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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민 ③] 옆도 보고, 뒤도 보면 항상 그가 있었네
[기획연재]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우동민의 삶과 죽음 ③
등록일 [ 2019년12월30일 14시55분 ]

▷ ②부 세상 속, 우동민의 자리

 

“나중에 집회 사진을 정리할 때 보니까요. 현장을 찍은 사진에는 어디에나 형이 있더라고요. 동민이 형은 항상 집회에 제일 먼저 나와서 가장 늦게 들어갔어요. 모든 투쟁의 현장을 묵묵하게 지키는 사람이었어요.” (박현)

 

2010년 12월 2일에 열린 장애인활동지원법 권리 쟁취 전국 결의대회에 참석한 우동민 열사.

 

인권이 무너진 곳에서 인권을 일으켜 세우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는 조직과 역할이 축소되었고 파행으로 치달았다. 2010년 7월 취임한 현병철 인권위원장은 사회적 약자의 인권에는 관심이 없고 정부와 여당 눈치 보는 데 급급했다. 인권위는 용산참사나 민간인 사찰과 같은 국가기관의 인권침해 사안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시민사회단체와 활동가들이 인권위가 준비하는 행사의 참석과 인권상 수상을 거부하면서 인권위는 사실상 명패만 달고 있는 상황이었다.


2010년 11월 현병철 위원장 사퇴 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11월 4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포함한 228개 인권·시민사회단체들은 대책위를 구성해 인권위 7층 인권상담센터를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인권위를 파행적으로 운영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현병철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11일에는 경기, 전북, 광주, 대구, 부산 등 전국의 660개 시민사회단체가 현병철 위원장의 사퇴 촉구 성명에 연명했다.


장애인활동가들은 인권위를 바로 세우는 일에 동참하기 위해 11월 22일 인권위 11층 배움터에서 현병철 위원장 사퇴 촉구를 외치며 농성에 돌입했다. 12월 2일 밤 9시, 전국에서 모인 200여 명의 장애인활동가들은 8층부터 12층까지 인권위 전 층을 기습적으로 점거했다. 모든 층의 출입구를 자신의 휠체어로 막아서며 그들은 소리쳤다. “현병철은 사퇴하라!” 


이원교 소장은 당시를 이렇게 설명했다.


“단순히 예산을 더 받기 위한 그런 투쟁이 아니었어요. ‘인권’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명제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인권위는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기관이었어요. 인권위가 망가지는 것은 장애인의 인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인권이 망가질 수도 있다는 의미였죠. 우리의 투쟁은 장애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언으로 남은 말

 

12월 3일 ‘세계 장애인의 날’에 장애인들에 의해 인권위는 봉쇄되었고 모든 업무는 마비되었다. 출근하는 인권위 직원들은 장애인활동가들을 막아서며 자신들의 업무를 방해하고 공간을 침해했다며 고성을 질렀다. 활동가들은 논의 끝에 전 층 점거는 3일 오후에 마무리하고 농성은 11층 배움터에서 이어가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인권위 직원들은 이마저도 철수를 요구했고, 직원 중 한 명은 투쟁하는 중증장애인활동가들을 향해 소리쳤다.


“비장애인에게 더 이상 이용당하지 말라.”

 

2010년 12월 3일 ‘세계 장애인의 날’, 이명박 정부의 국가인권위원회를 규탄하며 인권위를 점거한 장애인활동가들의 모습.

 

인권위 직원들의 인권 의식은 절망스러웠다. 인권위 직원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반인권적인지를 알지 못했다. 인권위는 남대문경찰서에 공문을 보내 사무실 점거 투쟁 중인 장애인들의 강제해산과 사법처리를 요청했다. 12월 6일 두 명의 장애인활동가가 공무집행방해와 폭행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고 11층 배움터에는 우동민과 문애린을 포함한 다섯 명의 중증장애인활동가가 남아 투쟁을 이어갔다.


12월 3일부터 10일까지 농성 기간 중 인권위는 경찰을 동원해 출입을 통제했고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의 이동을 막기 위해 엘리베이터 운행을 수시로 중단했다. 활동보조인의 출입과 인원도 통제했으며 혹한의 추위에도 난방을 끊었다. 전기가 수시로 중단된 사실과 식사 반입을 저지한 정황도 드러났다.


