재한다. 장애인의 자립생활의 권리보다는 보호를 명분으로 한 시설 수용이 우선적이며, 복지급여는 최소한도여야 하며 소득활동을 하거나 법적 부양의무자가 있으면 깎거나 없애야 한다는 인식이 만연하다. 이런 상황에서 생산성의 잣대로 장애인의 노동을 통한 사회 참여와 소득활동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인식 또한 여전하다.

 

1995년 결성되어 곳곳에서 노점 사업을 추진하던 장자추는 아암도 투쟁 이후 청계천에서 장사하는 회원들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의 적극적 활동을 벌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노점상 운동에 대한 의견 충돌도 중요한 배경이었다. 장자추는 활동 평가의 기회를 갖기도 어려웠는데 이는 장애인운동의 변화 과정과도 맞물린 것이었다. 1990년대 후반, 전장협은 한국 DPI(Disabled Peoples’ International : 국제장애인연맹)와 통합을 추진하는데, 이 과정에서 장자추 활동이나 90년대 중반 장애인운동의 대중투쟁의 성과와 과제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 이 시기는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단절기’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후 2000년대 들어 이동권 투쟁, 교육권 투쟁, 장애인연금 도입과 기초생활보장제도 현실화를 위한 투쟁, 그리고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와 탈시설 자립생활을 위한 투쟁 등 치열한 투쟁의 과정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가 만들어졌다.

 

장애인이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가치관을 바꾸는 과정이 필연적이다. 기존의 사회구조 그대로라면, 이 세계는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허락지 않기 때문이다. 장애인의 노동권은 노동에 대한 인식과 관행을 바꿔나가는 과정과 함께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하에 장애인일반노조를 준비하고 있는 흐름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6월 12일 장애인일반노조 준비위원회가 발족해 11월 본격적인 출범을 앞두고 있다.

 

“전장연 활동을 하면서 장애인 노동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제기하기 어렵다는 점이 아쉬웠는데, 지금 중증장애인의 노동 문제가 이제 막 나오기 시작하는 거잖아요. 노동의 가치 문제에 있어서, 자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사회적 가치, 이런 걸 가지고 싸울 때가 아닌가. 그때의 장자추 활동을 돌아본다면, 장애인들이 결국은 노동현장의 경험을 못 하고, 어떻게 보면은, 노점으로 밀려나는 상황에 대한 철저한 평가와 자기반성을 못 했던 게 있는 거죠. 사회를 변화시켜야 되는 거지, 기존에 걔네들이 만들어놓은 사회구조, 틀에 맞추려고 보니까, 그런 대상도 없고, 한계가 있었던 거죠.” (조성남)

 

장애인일반노조 준비위가 장애인 의무고용 준수를 촉구하며 지난 10월 1일,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1인 릴레이 시위를 하고 있다. 펼쳐진 노란 우산에는 ‘노동 해방, 장애 해방’이라고 적혀있다. 사진 박승원
 

24년이 지난, 이덕인 열사의 자리

 

정권이 다섯 번 바뀌었다. 이덕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자로 지목되었던 많은 사람들은 죽거나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세상은 변했다. 하지만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가. 고인이 된 최기선 전 인천시장은 생전의 회고록에서 “가난은 잊거나 피한다고 없는 것이 되지 않는다”고 썼다. 하지만 정작 그가 주도한 인천 개발의 역사는 가난한 사람을 외면한 것이었다. 그는 민주화운동 경력을 지닌 민선 1기 시장이었다. 휘황찬란한 신도시들이 등장하면서 빈곤과 불평등은 더욱 심화해왔다. 지금, 가난한 우리의 자리는 어디인가.

 

이덕인의 죽음은 법정에서 다뤄진 바 없다. 겨울 바닷바람 속 살수와 경찰과 용역이 협력한 강제철거는 모두 합법의 영역이었으며, 망루로 내몰렸다 망루에서 탈출해 주검으로 돌아온 이덕인의 죽음의 책임은 그 누구에게도 추궁되지 않았다. 2009년 1월 20일 용산의 망루에서 죽어서 내려온 다섯 철거민처럼. 법은 경찰관의 사망 책임만을 물었을 뿐, 철거민들의 죽음의 책임을 이 사회는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누군가의 삶과 죽임이 비극에 휘말려 갈 때 그 책임을 물을 곳이 없다면 과연 사회란 무엇일까. 그런 사회 속 가난한 사람의 자리는 어디인가.

 

지난 10월 8일, 1017 빈곤철폐의날 조직위원회 차원의 장애인빈민 열사 묘역 참배에 동행했다. 스물여덟에, ‘의문사’로 남겨진 죽음을 맞은 이덕인의 무덤가에서 문득 그의 아버지가 식사 도중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해가 안 가. 예수님이 서른셋에 죽었는데 목수 일을 했대. 그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사흘 만에 시신이 어디로 도망갔어. 시신이 어디로 갔어. 긍께 시신이. 신이 부활했지 육체는 부활할 수가 없어. 가을 무를 심어야겠다.” 그에게 아들의 죽음은 계속되는 현재진행형의 부재이며 그에게 대통령이 주었다는 시계는 멈춰있었다. “이덕인 열사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말은 그 시계가 멈춰 있는 한, 그토록 부질없는 말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정권이 몇 번이나 바뀌고 사회정의와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소위 ‘86세대’가 ‘작은 흠결’에도 불구하고 ‘큰 정의’를 위한 개혁의 주체로 전면에 나설 때, 그들과 동시대를 살다 간 가난한 장애인 청년은 개발과 발전, 진보의 역사 속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 이 세계에서 그에게 주어진 자리는 어디인가.

