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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옥란 ③] 나의 남겨진 말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최옥란의 삶과 죽음 ③
등록일 [ 2019년11월02일 14시05분 ]

▷ 2부 : 청계천 8가 ‘악바리’ 노점상

 

최옥란 열사의 유서. 왼쪽 페이지에 “나의 동료 여러분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내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을 꼭 이어주십시오.”라고 써있다. 사진제공 빈곤사회연대

 

7일간의 명동성당 농성

 

“김대중 정부의 선전과는 달리,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저소득 빈곤계층 단 한 명의 최저생계도 보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와 정리해고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악용하고 있습니다.”
_ ‘생존권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농성단’ 기자회견 자료 중, 2001년 12월 3일

 

농성단은 너무 낮은 최저생계비의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김대중정부가 공언하듯 ‘빈곤층의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제도’로 기초생활보장제도가 거듭나야 함을 강조하며, 핵심적으로 세 가지를 요구했다.

 

1. 지역별, 가구유형별 최저생계비를 도입하라
2. 생계급여의 현실화 : 추정소득과 부양비 간주제를 폐지하라!
3. 교육, 의료, 주거급여를 현실화하라!

 

세 가지 요구안의 근거가 된 것은 최옥란의 삶 자체였다. 최옥란의 한 달 총소득은 수급비 28만 6천 원, 장애수당 4만 5천 원을 합해 총 33만 1천 원이었다. 그러나 당시 자료에 따르면 지출해야 하는 비용은 관리비와 전기, 수도세를 합해 한 달 16만 원, 1주일에 한 번 방문해야 하는 병원에 가기 위한 차비가 월 12만 원(왕복 3만 원), 일 년에 두 번 맞아야 하는 근육이완주사가 의료급여 항목에 해당하지 않아 회당 80만 원으로, 월로 환산하면 13만 원에 이르는 상황이었다. 이것만 합해도 41만 원. 생활비를 합하면 한 달 30만 원 이상의 적자가 나게 된다고 최옥란은 말했다.

 

이런 적자를 메꾸기 위해 간헐적이나마 노점상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노점을 한다는 것이 이웃 상인의 신고로 동주민센터에 발각된 뒤 노점을 지속하면 수급권을 박탈한다는 통보를 받은 뒤였다. 수급자가 되면 한 푼도 벌어선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갑갑한 마음에 다시 노점을 할까 생각했지만 이미 뺀 자리에 다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저는 청계천 도깨비시장에서 노점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런데 기초법이 시행되면서 정부는 저에게 노점과 수급권 둘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저는 의료비 때문에 수급권을 선택하고 노점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점조차도 포기한 저에게 정부는 월 26만 원(생계급여)을 지급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시청과 구청 그리고 동사무소를 찾아다녔습니다.”
_ 최옥란, 명동성당 농성을 결의하며, 2001년 12월 3일

 

명동성당 앞엔 텐트를 세울 수 없었다. 깔개 하나에 이불과 비닐을 덮었다. 12월 명동의 칼바람은 예삿일이 아니다. 명동에서 밤을 그렇게 지새운다는 것은 건강은 물론 생명마저 위험한 일이었다. 유의선은 주변을 수소문해 잘 곳을 마련했다. 밤이 되면 인근에 있던 비전향장기수모임인 ‘통일 광장’ 사무실에 잠시 들어가 눈을 붙였다. 아침이면 일어나 출근 인파를 맞으며 명동성당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명운동을 진행했다.

 

농성 3일 차인 12월 5일, 농성단은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뒤편에서 열린 파견철폐공대위의 수요집회에서 ‘생존권 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투쟁대회’를 진행한다. 이후 최옥란은 한 달 생계비로는 생계가 보장되지 않는다, 현실적인 대책을 마련하라는 요구와 함께 28만 6천 원을 국무총리에게 반납하러 간다. 별다른 이유도 대지 않은 채 경찰들은 길을 막아섰고, 최옥란은 전동스쿠터에서 내려와 길을 막은 방패 앞에 누워 항의했다. 결국 28만 6천 원은 국무총리에게 반납하지 못한다.

 

농성 5일 차인 12월 7일. 농성단은 국무총리에서 반납하지 못한 28만 6천 원을 김원길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반납하기 위해 장관의 집으로 향했다. 7일엔 스무 명의 연대자와 많은 언론이 동행했다. 경찰은 길을 막지 못했다. 최옥란은 장관이 살고 있는 빌라 문 앞에 자신의 급여를 담은 봉투와 “28만 원 가지고 한번 살아봐라”는 쪽지를 내려놓는다.

