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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밀어내고 멈춰선 청계천
[칼럼] 쫓겨나는 이들의 서울산책 - 청계천①
등록일 [ 2020년08월12일 12시26분 ]

한강이 서울을 동서로 관통한다면, 도심엔 청계천이 흐른다. 서울의 중심 세종로에서 출발하는 청계천 물줄기는 종로와 동대문을 흘러 성동구에서 흐름을 바꿔 한강으로 나선다. 각종 거리 축제부터 겨울이면 연말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루미나리에 축제가 열리는 곳, 한미FTA반대 집회와 박근혜 퇴진 촛불이 시작된 곳도 청계천이다.

 

개천에서 청계로로, 판자촌 사람들에서 달동네 사람들로

 

청계천의 모습은 크게 세 번 바뀌었다. 현재의 서울 도심, 옛 한양이 조선의 수도가 되었을 때 청계천의 이름은 개천이었다. 모래하천인 자연 상태로는 수시로 범람하였기 때문에, 조선은 축대를 세우고 바닥을 파 물길을 넓혔다. 개천(開川), ‘열린 천’이라는 뜻의 이름으로 600년을 흘렀다.

 

개천은 가난한 이들의 일상과도 관련이 깊었다. 개천을 만들며 퍼낸 흙이 쌓여있던 오간수문 근처에는 범죄자나 거지들이 모여 살았다. 이들을 ‘땅꾼’이라 부르고, 포도청에서는 이들이 먹고살 수 있도록 뱀잡이 독점권을 주었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땅꾼’의 어원이다. 개천변 버드나무가지를 이용해 가재도구를 만들어 파는 사람은 ‘고리백정’이라 불렸다. 청계천 인근에 형성된 시전과 난전에서 서민들은 생활을  꾸려나갔다.

 

1910년 한일병합이 체결되고, 1914년 개천의 이름은 ‘청계천’이 되었다. ‘맑은 계곡’이라는 이름과 달리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화가 진행될수록 청계천은 더러워졌다. 1926년 청계천을 복개하는 계획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수립되지만 이행되지 않다가 광복 후 1958년부터 청계천 복개공사가 시작되었다. 청계천은 서울의 인구가 증가할 때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거처가 되었다. 청계천 다리 밑에는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제방 위엔 토막집이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서울로 모여든 월남인, 이농인은 청계천에 판잣집을 지었다. 복개사업은 이들을 쫓아내는 과정이었다.

 

청계천변의 판잣집은 서울의 가장 대표적인 슬럼이었다. 서울을 현대도시로 탈바꿈시키기 위해서 가장 먼저 쫓겨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 소위 ‘불량 주택’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쌀가게를 하는 동생이 있지만 그에게 가서 사정하기는 싫소. 차라리 우리 동리 이웃들에게 부탁하는 것이 마음이 편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속을 알아 이해를 잘하지.”
- 『판자촌 일기』, 최협

 

6~70명이 하나의 화장실을 사용하고 강에서 오물이 솟는,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화재와 하천범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판잣집 생활. 낭만적으로 기억하긴 어렵지만 불량주택에 살아간다고 사는 모습도 불량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만큼 서로 사정도 훤하고 생활양식을 공유할 수 있었다. 쫓겨난 판자촌 사람들은 봉천동, 신림동, 난곡동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달동네 사람’이 되었다.

 

청계천에 남아 있는 청계고가의 모습. 사진 김윤영

 

감춰진 가난 위로 쌓인 성장, 노점상 박봉규의 죽음

 

판잣집이 사라진 곳에 청계로와 신식건물, 고가도로가 들어섰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외국인 손님이 워커힐 호텔에 달려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청계고가는 서울 현대화의 상징이었다. 청계고가 옆으로 건설된 삼일아파트가 황학동에 넓게 운집한 판자촌을 가리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상징이란 그저 진짜를 가리기 위한 것은 아닌가 싶지만, 청계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광장시장, 방산시장, 평화시장과 세운상가, 성동상가 등 옷가지부터 공구, 가구, 조명, 주방용품까지 없는 것이 없는 시장의 성장만큼은 진짜였다. 종로와 을지로, 충무로, 동대문으로 이어지는 크고 작은 가게들은 제작과 판매부터 소비까지 촘촘히 연결된 거대한 생태계다. 청계로는 그 자체로 한국의 산업을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산업화의 진전과 함께 도시에는 노점상도 늘어났다. 복개공사로 빈민을 철거한 자리를 비집고 다시 빈민이 모여들었다. 정부는 88년 서울올림픽과 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대대적인 노점상 단속에 나선다. 이에 반발한 노점상들은 86년 전국노점상연합을 결성하고 폭력적인 단속에 맞선 투쟁을 시작했다.

