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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이 가고 싶은 곳으로, 온몸이 가게 하라
[비평]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등록일 [ 2020년08월05일 19시03분 ]

 

커다란 빔프로젝터 스크린을 배경으로 낮게 올라온 검은색 단상 위를 비추는 조명에 누운 희제. 엉덩이가 바닥에 닿지 않게 하려는 듯 양쪽 다리를 굽혀서 무릎을 올린 상태로, 인상을 쓰며 오른손으로 왼쪽 팔뚝을 잡고 있다. 사진 김덕중

 

- 아픈 몸이 가고 싶은 곳으로 온몸이 가게 하라

 

“바로 그 아픈 부분이 몸을 이끌게 하라. 그 부분이 가고 싶은 곳으로 온몸이 가게 하라”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연출자가 배우들의 아픈 몸을 풀어 춤출 수 있게 하면서 한 말이다. 사회라는 몸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을까? ‘사회체’가 건강하지 못한 지점에서 아픈 사람이 가고 싶은 곳으로 사회의 온몸이 가게 할 수 있을까?

 

아픈 몸이 가고 싶은 곳으로 전체가 가게 하는 건 간단치 않은 문제다. 왜냐하면 아픈 몸을 데리고서도 전체가 목표하는 ‘건강’에 도달할 수 있을지 확신하기 힘들고, 그러느라 공동체의 건강까지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방법을 찾는 게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 방법을 찾는다 하더라도, 만약 아픈 몸이 가고 싶은 곳이 ‘치료’가 아니라면, ‘건강’이 아니라면 어쩔 것인가? 그때 아픈 몸이 가고 싶은 곳으로 전체가 가게 하는 문제는 ‘건강사회’라는 목표, 혹은 전제 자체를 의심해야 풀 수 있는 문제가 된다.

 

아픈 몸이 가고 싶은 곳으로 온몸이 가게 하는 문제를 적나라하게 담고 있는 오래된 연극이 있다. 오래된 연극이라기보다는 연극의 ‘기원’인 아테네 비극 중 「필록테테스」가 그것이다. 기원전 409년 소포클레스가 90세 되던 해 공연된 비극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기, 죽기 3년 전 마지막 비극에서 소포클레스가 던진 ‘아포리아(풀리지 않는 문제)가 바로 아픈 몸이 가고 싶은 곳으로 온몸이 가게 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다.

 

트로이로 향한 그리스 연합군 일원이던 필록테테스는 렘모스 섬에서 독사에 물려 발이 괴사되는 병을 얻는다. “썩어들어가는 발에서는 고름이 흘러내려” 필록테테스는 끝 모를 고통에 신음과 비명을 질러댄다. “그의 사납고 불길한 비명과 신음 소리”가 진영에 가득 차 그리스 연합군 사령관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는 “제주도 제물도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바칠 수 없었다.” 합리성의 대변자 오디세우스의 제안에 따라 그리스 함대는 약간의 먹을 것과 함께 필록테테스를 무인도에 버려두고 트로이로 떠난다.

 

10년 동안 트로이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필록테테스가 지닌 헤라클레스의 활과 화살만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예언이 나오자, 그리스 함대는 오디세우스와 네옵톨레모스(아킬레스의 아들)를 렘노스 섬으로 파견한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필록테테스는 여전히 아픈 몸을 끌며 신음과 비탄, 그리고 자신을 버린 자들에 대한 원한에 사무쳐 살고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계략으로 필록테테스의 활과 화살을 빼앗아 트로이로 돌아가려 한다. 그 계략의 실행자인 네옵톨레모스는 자신도 아버지(아킬레스)의 무구를 가로챈 오디세우스에게 원한이 있다면서 필록테테스의 믿음을 얻고, 더불어 그의 활과 화살을 손에 얻는다. 그러나 정의와 성실을 신조로 삼는 네옵톨레모스는 필록테테스의 아픈 몸이 호소하는 고통과 믿음을 저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오디세우스의 계략을 배반한다. 오디세우스가 가고자 하는 곳 트로이, 전쟁의 승리, 공동체의 대의와 필록테테스가 가고자 하는 고향 중 어디로 갈지 망설이던 네옵톨레모스는 아픈 몸이 가고자 하는 곳, ‘고향의 안식’으로 필록테테스를 데려다주기로 결심한다.

