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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⑧] 내가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정태수의 친구이자 동지, 박경석 인터뷰 ②
등록일 [ 2019년12월14일 16시30분 ]

▷전편: 태수야, 네가 옳았다

 

대구역 앞에서 장애인 노동권 확보를 위한 장애인고용촉진걷기대회를 하는 정태수 열사(맨 오른쪽).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거리의 투쟁을 조직하다


홍: 정태수 열사의 정신이라고 하면 ‘조직하라’라는 말로 대표되잖아요. 조직이란 건 운동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는 일인데, 정태수가 했던 조직이 갖는 의미가 있을까요?


박: 조직한다는 건 관계를 맺는 일인데 그는 정치인이나 엘리트를 조직한 게 아니라 밑바닥의 삶을 조직했다는 거지. 목표는 투쟁을 하는 것이었고. 그게 장애인운동의 희망이라고 생각한 거야.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조직하려고 했고 노점상 투쟁을 조직했지. 대중의 물리적 힘을 장애인운동의 희망으로 봤던 친구야.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아래 전장협)에서 했던 노점상 투쟁, 거기서 가장 빛났던 사람이 흥수와 태수야. 그 결실이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아래 장자추)거든. 전장협에서 투쟁하자고 하면 즉시 동원이 가능했던 사람들이 바로 그 노점상들이었어. 흥수형과 태수가 조직한 사람들이지. 이덕인 열사 죽었을 때, 최정환 열사 죽었을 때, 태수가 꼭 나를 데리고 갔어. 흥수형은 나랑 태수가 갔을 때 되게 좋아했어, 꼭 오라고, 든든해 했던 것 같아. 그런데 흥수형이 말년에 그렇게 술을 먹고 외롭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건, 전장협이 DPI와 통합하는 과정에서 장자추가 다 무너진 거야. 최O이라는 엘리트가 대표가 되면서 이들이 일구어놓은 현장 조직을 모두 부정하고 해체시켜버렸어. 흥수형이 설 자리를 잃어버렸지. 자기 근거를 잃어버렸던 거지. 그때 느꼈을 외로움이 아주 강했을 거야.

 

홍: ‘정자결의’ 글 속에서 ‘장애인운동의 사명은 희망의 물리적 근거를 만드는 데 있다’고 했고 그게 정태수와 박흥수의 정신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건 무슨 뜻인가요? 물리적 근거가 무슨 뜻이에요?


박: 서준식 선생님이 쓴 글에 보면, 광야에서 목소리를 외치는 것, 거리를 점거하는 것이 물리적 투쟁이고 그게 힘의 근거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글을 읽으면서 태수하고 흥수형이 했던 것들이 바로 연결되더라고. 활동가들이 외치려고 하는 것을 대중과 만나서 이야기 나누며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로서 조직된 사람들이 거리에 나가서 같이 외쳐야 된다, 그게 운동의 사명이다, 그것이 본질적인 힘이다, 라는 내용이었어. 쉽게 말하면 도로를 점거하고 경찰하고 싸우는 거, 한 차선을 더 차지하려고 싸우는 거지. 다른 방식의 운동도 물론 있지.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서 정치인이 되는 것도 하나의 희망이 될 수 있고 진보적인 교수가 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장애인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장애인을 조직해서 투쟁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이것이 몸 밖에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운동의 방식이 아닌가 싶어. 그 정도는 누구나 다 할 수 있으니까. 흥수와 태수는 바로 그 부분에서 어느 누구보다 집중적으로 고민하고 활동했던 사람이지.


홍: 투쟁은 쉬운 거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다, 가장 적합하다, 라는 말이 좋네요, 신선하고. 우리가 정태수를 기억한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박: 운동이 변화되고 새로운 것들이 나타날지 몰라도, 태수라는 존재는 장애인운동에서 물리적 힘의 상징이 아닐까. 그 어려운 시기에 대중을 조직하기 위해서 장애인 노동권을 가지고 13박 15일 전국적 걷기대회를 조직했으니.

