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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⑤] 사랑의 야반도주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김영희 인터뷰] 김영희와 정태수의 사랑과 투쟁 ①
등록일 [ 2019년12월09일 13시09분 ]

[편집자 주] 열사가 존재하기 위해선 그의 말에 응답하는 존재들이 있어야 한다. 열사의 말을 유서로써 손에 쥐고 체제 변혁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 말이다. 진보적 장애운동에는 여전히 그러한 투사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매년 열사 추모제에서 열사의 생과 죽음, 열사가 남긴 말을 통해 자신을 조직하고 옆에 있는 자를 조직하며 운동을 이어나간다. 그렇게 열사는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그러함에도, 장애해방열사들에 대해서는 파편적 정보만 있을 뿐 현재까지 정리된 이야기는 없다. 기억되기 위해 ‘이야기되어야 함’을 상기한다면, 열사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또한, 열사의 삶을 서술한다는 것은 승리자의 관점이 아닌, 억압당한 이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새롭게 기술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19년 하반기 비마이너는 장애운동의 물적·정신적 토대를 만든 장애해방열사 아홉 분의 흔적을 찾아 기록하는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를 기획 연재한다.

 

ⓞ [서문] 시대의 악령들을 애도하기
① 김순석(1952~1984.9.19) 장애인 이동권 등에 항의하며 유서 남기고 자결 _ 정창조
② 최정환(1958~1995.3.21) 극악한 노점단속에 항의해 서초구청에서 분신 _ 강혜민
③ 이덕인(1967~1995.11.28) 노점단속에 항의해 인천 아암도에서 망루 투쟁 중 의문사 _ 최예륜
④ 박흥수(1958~2001.7.23) 장애운동에 헌신하다 질병으로 사망 _ 정창조
⑤ 정태수(1968~2002.3.3) 장애운동에 헌신하다 심근경색으로 사망 _ 홍은전

[1] 진보적 장애인운동 조직 활동가 정태수 열사 약전(略傳)
[2] 정태수의 동지이자 배우자 김영희 인터뷰
[3] 정태수의 친구이자 동지 박경석 인터뷰

⑥ 최옥란(1966~2002.3.26) 기초생활수급권, 이동권 투쟁 중 심장마비로 사망 _ 김윤영
⑦ 이현준(1965~2005.3.16) 장애운동 중 활동지원사가 없어 수면 중 사망 _ 여준민
⑧ 박기연(1959~2006.6.2)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투쟁 중 철로에 뛰어내려 자결 _ 박희정
⑨ 우동민(1968~2011.1.2) 탈시설 자립생활 운동 등에 헌신하다 질병으로 사망 _ 홍세미

 

* 글의 순서는 필자 사정으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김영희는 나의 동료이다. 나는 노들장애인야학에서 활동했고 그는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했다. 언젠가 함께 갔던 엠티에서 그가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걸 보았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아직도 생생하다. 누구라도 반하지 않을 수 없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정태수라는 사람의 마음을 잠시 상상했다. 1994년 정태수가 보고 홀딱 반해버렸을 그 장면을 나도 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날이었던 것 같다. 태수와 영희의 파란만장했던 청춘의 한 자락에 대해 들었던 것이. 정태수 열사에 대해 기록하기로 했을 때 나의 가장 큰 사심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처음부터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이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기회.


스물둘에 장애인운동을 시작해 서른다섯에 세상을 떠난 그에게 사랑은 가장 중요한 투쟁이었을 것이다. 정태수 열사가 가장 빛나는 투쟁을 펼쳤던 1995년과 1996년이 두 사람이 서로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시기와 일치하는 것도 나는 결코 우연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시기별로 그의 주요했던 활동을 기록하는 약전의 형식 속엔 이 열렬한 사랑의 기록을 넣을 수 없다는 것이 나를 몹시 슬프게 만들었다. 영희의 목소리는 너무나 강력해서 그가 등장하는 순간 글의 장르가 다큐에서 드라마로, 배경색이 빨간색에서 핑크색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다양한 장르와 색깔이 뒤섞여 고유한 무늬를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겠지만 나의 부족한 실력으로 그 무늬들을 제대로 살리기 어려우니 이 인터뷰를 따로 싣는다. (기록자인 홍은전은 ‘홍’으로 구술자인 김영희는 ‘김’으로 표기했다.)

 

*   *   *   *   *   *   *


홍: 어떻게 처음 만나셨어요?