 

시민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온라인 관람을 하면서 나는 기원전 409년 디오니소스 제전에 참여하여 「필록테테스」를 관람하는 듯한 희열을 느꼈다. 그 희열은 연극이 연극의 기원인 비극으로 돌아갈 때, 즉 기원의 반복이 불러일으킨 효과임을 깨달았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기획자 조한진희처럼 소포클레스도 (항상 그래왔듯이) 시민 중에서 비극 배우를 모집했다. 그리고 비극이 상연되는 제전에서 디오니소스 신을 찬미하는 이야기를 낭송했다. 디오니소스 신이 인간에게 준 파괴적인 운명과 끝내 그 운명을 사랑하는 자의 의지와 지혜를 찬미하는 낭송 말이다. 낭송이 캐릭터의 말과 코러스의 낭송으로 분화되고, 코러스 또한 극 중 배역을 맡으면서 비극은 전개된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도 이런 방식으로 6명의 시민 배우가 자기 이야기의 배역과 남의 이야기의 코러스를 번갈아 맡으며 극을 전개한다.

 

다만,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처럼 소포클레스도 실제 아픈 몸을 가진 시민에게 필록테테스 역을 맡겼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필록테테스」에서 서사를 이끄는 핵심 동력이 아픈 몸의 신음과 호소에 있다는 사실이다. 아픈 몸의 불길한 비명과 신음 소리 때문에 그리스 함대가 필록테테스를 버렸다는 발단 부분, 갑자기 밀려온 통증에 기절하듯 잠들면서 네옵톨레모스에게 활과 화살을 넘기는 절정 부분, “아아, 꿰뚫는구나. 아이코 아파! 신들의 이름으로 부탁하오. 손에 칼 가진 게 있으면 내 발꿈치를 내리치시오. 젊은이여! 어서 빨리 베어버리시오.”라는 절절한 고통의 호소를 차마 무시하지 못하고 네옵톨레모스가 오디세우스의 계략을 배반하고 필록테테스 편에 서는 결말 부분 모두 아픈 몸의 신음과 호소가 서사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목우가 의자에 앉아 있으며 뒤에는 다른 배우들이 서 있다. 사진 김덕중

 

- 치료 담론에 저항하는 아픈 몸들의 목소리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가 여느 ‘질병 서사’와 다른 점도 여기 있다. 근대 소설은 지식인의 폐렴에서 발생했다고 할 정도로 질병은 근대 서사의 중심 소재였다. 가장 전형적인 질병 서사는 낭만적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질병으로 주인공을 병들게 하는 것이다. 거기서 질병은 인물과 세계의 갈등 요인으로 소재화되고, 최루성 감동을 뽑아내는 미적 장치로 동원될 뿐 아픈 몸의 신음과 호소 자체를 들려주지는 않는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중 특히 ‘희제’와 ‘나드’의 이야기는 「필록테테스」처럼 아픈 몸의 신음과 호소를 적나라하게 들려준다. 아픈 몸에서 나오는 그 날것의 신음과 호소를 외면하느라 오디세우스로 대변되는 합리성의 문명은 그것을 재빨리 서사화하고, 합목적화하고, 미학적으로 승화시켰다. 그런 미학적 승화와 함께 아픈 몸의 신음과 호소는 사회 안에서 점점 들리지 않게 배제되어 왔다.

 

디오니소스 제전의 「필록테테스」와 마찬가지로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는 미학적으로 승화되고 사회적으로 배제되어 온 아픈 몸의 신음과 호소를 적나라하게 들려줌으로써 아폴론적 조화와 형상을 해체하는 디오니소스적 파격을 일으킨다. ‘희제’와 ‘나드’가 자신의 비극에서 항문과 턱관절의 염증이 일으키는 고통에 발버둥 치고 “하느님, 나를 버리셨나요? 내 고통이 당신과 상관이 없습니까? 아아! 차라리 나를 데려가 주세요”라고 울부짖는 장면은 몸이 부서지고 다시 태어나는 극한의 디오니소스적 체험으로 관객을 끌고 간다.

 

그렇다고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환우회의 질병 체험기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굳이 ‘환자’, ‘환우’라는 용어 대신 ‘아픈 몸’이라는 적나라한 이름을 사용하는 것도 환자 담론과는 다른 몸의 담론을 생성하기 위함일 것이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서 아픈 몸의 담론은 의료, 치료 담론에 예속된 환우회 담론에 저항한다. 그 담론은 ‘희제’의 이야기에서 의사들의 불성실, 오만함, 무책임함을 비난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나드’의 이야기에서 “아픈 사람의 책임은 낫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것임을, 완치란 환상이란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습니다. 이제 나는 완전한 치유가 아닌, 완전한 치유로부터의 자유를 원합니다.”로 끝난다.

