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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학기 지나서 교과서 받는 시각장애학생들, 해결책은 없을까?
마라케시 조약 비준 4년, 제자리걸음인 시각장애인의 정보접근권
“마라케시 조약의 ‘수혜자’는 곧 ‘권리자’를 뜻해, 정보접근권은 인권”
등록일 [ 2019년10월29일 14시00분 ]

28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마라케시 조약, 국내 이행 어떻게 할 것인가?’가 열렸다. 이일호 연세대학교 연구교수가 마라케시 조약 안내서를 중심으로 조약의 의미에 대해서 발표하고 있다. 사진 허현덕
 

“대학 입학 후에 일부러 본인의 저서로 강의하는 교수님 강좌를 신청했어요. 그러면 교과서 파일을 조금이라도 손쉽게 얻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을 갖고서요. 그러나 단 한 명의 교수도 파일을 제공해주지 않았어요. 저작권 때문에 자신의 저서를 파일로 제공할 수 없다는 거였죠.” (이일호 연세대학교 연구교수)

 

마라케시 조약을 따른다면 시각장애인인 이일호 연구교수는 교과서 파일을 받을 권리가 있다. 또한 그 파일을 기반으로 대체도서로도 당연히 제공받아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정부는 민간의 의식 변화를, 민간은 정부의 규정 마련을 말하며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그 사이 시각장애학생은 반 학기가 지나서야 자신에게 맞는 대체도서로 교과서를 받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유례없이 정보가 넘쳐나는 요즘, 시각장애인들이 비시각장애인과의 정보접근성 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고 토로하는 이유다.

 

우리나라는 지난 2015년 10월 마라케시 조약을 비준하고 2016년 9월에 발효했다. 마라케시 조약은 세계지적재산권기구가 채택한 ‘독서장애인을 위한 저작권 제한에 관한 국제조약’으로, 조약의 핵심은 독서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저작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독서장애인은 시각장애인을 포함한 난독증 등으로 독서가 어려운 사람을 뜻한다. 현재 61개국이 마라케시 조약을 비준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마라케시 조약을 비준하고 4년이 지났지만 사정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8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마라케시 조약의 진정한 의미를 짚고, 국내 이행을 가로막는 요소와 해소 방안을 모색하는 시간이 마련됐다. 토론회는 국회의원 우상호·신동근 의원이 주최하고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아래 한시련), 계란과바위가 주관했다.

 

- 디지털 파일 납본 의무 모르는 출판사 65.1%에 달해

 

2018년 출판연감 통계에 만화와 문학도서를 제외한 국내 발행 종수는 4만 3463개다. 그중 국립장애인도서관이 시각장애인 대체자료로 변환한 것은 5%에 그친다. 오디오북으로 출판되는 전자책은 1% 안팎이다. 시각장애인과 비시각장애인의 정보 격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통계다.

 

우리나라는 1987년부터 이미 저작권법상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대체도서에 대한 저작권 제한 규정과 도서관법상 디지털 파일 납본에 대한 규정이 마련돼 있다. 구체적으로는 인쇄자료를 점자와 녹음물로 보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디지털 파일 납본에 대한 규정을 지키는 곳이 적다. 그러다 보니 대체도서 제작은 늦어질 수밖에 없다.

 

점자와 녹음물로 대체자료를 제작하는 데는 오랜 시간과 인력이 들게 되는데, 인쇄물을 직접 타이핑하거나 스캐너로 읽힌 텍스트를 편집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디지털 파일이 있다면 점자를 제작하거나 TTS(문자음성 자동변환), 데이지도서 등의 대체파일로 만드는 것은 매우 빠르게 진행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마라케시 조약을 비준할 당시에 큰 기대를 모았던 것도 이 부분 때문이었다.

 

28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마라케시 조약, 국내 이행 어떻게 할 것인가?’가 열렸다. 발표자로 나선 김현아 미국변호사(왼쪽)와 남형두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오른쪽). 사진 허현덕
 

그러나 출판계는 디지털 파일 납본에 대해 모르거나 부정적 인식을 지니고 있다. 2011년 세명대학교 산학연구단의 ‘디지털파일납본기증활성화연구’에 따르면 디지털 파일 납본 의무에 대해 ‘모른다’고 답한 출판사가 65.1%에 달했다. 같은 조사에서 알고 있어도 납본하지 않은 이유로 불법유출에 대한 우려가 40.3%로 가장 높았다.