김: 대학 다닐 때 노래패를 하면서 학생운동을 좀 했어. 태수형이 활동했던 전장협이 대학생들과 연대사업을 했는데 내 친구가 전장협과 연이 있었어요. 1994년 어느 날 전장협이 노둣돌이라는 노래패를 만들었다고 나더러 노래를 가르쳐달라고 했어. 그 노래패를 가르치면서 장애인운동 쪽에 처음 발을 담그게 된 거지. 나도 소아마비 장애가 있었는데 장애인운동이라는 게 있다는 건 처음 알았어. 신기했지. 내가 장애인이니까 전장협 활동가들은 나를 어떻게든 구워삶아서 이 판에 끌어들이려고 애썼던 것 같아.


그런데 내가 노래를 썩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노래패를 지도한다는 게 어렵더라고. 그래서 차은영이라고 노래 잘하는 친구를 끌어들였지. 그 친구도 장애가 있었어. 둘이 같이 가르쳐서 하게 된 공연이 1995년 5월에 최정환 열사 공연이었어. 3월에 열사가 분신했는데, 그 내용을 담아서 5월에 ‘분노 그리고 다짐’이라는 공연을 올렸어. 그 공연에서 처음으로 ‘장애해방가’가 나왔어. 대학 노래패에서 같이 활동하던 친구가 가수 황현이었는데 남편이 작곡가 김호철이었거든. 우리가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지.

 

홍: 정태수 열사의 인상은 어땠나요?


김: 덩치가 엄청 크고 되게 후덕했어. 키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워낙 덩치가 좋았어. 후덕함 속에 카리스마도 있었고 유머도 약간 있었어. 김호철 선배 표현에 따르면 조직의 보스 같다고. 그러면서도 되게 다정해서 후배들이 많이 따랐지.

 

김영희 씨와 정태수 열사.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홍: 정말 많이 따랐나 봐요. 다들 그 이야길 하더라고요.


김: 언제나 먼저 전화해서 안부 묻고 만나자고 하는 사람이었어. 명절 되면 하루 종일 전화 돌리는 게 일이야. 잘 지내고 있냐. 뭐하냐. 한 달 전화비가 그 당시에 15만 원, 20만 원 나올 정도였으니까. 그 시절에도 태수형은 핸드폰을 갖고 있었어. 태수형의 형이 사업하느라 핸드폰이 있었는데 그걸 뺏어서 썼어. 무전기처럼 커다란 핸드폰인데 마석 묘소에 가면 있을 거야. 사람 만나는 거 엄청 좋아해서 껀수만 있으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어. 덩달아 나도 강릉, 광주, 엄청 다녔지.


태수형이 1996년에 장애인고용촉진걷기대회(전국 순회투쟁)를 조직했잖아. 그거 어떻게 하는 거냐면, 사전 준비과정으로 한 달 동안 돌고 그다음에 정식 걷기대회를 해. 그러니까 두 번 도는 거야. 나는 사전 답사할 때 같이 돌았어. 부모님이 어떻게든 움직이라고 차를 마련해줘서 그 차를 타고 다녔지. 전국의 지부들 돌면서 사람들 만나고 어떤 사업을 어떻게 하는지 듣고 또 이런 사업은 어떠냐고 제안했어. 지역의 지부들은 친목단체 성격이 상당히 강했거든. 사람들은 소소하게 모여 있는데 모여서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있으니까 이들을 좀 더 운동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설명하고 설득하고 조직하는 작업이 필요했던 거지. 그러기 위해선 먼저 친해져야 하니까, 정말 몇 번씩 가더라고. 

 

홍: 한 달 동안 그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면 너무 피곤하지 않나요?


김: 젊었으니까, 굉장히 즐겁게 다닌 것 같아. 또 지방 사람들은 서울에서 누가 왔다고 하면 아주 반갑게 맞아주고 챙겨주는 문화가 있었지.


홍: 사람들을 만나면 매일 술을 마셨나요?


김: 태수형은 술을 잘 못 마셨어. 어울려서 홀짝홀짝 마시는 정도였지. 그래도 당시엔 술을 거의 매일같이 먹었으니까 건강에는 어쨌든 영향을 미쳤을 것 같아. 술을 싫어했다기보다는 몸이 안 받아주는 체질이었어. 몇 잔 먹으면 얼굴이 벌게졌으니까. 그날(돌아가신 날)은 아마 순식간에 긴장이 풀려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96년 전국을 돌며 장애대중을 조직하던 정태수 열사(맨 오른쪽)의 모습.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첫 번째 야반도주

 

홍: 정태수 열사와 사랑의 야반도주를 하셨다고요.