 

“올림픽이 우리의 생존권을 짓밟고 외국인의 눈요기 때문에 우리가 쓰레기 취급을 당한다면 우리는 힘없는 사람들이지만 앞장서서 죽을 똥 싸면서라도 올림픽을 반대합시다”
- 「올림픽과 노점상」, 김기현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점상에 대한 불법화는 지속적으로 관철되었다. 2002년 월드컵과 함께 다시 격렬해진 노점 단속은 시간을 비껴간 듯 80년대를 꼭 닮아 있었다.

 

1997년부터 청계천3가에서 공구 노점상을 하던 박봉규는 아침 6시면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성실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2002년 월드컵으로 노점단속이 강화되고, 물건을 빼앗기거나 용역깡패로부터 모욕적인 멸시를 받는 일들이 반복되며 무척 힘들어했다. 노점으로 하루 2~3만 원을 벌던 그가 빼앗긴 물건들을 7만 원 주고 되찾아온 다음 날, 그는 또다시 단속반에 물건을 빼앗겼다. “불법장사를 하면서 뭐가 잘났다고 항의하느냐”는 말을 듣고 분개한 그는 휘발유통을 찾아와 8월 23일, 서울 중구청장실 앞에서 분신하였다. 병상에 있던 그가 9월 6일 운명한 뒤 노점상들은 7개월에 걸쳐 투쟁했으나 확실한 사과나 재발방지대책은 얻지 못한 채 장례를 엄수하게 된다.

 

청계천에서 자라 노점 활동가로 살고 있으며, 박봉규열사 투쟁으로 구속되기도 했던 최인기는 그의 영전에 시 ‘공구 파는 아저씨 어디 갔냐고 묻거든’을 남겼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똑바로
덩그러니 남아있는 가로수에
무언가 칭칭 묶여 있던 흔적을
기댈 곳 없이
아무렇게 놓여 있는 손수레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열사 가신 길
오늘도 누군가 찾아와
공구 파는 아저씨 어디 갔냐고 묻거든
온종일 오가는 이들의 머리에
햇살이 되었다 하자
- 「공구파는 아저씨 어디갔냐고 묻거든」 중, 최인기


청계로, 다시 청계천으로

 

노점상의 서러움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박경리를 비롯한 문인들의 제안으로 시작된 청계천 복원이 서울시장 선거의 쟁점이 되고, 청계천 복원을 공약한 이명박이 서울시장에 당선되며 청계천개발은 뜨거운 화제가 되었다. 가장 먼저 대두된 문제점은 청계천 인근 상인과 노점상인에 대한 대책 마련이었다. 당시 개발로 자리를 옮겨야 하는 상인들은 문정동 가든파이브로, 노점상인들은 동대문 운동장으로 이동했다. 상인들은 불안과 염려가 컸지만 불도저 같은 이명박 전 시장의 사업방식과 권력 앞에 뾰족한 대안을 만들기 어려웠다. 게다가 시장은 ‘나만 믿어라’라고 철썩같이 약속했다.

 

2005년 청계천이 다시 열린 뒤 2010년 청계천 상인들이 입주하는 가든파이브가 개장했다. 2007년 청계천 상인 6만여 명 중 6097명이 가든파이브로의 이주를 희망했지만, 실제 계약한 사람들은 1028명에 불과했다. 2003년 당시 서울시가 약속한 7~8000만 원의 분양가는 실제 분양 당시 1억 5000만 원에 이르렀다. 상권이 없던 가든파이브는 유령건물이 되었고,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인들은 스스로 나갔다. 청계천이 재개장한 10년 뒤인 2015년, 가든파이브에 남은 청계천 상인은 100명뿐 이었다.

 

“사기업이 하는 일이었으면 그렇게 믿고 따르지 않았을 거다. 시가 우리 잘살게 해준다고 해서 하는 대로 따라갔는데….” (청계천에서 가든파이브로 이동했던 상인 인터뷰)

- 「10년 전 ‘걸림돌’, 10년 뒤 ‘철거민’」, 신소윤·황예랑

 

상권도 해체됐다. “복원 이전에는 공구나 특수한 물건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골동품을 찾는 고정 단골들로 붐볐는데, 지금은 뜨내기 관광객뿐”(신소윤·황예랑)이다 보니 시장 상황이 퍽 달라졌다. 동대문운동장에 갇혔던 노점상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파크’를 만들며 다시 쫓겨났고, 풍물시장과 곳곳으로 흩어졌다. 이곳도 장사가 안 되기는 매한가지인데, 성동공고와 동대문 노점상 철거는 지금도 잊을만하면 반복된다.

 

상인들이 서울시를 믿었든 믿지 않았든 이제 상인들은 청계천 개발의 책임을 물을 곳조차 없다. 청계천 개발의 가장 큰 ‘난관’이었던 그들을 해산시킨 뒤 ‘상인대책팀’은 해체했고, 언제나 그렇듯 관청은 여유롭다. 담당자가 바뀌어서 답변할 사람이 없다는 앵무새 같은 대답은 쫓겨난 사람들의 냉가슴을 더 얼어붙게 한다.

