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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 아닌 ‘할 수 있는 일’ 찾아 헤매는 삶
[연재] 질병과 함께 춤을
등록일 [ 2020년05월27일 12시42분 ]

“선생님 저 좀 잠깐 보시죠.”
“네?”
“이제 그만 나와주셔야겠습니다. 애들이 선생님 발음을 알아듣기가 어렵대요.”

 

20대 첫 직장은 보습학원이었다. 나는 중1 국어를 맡았다. 당시 나는 교사가 되기 위한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고 공부를 하면서 일할 파트타임 일자리가 필요했다. 큰 학원은 나의 학벌로 가기 어려웠고 해야 할 일도 많았기에 나는 동네 보습학원을 지원했다. 원장은 나를 3일 만에 해고했다. 나는 누군가 머리를 망치로 때린 듯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얘기를 듣고 마지막 수업을 하기 위해 교실로 들어갔다. 숨을 헐떡거리며 나는 긴장하며 물었다.

 

“선생님 얘기하는 게 그렇게 안 들리니?”

 

맨 앞의 남자아이가 얼굴을 찌푸리며 “네”라고 얘기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그 자리에 잘 서 있기도 힘들었다. 수업을 마치고 나와서 1시간을 걸었다. 숨이 잘 안 쉬어졌다. 그리고 이날 집에 가서야 내 장애가 그냥 다리가 불편한 소아마비장애가 아니라 신체의 모든 부분에 조금씩 마비가 있었던 뇌병변장애임을 알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내 걷는 모습을 가지고 놀리는 사람은 많았지만 내 발음을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엄마는 내 장애에 대해 제대로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도 엄마에게 내 장애로 겪는 왕따나 마음의 짐에 관해 얘기한 적이 없었다. 가족 간의 소통의 부재는 20대 이후에 이렇게 충격을 주는 형태로 내게 다가왔다.

 

몇 년 전 청년공공근로에 참여했을 때, 마을 벽화작업에 함께했던 사람들의 모습. 주로 중장년층에서 시행하던 공공근로를 청년층에 도입해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만 39세까지라 1회 참여 후 참여 기회를 잃었고 그 한 번의 일자리도 4개월여에 불과했다. 사진 박현진

 

첫 직장의 충격, 일터에서 열등감과 자책감에 시달리다
 
내 장애에 대해 인지하게 된 후, 큰 충격을 받았으나 다른 일을 찾아내기 어려웠다. 교사가 되기 위한 시험공부를 놓지 않아 풀타임으로 일하기가 어렵기도 했지만 당시에도 나는 수면장애와 약한 체력 덕에 주 6일 8시간 일하기가 힘들었다(당시에는 주 6일 근무였다). 나는 다른 학원에 주 3일 하루 4시간 일하는 파트타임 강사로 들어갔다. 오후 출근이 가능한 업종이라 오전에 일어나 구민회관에 가서 운동하고 돌아와 출근 전에 잠깐 다시 잠을 보충하고 출근했다. 그래야 밤에 부족한 수면이 보충돼 출근을 그나마 할 수 있었다. 거기서도 종종 발음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나보다 더 싸게 다른 강사를 구할 수 없었는지 원장은 특별히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다만 원장이 공지사항 때문에 원장실에서 보자고 할 때마다 가슴이 후들후들 떨렸다. 언제든지 해고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에 아는 분이 연락을 주셨다. 자신이 1년 기간제 교사로 들어갔다가 개인 사정상 6개월만 일하고 그만두게 됐는데 학교에서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해왔다. 나는 고민하다가 교사가 되려면 현장이 어떤지 알아보고 싶어 학교에 들어갔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그 학교는 경력이 오래된 교사도 오기 싫어하는 교실붕괴, 학교붕괴가 심한 학교였다. 소위 ‘일진’이라는 아이들의 조직이 활발했다. 내가 수업에 들어가도 나 보란 듯이 자리에 앉지 않고 교실을 오가며 내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한 남학생이 수업시간에 만화책을 보길래 압수하고 수업 끝나면 찾으러 오랬더니 나에게 욕을 크게 내뱉어서 학교가 뒤집어진 적도 있었다.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쓰던 내가 어느새인가 “이 새끼, 저 새끼”하고 있었고 폭력적으로 매를 쓰기도 했다.