건물 안에서 농성 중이던 활동가들은 중증장애인이었다. 전기가 끊겨 전동휠체어가 멈췄고 활동보조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배변, 식사 등의 신변 처리도 어려웠다. 난방이 끊긴 공간에서 밤을 보낸 활동가들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우동민은 차가운 바닥에서 잠을 잘 수가 없어 스쿠터에서 앉은 채로 밤을 지새웠다. 12월 6일 우동민은 폐렴 증세와 허리 통증을 호소하며 응급실로 실려 갔고, 8일 문애린도 같은 증상으로 응급실에 급히 이송됐다. 전기가 끊기고 난방이 중단되고 식사 반입이 막히는 중에도 중증장애인 활동가들은 점거를 이어나갔다. 우동민이 폐렴에 걸려 응급실로 실려 나가기 이틀 전이었다. 하루의 농성을 정리하는 이야기를 나누는 저녁 시간, 늘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그가 평소와 달리 길게 말했다. 


“앞만 보지 말고 옆도 보고 뒤도 보고 그렇게 함께 갑시다”


그날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유언으로 남았다.

 

인권위 투쟁 때 얻은 폐렴이 악화되다

 

2010년 12월 8일 한나라당은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장애인활동지원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활동지원법은 이전에 합의한 활동보조서비스보다 자부담을 높게 책정하고, 서비스 대상자를 장애 1등급으로 제한하며, 서비스 상한선을 두는 등 심각한 문제가 예상되는 법이었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장애인활동지원법은 국회에서 단 한 차례도 논의되지 않은 채 날치기 통과되어버렸다.


같은 날, 살이 에일듯한 한파 속에서 장애인활동가들은 한나라당사 앞에 모여 ‘한나라당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인권위 농성으로 응급실에 후송되었던 우동민이 폐렴을 앓은 지 이틀이 지나지 않은 때였다. 동료들은 여전히 기침을 하던 동민에게 찬바람 쐬지 말고 들어가서 쉬라고 했지만, 동민은 기자회견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투쟁 당시를 이야기하던 문애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동민이 형은 정말 고집이 세요. 일에 관해서는 더 그랬어요. 형은 자기가 맡은바 주어진 일은 자기 몸이 아파도 하는 게 있었어요.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밀고 나가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2010년 12월 8일, ‘한나라당의 장애인활동지원법 날치기 통과’를 규탄하는 기자회견 후 도로점거를 하며 항의하는 장애인활동가들.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우동민 열사.


그날 이후 동민은 밤새 기침을 토해냈고, 숨을 쉬는 것마저 버거운 상황이 되었다.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다. 약을 먹어도 듣지 않자 가족은 동민을 업고 급히 동네 병원으로 갔다. 가족들은 단순한 감기라고 생각했는데 병원에 가보니 급성폐렴이었다. 12월 23일 동민은 기침과 열, 호흡곤란의 증상으로 상계백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응급실에서 바로 중환자실로 이동됐고 치료를 받던 우동민은 더 버티지 못하고 2011년 1월 2일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곤란증후군으로 숨을 거둔다.


가족은 동민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황망했다. 가족에게는 마흔네 해 동안 외롭게 살다 간 장애인 자식의 불쌍한 죽음이었다. 가족들은 장애인 자식의 죽음을 함께 슬퍼할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 병원에서 가장 작은 장례식장을 빌렸다. 가족들은 그렇게 많은 장애인을 그날 처음 보았다. 장례 기간 내내 우동민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로 장례식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추모조차 가로막은 인권위

 

동민은 너무도 갑작스럽게 모두를 떠났다. 동료들은 동민을 살피지 못했다는 생각에 망연자실했다. 그러던 사이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김기정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다가 급하게 양복 한 벌을 마련했다. 살아있는 동안 제대로 된 옷 한 벌 입지 못했던 동민이 안쓰러워 그냥 떠나보낼 수가 없었다. 기정이 마련한 양복은 동민과 함께 태워졌다.