 

이것이 진정 ‘비극’의 담론인 것은 「필록테테스」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아픈 몸의 신음과 호소에 공명한 네옵톨레모스는 필록테테스에게 활과 화살을 돌려주면서 깨끗한 마음으로 설득한다. “그대는 신이 보내신 운명에 의해 이 병을 앓고 있는 것이오.” 이제 “자진하여 트로이의 들판으로 가서 우리들 사이에서 아스클레피오스의 두 아들을 만나 이 병을 치유받은 다음, 이 활과 내 도움으로 트로이의 성채를 함락”하면 어떻겠소? 우직한 성실함과 깨끗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무엇보다 ‘치유’의 약속을 담은 이 설득을 어찌 거절할 수 있으랴? 그러나 ‘비극’의 정신, ‘디오니소스’의 세계관은 그 조화와 화해의 제안을 거부한다. “내 몫의 고통을 참고 견디도록 나를 내버려 두시오.” “트로이 이야기는 더는 끄집어내지 마시오. 그 때문에 나는 충분히 눈물을 흘렸으니 말이오.” 필록테테스는 차라리 죽여 달라며 괴로워하던 아픈 몸의 고통을 “내 몫의 고통”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참고 견딜지언정 결코 자신을 버린 자들의 체제, 트로이 정벌을 통해 유지되는 그리스 체제에 복무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개인적 원한에 사로잡혀 전체의 대의를 무시하는 어리석음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스파르타와의 전쟁에 집착하는 아테네 제국주의에 대해 소포클레스가, 한때 전쟁영웅이었으며 정치인이었던 소포클레스가 마지막 비극으로 전하는 디오니소스적 지혜라고 생각한다. 전쟁과 정벌을 통해 수립되는 질서, 아픈 몸을 버리고서야 얻게 되는 강건함이란 대체 무엇인가? 아픈 몸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공동체를 가게 하는 용기 있는 결단이 우리에게 필요한 게 아닐까?  

 

아픈 몸을 버린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은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환우회 체험기로 만들지 않게 하는 핵심 요인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는 공리주의나 의료 자본주의 같은 개념이 지금까지 환자의 소외를 비판하는 개념 틀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런 접근법은 아픈 몸을 치료의 대상으로 여기는 의료 담론을 벗어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가 ‘아픈 몸’이라는 이름으로 포착하는 현상은 아픈 몸이 장애(disability)로 정체화(identifying)되는 국면이다. 즉, 이 연극은 아픈 몸을 치료해야 할 일시적 상태로 보는 게 아니라, 아픈 몸이 사회적 관계 안에서 구조적으로 차별받고 미시적으로 배제되고 문화적으로 억압받는, 즉 ‘장애’(disability)로 경험되는 국면을 포착한다.

 

‘목우’의 이야기가 단적인 예다. 조현병으로, 혹은 약물 부작용으로 인해 그녀는 “다섯 마디 말을 하려면 세 마디 말을 하고, 두 마디 말이 잊히는 그런 몸”을 갖게 되고, 아무도 그 더듬거리는 말이 하고 싶은 말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잠이 쏟아져 간단한 문서 작성 하나 할 수 없고, 강박 때문에 몸을 움직여 물건을 정리할 수도 없으며, 설거지조차 물소리가 환청으로 들려 할 수 없는 그런 몸”을 가진 사람들은 ‘정신장애인’으로 분류되지만, 복지혜택을 받기는커녕, 매스컴에 의해 우범집단으로 지목되고, 가족에 의해 빈번하게 강제입원 당한다.

 

아픈 몸은 곧바로 무능한 몸으로 취급된다. 직장이 원하는 속도와 방법으로 노동할 수 없는 몸, 학교가 원하는 속도와 방식으로 과제를 수행할 수 없는 몸으로 규정되고, 그 병력(病歷)만으로도 차별받는 사회적 장애(disability)를 경험한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서 특히 주목하는 아픈 몸의 장애화는 젠더와 교차된다. ‘희제’의 크론병은 만성적인 소화기 염증을 일으킨다. 그래서 그의 몸은 술 마실 수 없는 몸, 치킨을 먹을 수 없는 몸, 입대를 할 수 없는 몸, 한마디로 남성(사회의 구성원)으로 젠더화 하기 힘든 몸이다. 그 지점에서 ‘희제’의 아픈 몸은 일종의 젠더장애를 경험하는데, 그 장애는 남성사회로부터의 탈주를 향한 경로가 되기도 한다. ‘다리아’의 난소 낭종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여성적 젠더 수행의 장애(disability)로 경험된다. ‘다리아’의 아픈 몸은 그로 인한 신체적 고통보다 더한 (아픈 몸보다 불임을 걱정하는) 가족주의적, (출산지도를 그리는) 국가주의적 억압에 고통받는다.