김: 두 번 했어, 야반도주. 첫 번째 야반도주는 1995년이었어. 나는 사실 노래패만 하고 내 길을 가려고 했어. 집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고, 운동을 하고 싶다는 욕구도 있어서 노동자신문이라는 곳에 취직을 했었어. 그런데 한 달도 채 일을 못 했어. 우리 집에서 내가 정태수랑 사귀는 걸 알게 되면서 우리 관계를 반대했는데, 그 탄압이 너무 심해서 내가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됐어. 우리 가족은 제주도에 있었고 나만 서울에서 자취하고 있었는데, 정태수를 못 만나게 하려고 가족들이 자췻집까지 점거를 했거든.


그 시기에 정태수는 노점상 싸움을 한참 하고 있던 때야. 95년 3월에 최정환 열사가 분신하고 그 후에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했거든. 노점을 통해서 장애인 생존권을 확보하자는 거였어. 청계천에서 노점 자리를 얻기 위해서 싸웠고 강변역 테크노마트 공사 들어가기 전에도 그 앞에서 싸워서 노점을 했어. 그러다 인천 송도를 개발한다고 발표 났던 시점에 아암도에 들어갔고. 그 정신없는 와중에 우리는 연애를 했지. 그때 태수형에 대한 경찰 수배가 떨어지면서 둘이 같이 도피생활을 시작했지. 나는 집안의 탄압을 피해서, 정태수는 경찰의 수배를 피해서. 둘 다 집엘 못 들어가니까 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았지. 선배한테 돈을 좀 얻어가면서 두세 달 정도 그렇게 지냈던 것 같아. 


하루는 어떤 선배가 자기가 인천경찰서랑 이야기를 다 해두었다면서 가서 조사만 받으면 된다고 했어. 그래서 조사받으러 갔다가 그 길로 구속이 됐어. 둘이 같이 도피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정태수가 구속되는 바람에 나는 오갈 데가 없는 상황이 돼버렸잖아. 그 길로 정태수가 살던 방으로 들어갔어. 그러니까 시댁 정태수 방이지. 거기서 지내면서 매일매일 면회를 갔어. 시댁이 서울 강동이었는데 정태수는 인천에 있었으니까 왔다 갔다 하면 하루가 저물었어.(웃음)


홍: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정말 힘들었겠네요. 원가족들하고의 관계는 틀어졌고 남자친구는 구속되어 있고 언니가 지내는 곳은 남자친구의 부모님 댁이고.


김: 그렇지, 힘들었지.(라고 말하면서도 계속 웃음) 9월 20일에 들어가서 10월 25일에 나왔어. 35일 살았지. 출소하고 바로 동거를 시작했어. 그리고 한 달 후에 아암도에서 노점하던 이덕인 열사가 돌아가셔서 태수형이 투쟁 집행위원을 맡았지. 그 진상규명을 위해 또 싸웠어. 다음 해까지 계속 싸웠어. 그때 그 싸움이 너무 어려웠던 게, 인천 시장 이름이 지금도 기억나는데, 최기선이라고, 이덕인에 대한 어떤 싸움도 펼쳐나가지 못하게 인천시 전체에 완전히 공안을 형성했어. 그래서 그 싸움을 서울로 가져와서 대학로에서 집회했던 기억이 나. 그때 경찰이 이덕인 열사 시신을 탈취해서 장기를 다 제거하고 겉만 꿰매서 돌려줬잖아. 시신 지키는 과정에서 싸우다가 어떤 학생은 실명까지 됐고. 95년, 96년 그 싸움이 엄청 컸어. 최정환 열사 돌아가셨을 때는 시신을 탈취하려는 쪽과 지키려는 쪽 사이에 전쟁을 방불케하는 싸움이 벌어졌어. 강남에 있던 병원 앞이 불바다가 되고 정문이 전소됐어. 결국 시신을 뺏어갔지. 민중운동 진영 자체가 완전히 죽어있던 시기에 장애계에서 큰 싸움이 벌어져서 모두 집결하게 된 계기였지.

 

홍: 저는 정태수 열사에 대한 이 작업을 준비하기 전까진 전혀 몰랐어요. 최정환 열사, 이덕인 열사는 노점상 쪽분들이고 장애계에선 그저 연대를 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김: 아니야. 이덕인은 우리와 함께했던 사람이었어.


홍: 그런 시기에 남자친구가 투쟁 집행위원을 했으니 되게 무서웠겠어요.


