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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수 ③] 변방에서, 혁명의 물리적 근거를 위하여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박흥수의 삶과 죽음 ③
등록일 [ 2019년12월22일 19시02분 ]

▷ ② 상담치료, 약물치료, 물리치료

 

박흥수 열사.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투쟁 연습

 

89년 봄 정립회관. 세 명의 장애인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일렬로 자리해 있다. 조용하던 정립회관 운동장엔 이내 괴이한 소음이 진동한다.

 

“자! 따라 해! 장애인복지법 개정하라!”

“장애인복지법 개정하라!”

“자! 이번엔!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하라!”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하라!”

 

어설프게 어깨 위로 들려진 그들의 팔뚝은 시간을 거듭할수록 투쟁에 익숙한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의 팔뚝마냥 절도가 배어갔다. 그런데 정작 싸움의 대상은 당장 그들 앞에 없었다. 이들은 곧 열릴 양대 법안 투쟁을 앞두고서 ‘투쟁 연습’을 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팔뚝질 연습과 구호 제창 연습은 한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이 엉뚱해 보이는 행동의 주인공들은 박흥수, 정태수, 박경석으로 당시 서울장애인복지관 직업훈련과정 동문회인 ‘싹틈’의 집행부였다. 전년에 이어 박흥수가 회장을 맡았고, 투쟁 꿈나무였던 정태수가 조직부장을, 한때 배신자였으나 이제는 갱생(?)한 박경석이 싹틈 소식지의 편집부장을 맡았다. 마침 89년엔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 “심신장애자복지법” 개정이 88년보다 더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던 시기였고, 곳곳에서 이와 관련된 크고 작은 투쟁들이 연이어 열리고 있었다.

 

“대중 투쟁 나가기 전이었는데 대학생들이 정말 데모를 멋지게 하니까 우리가 거기 가서 기죽으면 안 된다고 흥수형이 그렇게 데모 연습을 시킨 거야. 나야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었지만 태수는 좋아했지. 아무튼 그렇게 훈련받고 데모에 나갔는데, 흥수형이 또 나보고 대학생들 앞에서 선동도 하라 하고 구호 선창도 시키고 하는 거야. 이야, 거기 나온 아들 상당수가 서울경기지역 사회복지학과 대학생들이었는데, 걔네들이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소속이었거든. 프로들이지 프로. 전대협 대학생들 다 같이 함성 지를 때 비장하고 절도 있게 ‘으아아!’ 하는데 나한텐 정말 완전 새로운 세계였어. 프로들 앞에서 초짜인 내보고 어쩌라고. 덜덜덜 떨면서 구호 선창도 하고 했는데 뭐 집회 내내 완전 쫄아 있었지.” (박경석)

 

싹틈은 그렇게 차근차근 운동판에 제 존재감을 알려가기 시작한다.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앞두고 국회 앞서 벌어진 ‘기만적인 복지정책 규탄대회’는 물론이고, 10월 28일 출범한 ‘심신장애자복지법 개정 및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을 위한 공동대책위’에도 싹틈 회원들이 등장했다. 10월 30일부터 11월 9일, 야 3당 당사를 차례로 방문해 양대 법안을 요구하다 결국 신민주공화당사를 점거하고 단식투쟁을 진행한 울림터 활동가들 사이에는 ‘싹틈’의 조직부장 정태수가 포함되어 있기도 했다.

 

어쩌면 싹틈의 이러한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 스스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제 삶의 터전인 복지관 내에서부터 역량을 다져온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중에서도 89년 봄, 서울장애인복지관 점거 농성은 특히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서울장애인복지관의 장애인 학생들은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해봐야 졸업 후에도 제대로 취업을 할 수 없었다. 성적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당시 직업훈련과정 학생들 중 중증인 이들, 특히 그곳에서도 몇 없었던 뇌병변장애인과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은 좋은 성적이 기재된 서류를 이곳저곳에 내봐야 면접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경증이었던 소아마비 장애인들도 기껏 취업을 해 봐야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수공예과 출신 학생들이 조그마한 금속세공 공장에 들어가 숙식을 제공받으며 일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직업훈련과정에서 배운 것과 무관하게 취업을 하는 경우도 허다했고, 이 역시 저임금과 차별들에 시달리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몇 개월 만에 쫓겨나곤 했다.

