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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아픈 사람들의 독서 코뮨주의 - 어떤 ‘고독’과 ‘우정’ 대하여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메이 외, 봄날의책
[연재] 노들장애학궁리소 ‘마이너의 서재’
등록일 [ 2020년06월01일 17시11분 ]

노들장애학궁리소는 장애인운동단체의 진지인 ‘대항로’에 있으며, 장애 문제를 연구하고 토론하는 곳이다. ‘궁리’를 통해 장애를 규정하는 근거에 대해 바닥까지 따져 묻고, 장애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억압하는 온갖 삶의 형식을 부수어나갈 운동의 지혜와 전략을 모색하고자 한다. 강좌, 세미나, 차담회 형태로 해 오던 궁리 외 또 다른 방식을 궁리하다가 연구자들이 매달 돌아가며 장애와 관련한 책을 읽고 서평을 쓰기로 했다. 장애인뿐만 아니라 정상성 권력에 의해 억압받고 차별받는 다양한 소수자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도 담으려 한다.


1.
프리드리히 니체는 가장 나쁜 독자들이란 ‘약탈하는 군인’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자신들에게 쓸모가 있는 몇 가지를 챙긴 뒤 나머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고는 전체를 비방한다는 것이다. 비방은 없지만 나의 이 독후감도 쓸모 있는 몇 가지만 챙기고는 나머지를 엉망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다.


그럼에도 쓴다. 내가 읽은 코뮨(클럽)에 대한 이야기가 이국적이면서도 너무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써넣고 보니 벌써부터 ‘이국적’, ‘매혹적’이라는 말이 걸린다. ‘이국적’이라는 말은 이 코뮨을 신비한 외국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아서(내가 결코 속하지 않는,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의 공동체처럼 타자화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매혹적’이라는 말은 아픈 사람들의 공동체를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것 같아서(현실적 고통을 비현실화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책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표지 이미지 ⓒ봄날의책


내가 읽은 글은 메이 작가의 「‘병자 클럽’의 독서: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아픈 사람들」이다(김영옥, 메이, 이지은, 전희경 지음,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봄날의 책, 2020). 그러니까 앞서 내가 너무 매혹적이라고 말한 코뮨은 이 책의 제목에 들어 있는 병자들의 독서 클럽이다. 단지 고통을 겪는 게 아니라 ‘고통을 살아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그중에서도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 아픈 사람들’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코뮨이 특정 조직이나 단체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성원들 대부분은 자기만의 외딴섬에서 혼자 앓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분명히 코뮨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읽는 책의 문장들에서 동료들을 알아보며, 쓰기와 읽기 속에서 동료들을 느낀다. 서가에 함께 꽂혀 있는 책들이 이들이 함께 있다는 표식이다. 이것은 매우 독특한 독서론이자 서재론이며, 동시에 매우 독특한 존재론(철학)이자 공동체론(정치학)이다.

 

2.
나는 이 글의 첫 단락에서부터 밀쳐냄(이국성)과 끌어당김(매혹)을 함께 느꼈다. 첫 소절의 제목은 ‘아프다는 것을 아는 문장들’이다. 그리고는 프랑스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글에서 따온 짧은 문장들이 제시된다. “내 고통, 너는 내 모든 것이어야 한다. 너로 인해 방문할 수 없을 그 모든 이국의 땅을 네 안에서 발견하게 해다오. 내 철학이 되어다오, 내 과학이 되어다오.” 그리고 저자의 첫 문장이 시작된다. “통증에 시달려본 사람이라면 이 구절에 멈춰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135쪽)


그러니까 세상에는 ‘아프다는 것을 아는 문장들’이 있고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나는 밀려난다. 쉬운 한글 문장인데도 마치 한글 자모만을 갓 배운 외국인처럼 나는 문장들을 소리 내 읽을 수 있을 뿐 의미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된다. “내 고통, 너는 내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내, 고통, 너, 모든 것, 되어야 한다. 내가 안다고 생각한 이 모든 단어들이 갑자기 외국어가 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이 독서클럽의 이방인이라는 것, 이 세계의 외국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 문장들은 나를 당긴다. 이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을 이해하는 것이 내 삶에 관한 중요한 진실을 이해하는 일이라도 되는 양, 그리고 이 독서클럽의 사람들이 말하는 ‘고통의 땅’, ‘지독히 어둡고 깊은 곳’이 내 삶의 가장 안쪽에 있는 세계, 가장 깊은 곳에 들어앉은 세계라도 되는 양, 나는 문장들을 읽고 또 읽는다.