김: 매일 불안불안했지. 오늘은 무사히 돌아오길.(웃음)


홍: 그 시기 정태수 선배는 어땠어요? 투쟁할 때 마음이라던가, 고민이라던가. 힘들어하진 않았어요?


김: 글쎄, 특별히 다를 것 없이 그냥 똑같이 열심히 했지. 그래도 그땐 연애하면서 투쟁했으니까 나쁘진 않았을 것 같은 느낌인데.(웃음)


홍: 하하. 그랬겠네요. 청춘은 참 바빴네요. 열사 투쟁하는 와중에 연애에, 동거에.


김: 웃긴 얘기 하나 해줄까. 어느 날 태수형이 나를 만나러 오는 길에 불법유턴을 하다 경찰에 딱 걸렸어. 면허증을 조회하니까 수배자인 게 나온 거지. 태수형도 자기가 수배되었다는 걸 그날 처음 안 거야. 바로 남대문경찰서에 끌려갔어. 나한테 삐삐를 쳐서는 자기가 지금 경찰서에 갇혀 있으니 청계천 노점 동료들한테 알려달라고 했어. 그렇게 모인 장애인이 30~40명 됐는데 나도 집어넣어라, 하면서 난리를 쳤지. 민원실에서 옥신각신하면서 시간이 흐르는데 사람을 임의로 가둘 수 있는 시간에 제한이 있잖아, 그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영장이 안 나온 거야. 우리는 나가겠다고 하고 경찰들은 안 된다고 막으면서 싸우는데, 그 와중에 너무 웃겼던 건, 남대문경찰서에 계단이 엄청 많은데, 장애인들이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니까 건물 밖에서 지키고 있던 경찰들이 이 상황이 뭔지도 모르고 휠체어를 들어서 계단 내려가는 걸 도와줬어.(웃음) 그때 저 멀리서 영장 갖고 오는 경찰버스가 보이는 거야. 정태수와 나는 그 앞에 주차해뒀던 우리 차를 타고 탈출하고 형사들은 도망가는 우리를 잡으려고 그 차를 막고, 우리 동지들이 그 형사들을 막으니까 형사들이 우리 동지들을 막 뜯어내서 몸을 던져버리고, 정말로 육탄전이 벌어졌어. 그렇게 도망쳤어. 그리고 도피생활이 시작된 거야.


홍: 세상에! 어떻게 경찰서에서 도망갈 생각을 해요? 청춘은 참 무모하기까지 하네요.(웃음)


김: 그 당시엔 수배되면 무조건 도피하던 시절이었어.


홍: 상상이 잘 안 가요. 당시 시대 분위기도 상상이 안 가고. 데이트는 어떻게 했는지도 상상이 안 가고.


김: 주로 도피.(웃음) 연애와 도피를 함께한 거지. 사람들하고 소식은 계속 주고받았어. 가끔은 집회나 행사도 가고. 동료들하고 자동차를 주기적으로 바꾸면서 다녔지, 조회 안 되게. 

 

홍: 두세 달 동안 뭐하면서 지내셨어요?


김: 전국을 다니며 동지들을 만났습니다.(웃음) 강릉 지부에 태수형 동기들이 많이 있어서 거기에 몇 번 갔던 것 같아. 그동안 가봐야 하는데 하면서도 바빠서 못 갔던 그런 지역들을 가보기도 했지.


홍: 관광지도 가고 그랬어요?


김: 갔던 거 같아. 공주 칠갑산에서 찍은 사진이 있어. ‘콩밭 매는 아낙네’ 옆에서 찍은 사진 있어.(웃음)

 

두 번째 야반도주

 

홍: 두 번째 야반도주는 언제 한 거예요?


김: 1996년에 나 임신했을 때. 우리 집에서 반대해서 결혼은 못 하고 동거를 하고 있었지. 1996년 태수형이 고용촉진걷기대회 하느라 전국을 돌아다닐 때였는데, 내가 아무래도 이상해서 병원에 같이 가자고 했어. 태수형이 너무 바쁠 때여서 한 달을 기다렸다 병원에 같이 가서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됐어. 그리고 420 장애인의 날 투쟁이 끝났을 무렵에 그 소식을 들은 우리 가족들이 들이닥쳤어. 나를 제주도 집으로 끌고 간 거지. 거의 강제로 유산을 시키려고 했었어. 4, 5개월 됐을 무렵이었는데 내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내가 마음을 딱 먹고는 태수 형하고 시댁 식구들한테 알렸어. 나는 오늘 탈출한다, 라고. 우리 가족들한테도 이런 식으로 살지 말라고 선언하고 야밤에 몰래 도망쳐 나왔어. 태수형이 서울에서 나를 데리러 오고 태수형 부모님도 우리 집안 어른들 만난다고 제주도로 오셨어.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만나서 이야기하고, 우리 둘은 배 타고 여행하면서 서울로 올라왔지.(웃음)

 

김영희 씨와 정태수 열사.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홍: 그 와중에 청춘들이란.(웃음)


김: 파란만장했지.