 

1996년 장애인고용촉진걷기대회에서 ‘어깨끈’을 한 사람들이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홍: ‘어려운 시기’라 함은 어떤 뜻인가요?


박: 시혜와 동정의 떡고물을 받기 위해서 장애인단체조차 앵벌이를 하고, 이권을 위해 활동했던 시대였어. 재활을 외치던 시대에, 장애인의 몸을 고쳐야 한다고 외치던 시대에 장애인이 직접 나서서 자신의 노동의 문제를, 서울뿐 아니라 전국을 돌면서 외친 거야. 데모하자고 사람 조직하는 일이 서울도 힘들었는데 지역은 얼마나 열악했겠어? 그 당시 사진 봐봐. 데모하러 나왔는데 머리띠가 아니라 어깨끈을 하고 있어. 선거운동하는 것처럼. 공무원들도 어깨띠는 하잖아. 그만큼 유화적이고 관변적이라는 거야. 지금 우리 시각에선 별것 아닌 것 같은데, 그 시절에 지역의 장애인들을 데모라는 방식으로 꼬셔서 거리에 나오게 한다는 게 무지무지 어려웠을 거야. 태수가 그런 고충을 이야기한 적이 있어.


1997년 에바다복지회에서 비리가 터져서 투쟁을 처음 시작할 때, 그때 구호가 ‘김영삼 할아버지 해결해주세요’였어. 마치 애원하듯이. 전장협에서 설득해서 서울역 앞에서 데모를 하기로 했어. 그런 게 처음이니까 순서도 다 적어주고 민중의례,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것도 다 알려드리면서 이렇게 하시라고 했어. 그런데 시작할 때 애국가 부르시더라고. (웃음) 집회 끝나고 우리가 도로를 가로질러서 행진 가자고 했는데, 경찰이 지하도로 건너가라고 하니까 농아원 교사들이 농아인들 데리고 지하도로로 건너갔어. 그래서 도로 위에 우리만 덜렁 남아버렸어.(웃음) 지역의 정서가 그랬다는 거야.


그런 시절에 노동이라는 주제로 장애인들의 의식을 깨우고 조직하고 투쟁하려고 했던 건 굉장한 거였지. 전장협 지부들은 친목 모임 성격과 운동성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 회원들은 활동비를 받는 활동가들도 아니었고 많은 수가 사람 좋고 술 좋아서 모였던 사람들인 거야. 밤새 술 마시고 이야기해도 겨우 지부장 몇 명 꼬실 수 있는 건데 그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을 거라고. 그런 일을 지역에서부터 하면서 쭉쭉 올라와 마지막 서울에서 크게 한 방 때리는 거지. 그날 하루 도로를 점거하고 경찰들하고 싸우면서 우리의 분노를 표현하는 것인데, 나도 해보니까 데모하는 게 점점 재미있어지더라고. 태수가 그렇게 노력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어.


98년에 전장협과 DPI가 통합되던 때 내가 가장 분노했던 것 중의 하나가 그 걷기대회를 안 하겠다고 할 때였어. 매년 4월 20일 즈음해서 지역 돌면서 투쟁을 조직하는 이 역할을 중앙에서 포기해버린 거야. 그게 태수가 뼈 빠지게 했던 일인데, 활동가들이 1년 농사짓는 건데, 씨 뿌리고 땅 일궈서 4월 20일에 걷어 올리는 거, 그게 대중의 물리적 힘을 보여주는 일인데 그걸 포기해버린 거야. 안 한대. 그러다가 KBS에서 촬영하러 나온다니까 갑자기 또 한 대. 그래서 정부청사 앞에서 행진을 하는데 갑자기 다시 돌아가래, 방송국에서 다시 찍어야 된다는 거야. 아우, 그런 게 차이인 거야.

