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02월24일mon
기사최종편집일  최종뉴스편집일
비마이너로고
news
뉴스상세검색 버튼
기사등록 기사제보
전체메뉴 펼침
HOME 뉴스홈 > 기획연재 >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트위터로 보내기 네이버 밴드 공유
쪽지신고하기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박흥수 ④] 죽음의 행렬, 그리고 가난한 자들의 복수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박흥수의 삶과 죽음 ④
등록일 [ 2019년12월23일 16시42분 ]

▷ ③부 변방에서, 혁명의 물리적 근거를 위하여

 

95년 3월 24일, 성대 앞에 불길이 솟았다. 3월 25일에는 연대 앞에도 불길이 번졌다. 아직 겨울 기운을 머금어 차갑게 식어 있던 대학로와 신촌 근교 아스팔트 바닥 곳곳은 이내 뜨겁게 달궈졌다. 500여 개의 화염병이 차례로 하늘을 수놓는 동안, 경찰들이 쏘아 올린 최루탄 가스가 온 대기를 뿌옇게 메워 갔다. 곧 불길은 서울 시내 곳곳을 향한다. 억센 손아귀들에 쥐어진 돌멩이들은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2400여 개의 방패 벽에 부딪히고는 그슬린 도시의 아스팔트 바닥을 마구잡이로 할퀴었다. 노점상, 장애인, 노동자, 대학생 등 3000여 명에게서 질서정연한 듯 질서정연하지 않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모처럼 “정권 타도” 구호가 등장했고 “정권과의 전면전”을 선포하는 이도 있었다.

 

당시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에서 발간한 최정환 열사 투쟁기록집 중에서.

 

“그런데 우리 동지들은 그렇게 피 터지게 싸우는데, 그때 마침 어떤 음악 프로그램 라디오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오데요? 지금까지도 너무 선명해서 도무지 잊을 수가 있어야지. ‘오늘 큰 시위가 열리고 있다는데요. 시위하는 사람은 시위하시고, 우리는 음악 하는 사람대로 음악을 즐깁시다.’ 그러잖아도 화가 나 있었는데 그 말 듣고 더 분이 차올랐어요.” (익명 요청)

 

전장 한가운데 우뚝 선 대형 캔버스 위 최정환의 얼굴은 이 냉소 어린 한 마디에 그저 무표정으로 응대하고 있었다. 마치 그의 유령이 사회의 온갖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도 살아남은 이들을 묵묵히 전선으로 이끄는 듯했다. 3월 25일 연대 앞 시위에 참여했던 중증장애인 박경석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 쪽서 화염병을 던지니까 저쪽에선 최루탄을 쏘는 거야. 최루탄 팍 터지고 우리 쪽이 도망가길래 나도 같이 도망가려 했는데 하필 다리에 경련이 나 버렸네. 이야. 휠체어를 막 밀고 도망가야 하는 판에 그러질 못하니, 우리 편은 이미 다 없고 나만 경찰하고 시위대하고 딱 중간에 남은 거야. 그때 활동지원사가 있냐 뭐가 있냐. 도망을 못 간 통에 우리 편이 던지는 화염병하고 돌멩이하고 저 쪽서 날라 오는 최루탄하고 막 옆에서 터져 대는데, 정말 완전 전쟁통이었어.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니까.” (박경석)

 

이것은 복수였다. 긴 군부 독재 끝에 찾아온 문민정부는 ‘민주화 정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민중운동 진영을 지속적으로 탄압해 왔다. 마냥 좋은 것처럼 선전해대던 세계화는 도리어 민중들의 삶을 갉아 먹어 갔고, 덕분에 노점상들과 장애인들은 물론 노동자들과 철거민, 농민들도 계속 죽어갔다. 그리고 결국, 최정환의 분신을 기점으로 운동진영은 대대적으로 폭발해 버린다. 당시 성인장애인복지협의회(아래 성장협)와 전국노점상총연합(아래 전노련), 민주노총 준비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전장협 등이 참여한 ‘최정환 비상대책위’는 21일 최정환이 숨을 거두자 ‘최정환 빈민장례준비위’로 이름을 바꾸고선 이렇게 선언한다.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2월 8일 한진중공업 영도공장에서 수리 중이던 한진해운 콘테이너 운반선 기관실에 대형화재가 나 공업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일을 시작한 지 하루 만에 참변을 당한 18세의 노동자에서부터 장년의 자제를 둔 58세 노동자까지 목숨을 잃었다. ... 지난 3월 8일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동지가 살인단속에 항의하면서 분신 산화해 가셨다. 어디 그뿐인가? 3월 16일 새벽 5시 공권력을 앞세워 금호1-6지구 재개발지역에서 살인적인 강제철거에 맞서 박균백씨가 온몸에 신나를 붓고 16m 철탑 아래로 투신하였다. 전셋값 폭등, 세금 및 공공요금, 범칙금 폭등에서 살인철거, 노점상 단속, 임금 억제에 이르기까지, 결국에는 죽음을 요구하는 자본과 권력의 욕심은 어디까지인가? ... ‘복수를 해 다오!’ 가신 이의 유언은 이제 투쟁하는 4천만 민중의 힘으로 전화하여 가진 자들만을 위한 ‘세계화’를 끝장낼 것이다.” (중증장애인의 삶의 실태와 그 대책안, 전장협, 1995, 31~33쪽.)