동료들은 동민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가족들 앞에 나서기가 어려웠다. 자식의 죽음으로 세상이 무너지는 슬픔을 겪고 계신 부모에게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었다. 동민의 지난 활동을 전혀 알지 못했던 가족에게 동민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인권위 점거 때 얻은 폐렴 때문이라는 설명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1월 4일 오전 11시 동료 장애인활동가들은 인권위 건물 앞에서 우동민 열사의 장례를 ‘장애해방열사장’으로 치렀다. 열사장을 마친 참가자들은 영정을 들고 고인이 마지막으로 투쟁했던 인권위 11층 배움터를 찾아 헌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인권위는 장애인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엘리베이터 운행을 중지시켰다. 마치 그날처럼.


“영정이 못 들어가게 문을 잠그는 경우가 어딨어요. 엘리베이터 열어라!”


참가자들은 1층 로비에서 큰소리로 항의하고 눈물로 호소했지만 인권위 측은 엘리베이터를 가동하지 않았다. 걸을 수 있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10여 명만이 영정을 들고 계단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활동가는 눈물을 흘리며 우동민 열사의 영정을 비장애인 활동가에게 건넸다.


“우리 동민이 잘 보내주세요.”


11층 배움터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 참가자들은 울분에 찬 목소리로 문 열어줄 것을 호소했다. 인권위 측은 헌화 이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고 30분 안에 나간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야 문을 열었고 참가자들은 두 시간의 승강이 끝에 겨우 열사의 넋을 추모하며 헌화할 수 있었다.

 

2011년 1월 4일, 우동민 열사가 마지막으로 투쟁한 인권위 배움터에서 국화꽃과 고인의 영정을 들고서 추모하는 활동가들.

 

무작정 모란공원으로 향하다

 

가족들은 우동민의 분골을 벽제 서울시립승화원 유택동산에 뿌리기로 결정했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 자들, 무연고자들의 분골이 뿌려지는 곳이다. 유택동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계단뿐이라 휠체어 탄 장애인들은 접근할 수 없었다. 부모는 자신들이 죽은 후 아무도 동민을 돌볼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장애인활동가들은 동민을 그곳에 남기고 올 수 없었다. 장애해방운동을 하던 활동가가 정부 기관의 횡포로 인해 사망했으니 마땅히 추모할 수 있는 공간에 모셔야 했다. 이원교 소장과 활동가들은 동민을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모시자고 가족을 설득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당신들이 우리 동민이를 평생 책임질 수 있습니까?”


가족들은 갑자기 등장해서 동민이의 동료라고 주장하는 이 많은 사람들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김기정은 동민을 모란공원으로 데려가게 해달라고 울면서 호소했다. 김기정의 눈물에 가장 완강하던 동민 아버지의 마음이 움직였고 활동가들은 우동민의 유골함을 안고 무작정 모란공원으로 향했다. 모란공원 측과 묏자리가 미리 논의된 상황도 아니었다. 죽음은 갑작스러웠고, 장례와 화장은 가족들에 의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으며, 활동가들은 발인날 열사장을 동시에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모란공원에 요청할 여력이 없었다.


활동가들과 가족들은 오후 5시께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도착했다. 한겨울이라 주변은 이미 어둑어둑했다. 활동가들은 휠체어를 탄 동지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곳을 찾다가 민주열사묘역 입구 표지석 뒤쪽 나무로 정했다. 시간은 곧 저녁 6시를 넘겼고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표지석을 둘러싼 십여 대의 전동휠체어 조명이 우동민 열사의 영정을 비추었다. 표지석 위에는 열사의 영정과 소주 한 잔, 담배 한 대가 놓였다. 가족과 동료들은 차례로 표지석 뒤 나무에 열사의 분골을 뿌렸다.

 

마석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있는 우동민 열사 묘역. 왼쪽에는 8주기(2019년 1월)를 맞아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 이름으로 된 국화꽃이 놓여 있다. 사진 박승원


“민주열사가 묻힌 이 땅에 무덤 하나 없이 우동민 동지를 묻습니다.”


이원교는 말을 잇지 못했다. 


“동지가 열사가 되어버렸습니다. 동민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외롭게 가게 만들어 미안합니다.”


활동가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동민아, 이제 아빠 잔소리 안 듣는 곳에서 네 마음대로 훨훨 날아다녀라.”