 

내가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홍: 정태수 열사가 조직가이면 교장샘은 뭐예요? 교장샘도 조직가 아니에요?


박: 내가 태수보다 조직은 좀 못하지만, 나는 조직가 중에 경영이 가능한 조직가.


홍: 윽, 갑자기 자기자랑을…


박: 네가 물어봤잖아! 예전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실장으로 활동했던 남병준이 그렇게 이야기했어. 경영이 가능하다는 건 쉽게 말하면 변질할 수 있는 위험이 많은 사람일 수 있지.


홍: ‘현실적 조직가’라고 합시다.


박: 어떤 꿈이 있는데 그것을 실질적으로 이룰 힘이 없다는 건 굉장히 비참한 거야. 그걸 이루기 위해선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지. 돈도, 정치도 굉장히 중요한데, 나는 여전히 장애대중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하려면 어떤 혁명과 같은 대중적, 물리적 폭동 같은 것을 거리에서 조직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야만이 본질적인 관계의 변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2012년 3월 1일,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열린 정태수 열사 10주기 추모제에서 발언하고 있는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홍: 세상에, 폭동이라니. 거리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것보다 유튜브를 하는 건 어때요?


박: 그건 하나의 기술이지, 표현의 기술. 당사자들이 어떤 자부심을 느낄 수 있으려면, 민주노총이 수십만을 조직하듯이, 세월호 유가족이 광화문광장을 점거하듯이, 장애인차별철폐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장애인 활동가와 장애 운동가 천 명이라도 조직해서 일박이일, 이박삼일 거리에서 투쟁할 수 있다면 세상의 인식은 굉장히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


홍: 유튜브를 100만 명이 보는 것과 천명이 거리에 나와서 투쟁을 하는 것 중 어느 쪽이 사회에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더 큰 힘을 가질까요?


박: 나는 투쟁하는 천 명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홍: 어떤 면에서요?


박: 거기엔 스스로를 조직하는, 자기의 노력과 실천이 녹아 있잖아.


홍: 스스로 바뀌면 뭐가 좋은데요? 그렇다고 당장 법이 바뀌는 것도 아니잖아요.


박: 법이 바뀐다고 모든 게 해결되진 않아. 지속적인 힘이 담겨 있는 조직화가 중요하지.


홍: 그러니까 왜 그게 더 중요하냐고요?


박: 과정이 중요한 거잖아. 너는 어떤 결론을 두고 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무엇이 더 유리한지를 비교하는 것 같은데 나는 과정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거야. 그 성과가 10이든 100이든 그건 부차적인 문제야.


홍: 그게 왜 부차적인 문제예요?


박: 사람은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끼잖아. 사람들과 직접 관계를 맺고 만나는 게 조직화인데 SNS상의 조직화는 그렇지 않잖아. 직접 만나고 거리에서 투쟁하려면 한 사람 한 사람 교육하고 연결하는 과정이 중요하지.


홍: 그 과정은 중요하지만 너무 힘들잖아요! 천 명을 거리에 조직하려면 얼마나 힘들어…?!


박: 힘들기 때문에 의미 있는 거지.


홍: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안 힘든 게 좋은 거지.


박: 안 힘든 건 결코 좋은 게 아니야.


홍: (이 무슨 꼰대 같은 소리인가.) 그 힘듦을 감수해야 할 만큼 좋은 게 뭐예요? 좋은 게 있으니까 힘들어도 의미가 있을 거 아니에요?


박: 세상의 변화를 내 눈으로 볼 수 있잖아. 자기 힘으로 만들어가는 변화, 자기가 참여해서 만들어낸 변화. 그런데 유튜브에서 나는 하나의 대상일 뿐이야, 누군가 대리해주는 거잖아, 누군가 나를 대리해서 정치를 하는 거잖아. 
 