 

그럼에도 서울시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야 했던 복지관은 취업률을 뻥튀기해서 상부에 보고하곤 했다. 겨우 얻은 일자리를 잃고 복지관에 돌아와 상담을 요청하는 학생들에게 복지관은 “장애인인데 어쩌겠냐”, “어디 들어가서 일하건 가서 일하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지. 그냥 잘 참아내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결국 싹틈 집행부는 자체적으로 취업률 실태조사를 다시 한다. 조사 결과는 예상대로 처참했다. 그리고 싹틈은 그 실상을 자신들의 소식지에 실었다. 그러나 이 소식지에 실린 내용은 복지관 입장에서는 바깥에 알려져선 안 되는 것이었다. 복지관 직업훈련과정의 직업부장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싹틈이 쓰던 책상에 비치된 소식지 뭉치를 몽땅 압수해 버린다.

 

박흥수는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정태수, 박경석과 함께 학생들을 조직하여 복지관 로비를 점거한다. 그러고선 복지관에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 압수한 소식지를 돌려줄 것, 제대로 된 장애인 고용 대책을 마련할 것, 복지관 직원들이 관여할 수 없는 독립적인 동문회 싹틈의 사무실을 복지관 내에 마련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들은 더 나아가 복지관 이름으로 서울시에 공문을 보내 서울시장과 면담을 추진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정태수는 자신의 생애 첫 점거 농성이라며 삭발까지 하고 나타나 복지관에 강경하게 대응했지만, 그때까지도 덜 ‘운동권화’된 박경석은 친한 복지관 선생님들과 협상해가며 현실적인 요구 조건만이라도 들어달라고 부탁하고 다녔다. 박경석은 장애인 고용 대책 마련이니, 서울시장 면담이니 하는 것들은 어차피 이 투쟁을 통해 얻을 수 없는 것이라 판단했다. 이에 그는 소식지만 돌려받고 이 싸움을 계기로 싹틈 사무실이나 제대로 마련해 보자 생각했던 것이다.

 

박흥수는 강경파에 가까웠지만 협상파의 의견도 잘 들어주었다. 그리고 이 기묘한 공존 속에서 복지관 점거농성은 15일간이나 이어졌다. 15일 후 결국 복지관은 싹틈의 요구 조건을 수용한다. 복지관은 소식지를 빼앗아간 것에 대해 사과했으며,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싹틈 사무실을 보장하겠다고도 약속했다. 심지어 서울시에 공문을 보내 서울시장 면담을 요청하기도 했다. 물론 서울시장과의 면담이 실제로 추진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들은 작년 ‘국민체조 거부투쟁’에 이어 다시 한번 복지관에 대항해 작은 승리를 일궈냈다.

 

1989년,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이 동문회 ‘싹틈’ 소식지 내용을 문제 삼아 소식지를 압수해가자 사람들이 복지관 로비를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맨 뒤에 하얀 머리띠를 하고 휠체어 탄 사람이 박경석, 보라색 남방 입은 사람이 박흥수 열사, 맨 앞에 머리를 빡빡 밀고 안경 쓴 사람이 정태수 열사.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혁명의 물리적 근거지

 

복지관 내외의 투쟁을 거치면서 박흥수, 정태수, 박경석은 점점 그 관계가 끈끈해져 갔다. 그러나 싹틈 출신 3인방 활동가들의 실천은 잠시의 휴식기를 가져야만 했다. 전산과 2등 졸업생임에도 취업에 실패한 중증장애인 박경석은 엄마에게 첫 봉급을 드리겠다는 꿈을 당장 이루지 못한 채, 곧 대학 입시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정태수 역시 ‘투쟁은 대학 가서 하면 된다!’는 박경석의 꼬드김에 넘어가 함께 입시 학원을 다녔다. 물론 투쟁하기에도 바빴던 정태수는 금방 학원을 때려 치고 곧장 직업 활동가로 나섰지만, 생애 내내 가난에 허덕이던 박흥수 역시 더는 생계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는 별수 없이 89년 언젠가부터(가을 언저리로 추정됨) 생활 전선에 뛰어든다. 그러고는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이제 나는 생활인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 나를 용서해라, 나를 이해해라. 너희들이 4백만 장애인의 아픔을 대신해서 타협 없이 전진하라.” (고 박흥수 동지를 떠나보내며, 정태수추모사업회 홈페이지)

 

이 말과 함께 그는 제 몸처럼 붙어 다니던 삼륜 오토바이를 후배들에게 내주었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어찌 되었건 그는 이후에도 투쟁현장 곳곳에 삼륜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당시 그가 목공예 공장에 취업하여 일을 했다는 설, 그 취업이 ‘위장 취업’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이 역시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얼마 후 박흥수가 경기도 하남에 위치한 허름한 슬러브 주택에 작은 구두공장을 차렸다는 사실이다. 그 공장에는 재래식 화장실이 하나 딸려 있었고, 연탄으로 불을 때는 부엌도 하나 딸려 있었다. 박흥수는 한동안 그곳에 기거하면서 공장 운영에 힘썼다. 돈이 별로 없으니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경우도 허다했다.