아버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식의 분골을 나무 위에 뿌리며 말했다. 그리고 부모님은 활동가들의 손을 잡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동료 여러분, 동민이를 여러분의 동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동민이 동료 여러분, 고마웠습니다. 고맙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우동민 열사 49재에서 아버지는 유가족 대표로 추도사를 낭독하며 눈물을 흘렸다. 


“동민아, 지금 너의 동지들은 다 여기에 있는데 너는 어디에 있니? 아픈 몸 이끌고 나가지 말라고 만류했는데도 굳이 나가더니 지금 너는 여기에 없구나. 아버지는 네가 나갈 때마다 신발 신겨주던 모습이 떠오르고, 지금이라도 네가 문을 열고 집에 올 것만 같아 너를 기다린다.”


건강하셨던 우동민 열사의 아버지는 열사가 세상을 떠나고 5개월 후에 돌아가셨다.

 

8년 만에 이루어진 진상조사와 공식 사과

 

인권위는 농성에 참가한 장애인활동가들에 대한 인권 침해가 원인이 되어 우동민 열사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지속해서 부인했다. 2012년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는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심지어 인권위가 피해를 입었다고 피해사실보고서를 작성했다. 2014년 유엔인권이사회에서는 장애인활동가들이 인권위 직원들을 폭행했다며 폭력배 취급하는 발언을 하고 “전기와 난방은 인권위가 관여할 수 없고 음식물 반입도 금지하지 않았다”고 거짓 해명했다. 2015년 박근혜 정부 때 취임한 이성호 위원장은 사건 가해당사자 가운데 한 명인 안성모를 사무총장으로 임명했다. 안성모는 인권위 운영지원과장으로 일하던 당시, 출입 통제·난방 공급 중단 등이 명시된  「장애인단체 점거농성 경과보고」에 결재를 한 장본인이다. 안성모 사무총장은 직위를 유지하는 동안 우동민 열사의 죽음에 대한 진상조사 요구를 계속해서 묵살했다.


장애계와 우동민 열사의 동료들은 우동민 죽음에 대한 진상조사와 인권위의 공식사과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분노하고 절망했다. 더 늦기 전에 우동민 열사의 죽음에 대한 제대로 된 조사와 평가가 이루어져야 했다. 2014년 우동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 우동민열사추모사업회가 출범했다. 추모사업회는 매년 1월 2일 추모제를 진행하고 우동민 열사를 기리는 각종 연대사업 등을 기획하며 우동민 열사의 유훈을 담아 투쟁을 이어갔다. 모든 투쟁의 서두에 인권위의 사과와 진상조사를 치열하게 요구했다.


정권이 바뀌고 2017년 10월 외부위원들로 구성된 인권위 자문기구인 혁신위원회가 발족했다. 혁신위원회는 조사활동을 마무리하면서 보고서의 「과거반성과 재발방지」 부분 첫 번째 권고안에 “우동민 사망 및 장애인활동가 인권침해 건”을 담았다. 조사에서 12월 4일 난방과 전기 공급이 되지 않았음이 확인됐다. 혁신위원회는 인권침해행위에 대한 인권위의 공식사과, 우동민 활동가의 명예회복 노력 및 진상조사팀 구성, 고위 간부 책임 부과, 인권옹호자 선언 채택 공포, 장애인권향상을 위한 직원교육 등을 권고했다. 2018년 1월 2일, 우동민 열사 7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이성호 인권위원장은 사건 당시 인권위가 인권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인권위는 혁신위원회의 권고안을 수용해 2018년 7월부터 11월까지 조영선 사무총장을 단장으로 자체 진상조사를 진행했고 12월 11일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새로 취임한 최영애 인권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장애인의 인권을 보호하고 차별을 시정하는 장애인차별시정기구로서, 당시의 점거 농성이 가지는 인권옹호활동으로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대응 과정에서 농성 참여 장애인인권활동가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가 침해되지 않도록 적극적인 조치를 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서 “유족과 여러분들께 말로 다 할 수 없는 깊은 상처와 고통을 드린 점에 대해 인권위를 대표하여 머리 숙여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 숙여 사과했다. 인권위원장의 사과는 2019년 1월 2일 모란공원 열사 묘역에서 열린 우동민 열사 8주기 추모제에서 다시 한번 이어졌다. 우동민의 죽음 후 농성하는 사람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전기, 난방 등 최소한의 것은 제공되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도 마련되었다.