‘아픈 사람’은 아프다는 것을 아는 문장들을 알아보고는 기뻐한다. “자신의 경험을 알고 있는 이 문장들에 감격하여 밑줄을 긋고 페이지 모서리를 접어두며 스티커와 책갈피를 붙인다. 수첩과 포스트잇 위에 필사한다.”(138쪽) 그런데 ‘아픈 사람’이 아닌 나 역시 여기에 밑줄을 긋고 모서리를 접어둔다. 이를테면 도데의 문장, “통증의 실제 느낌이 어떤지를 묘사할 때 말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는가? 언어는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잠잠해진 뒤에야 찾아온다. 말은 오직 기억에만 의지하며, 무력하거나 거짓이거나 둘 중 하나다”에 밑줄을 긋는다. 그리고는 “아픈 사람들은 이런 문장들을 발견하고 기뻐한다”는 저자의 문장이 들어 있는 페이지 모서리를 접는다. ‘아픈 사람’이 아닌 나는 왜 이런 일을 하는가. 혹시 아픈 사람이 내 어딘가에 거주하는 건가. 혹시 그가 내 어딘가를 다녀간 건가.

 

3.
조금 전에 나는 아픈 사람의 문장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을 이방인으로 만든다고 했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아픈 사람의 문장을 알아보는 아픈 사람들이야말로 이 세계를 이방인으로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아팠던 시기에 나는 내가 ‘이곳’에 없다고 느꼈다. (중략). 이곳이 아닌 곳에 있다는 감각, 혹은 황무지를 끝없이 걷고 있다는 감각, 그건 오직 나만 겪고 나만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걸 아는 사람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외로움은 센티멘털한 것이 아니라 혹독한 것이었다.”(144쪽)


나는 예전에 다른 책에서 ‘다발성경화증’ 환자가 진단을 받은 후의 심적 충격을 표현한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이렇게 썼다. “[진단결과를 들은 후] 나는 홀로 그 고요한 건물을 떠나야 했다. ... 나는 누구와도 이 두려운 진실을 공유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휩싸인 채 무망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 전적으로 나 혼자뿐이구나.”(베네딕테 잉스타, 수잔 레이놀스 휘테 엮음,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 그린비, 206쪽에서 재인용) 이 글을 읽을 때도 나는 어떤 끔찍한 사건을 목격한 사람처럼 밑줄을 그었다. 그때 나는 누군가 혼자되는 순간, 혼자서 터벅터벅 다른 길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을 보았다.


아픈 사람의 외로움은 아픔의 고립적 성격 즉 아픔을 소통할 수 없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도데가 썼듯이 “아픔을 묘사할 때 말이라는 것은 별 쓸모가 없다”. 작가인 멜라니 선스트럼은 이렇게 썼다고 한다. “통증의 한 가지 저주는 통증이 없는 사람에게 거짓말처럼 들린다는 것이다.”(137쪽) 아픈 사람은 자신의 행성에서 혼자 사는 사람이다. 그는 한글을 쓰지만 아프지 않은 사람들은 그것을 읽지 못한다. 그의 언어는 외계어다.

 

책 읽는 사람의 모습. ⓒ언스플래시
 
4.
이 글의 저자는 아픈 사람의 질병이야기는 여행기와 같다고 했다. 아픈 사람은 고통을 삶에 대립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 더 나아가 삶의 기본 조건으로 받아들인 채로 낯선 영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픈 사람의 서가에 있는 책들은 ‘여행 가이드북’이다. 그런데 이 가이드북의 첫 페이지는 외로움, 그것도 “센티멘털한 것이 아니라 혹독한” 외로움이고, 이 책이 소개하는 여행지 역시 외로운 행성(‘론리 플래닛’)이다(165쪽).


혼자서 혼자를 향해 떠나는 여행. 아픈 사람의 삶은 철저히 고독한 여행이다. 나 혼자서 떠나는 여행이라서 그렇고, 나 자신으로 침잠하는 여행이라서 더욱 그렇다. 아픈 사람의 여정을 알리는 ‘나침반’인 고통(149쪽)은 항상 나만을, 내 몸만을 가리킨다. 그래서 아픈 사람의 자아는 좀처럼 자신의 몸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 몸이 자아의 전부이자 운명의 전부가 되는 때가 있다. 나는 내 몸일 뿐 다른 무엇도 아니다. ... 내 몸은... 나의 재앙이었다.”(157쪽) 내 몸은 누구보다 자신을 돌볼 것을 내게 요구한다.


그런데 나는 이 글에서 철학의 오랜 요구, ‘너 자신을 알라’ 즉 ‘너 자신을 돌보라’는 요구가 얼마나 독특한 색깔로 변용되는지를 보고 놀랐다. 아픈 사람은 세상의 말들이 아니라 내 몸의 말을 들어야 하고, 내 자신의 고통, 내 자신의 병을 연구해야 하며, 나만의 ‘앓는 법=사는 법’을 설계해야 한다. 저자로서 아픈 사람은 자신만의 스타일과 템포를 찾아야 하며, 독자로서 아픈 사람은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책을 자신의 템포로 읽어야 한다. 요컨대 아픈 사람은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하고 자기 자신에 이르러야 한다.