 

아이들이 다른 교사 수업시간에는 얌전하게 수업받는 모습을 보면서 내 자괴감은 더 심해졌다. 변해가는 내 모습에 그리고 내 장애로 인한 열등감에 몸부림쳐 갈 때 친구는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했다. 아이들 탓을 해가며, 아이들 흉을 봐가며 교사 생활을 할 수는 있지만 자신의 열등감이 그렇게 차고 넘친다면 교사생활을 하기 힘들 거라고 했다. 나는 모든 교사가 방학 때 일을 맡기 싫다고 거부했던 학교 문집 편집일을 제안받았고, 기간제교사는 방학 때 보수도 나오지 않는 데 그 일을 맡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것으로 재계약은 무산됐다. 나는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깊은 우울감에 빠졌다. 높은 데서 뛰어내리고 싶은 지경까지 이르자 없던 종교를 가지게 됐고 과외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하고 싶은 일 찾았지만, ‘체력의 한계’로 노동시장에서 버티지 못해

 

그러다가 2009년 장애인단체에 활동가로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장애가 있다는 것을 항상 창피하게 여겼고 숨기며 살았는데 장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알게 됐고 장애인운동 의제에도 눈을 떴다. 하지만 약한 체력 때문에 종종 발생하는 야근과 주말 근무를 감당키가 어려웠다. 출근해서 몸이 견딜 수 없을 때면 휴게실에 가서 잠깐씩 자기도 했지만 매일 그럴 수는 없었고 눈치가 보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출근해서는 앉은 자리에서 허리를 펼 수가 없어서 응급실에 실려 갔다. 일주일 동안 집에서 기어 다녀야 했다. 밤에 화장실에 갈 때도 변기통을 붙잡고 간신히 일어나 용변을 봐야 했다. 일주일 만에 간신히 걸을 수 있게 됐고 출근은 무리였지만 더 이상 쉴 수는 없었다. 다시 야근에 주말근무가 이어지면서 2년 만에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는 건 허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활동가라는 직업 자체는 좋아했지만 체력이 무너지자 일에서 얻는 기쁨은 느낄 수가 없었다.

 

그 후로 1년을 쉬다가 다른 시민단체에 들어갔는데 자궁근종을 수술한 후 재발한 상태에서 일을 제때제때 해낼 수가 없었다. 몸의 상태는 더 이상 출퇴근해서 하루 8시간 일을 해내고 중간중간 야근을 하고 가끔 주말 근무도 하는 한국의 노동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그 후 몇 년을 부모님 집에 얹혀살면서 하릴없이 지냈다. 서울시에서 청년공공근로를 하고 그 후 마을공동체 활동을 하면서 몇 년을 지냈다. 하루 8시간 근무가 아니었고 내가 일할 수 있는 시간에, 사람들과 일을 나눠 할 수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적은 소득으로 저축 없이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아래 고용공단) 홈페이지를 계속 보다가 3개월 포토샵 교육공지를 보게 됐다. 교육을 받고 디자인 작업을 재택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출퇴근을 할 수 없는 몸이니 이 일을 하고 싶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3개월의 교육은 몸의 통증을 불러일으켰고 힘들었지만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버텼다. 그런데 교육 마지막 날 회사대표가 와서 우리의 작업속도가 너무 느리다면서 1개월 더 연장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식비랑 교통비 명목으로 한 달 10만 원 받으며 3개월 버티던 사람들은 반발했다. 생활비가 부족해 버티기가 힘들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대표가 그렇게 말하는데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마지막 한 달은 별다른 수업 없이 아침 10시부터 저녁 수업 끝날 때까지 디자인 한 세트를 무조건 시간 내에 끝내는 테스트만 이어졌다. 사람들은 예전처럼 쉬는 시간에 수다를 떨지도, 점심 먹은 후 차 한잔을 하지도 않았다. 시간 내에 끝내야 취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회사의 2기 교육생이었던 우리는 취업이 됐다. 취업하자마자 우리 교육을 맡았던 팀장과 본부장이 그만뒀다. 이유를 몰랐고 들리는 이야기로는 충분한 디자인 능력이 있는 사람을 뽑지 않고 회사에서 장애인을 대거 뽑아놓았는데 우리 능력이 부족해서 불만이었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세금 혜택도 받고 급여 일부도 지원받기 위해 장애인을 뽑은 건 알고 있었는데 회사 내에서 소통이 잘 안 되었나 싶었다.