 

그러나 국가는 언제나처럼 이 절규에 귀 기울일 생각이 없었다. 아니, 자신들이 앗아간 비루한 생명들에 대한 최소한의 애도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죽음들의 한 가운데 서 있던 최정환의 얼굴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지난 세월을 거쳐 이미 익숙해진 국가의 진압봉이었다. 서초구청과 서울시청은 최정환의 분신 다음 날부터 이어진 장애인들과 노점상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얻어낸 약속들조차 금방 파기해버렸고, 투쟁의 확산을 우려한 경찰은 최정환의 시신 탈취를 시도하기도 한다. 3월 25일 9시 연대 노천극장에서 열릴 예정이던 영결식조차 경찰의 저지로 무산되어 버렸고, 14시 시청 앞, 16시 서초구청 앞서 열리기로 되어 있던 노제도 가로막혔다.

 

박흥수는 당시 최정환 투쟁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대책위나 노점상 단체, 타 장애인 단체와의 회의에 전장협 대표로 참석해서는 언제나 제 강경한 입장을 밝혔고, 연단에 올라서도 절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사실 워낙 여러 단위들이 참여한 투쟁이었던 데다가, 전장협은 전체 운동판에서 그다지 큰 영향력을 가진 단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박흥수의 주장들은 별로 힘을 발휘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그는 어째 그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에게서만큼은 전적인 신뢰를 얻고 있는 듯 보였다. 물리적인 전투가 벌어질 때도 그랬다. 장애인들의 신체 특성상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순간마다 그는 적절하게 뒤로 빠져 있곤 했지만, 그 와중에도 계속 싸움에 앞장서고 있는 것만 같은 인상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1996년 장애인고용촉진걷기대회에서 정태수 열사(왼쪽)와 박흥수 열사(오른쪽). 박흥수 열사가 자신의 삼륜오토바이를 운전하고 있다. 사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당장의 큰 성과를 내지는 못한 투쟁이었지만, 박흥수는 이 투쟁을 거치면서 장애인들이 새로운 싸움에 나설 필요가 있음을 깨닫는다. 최정환의 죽음은 언제나 장애인들의 생존권 문제와 활동가들의 생계 문제를 고심하던 그에게 ‘장애인 노점’이 갖는 의미를 일깨워주었다. 이내 전장협에서는 박흥수를 중심으로 노점 분과를 개설했고, 전장협과 전노련 간의 연대단체인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아래 장자추)도 창립했다. 청계천 8가를 비집고 들어간 장애인 노점들은 박흥수와 장자추의 새 싸움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당시 박흥수와 함께 활동했던 이들이 “최정환, 이덕인 열사 투쟁하실 때가 활동의 정점에 계셨을 때”(김종환)라는 평가들을 하나같이 내놓을 정도로 박흥수의 가슴은 이 당시 유난히 더 뜨거웠다.

 

“저희 노점 확보 투쟁은 당장의 생존 문제와 직결된 문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최정환이라는 열사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의도가 다분하기도 했죠. 흥수형도 그런 마음이 컸던 것 같고.” (조성남)

 

“주관적인 평가이긴 하지만, 당시 최정환 열사가 박흥수 열사뿐만 아니라 청계천 노점 확보 투쟁하던 이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아요. 열사...죽은 자들이란 그러지 않나요? 산 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방향을 제시해주고, 지치거나 길을 잘못 들 것 같으면 또 바로잡아주고. 박흥수 열사에게 뿐만 아니라, 운동을 하던 이들에게 당시엔 최정환 열사가 딱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최인기)

 

조직된 노동자나 대학생뿐만 아니라 저들같이 못 배우고 이 세계의 생산 시스템에 귀속되지 않은 이들이 사회를 변혁하는 주체가 되어야 하며, 실제로 그러할 수 있다는 박흥수의 신념은 이 복수를 통해 점점 더 구체화되어 갔다. 당시 그는 ‘자본에 착취당할 자격’조차 없는 이들이 저들의 시스템 안으로 발을 내딛음으로써 도래할 세계의 변혁을 낙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고독한 속내야 아무도 알 수가 없었지만, 적어도 공개적으로 드러난 그러한 낙관은 함께 싸우던 동지들에게 큰 힘을 실어 주었다.