 

자고 나면 새로운 땅이 생겨나는 때, 비집고 들어가 살 땅 한 뙈기 허락되지 않은 죽음을 돌아보며,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가 없다면 새로운 땅을 상상하고 일굴 수밖에 없지 않겠나 생각한다. 그 새로운 땅은 바다와 갯벌을 메우고 뭇 생명을 갈아엎어서 만들어지는 그런 땅은 아마 아닐 것이다. 열사들의 죽음을 붙들고 지금껏 장애인운동이 걸어온 길은 그 치열한 여정 자체였다. 오늘을 살아가는 가난한 우리의 땅을 일구고 열사에게 자리를 마련하려는 여정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덕인 열사의 명복을 빕니다.”

 

 

아무리 찢어지게 못사는 마을에도 잘사는 집은
한두 채 있게 마련이지요
이제 그런 집 한 채도 없지요 눈 씻고 봐도 없지요
5‧16인가 뭔가 나고 새마을인가 생기고
5‧17인가 뭔가 나고 새 시대 새 인물인가 나고
아무리 잘사는 부자 마을에도
빚 안 지고 사는 집은 한 채도 없지요
우리 마을에서도 이제 부자라면 제일 가는 부자는
천석이 만석이네 같은 집은 아니지요
논 사서 소작 놓고 자기는 도회지에서 장사하는 사람이지요
면에 가서 면서기라도 하는 사람이지요
조합에 가서 서기라도 하는 사람이지요
손에 흙 안 묻히고 침발라 돈이나 세거나
책상머리에서 펜대나 까딱까딱하는 사람이지요
천석이 만석이네 논도 그런 사람들이 사갔지요

_ 김남주, 「내력」 중

 

2014년 11월 28일, 강남역에서 열린 이덕인 열사 19주기 추모제
 

[참고자료]
〇장애인 노점상 고 이덕인 열사 사인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및 빈민생존권 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이덕인 열사 투쟁 자료집 : 핏빛 아암도’ 외 당시 자료들
〇최인기,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열사 이야기」, 『민플러스』, 2019.05~07 기획연재
〇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한국사회 장애민중 운동의 역사』, 2005
〇민주노점상전국연합,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빈곤철폐를위한사회연대, 인권중심 사람, 인권운동+(더하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 공동주최 기자회견, ‘23년 피맺힌 유가족의 한을 풀, 이덕인 열사 의문사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 촉구 청와대 앞 기자회견’ 자료(2018.5.23)
〇대통령소속 의문자진상규명위원회 결정문 진정 제23호, 2002.8.30.
〇인천도시역사관 기획전시, ‘송도 일대기 : 욕망, 섬을 만들다’, 2019.07.10.~10.06
〇컴팩스마트시티 특별전시, ‘사라진섬, 파묻힌 바다, 태어난 땅’, 2015.08.25.~11.29
〇EBS, ‘하나뿐인 지구 - 생존기록 검은머리갈매기 소금땅에 오다’ 2006. 6. 12

 

[자문]
김종환 _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장애인일반노조(준)
박경석 _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유희   _ 십시일반 밥묵차
조덕휘 _ 전국노점상총연합
조성남 _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최인기 _ 민주노점상전국연합
홍경희 _ 중구 노점상(당시 장자추)
이덕인 열사의 어머니 김정자 님, 아버지 이기주 님과 가족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올려 0 내려 0
최예륜 w.yeryoon@gmail.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텔레그램 비마이너 구독하기 비마이너 paypal로 일시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비마이너 정기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무통장입금 정보입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관련뉴스]
1995년 11월 28일 인천 아암도, 그날의 진실
[이덕인 ①] 그날의 아암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최옥란 ①] 이르게 온 미래, 최옥란 (2019-10-31 13:06:12)
[이덕인 ①] 그날의 아암도 (2019-10-22 19:13:15)
비마이너의 아름다운 유혹, 독자 인터뷰 비마이너의 아름다운 유혹, 독자 인터뷰 더보기
신간소개기사보기 도서 구매하기
기고 칼럼 기자칼럼

기고 작은이미지
탈시설한 최중증 발달장애인 9명, 어떻게 살고 있을...
[편집자 주] 지난 7월, 장애인 탈시설 지원 방안을 ...

우생학, 우리 시대에는 사라졌을까
무엇이 독일 나치의 장애인 학살을 허락...
다가오는 ‘디지털 복지 디스토피아’의...
Beminor SNS 비마이너 페이스북비마이너 트위터비마이너 텔레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