 

장애인을 이용해 돈 벌려는 회사들, 그 속의 참담한 현실

 

5개월 후에 우리 급여가 밀리기 시작하면서 팀장과 본부장이 그만둔 이유 중에 급여 체불과 4대 보험 체납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급여는 한 달 뒤쯤 들어오다가 두 달 뒤에 들어오고 1년이 넘어가자 석 달씩 밀렸다. 석 달씩 밀리면서 간간이 한 달 급여만 간신히 들어왔다. 애가 타서 고용공단에 얘기했으나 고용공단은 권고만 할 수 있을 뿐 강제력이 없다고 얘기했다. 회사 대표는 고용공단에 우리의 작업속도가 너무 느려서 매출이 제대로 나올 수가 없다며 수익이 않나 급여가 밀릴 수밖에 없다고 얘기했다. ‘3일 이내에 무조건 디자인 한 세트씩 하라’는 회사의 이야기를 못 지키는 사람은 없었는데 왜 계속 저런 얘길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세금 혜택과 급여 지원이 있긴 하지만 장애인을 뽑아 수익이 이렇게 안 난다면 대체 장애인을 1, 2, 3, 4기까지 25명 넘게 뽑은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그러다가 급여가 계속 밀리자 표준사업장만 되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대표가 얘기했다. 표준사업장을 만들기 위해 투자 기업을 찾고 있다고 했다.

 

원래는 사회적 기업 인증을 받겠다고 했는데 표준사업장은 또 뭐지? 의아했다. 찾아보니 표준사업장은 장애인 의무고용사업주인 모회사가 자회사를 통해 전체 직원 가운데 30% 이상, 10명 이상의 장애인을 고용하면 이를 모회사가 고용한 것으로 인정해주는 제도라고 한다. 지원금이 10억 원이라는 것에 놀랐다. 회사는 처음엔 사회적 기업 인증을 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사회적 기업 인증을 못 받자 표준사업장을 노린 것 같았다. 하지만 표준사업장은 선정되지 않았다.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임금체불이나 4대 보험 체불이 있는 회사라는 게 알려져서 다른 회사에서 투자받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4대 보험 체납에 대해 국민건강보험공단(아래 보험공단)에 신고를 했다. 보험공단은 4대 보험이 체납되면 회사에 압류를 걸긴 하는데 압류할 게 없으면 당장 어쩔 도리가 없다고 했다. 임금체불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그만두기 시작했다. 나도 그만두고 싶었지만 주변 사람들이 만류했다. ‘그렇게 재택하면서 일하는 직종 얻기가 쉬운 줄 알아? 아예 월급이 안 나오는 건 아니잖아. 조금만 참아’ 나는 다시 3개월여를 더 근무했는데 상황이 해결될 거란 대표의 말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1년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다행히 나는 밀린 급여를 받았고, 앞서 그만둔 사람이 고용노동부에 신고하는 등 적극적인 행동을 보였기에 퇴직금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만둔 이후에 그만둔 사람들은 얼마 전 연락해보니 1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밀린 급여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고용노동부에 신고해도 해결이 안 돼서 오히려 대표에게 밀린 급여의 반이라도 줄 수 없냐고 사정하고 있다고 했다. 장애인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회사에 들어가 일만 하다가 밀린 급여를 받지 못해도 누군가가 제재를 가하지 못하는 이 현실. 나는 매우 참담함을 느꼈다.