홍: 진짜 좋았나 보다. 그런데 진짜 마음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김: 우리 집은 내가 장애가 있어서 나를 많이 아껴주고 지원해줬어. 달걀 한 개라도 나를 더 챙겨주던 집이었어. 8남매 중에 내가 다섯째였는데 서열로는 장남 다음이었어. 공부도 제법 잘해서 서울로 유학 보냈는데 얘가 데모에 빠져드니 불안했겠지. 하지만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거니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고 생각했어, 내 인생 대신 살아줄 거 아니라면 부모도 형제도 간섭하지 말라고 독립선언을 한 거지. 


홍: 언니보다 정태수 열사의 장애가 훨씬 중증인가요?


김: 그렇지. 지금은 중증 장애의 개념이 변했지만 그때 시각으로 정태수는 굉장히 중증이었어. 우리 어머니가 뭐라고 했었냐면, 너 그 사람 만나서 살면 폭력에 시달릴 거라고 했어. 그래서 내가, 아니, 장애인을 가족으로 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냐고, 그러면 나도 사회에 나가서 똑같이 대접받는다고 화를 냈던 기억이 나.

 

홍: 그 시절을 돌아보면 어때요? 좋았어요? 야반도주와 도피와 구속과 동거와 임신과.


김: 그냥, 나쁠 건 없었어. 워낙 격랑의 시절이라 어떤 느낌을 충분히 느낄 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좋았어. 사람이 좋고. 서로 대화가 통하고 삶에 대해서 서로 노력할 줄 알고 그거면 족하지. 같이 나눈다는 거, 결혼해서 산다는 그런 느낌이 좋았어. 아쉬웠던 건, 이 사람은 자기 활동이 너무 많았고, 나는 이 집안의 며느리로서 역할이 너무 많아서 우리 둘이 부부로서 가족으로서 오롯이 무언가를 충분히 나누지 못했다는 것. 이 집안의 대소사가 워낙 많았어. 제주도의 오래된 전통 씨족사회 문화를 갖고 있는 집이야. 


홍: 거기에 대한 정태수 열사의 반응은 어땠어요?


김: 엄마 아빠 없을 때 몰래 설거지 도와주는 정도였지. 어른들 사고체계를 쉽게 바꿀 순 없으니까. 장남이 잘돼야 집안이 흥한다는 생각을 가진. 당신들이 워낙 열심히 살고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는 집안이라 함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어. 사람마다 다 살아왔던 방식이 있기 때문에 너무 내 기준으로 해석할 수도 없으니 적당히 맞춰야지.

 

홍: 정태수 열사가 워낙 사람 만나는 거 좋아했다던데, 배우자로서 그런 성향은 그리 좋은 건 아니지 않나요?


김: 그 부분에 있어 나는 예민하진 않았어. 나도 활동하던 사람이고, 이 사람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다 알고 있으니 괜찮았어. 가끔 선후배들 집으로 불러들이면 같이 어울려서 놀고. 다만 나는 시댁 대소사에 불려가서 일해야 되는데 자기는 바빠서 그런 거 나 몰라라 할 때, 부인이 무슨 상황에 처해있는 줄도 모르면 답답하고 서운하지, 그럴 때 빼고는 괜찮았어.


홍: 언니는 동거를 시작한 후 딸을 낳고 키우느라 쭈욱 전업주부 생활을 하셨네요.


김: 그렇지. 태수 형 만나기 전에는 가족으로부터 독립하고 싶다는 욕구가 되게 강했는데, 결혼하고 나서 그럴 만한 조건이 안 만들어졌어. 너무 시부모한테 기대어 사는 것에 대한 답답함과 불편함이 있었어. 시부모 입장에서는 당신 자식이 장애가 심하니까 가장으로서 못하는 부분을 당신들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셔서 경제적으로 지원해줬는데 나는 그게 너무너무 불편하고 싫었던 거지. 어떻게든 빨리 독립하자고 태수형을 닦달해서 인쇄소를 차리게 된 거야.

 

▷ 다음편 : 그날, 이후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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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전 인권기록활동가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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