2018년 11월, 장애인 활동가들이 국회 앞에서 사다리와 쇠사슬을 매고 정문을 막아선 채 장애인복지예산 확대를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 박승원
 

홍: 아… (뭔가 왔음.) 요즘 TV에 장애에 관한 아주 세련된 다큐가 나오는 걸 보면서 ‘혁명이 일어난 건가?’ 하고 생각했거든요. 정말로 혁명이 일어나긴 했죠, 촛불혁명. 김원영(『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저자)이나 장혜영(다큐 ‘어른이 되면’ 감독, 유튜버 ‘생각많은 둘째언니’) 같은 분들이 나와서 우리가 거리에서 하던 이야기들을 하고. 장애 문제뿐만 아니라 산업재해나 페미니즘을 다루는 재밌는 드라마나 예능도 많아졌고요. 그런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마치 도로 점거했을 때의 느낌이 들어요. 나는 분명 TV를 보고 있는데 꼭 집회하면서 도로 점거하고 있는 느낌이야. 뭔가 해방감이 느껴졌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우리가 이 문제를 갖고 거리에서 싸운 게 몇 년인데… 그땐 아무리 외쳐도 관심을 안 갖는 것 같더니 저 분들이 하니까 되네? 그런 생각. 그러면서 생각했어요. 거리에 1,000명이 나와서 투쟁하는 것과 공중파에서 세련된 프로그램을 만들어 수십만이 보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박: 영화 ‘도가니’ 봤을 때 나도 그런 감정 느꼈어. 그게 장애인 시설 비리,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에 대한 문제였는데, 우리가 2006년부터 성람재단, 석암재단의 비리 문제를 갖고 싸웠거든. 종로구청 앞에서, 시청 앞에서 수백 일 동안 농성을 했는데도 그게 해결이 안 됐어, 그런데 영화 한 번 흥행하니까 다 해결이 되어 버리더라. 법 개정됐으니 당연히 좋지만 또 양가감정이 있지. 한나라당이 반대해서 그 법이 통과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영화배우 공유가 나서니까 장관이 나서고 한나라당이 동의했어, 그래서 통과된 거지. 그게 영화의 힘이야. 그런데 영화의 힘이 그렇게 세면, 우리가 전부 영화인이 되어야 해?


홍: 하하. 그러네요. 우리가 공유가 될 수는 없네요. 우리는 장혜영도 될 수 없고 김원영도 될 수 없으니까 거리에서 투쟁하는 게 제일 현실적이다. 하하하. 확 이해되는데 왜 기분이 안 좋지… 뭔가 억울한 기분인데…


박: 뭐가 억울해. 그게 행복이지. 김원영 되려면 법률 공부해야 돼.


홍: 공부는 하기 싫지만 김원영은 되고 싶다…


박: 투쟁하는 게 고생만 되고 별로 낙이 없어 보이지. 그런데 나는 그 고생이 의미가 있다는 걸 계속 이야기하는 거야. 그게 내가 해야 될 더 적합한 일이라고 생각해. 혁명이란 게 특별한 게 아니라 바로 이 일이 혁명이라고, 거리에서 도로 차선 하나를 두고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을 오고가는 현장투쟁과 사람들을 어떻게라도 꼬셔서 조직하는 것에 대하여 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다 김원영이 되려고 할 테고, 장혜영이 되려고 할 테고, 지식인이 되려고 하겠지. 지식인이 되면 좋지! 그렇지만 그렇게 안 될 사람이 대다수잖아. 특히 노들야학 학생들처럼 배우지도 못했고 장애도 중증인 사람들에게 오히려 그것이 고통이 아닐까?


홍: 그러네요.


박: 하지만 우리도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고 할 수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해, 그게 조직화야. 내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아주 조그마한 능력만 있어도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그것이 얼마나 혁명적인지. 그 혁명은 거창한 게 아니라 데모하는 것이라고 연결시킬 수 있는 힘. 데모는 누구나 할 수 있거든. 데모는 아주 쉬운 거야.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잖아. 거리에 나서는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 누구나 특별한 지식이나 기술 없이 함께 할 수 있어. 발달장애인들도 피플퍼스트대회로 참여할 수 있어. 지금은 호텔에서 하지만 그걸 거리에서 하면 되는 거야.