 

박흥수는 이 허름한 공장을 통해 장애인들이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보고자 했다. 그러나 박흥수가 이 공장을 꾸린 데는 또 다른 노림수가 있었다. 그는 이 공장을 “혁명의 물리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진지”라 생각했으며, “장애 투쟁에 대한 보급투쟁과 장애인들의 의식화”(이상호)를 실현하기 위한 장소로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이곳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노동하면서 자립 기반을 마련하고, 더 나아가 그들을 이후 장애인운동에 앞장설 전사로 길러내려 했던 것이다.

 

구두를 닦는 한 사람의 모습.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런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나 싶어요. 당연히 투쟁의 경중을 따질 수는 없지만, 현실적으로 보자면 운동판 내에서도 사실 부문 간에 권력 관계란 게 있잖아요. 뭐 돈도 좀 있고 중앙의 큰 투쟁을 이끌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장애인운동은 변방의 운동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당시엔 더 그랬고. 그런데 돈도 별로 없었고 변방의 운동에 투신한 흥수형이 이런 사업을 직접 실천한 거예요.” (이상호)

 

박흥수는 공장을 운영하던 와중에도 시간이 날 때면 서울서 열리는 장애계 투쟁들에 오토바이를 끌고 나타나 얼굴을 비췄다. 지금과 달리 도로가 잘 마련되어 있지 않아 서울로 가려면 몇 시간을 달려야 했음에도, 이미 몸이 안 좋아 피를 토해가며 노동을 하던 와중에도, 그는 끈질기게 싸움의 현장에 나타났다. 박흥수는 한겨울에도 이 여정을 감행했는데, 그 덕에 서울을 한 번 다녀오고 나면 몇 시간 동안 몸이 굳어 있었다. 그렇잖아도 그의 신체 특성상 저체온증이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던지라, 최소 두 시간 정도는 몸을 풀어야 겨우 원래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박흥수가 나름 큰 포부를 안고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공장 운영은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거래처를 찾기도 힘들었고, 찾더라도 물건은 잘 팔리지 않았다. 결국 이 작은 구두공장은 92년에 그 장대한 목표에 어울리지 않게 조용히 문을 닫는다. 그리고 박흥수는 다시 싸움의 최전선으로 복귀한다.

 

마침 당시엔 울림터 인자들과 청년 장애인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아래 장청)가 결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변혁적 청년장애인운동의 전국적 단일조직 건설이라는 목표”(한국사회 장애민중운동의 역사, 46쪽)를 지향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수도권 위주의 조직을 전국적 단위로 확장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여수애양병원에서 소아마비 치료를 받고 자립한 이들을 중심으로 82년 친목 단체 형태로 결성된 ‘밀알들’ 역시 조금씩 운동성을 가지게 되면서 ‘장애인한가족협회’(아래 장한협)라는 이름을 가진 조직으로 91년에 정식 발족했다. 그리고 박흥수가 이 길로 인도한 ‘투쟁 꿈나무’ 정태수는 어느덧 장청의 조직부장 명함이 딸린 직업 활동가로 변모해 있었다.

 

운동판에 복귀한 박흥수는 당시 장청, 장한협, 정립회관 노동자들이 90년부터 주도해 오던 ‘정립회관 황연대 관장 및 정은배 상임이사의 비리 투쟁’ 및 ‘정립회관 민주화 투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 투쟁은 장애인 복지 시설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투쟁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단지 일부 지도층의 비리 문제에만 주목했을 뿐이며, 장청은 조직의 본 의도와 달리 대중들에까지 제 역량을 확대해 가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당시 장청은 유명한 운동권 지식인 한 명에게 휘둘리며 표류하기도 한다. 게다가 당시 운동권 전반을 휩쓴 활동가들의 다단계 판매 문제에도 장청 활동가들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장청 조직은 큰 타격을 입는다.