 

- 아픈 몸들이 겪는 사랑과 우정에서의 차별과 배제

 

재생산 이전에 성(sexuality)과 사랑의 관계에서도 아픈 몸은 관계 단절의 요인이 된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는 근육병으로 인해 아픈 몸을 가진 ‘수영’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어쩌면  아픈 몸을 가진 배우가 무대에서 아픈 몸을 연기하며 아픈 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연극의 연출이 가장 아름다운 성취를 보여주는 무대가 ‘수영’의 무대일 것이다. 그녀의 근육병은 일상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연기 중에도 입 주위의 근육에 경련을 일으켜 불수의적인 웃음을 짓게 만드는데, 떠나버린 연인과의 행복했던 순간을 연기할 때 그녀가 짓는 웃음과 찡그림과 허우적대는 손짓은 혼합된 감정들의 적확한 표현을 만들어낸다. 여느 연극처럼 대사를 외워 말하는 게 아니라, 종이에 적은 말을 읽는 방식도 자연스러움을 더했다. 대사를 외울 때 발생하는 말과의 거리를 소멸시켜 자연스럽게 자기 말을 연기할 수 있게 했다.  

 

무대 중앙에 빈 의자가 있고, 그 오른편에 분홍색 통이 넓은 바지에 남색의 티셔츠를 입은 수영이 서 있다. 수영 뒤에 있는 스크린에는 긴 머리에 파마머리를 한 여성이 활짝 웃고 있는 흑백사진이 띄어져 있다. 사진 김덕중

 

‘수영’의 이야기는 사랑과 우정의 관계에서 아픈 몸에 가해지는 미시적 차별과 배제의 현실을 보여준다. 나는 ‘수영’의 이야기 속 ‘그’가 서투름을 다해 그녀를 위한 사과를 깍뚝 썰어주고 가던 귀여운 연인으로만 관객에게 기억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픈 애를 왜 만나니?”라는 어머니 대신 연인을 떠나버린 그, “터미널에서 나오다 너랑 꼭 닮은 사람을 봤어. 네가 나으면 꼭 그 사람일 것 같아서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어. 정말 예쁘더라.”라는 사랑의 속삭임 속에 연인의 아픈 몸을 감추고,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려고 했던 남자, 그래서 그녀를 “연인의 시선 안에서 한없이 가려지고 작아지게,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사랑을 주장하는 곳에 있는 배제의 한 사례로 그 남자의 사랑이 비판받길 바란다.

 

‘수영’은 떠나버린 연인을 회상할 때보다 스쳐 지나간 친구들을 회상할 때 더 설게 운다. “수영 씨 모습, 지난번이랑 되게 달라요. 죄송한데, 좀 부담스러워요” 근육병으로 아픈 몸은 컨디션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이나 판이하게 다른 모습의 사람이 된다. 멀쩡하게 이야기하던 사람이 갑자기 고꾸라져 고통을 호소하는 모습에 함께 있던 사람은 당황해하며 주변의 눈치를 본다. 몸이 안 좋은 날에는 입 주위 경련도 심해져서 더 많은 웃음을 짓게 만드는데, 친구들은 뭐가 그렇게 좋냐,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고만 있냐고 묻는다. 근육병으로 인한 불수의적인 웃음이라고 설명해도 사람들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필록테테스」에서 오디세우스가 필록테테스를 무인도에 버린 것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오디세우스가 대단히 악해서, 필록테테스가 대단히 나쁜 짓을 했거나 함대에 회복 불가능한 손실을 끼쳐서가 아니다. 아주 작은 다름, 불길한 차이, 주변 사람들을 당혹하게 만들고, 어쩔 줄 모르게 만들며, 자신들까지 우울하게, 불행하게, 죄스럽게 만드는 그 신음 때문에 그를 무인도에 떼어 놓고 공동체의 행복을 향해 떠난 것이다. 제도적 차별이나, 가시적인 추방 이전에 아픈 몸이 내는 신음을 견디지 못하는 얄팍한 관계, 그 미세한 선긋기가 무서운 것이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수영’은 자신의 마지막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대사노트를 내려놓고 자기가 가진 모든 근육을 써서 자신의 말을 온몸으로 내뱉는다.  

 

“경련이 웃음으로 변하고, 얼굴 하나 표정 하나 갖고 싶어서 헤맸던 시간들, 그 어떤 웃음도 내 것이 아니었던 시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다. 스치듯이 보고 스치듯이 사랑하려 했던 사람들. 그런 내게도 뛸 듯이 기쁜 순간이 찾아오는데, 누군가가 헤어짐의 인사 뒤에 어색한 악수 대신 이 말을 건네 줄 때다. “우리 내일 만날래요? 다음 주에 또 볼까요?””

 

우리 내일 만날래요? 다음 주에 또 볼까요? 비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온라인 관람은 8월 31일까지 가능하다.

 

▷ 질병을 둘러싼 차별, 낙인, 혐오 속에서 살아가는 아픈 몸들의 목소리로 만든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온라인 관람 https://www.socialfunch.org/dontbeso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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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lizom@hanmail.net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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