홍: 그러네요, 우린 모두 데모는 할 수 있으니까! (결국 나는 또 해맑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고, 그렇게 조금 ‘물들고’ 말았다.)


*    *    *    *    *    *    *


1989년 장애인복지관 로비를 점거하며 복지관 측이 훔쳐 간 소식지를 돌려달라며 장애인들이 시작한 농성에 대해 경석은 이렇게 썼다.


“농성 첫날 태수가 머리를 빡빡 민 채 나타났다. 장난이 아니었다. 충격이었다.”


세 시간여의 긴 인터뷰를 하며 나는 저 세 문장 사이의 온도와 냄새 같은 것을 감각할 수 있게 되었다. 민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던 태수를 보며 경석이 충격을 받은 건 태수의 어떤 결기 때문이 아니었다. 태수가 이 일을 ‘장난이 아닌’ 것으로, 그러니까 아주 진지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국민체조 거부 투쟁을 선생님에게 밀고(?)해놓고선 왜 자존심도 없이 그들과 다시 어울렸냐고 내가 물었을 때 경석은 말했다.


“그때 난 이야기할 사람이 우리 어머니밖에 없었어.”


장애인이 된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장애인이 세상을 변혁할 수 있다는 말은 경석에게 옳은 말로 하는 거대한 농담 같은 것이다.


“나는 장애인이 불쌍하다고 생각했어. 그랬던 내가 그 불쌍한 장애인들 속으로 떨어졌으니 인생이 비참해 죽을 것 같았는데, 그때 태수가 왔지. 그런데 그 장애인이 사람으로 보이는 거야. 불쌍한 장애인이 아니라 그냥 사람. 태수는 나한테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해줬지, 충격적으로.”


나는 이 말이 참 좋았는데, 그 순간 경석이 ‘그냥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경석은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일으킨 사람이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조직한 사람이고, 내가 처음 야학 교사가 되었을 때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충격적으로 보게 해줬던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나에게 처음부터 열혈 투사였다. 그에게도 데모는 하기 싫지만 술은 먹고 싶고, 술은 먹고 싶지만 친구라곤 어머니밖에 없었던 ‘불쌍한 장애인’ 시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나는 언제나 그저 장난처럼 여겨왔던 것이다. 그것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걸 알아서, 충격적으로 좋았다.

 

2018년 10월, 국회 앞에서 열린 ‘장애인거주시설폐쇄법 제정 촉구 결의대회’에서 발언하는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사진 박승원
 

그리고 나는 농담 같았던 투쟁들을 생각했다. 2001년 처음 야학에 와서 선배 교사로부터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라는 구호를 들었을 때 나는 풉, 하고 웃었다. 물을 마시고 있었다면 아마 뿜었을 것이다. 상대가 너무 진지해서 ‘아, 농담이 아니었구나.’ 하고 얼른 웃음을 거두었지만 정말로 몰라서 물었다. “왜 버스를 타요?” 그 교사가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도 친절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답했다. “못 타니까요.” 나는 기어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했을 법한 대사를 하고 말았다. “그럼 지하철 타면 되잖아요.” 정말로 그런 시절이 있었다.


2006년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 투쟁이 시작되었을 때, 2009년 탈시설 투쟁이 시작되었을 때, 그리고 2012년 장애등급제 폐지 투쟁이 시작되었을 때도 나는 늘 뒤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정말로 활동보조서비스가 제도화될 수 있다고?” “세상에! 장애인이 시설을 나와서 살 수 있도록 집을 달라고?!” “장애등급제가 폐지되면 뭘 기준으로 서비스를 줘?” 그런 세상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몇 년 전의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것은 박경석이 한 일도, 홍은전이 한 일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한 일이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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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전 인권기록활동가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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