 

“당시 장청이 소수의 선진 활동가들만으로 구성된 조직이었다면, 장한협은 장청보다 운동성은 약했지만 전국적으로 세를 가진 대중 조직이었지. 흥수형이 힘을 잃은 장청을 평가하면서 그런 말도 했어. 운동은 결국 대중이 하는 건데, 대중이 없으니 망하더라. 어떤 조직을 만들더라도 선진 활동가 중심으로 조직되면 안 된다고.” (문상민)

 

결국 장청은 “시민운동 내지는 전문가 운동으로의 편입이 아니라 대중 공간과의 연계를 통한 재도약”(한국사회 장애민중운동의 역사, 47쪽)을 위해 장한협과 통합을 하는데, 두루두루 활동가들에게 신뢰를 얻고 있던 박흥수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침내 93년 8월 13부터 15일까지 3일간 열린 장청과 장한협의 통합수련회에서 양 조직은 통합을 하게 되었고, 이로써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아래 전장협)가 출범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박흥수는 전장협 부회장과 서울지부장을 역임했다.

 

“그런데 당시 흥수형이 조금은 운동판에 대한 실망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자기가 혁명의 물리적 근거지를 만들어 보겠다고 한 공장은 잘 안 되었지, 당시 장애인운동한다는 활동가들도 그저 엘리트스럽거나 반(反)대중주의에 빠져 상당히 실망스런 모습을 많이 보였지. 그런데 이게 단순히 장애인운동 진영의 문제만은 아니기도 했죠. 소련 붕괴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운동권들이 전반적으로 다 침체기에 들어섰으니 형은 그걸 참 우려했어요. 장애인운동 쪽에서도 그때 이제부터는 혁명 투쟁이 아니라 시민운동을 해야 한다거나 전문가 중심으로 가야 한다거나, 개량으로 돌아선 사람들, 단체들도 많았고. 흥수형은 이런 걸 별로 안 좋아했거든요.” (이상호)

 

그러나 박흥수는 당시 장애인운동의 본류로 여겨질 만한 조직 출신도 아니었고, 이에 단체의 중심에 서는 데 조금은 한계를 느꼈던 것 같다. 싹틈이 80년대 후반부터 곳곳에 작게나마 제 존재감을 새겨오긴 했지만, 싹틈 인자들은 대부분이 다른 장애인운동단체 활동가들과 달리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고 많이 배우지도 못했다. 박흥수는 생 내내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은 변방에 있을 뿐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박흥수의 이 외로움은 장애인운동사에서 크다면 크다고, 작다면 작다고도 할 수 있는 한 사건을 낳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돈도 별로 없고, 내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술집도 별로 없으니, 흥수형 태수랑은 대부분 소주를 사 들고 와선 복지관 운동장이나 우리 집 앞 정자에서 술을 마셨지. 내가 대학 입학하고 좀 있다가 였을 거야, 그날도 세 명이 정자에 모여 앉았어. 안주는 달랑 오징어 하나였고. 그날따라 흥수형이 결의에 찬 말들을 쏟아 내대. 뜬금없이 장애인운동을 하는 여러 조직들의 족보를 쭉 나열해 가더니만 우리는 변방이라는 거야.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지. ‘장애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대중의 힘으로 쟁취할 수 있는 조직적 힘이 필요하다. 그 투쟁을 해나갈 장애인 활동가와 조직이 필요하다.’” (박경석)

 

적당히 취기가 오른 셋은 앞으로 투쟁을 해나가면서 박흥수의 이 선언을 배신하지 않기로 결의한다. ‘장애대중 조직운동’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그 노선과 다른 노선을 절대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죽을 때까지 동지가 되자”고. 이름하야 ‘정자결의’였다.

 

“지금 남들이 보면 사실 별것 아닐 수 있는데, 당시엔 뭐 대단한 걸 한 느낌이었어. 무슨 혁명 결사조직? 그런 거 된 느낌이랄까? 그리고 생각해보면 사실 그 결의 덕에 지금의 나와 그간의 나의 운동이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 (박경석)

 

장한협과 장청 통합 후, 박흥수는 1년여간 전장협을 안정시키는 활동에 집중한다. 그리고 전장협이 차차 자리를 잡아갈 무렵, 비보가 날아든다. 서초구 방배역 근처에서 노점을 하던 한 장애인이 노점 단속에 항의하며 제 몸에 시너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는 소식이었다. 그의 이름은 최정환. 그는 제 성량이 남아 있던 마지막 순간까지 이렇게 외쳤다.

 

“400만 장애인을 위해서라면 내 한목숨 죽어도 좋다. 복수해 달라!”

 

 95년 3월 8일이었다.

 

▷ ④부 죽음의 행렬, 그리고 가난한 자들의 복수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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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조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msophist1@gmail.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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