 

“당시 많은 이들이 가깝게 지내기 꺼려하거나 무시하던, 굳이 표현하자면 ‘거친 장애인들’이 있었어요. 앵벌이 활동을 오래 하시거나 깡패 조직과 연루되어 있다는 설이 있는 분들도. 지금 장애인운동사를 다루는 분들한테 이분들 평이 안 좋을 수도 있는데, 저는 그런 시각이 좀 섣부르다고 봐요. 흥수형도 그랬어요. 실제로 흥수형 같은 경우에는 많이 배우고 그런 사람들보다도 이 장애인들과 더 맘을 터놓고 지냈죠. 이분들도 이 사회에서 어떻게든 먹고 살아 보겠다고, 이 사회에서 한 번 생존해 보겠다고 그렇게 거칠어지신 거잖아요. 흥수형은 그분들을 조직하는 게 운동에서 특히나 중요하다고 봤어요. 그렇다고 뭐 그분들을 단순히 운동의 수단으로 삼고자 한 건 아니고요, 단지 그분들 하나하나가 능동적인 민중으로서 사회 변혁에 앞장설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길 원했고, 그래서 먼저 매일같이 함께 술을 먹어 가며 일상을 나눠 가고자 했던 거죠. 태수가 각계각층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한 조직가였다면, 흥수형은 유난히 제일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과 가까운 활동가, 그리고 진짜 친해지면 그런 사람들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는 활동가였죠.” (이상호)

 

장애인 노점상들은 매일의 전투를 잘 버텨갔다. 박흥수 역시 청계천 8가 근처의 한 여인숙에 터를 잡고 몇 달씩 묵기도 하면서 이 싸움에 앞장섰다. 낮 내내 싸워 겨우 차지한 노점 자리에 자신의 오토바이를 세워두고선 밤새 그곳을 지킬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의 표정에는 언제나 적의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적과 타협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요령 있게 사태를 돌파하는 기술도 없었다. 한편에 서서 싸우는 이들을 대하는 그의 표정과 말투만을 떠올려 본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당시 저는 신입활동가로 전장협 부설 새날도서관에 있었어요. 그런데 조직이 가난하니까 재정사업을 해야 해서 청계천에 가서 꿀을 팔았거든요. 흥수 선배가 그때 도움을 참 많이 주셨어요. 먼저 따뜻한 말들 많이 해주시고, 청계천에서 있었던 일들 얘기해 주고 그러셨어요. 제 꿈 이야기 많이 들어주고 앞으로 꿈 잘 이뤄가고 이런 격려들이 정말 따뜻했어요. 갓 장판(‘장애인운동판’의 준말)에 왔는데 이렇게 따뜻하고 정답게, 전혀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도 있구나 싶었죠. ‘너가 조직을 알아?’ 하면서 면박주고 그런 선배들도 있었는데, 이 선배는 너가 그런 고민이 있구나, 정말 신기하다, 잘 되었으면 좋겠다 이러면서 격려해 주는데 정말 따뜻한 느낌이었죠.” (고명선)

 

“장애인들, 우리 편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한테는 어쨌거나 다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이었고, 경찰이나 단속반 같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굉장히 강하고 비타협적인 그런 사람이었어요.” (조성남)

 

어느덧 장애인 노점은 청계천 거리를 넘어 다른 곳까지 확장되었다. 동서울터미널 앞에도, 동대문 경동시장에도 이 비루한 자들의 혁명을 위한 작은 근거지가 세워졌다. 장자추는 강남에까지 제 세력을 뻗어가려 시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7월에는 장자추 인천 아암도지부도 발족했다.

 

이덕인이 소속된 지부였다.

 

▷ ⑤부 골리앗의 패배, 인천 아암도 전사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올려 0 내려 0
정창조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msophist1@gmail.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텔레그램 비마이너 구독하기 비마이너 paypal로 일시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비마이너 정기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무통장입금 정보입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관련뉴스]
[박흥수 ⑥] 장애인운동의 카나리아와 광부들
[박흥수 ⑤] 골리앗의 패배, 인천 아암도 전사들
[박흥수 ③] 변방에서, 혁명의 물리적 근거를 위하여
[박흥수 ②] 상담치료, 약물치료, 물리치료
[박흥수 ①] 청계천 8가, 비루한 혁명가들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박흥수 ⑤] 골리앗의 패배, 인천 아암도 전사들 (2019-12-24 11:46:53)
[박흥수 ③] 변방에서, 혁명의 물리적 근거를 위하여 (2019-12-22 19:02:08)
비마이너의 아름다운 유혹, 독자 인터뷰 비마이너의 아름다운 유혹, 독자 인터뷰 더보기
신간소개기사보기 도서 구매하기
기고 칼럼 기자칼럼

기고 작은이미지
코로나19 정신병동 사망자, 그들을 위한 진혼곡
그의 시야는 어두웠을 것이다. 고열을 앓으며 그는 누구의 ...

[서평] 욕망은 더러운 것이 아니라 고통...
이해찬 대표의 발언이 답답한 네 가지 이...
[리뷰] 신자유주의는 한 사람의 삶을 어...
Beminor SNS 비마이너 페이스북비마이너 트위터비마이너 텔레그램
PayPal
▼ 정기후원


▼ 일시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