 

“집이 정말 좋았습니다… 이런 집에 살고 있는 김원길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28만 원으로 한 달을 살라고 합니다. 김원길이 28만 원을 가지고 한 달을 살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_ 최옥란, 농성단 일지에서 발췌, 2001년 12월 7일 

 

12월 8일 토요일에는 ‘생존권 쟁취와 민중복지 실현을 위한 결의대회’를 명동성당 입구에서 진행하고, 12월 10일에는 ‘지역별, 가구유형별 최저생계 도입을 위한 헌법소송 기자회견’을 진행한다. 이 헌법 소원(2001헌마849)은 이듬해 최옥란의 사망으로 기각된다.

 

최옥란 열사가 농성하던 명동성당 입구 들머리에 걸린 현수막. “겨울철 난방비 10만 원, 1인가구 최저생계비 26만원! 당신은 살아갈 수 있습니까?” 사진제공 빈곤사회연대
 

민중복지연대는 7일간 진행된 최옥란의 농성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생산적 복지의 주체적·법적 구현체라 할 수 있는 기초법에 대한 수급자 차원에서의 최초의 직접적인 문제제기였다는 점, 연대한마당의 직접적인 성과물이었다는 점, 각 단체·진보정당·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이끌어낸 점 등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특히 사회적 관심 집중의 경우는 인간이라면 노동능력과 상관없이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보편적 명제에 대한 동의를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_ ‘생존권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농성’을 통해서 본 2002년 민중복지운동의 과제, 한진, 민중복지연대

 

너무 일찍 떠난 사람, 그녀가 남긴 것들

 

“밤늦은 시간에 갑자기 옛날에 같이 활동하던 친구에게 전화가 왔어요. 되게 다급한 목소리로 다급하기도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란이누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 (김태현)
“그동안 고마웠고 애썼다.. 늘 같이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이런 얘기를 하고 끊었다는 거예요.” (유의선)

 

2002년 2월 21일 새벽, 최옥란의 지인들은 다급히 그녀의 집을 찾았다. 음독을 시도하고 영등포 한강성심병원으로 후송된 그녀는 기력을 되찾는 듯했으나 3월 26일 이내 사망했다.

 

‘유서’라는 파일명으로 남아있는 몇 장의 스캔된 노트는 2001년 3월에 작성된 것이다. 처음 이 유서를 보았을 때 2002년을 잘못 적은 것인가 생각했지만, 최옥란의 유서는 자신의 죽음 한해 전 이미 작성해 두었던 것이었다. 농성에 돌입하며 말했던 “처지가 한심스러워 아파트 창밖으로 떨어져 죽고 싶은 생각밖에 안 든다”는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최옥란은 일기장에 적은 유서를 품고 한 해를 살다 결국 떠난 사람이었다. 유서는 총 네 통이다. 사랑하는 아들 준호에게, 함께 활동하던 동료들에게, 어머니에게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에게 쓴 글이 마지막이다.

 

김대중 대통령께
이제 내 나이 35세. 우여곡절이 많은 장애인입니다.
당신도 장애인이면서 현재 시행하고 있는 법이 나의 작은 꿈들을 다 잃게 했습니다.
노동도 할 수 없는 장애인이 그나마 거리에서 장사해서 돈을 벌어서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나의 아들을 찾으려고, 힘이 들어도 참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거리에서 장사도 못 하게 하니 이제는 더 살 수 없는 심정입니다. 다시는 저와 같은 동료들 상처받지 않고 살았으면 합니다. 이러한 죽음을 선택한 것은 절망, 좌절. 희망이 없어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주위 계신 동료 여러분께 부탁이 있습니다.
내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을 꼭 이어주십시오. (후략)

 

명동성당에서의 농성 후 최옥란은 아들의 양육권을 찾기 위한 방법에 골몰했다. 경제력을 입증할 수 있어야 유리하다는 지인들의 조언에 따라 주변에서 돈을 모아 통장에 넣어둔 것이 문제가 되어 수급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고 최옥란은 다시 좌절한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 꿈꾸고 일구어 왔던 자립, 독립적이고 존중받는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는 2002년 3월, 36세의 짧은 생을 일기로 멈추었다.
 