 

김환희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기획조정팀 팀장은 “마라케시 조약이 갖는 당위성과 필요성은 부인의 여지가 없지만 출판계가 공공의 책임감을 가지고 협력해나갈 수 있도록 파일 유출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도록 하고, 정부가 나서서 제공 형식과 절차의 표준화를 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협력 출판사에 대한 지원과 보상안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현아 미국변호사는 “마라케시 조약 안내서 제4항 5조에는 ‘저작자에 대한 보상금 지급 규정’을 국가별 재량으로 두고 있지만, 독서장애인들의 정보접근을 현저하게 제한할 수 있다는 점과 조약이 추구하는 목적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하며 권장하고 있지 않다”며 보상안에 대해서 회의적 입장을 내비쳤다.

 

- 누구에게나 공평한 학습권 구현, 왜 안 될까?

 

일반도서의 경우보다 심각한 문제는 교과서 공급 문제다. 일반도서의 경우 광범위한 출판사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핑계라도 있지만, 교과서는 장애학생의 학습권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정부의 책임이 더욱 강조된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교과서 대체도서 제작이 미뤄지면서 시각장애학생의 학습권 침해 사례가 빈번하다. 이에 한시련을 주축으로 시각장애계에서는 교과용도서가 확정된 경우 60일 이내에 디지털 파일 납본을 의무화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토론회에서 교육부 관계자는 교과서 확정시기를 거론하며, 물리적인 제작 시간 부족을 이유로 꼽았다. 또한 저작권법보다 상위의 법령에 이에 대한 근거를 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책임을 회피했다.

 

김영재 교육부 교과서정책과 과장은 “디지털 납본 의무화에 관해서는 저작권 관련이기에 초중등교육법의 의무에서 벗어난다”며 “저작권법이나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디지털 파일 납본 규정의 근거를 담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현재 인정교과서 76%, 검정교과서 11%로 민간에서 교과서 개발 비율이 높아지면서 민간의 협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김 과장은 “현재 교과서 선정 과정에서 ‘교과서 채택 시에 디지털 파일 납본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협약서를 포함해 납본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남형두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교과서 채택 후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협약서를 받기보다, 교과서 평가에 디지털 파일 납본에 배점을 주는 방식으로 한다면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며 “저작권법이나 장애인차별금지법에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미 가장 상위법인 헌법에서 국민의 교육받을 권리를 규정하고 있고, 초중등교육법에서 의무교육으로 정한 중학교, 특수교육법상 의무교육인 고등학교 과정에는 반드시 교과서가 적시에 공급되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현아 미국변호사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 교과서를 받는 데 어려움이 없어서 이미 마라케시 조약에 비준했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미국은 올해 2월 비교적 늦게 발효되었다”며 “미국은 ‘미국장애인법(ADA)’을 통해 장애학생의 교육권을 보장하고 있다는 증거”라며 정부의 책임을 강조했다.

 

토론자들의 토론을 참가자들이 경청하고 있는 모습. 사진 허현덕

 

- “마라케시 조약의 ‘수혜자’는 곧 ‘권리자’를 뜻해”
 
이날 토론회에서는 독서장애인에 대해서 인권적 측면을 강조하기도 했다. 최근 세계시각장애인연맹(WBU)이 마라케시 조약 점검과 안내를 돕기 위한 안내서를 번역한 이일호 연구교수는 “마라케시 조약은 저작권 관련 조항을 담고 있지만, 여타의 다른 조항과는 달리 제한 규정만 담고 있는 최초의 조약”이라며 “독서장애인을 ‘수혜자(beneficiary)’라고 표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수혜자가 곧 ‘권리자(right holder)’가 된다는 점도 분명히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교수는 마라케시 조약의 근간에는 세계인권선언과 장애인권리협약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특히 장애인의 정보접근성과 문화 향유권을 집중적으로 제시하며,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고, 따라서 제대로 이행하는 것을 의무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마라케시 조약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남형두 교수는 “무엇보다 시각장애인을 비롯한 독서장애인이 저작권을 침해할 것이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며 “이들을 진정으로 정보접근권의 권리자로 여기고 민관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남 교수는 “현재 대체도서 포맷이 점자와 녹음물로 한정돼 있는데, 전맹 시각장애인이 아닌 저시력 시각장애인을 위한 큰글자도서까지 대체도서 형태를 확장해야 한다”며 “이미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는 디지털 포맷형태를 시각장애인을 비롯한 독서장애인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들의 정보접근권 향상을 논의해야 할 때”라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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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현덕 기자 hyundeok@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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