 

삼일아파트 자리에 들어선 롯데캐슬 아파트. 사진 김윤영

 

청계천은 어디로도 흐르지 않는다

 

“청계천도 예전의 청계천이지요”
헤어질 때 그가 한 말처럼, 내가 사랑했던 풍경은 그 유효성을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나는 한때 청계천의 새벽풍경을 사랑했다.

청계천으로 상징되는 개발의 그늘을 벗겨 냈듯이 곳곳에 남아 있는 지난 세기의 그늘을 벗겨낼 것이다. (중략) 흘러가는 것은 멈출 수 없다.
-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이명박은 대선에 출마하며 청계천 개발 과정을 담은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를 출판했다. 이명박에게 개발의 그늘은 낙후한 청계천의 풍경과 일자리, 그리고 사람들이었다. 청계천이 청계로가 되며 판잣집을 밀어버렸듯, 삼일아파트를 세워 황학동 판짓집을 가렸듯, 노후한 삼일아파트를 밀어내고 롯데캐슬 아파트를 건설하듯 ‘개발의 그늘’은 동대문운동장으로, 가든파이브상가로 밀려났다.

 

장사가 잘 되지 않는다는 상인의 넋두리는 상인들을 쫓아내도 괜찮은 이유가 되었다. 어차피 세상은 변하고 과거의 삶의 방식은 이 세상에 통용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삶은 이미 쇠락해가는 쪽이었다고 그는 합리화한다.

 

어쩌면 이 변명은 이명박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겠다. 가난한 이들을 쫓아내고 세워진 깔끔한 건물과 녹지대, 이를 통한 지대 상승을 충분히 누리고 있는 사람들 모두를 위해, 정신없이 흘러드는 오토바이 소음과 땀 냄새, 먼지 가득한 마찌꼬바(소규모 공장) 대신 출입카드를 목에 건 사무직 직원들의 커피브레이크를 위해, 옛날보다 도시가 많이 깔끔해졌다고 순진하게 안심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변명이다. 한때 사랑했던 모든 것은 어차피 변하기 마련이라며 체념을 위장하지만, 그의 사랑은 누구에게 개발의 이익이 독점되고, 누구에게 피해가 집중되는지에 대해 침묵한다. 어차피 세상은 변하니까, 뒤처지는 사람들을 너무 신경 쓰지 말자는 달콤한 위로다.

 

흘러가는 것은 멈출 수 없다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과 달리 청계천은 스스로 물을 흘려보내지 못한다. 하루 9만 8천 톤의 물을 한강에서 끌어와 다시 한강으로 보낸다. 청계천이 ‘거대하고 긴 어항’이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청계천을 복원하며 서울시는 ‘개발주의’를 벗어나 환경과 문화, 역사를 중심에 둔 도시 서울로 거듭난다고 선언했지만, 억지로 흐르는 물과 이 때문에 쫓겨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이 선언에 항의한다. 오늘도 청계천에는 물이 흐른다. 잠그면 결코 흐르지 않을 물이 흐른다.

 

◯ 참고자료
- 청계천 박물관
- 『판자촌 일기』, 최협, 눈빛, 2012년.
- 「올림픽과 노점상」, 김기현, 월간 말, 1988년 7월.
- 『떠나지 못 하는 사람들』, 최인기, 동녘, 2014년.
-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 이명박,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년.
- 「도시의 순례자, 노점상 박봉규 열사 – 다시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길 바래요」, 손홍규, 민족21, 2002년.
- 「가난한 노점상과 노동자들의 거처, 청계천」, 명숙, 워커스, 2018년 2월 14일.

- 「공구 파는 아저씨 어디 갔냐고 묻거든–노점상 박봉규열사 영전에」, 최인기, 참세상, 2002년 9월 25일.
- 「노점상 고박봉규씨 사망 7개월만에 장례식」, 최은택, 오마이뉴스, 2003년 3월 31일.

- 「10년 전 ‘걸림돌’, 10년 뒤 ‘철거민’」, 신소윤·황예랑, 한겨레21, 2015년 10월 5일.

 

김윤영의 쫓겨나는 이들의 서울산책

 

빈곤사회연대에서 활동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여러 도시에서 자랐다. 가난한 이들을 쉽게 쫓아내고, 머문 자리마저 빠르게 지우는 도시에 애증이 있다. 서울 곳곳에 스며든/지워진 역사를 되돌아보고, 가난한 이들이 빼앗긴 공간과 권리에 대해 돌아보는 ‘다크투어 칼럼’을 한 달에 한 번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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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beminor@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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