그녀의 치열했던 삶을 기억하는 동료들은 이렇게 최옥란을 보낼 수 없었다. 가족을 설득해 민중복지장을 치르기로 하고, ‘최옥란열사 장례위원회’를 구성한다. 28일, 명동성당 앞에서의 노제와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장례를 치르고 장지로 이동하려 했으나 경찰은 아현동과 서울시청 앞에서 폭력적으로 운구차량을 막아선다. 결국 운구차는 일정에 맞추기 위해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화장터로 향했고, 진보정당과 여성, 노동계를 비롯한 진보적 단체들은 이에 분노하는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살아서도 못가던 길, 죽어서도 끝내 가지 못한 최옥란열사의 비애를 우리 살아남은 자가 짊어지고자 한다. 한 줌의 재만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난 최옥란열사를 기리며 민주노총은 여러 진보적인 사회단체와 힘을 모아 민중복지 쟁취를 위해 힘차게 나아갈 것이다.”
_ 민주노총 성명, 2002년 3월 28일

 

“고 최옥란 씨의 죽음은 한 개인의 삶과 죽음을 넘어, 우리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정부가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최저생계비를 요구하며 스스로 목숨을 던져야 했던 현실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작금의 불법적인 경찰력 행사를 사과하고 소외된 시민들에 대한 대책을 시급하게 마련할 것을 거듭 촉구하며, 위 요구사항들을 즉각 이행할 것을 엄중히 요구하는 바이다.”
_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송두환 회장, 2002년 4월 3일

 

최옥란 열사 민중복지장 당시, 운구차를 막아선 경찰. 사진제공 빈곤사회연대
 

2002년 ‘생존권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농성단’은 ‘기초법개정을 위한 연석회의’로 개편된다. 기초법 개정의 문제의식은 철거민, 노점상, 홈리스, 장애운동 등과 함께 반빈곤연대운동을 지향하는 상설 연대체 ‘빈곤철폐를 위한 사회연대’(약칭 빈곤사회연대) 결성으로 이어진다. 빈곤사회연대는 2004년 3월, 타워팰리스 앞에서 가난 때문에 세상을 떠난 이들을 추모하는 위령제를 지내며 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3월 26일 최옥란열사의 기일은 동정과 시혜의 ‘장애인의 날(4월 20일)’을 거부하고, 장애인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열리는 ‘420장애인차별철폐 투쟁’을 선포하는 날이 되었다. 2010년 장애아동 아버지의 수급신청좌절로 인한 자살 이후 장애운동과 반빈곤운동은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요구하며 다시 기초생활보장제도 개정 투쟁의 깃발을 올렸다. 2012년 3월 26일 최옥란 열사를 기리는 장애-빈민의 공동투쟁대회가 시작되었고, 2019년에 이르는 지금까지 최옥란은 기초법 개정 투쟁의 깃발이다.

 

삶의 모순에 맞선 사람, 삶보다 가혹했던 세상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 건강하였다면 대학교 3학년이 될지도 모르고 직장인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아이엄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 현실을 사랑할 수가 없다. 좌절밖에는 없다.”
_ 최옥란의 일기, 1987년 5월 18일, 최옥란 평전 104쪽에서 재인용

 

“사람이 처음에 태어날 땐 아무것도 모르고 태어나지만 살아가면서 사회를 자각하고 그 자각 속에서 자기의 행동을 정하죠. 보통의 사람은 피해버리지만 최옥란은 직접 몸으로 부딪쳤던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 동의를 하든 안 하든 비난을 하든 안 하든 간에 본인의 생각대로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생각해요.” (조성남)

 

80년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운동은 최옥란에게 새로운 언어를 주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힘을 갖는다는 것은 개별적 사건과 삶의 모순에 대해 비평적 관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장애로 인한 차별과 그로부터 비롯된 가난에 힘겨워하면서 새로운 삶을 꿈꾸었던 최옥란에게 장애해방운동은 혁명이었다. 장애운동은 최옥란이 일기장에 끊임없이 고백한 오도 가도 못하는 삶의 답답함을 새롭게 해석하고 발언할 수 있는 창이 되었다.