자기 자신에 이르는 고독한 여정의 어느 순간엔가 아픈 사람은 이런 문장에 닿는다고 한다. “다시 겪으라면 차라리 안 살고 만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예전의 나보다 마음에 든다.”(143쪽) 이 문장에서 나는 또 한 번 밀쳐냄과 끌어당김을 느낀다. 감당할 수 없는 길, 겁에 질린 마음은 도망치려 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고 결국 이 문장에도 진한 밑줄을 긋는다.

 

5.
이 글의 끝에서 나는 아픈 사람의 고독한 여정이 얼마나 독특한 우정에 이르는지를 목격했다.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의 글을 읽으며, “황량한 바다와 같은 방”에 처박힌 채로 거대한 코뮨의 일원이 된다. 이 코뮨은 앞서 말한 독서 클럽이다. 아픈 사람은 책 속에서 친구를 알아보고 기뻐한다. 그런데 이 우정과 기쁨은 통상적인 게 아니다. 내가 이 글에서 본 것은 고독을 극복한 우정이 아니라 고독한 자의 우정이고, 고통이 사라진 기쁨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자의 기쁨이다. 저자의 표현을 쓰자면 이것은 “아픈 몸이라는 고립에서 자라나는, 다른 아픈 이들과 한 무리라는 감각”이다. 이들은 책에서 아픔을 아는 문장들을 알아보고 아픈 동료들을 알아본다.


황량한 바다에서 같은 배를 탄 사람은 없지만 모든 배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아픈 사람들은 혼자 걸어가야 하지만 혼자만 이렇게 걷고 있는 것은 아니다.”(165쪽) 책 속에서 내가 고통을 아는 어떤 문장을, 고통을 살아가는 누군가를 알아보는 것처럼, 누군가는 멀리서 나를, 내 문장을 알아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 볼 수는 없지만 하나의 공동체였다.”(155쪽)


이때 비로소 내 몸은 너무나 무거워 빛조차 잡아두는 블랙홀이기를 그만둔다. “몸 하나만 남게 되는 세계의 수축이 아프다는 경험이라면, 이걸 알고 있는 내 몸 바깥 누군가의 존재는 그 자체로 수축에 맞서는 힘이다.”(158쪽) 모든 빛을 삼키는 무거운 블랙홀이 아니라 등대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별. 밤하늘의 별들이 홀로 빛나면서 함께 반짝이듯이, 아픈 사람은 고독을 풀지 않은 채로, 오히려 자신만의 고독한 빛을 발산하면서, 친구를 발견한다.


책에서 자신이 찾고 싶은 정보를 발견하지 못해도 좋다.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이 쓴 책, 아픔을 아는 문장들이 담긴 책을 소중하게 읽는다(153쪽). 거기에는 아픈 몸을 견디고 돌보며 살아온 사람, 고통의 삶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구체적으로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아픈 사람은 거기서 “공감, 연민, 조언, 기술, 지식, 지혜, 계시”를 발견한다(166쪽). 다시 말하지만 그는 거기서 “내 고통, 너는 내 모든 것이어야 한다”는 문장을 알아본다. 이것이 이들의 우정이다. 이것이 이들의 코뮨이다.

 

여담이지만, 철학자 니체는 몇 년간의 지독한 통증, 몇 번이나 자살을 떠올렸을 정도로 극심했던 통증을 겪은 후 갑자기 어떤 책, 어떤 한 사람을 동료로서 알아보게 되었다. 그는 1881년 7월 말에 요양을 하고 있던 실스마리아에서 친구인 프란츠 오버벡에게 엽서를 썼다. “나는 깜짝 놀랐고 완전히 매혹되고 말았네! 나는 한 사람의 선구자를, 그것도 진정한 선구자를 만났다네! 나는 [그동안] 스피노자를 거의 몰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지금 나를 그에게 이끄는 것은 ‘본능의 작용’이네. 그의 전체 성향이 내 것과 똑같을 뿐만 아니라 ... 그의 이론의 다섯 가지 점에서 나는 나 자신을 발견했어. ... 요컨대 나의 고독(Einsamkeit)은 ... 최소한 이제 친구(Zweisamkeit)를 갖게 되었다네.” 참 흥미로운 말이다. 고독이 해소되지 않고 다만 친구를 갖게 되었다니. 그런데 이제야 나도 책을 읽은 후 생겨난 이 수수께끼 같은 고독과 우정을 조금은 알 수 있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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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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