 

당시 같이 일하던 사람 중에는 나보다 장애정도가 더 심한 중증장애인이 있었다. 그 사람은 한쪽 손이 불편하여 나보다 장애등급이 높았지만 몸에 질병이 없는 상태였다. 교육받을 때 매우 피곤해하고 한 번씩 결석하던 나와 달리 그는 건강히 교육을 잘 마쳤고 회사문제로 그만두고 난 이후에는 현재 다른 회사에 출퇴근하여 잘 지내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경증의 장애를 가졌지만 몸에 질병이 있는 나는 출퇴근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재택근무만이 가능하다는 한계조건을 갖고 일자리를 찾았고, 다행히 면접까지 보았다. 이름을 대면 다 알만한, 굉장히 오랜 역사를 가진 회사였는데 장애인 채용이 처음이라고 했다. 3차 면접까지 올라갔는데 최종 합격자는 없었다. 차라리 나 대신 누군가라도 채용됐다면 이렇게 허무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으리라. 장애인을 뽑겠다고 면접을 3차까지 하더니 결국 회사에 맞는 사람이 없다며 아무도 뽑지 않는 현실. 단순히 ‘정말 회사에서 찾는 인재가 없었을까?’라고 생각하기엔 의아한 점이 너무 많았지만 고용공단에서도 회사 쪽 입장만을 이야기할 뿐 더 알 수는 없다고 하였다. 

 

장애인 일자리에 관한 장애인 당사자들의 목소리들. 하지만 이런 당사자들의 바람과는 달리 현실의 벽은 높다. 사진 박현진

 

장애를 넘어 ‘노동할 수 없는 몸’에 대한 논의 필요

 

현재 나는 4시간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8시간 재택근무는 찾을 수가 없었고 간신히 재택근무를 찾은 게 4시간이었다. 최저임금으로 세후 80여만 원을 받고 있다. 4시간 재택근무 중 최저임금을 넘는 일자리도 있었지만 그런 일자리는 대부분 회사에서 중증장애인을 원했다. 이왕 장애인 고용을 할 거면 기회가 더 적은 중증장애인에게 회사는 기회를 주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한 달 80여만 원으로 살아가는 것은 힘들지만 그래도 이 체력을 가지고 재택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어딘가 싶다. 하지만 내년 3월이면 계약이 끝난다. 공고에는 ‘정규직 전환 가능성을 열고 계약직을 뽑는다’고 했으나 정규직 전환이 쉽지 않다는 걸 안다.

 

누군가가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사이에서 어떤 도전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할 때 나는 지난날을 생각하게 된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됐지만 잦은 야근과 긴 노동시간은 하고 싶다는 의지를 무력하게 만들었고 대한민국 시스템에서 일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나이가 많고 여성이고 기술이 없는 상태에서는 이제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출퇴근을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의 폭이 좀 더 넓어질 텐데 출퇴근을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의 폭이 매우 좁다. 저축이 불가능한 100만 원 이하의 월급에 힘들어서 나도 남들처럼 벌고 싶은 욕망이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주어지더라도 몸이 허락지 않으니 일단은 적은 소득이지만 이 정도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다만 좀더 내가 할 수 있는 재택근무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현재는 4시간 근무를 하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다 해 다른 일은 꿈도 못 꾸지만 체력이 조금 더 나아진다면 재택근무 외에 몇 시간이라도 부수적인 일을 해서 저축이 가능한 수입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장애/비장애를 넘어, 장애 중·경증을 넘어, ‘노동할 수 없는 몸’에 대한 논의도 다양하게 이뤄졌으면 한다. 그 담론 형성에 이 연재들이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글쓴이 소개

박현진 _ 다른몸들(준)의 질병서클 “질병과 함께 춤을”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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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진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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