 

“그때 저희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어요. 자기가 열심히 노점해서 먹고 살면 되지. 왜 수급비 문제를 제기하냐. 그때까지 제 인식 자체도 그랬던 거 같아요… 그때만 해도 우리가 부양의무제나 가난의 국가책임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싸우지 않았으니까. 노점을 하든 뭐를 하든 간에 장애인고용촉진법 통과되고 직장에 들어가면 되지, 이런 식의 생각을 많이 해서 아마 같이 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하면 참 그렇죠. 그런 문제제기를 벌써 17년 전에 했으니.” (조성남)

 

2001년 12월 3일,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명동성당 농성 돌입 기자회견 당시 최옥란 열사(오른쪽). 사진제공 빈곤사회연대
 

장애인이자 여성, 도시빈민이라는 조건은 삶에 대한 최옥란의 주도권을 번번이 가로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투쟁에도, 삶에도 헌신적이었다. 그런 최옥란의 노력은 허공에 뜬 선언문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삶을 문제로 제기하고, 제기된 문제 속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이런 노력이 언제나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한 푼이라도 더 모아보려는 노력은 남들에게 이기적인 행동으로 손가락질받기도 했고, 새로운 투쟁과제를 번번이 가져오는 그녀를 사람들은 어려워하기도 했다. 장애여성이며 도시빈민이었던 그녀의 조건은 가장 가난한 이들의 삶이 운동의 과제가 되도록 했다. 그녀가 제기한 기초생활수급비를 비롯한 문제는 최옥란만이 겪고 있는 일은 아니었으나, 그녀가 아니었으면 제기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제가 이렇게 명동성당에서 그것도 추운 겨울에 텐트농성을 결심한 것은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비단 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부터입니다. 수많은 수급자가 그리고 차상위 계층이 말도 안 되는 제도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는 현실은 저에게 한편으로 힘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명확히 해주었습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정말로 저같이 가난한 사람들의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제도로 거듭나기를 희망합니다. 벌써 두 명의 수급권자가 자살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더 이상 수급자들이 자살하거나 저같이 자살을 생각하지 않도록 바뀌었으면 합니다.”
_ 최옥란, 명동성당 농성을 결의하며, 2001년 12월 3일

 

그녀는 결코 현실에 무릎 꿇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세상은 그보다 냉혹했다. 더 이상 기초생활수급자들이 죽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거리에 나섰던 그녀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이후 수도 없이 죽음을 생각했다는 그녀가 다른 빈곤층 역시 고통받고 있다는 현실을 알고 갖게 된 새로운 힘은 어떤 것일까.

 

때때로 그런 상상을 한다. 2002년보다 더 많은 엘리베이터와 저상버스가 설치되었고, 더 많은 장애여성과 뇌성마비 장애인들이 장애운동의 동료로 있는 오늘로 최옥란이 돌아온다면. 3월 26일,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가득 찬 광장을 본다면.

 

“항상 그래. 형, 이건 아니잖아. 싸워야지…” (김병태)

 

형, 이건 아니잖아. 싸워야지. 최옥란이 생전에 자주 했다는 그 말을 떠올린다. 오늘로 최옥란이 돌아온다면 그녀는 여전히 세계 곳곳에 남은 차별의 현장에 대해 말할 것이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장애인의 현실에 분노할 것이다. 장애여성의 일상이 얼마나 더 고단한지에 대해서 따져 물을 것이다.

 

지금은 혼자 시작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 것이라는 그녀의 믿음은 천천히 우리를 떠밀어왔다. 최옥란을 잊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시작되는 변화가, 최옥란이 꿈꾸던 세상으로 우리를 데려갈 것이다.


[ 참고자료 ]
◯ 울림터 활동기록집, 장애인문제연구회 울림터
◯ 전장협 활동기록집 ‘장애해방 그 한길로!’,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2002
◯ 농성을 통해서 본 2002년 민중복지운동의 과제, 민중복지연대, 한진, 2002
◯ 실업운동의 과정과 평가, 사회운동, 유의선, 2004년 5월
◯ 최옥란평전 ‘시대를 울린 여자’, 김용출, 서울포스트, 2003
◯ ‘생존권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농성단’ 취재요청서 및 보도자료
◯ 생존권 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농성단 농성일지, 2001
◯ 영상 ‘2001-2012 최옥란들’, 장호경감독, 2012

 

[ 자문 ]
조성남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김병태 (안산단원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박경석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이사장)
유의선 (정치발전연구소 교육국장)
김종환 (장애해방열사 단)
최인기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수석부위원장)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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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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