 

2019년 1월 2일,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이 마석모란공원에서 열린 고(故) 우동민 활동가 8주기 추모제에 참석해 우동민 열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인권위에 있음을 인정하고 유족에게 사과했다. 사진 박승원


우동민 열사는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성북센터에 들어오기 전까지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했다. 가족의 지원도 거의 없었던, 나라의 시스템 안에서는 시설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전형적인 중증장애인이었다. 장애로 인한 차별과 장벽을 모두 경험한 사람이었고, 그 차별과 장벽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사람이었다. 자기 삶을 기반으로 운동한 활동가였고 죽는 날까지 자립생활을 추구했던 사람이었다. 2011년 우동민은 장애인운동에 헌신한 현장 활동가들에게만 수여하는 ‘정태수상’을 수상한다.


우동민열사추모사업회 이원교 회장은 우동민 열사를 기억해야 하는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우동민 열사의 죽음을 한 중증장애인이 점거농성하다가 폐렴에 걸려서 사망했다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우동민 열사는 장애인의 생존권을 위해 전 생애를 걸고 싸웠던 사람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나아가 ‘인권’을 인간의 ‘권리’로서 보장받는 것에 대한 자성과 반성의 의미로 우동민 열사를 기록해야 합니다.”

 

우동민 열사 9주기 추모제가 2020년 1월 2일 인권위에서 열린다. 올해 초 혁신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우동민 열사를 기리는 동판이 이날 인권위 벽에 걸릴 예정이다. 그 동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2010년 12월, 우동민 열사와 장애인운동 활동가들이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해 국가인권위원회의 독립성 확보와 장애인활동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 반대 등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당시 국가인권위원회는 경찰을 동원한 출입 통제 및 엘리베이터 운행 제한, 난방 미제공 등 중증장애인 활동가에 대한 인권침해행위를 자행함으로써 우동민 열사 등이 병원에 응급 후송되었습니다. 이후 우동민 열사는 병세가 악화해 폐렴으로 결국 사망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어떠한 국가기관보다 국민의 기본권 보호에 대한 감수성과 민감성을 가져야 하지만, 당시 인권옹호자인 장애인 농성자에 대한 적극적 보호조치가 미흡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와 같은 반인권적인 행위로 인권기관으로 지켜야 할 기본적인 가치를 훼손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보장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성찰하며, 장애인과 사회적 소수자,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의 독립성 확보를 위해 투쟁한 우동민 열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동판을 설치합니다.


2020년 1월 2일

 

“앞만 보지 말고, 옆도 보고 뒤도 보고 그렇게 함께 갑시다” _ 우동민 열사

 


○ 참고자료  

- 2부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 투쟁 관련
『노란들판의 꿈』, 홍은전

 

- 3부 국가인권위원회 점거 투쟁 관련
인권운동사랑방, 2010년 12월 13일, 2010년 인권활동가들이 뽑은 '10대 인권뉴스'
비마이너, 2010년 12월 3일~10일 인권위 점거투쟁 관련 기사
비마이너, 2010년 12월 8일, 15일 한나라당 항의 방문 기자회견 관련 기사
비마이너, 2011년 2월 19일, 그는 정말 소수자였습니다
비마이너, 2018년 12월 12일, 인권위, 고 우동민 열사 사망사건에 드디어 ‘공식 사과’
2017년 12월 27일, 국가인권위 혁신위원회 권고문
2018년 3월, 국가인권위원회 혁신위원회 활동결과 보고서
유투브, 우동민열사 발인 영상, 우동민동지 장애해방열사장 영상, 8주기 추모제 영상
 
○ 자문  

권순자(우동민 열사 어머니)
우동수(우동민 열사 남동생)
이원교(우동민열사추모사업회장,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김기정(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신인기(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박현(전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 현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활동가)
문애린(전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현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
김종숙(성북장애인자립센터 활동가)
김종환(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집행국장)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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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미 인권기록활동가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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