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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95년, 최정환과 이덕인
장애빈민운동가 이덕인 열사의 16주기를 추모하며
장애인 노점상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등록일 [ 2011년11월22일 22시11분 ]

▲최정환 열사. © 장애해방열사 단

 

1995년 3월 봄에 있었던 일이다. 서초구청의 노점단속에 항의해 분신한 장애인이 있었다. 그는 보육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척수장애를 지닌 중증장애인이 있었다. 그가 사망하기 10년 전 신문 광고를 통해 아버지를 찾았으나 친자임을 부인 당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기록상으로는 아버지가 존재했기에 생활보호대상자가 될 수 없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길은 노점상이었다. 삼륜 오토바이에 카세트테이프를 차곡차곡 싣고 노점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노점상은 장애인에게도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는 이미 1994년 6월 서초구청의 단속 과정에서 다리가 골절되는 전치 8주의 부상을 입기도 한다. 그는 이를 악물고 먹고 살고자 발버둥쳤다. 1995년 3월 8일 그는 구청의 단속반에게 스피커와 배터리 등을 빼앗기게 된다. 물건을 압수당하기를 반복했던 그는 서초구청에 찾아가 빼앗긴 물건들을 되찾으려 했지만 차갑게 거부당했다.

 

아마도 그는 이 더러운 세상을 자신의 몸을 불살라서라도 끝장을 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4백만 장애인을 위해서라면 내 한목숨 죽어도 좋다”, “복수해 달라”라고 동료들에게 절규했다. 전신 88%의 화상을 입고, 그는 마침내 3월 21일에 숨을 거두었다.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열사의 이야기다.

 

▲3월 25일 연세대에서 열린 최정환 열사 장례식과 영결식 및 규탄대회 © 장애해방열사 단

 

최정환 열사의 분신은 수많은 사람의 분노를 불러왔다. 곧바로 민중운동 진영은 비상대책위를 구성해서 투쟁에 돌입한다. 1995년 3월 16일 종묘에서 약 2천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살인단속 분쇄 및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분신사건에 대한 규탄대회를 전개한다.

 

한편 이날 새벽에는 행당동 철거민 박균백 열사의 분신 투신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당시 김영삼 정권의 재개발정책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했다. 결국 최정환 열사는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고, 3월 21일 빈민장례위원회로 전환하면서 장례투쟁을 준비했다. 그러나 투쟁의 확산을 우려한 정부와 경찰당국은 시신을 탈취해버렸다. 이에 대항해 3월 25일 연세대에서는 3천여 명이 장례식과 영결식 및 규탄대회를 열어 시신 탈취와 장례식 봉쇄에 대해 항의하면서 화염병을 투척하는 등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열사 투쟁이 끝난 후 당시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와 전국노점상연합회는 중증장애인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청계천 8가와 인천의 아암도 등지에서 새롭게 삶의 터전을 준비하게 된다. 물론 이 과정도 녹록지는 않았다. 여전히 수많은 단속과 철거에 시달리며, 장애인과 노점상들은 생존권 쟁취를 위해 도로로 뛰쳐나와, 온몸으로 노점자리를 지키는 싸움을 벌여야 했다. 이 과정에서 그해 여름 약 13명의 장애인과 노점상이 구속되기에 이른다.

 

▲이덕인 열사. © 장애해방열사 단

1995년 11월 28일 한참 겨울로 접어들 무렵, 인천 아암도에서 또다시 비보가 전해진다. 철거용역 등 1,500여 명의 공권력을 동원해 노점 철거의 행정집행을 하는 과정에서 실종되었던 장애인이 3일 만에 해변에 변사체로 떠오른 사건이었다.

 

당시 인천 아암도 해변에서 장사하던 30여 명의 장애인을 포함한 노점상들은 구청의 노점 철거 집행에 항거하며 망루를 설치하고 올라가 고공 농성을 전개했다. 망루 위의 농성자들은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지체장애인들과 당뇨병 환자도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철거용역 깡패들을 앞세운 공권력은 망루를 포위하고 농성자들에 대한 음식물과 식수는 물론 환자에 대한 의약품 공급까지 철저히 차단했다. 심지어 매서운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혹한의 추위 속에서 소방차를 동원해 망루에 물대포를 쏘아댔다. 이 과정에서 한 장애인 노점상이 탈출을 시도했고, 11월 28일 아침 시신이 되어 인천 아암도 앞바다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열사다. 그리고 이 투쟁은 겨울을 넘어, 다음 해 5월까지 이어진다.

 

한편 지난 2002년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덕인 열사 사건에 대해 “대규모의 공권력 동원과 통제로 헌법상의 생명권을 위협하고, 신체의 자유, 행복추구권을 과도하게 침해하여, 공익에 비해 침해되는 사익이 현저히 큰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였으며, 국민기본권의 확립을 위해 항거하는 과정에서 사망에 이르렀으므로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 심의를 요청”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직접적인 사인과 관련해서는 “이덕인 씨가 경찰에 폭행당한 후 실신 상태에서 물에 던져졌음을 뒷받침할 근거는 없다”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이 사건의 실체는 여전히 진실을 밝혀내지 못하고 아직까지 미궁에 빠져 있다.

 

▲1995년 11월 28일 인천 아암도 앞바다에서 발견된 이덕인 열사의 시신. © 장애해방열사 단

 

당시 이덕인 열사 대책위를 중심으로 자체 조사한 바로는, 주검 발견 당시 열사의 상의와 신발이 벗겨진 채로 해변에 엎어져 있었던 점, 양 손목과 양팔이 밧줄로 포박되어 있었던 점, 또한 뒷머리, 양쪽 어깨, 팔 등에는 상처와 피멍으로 짐작되는 상처가 있었고, 시신은 두 눈을 부릅뜬 채였다는 점 등이다. 이러한 것은 당시 사진 자료에서도 입증이 된다.

 

또한 당시 대책위가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이덕인 열사가 망루에서 탈출을 시도한 11월 25일 저녁 7시 30분경은 망루에서 탈출로 간의 수위가 55~80cm이고 유속도 거의 없는 지점으로 평소 수영을 잘하는 열사가 탈출 시 수영 미숙으로 익사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덕인 열사가 탈출을 시도하다가 사망했다면 사흘 동안이나 바다 위를 표류했을 텐데, 당시 아암도 망루 주변에는 군과 경찰이 삼엄한 경계근무를 계속하고 있었고, 망루 위에 농성자들도 계속 농성을 하고 있었음에도 3일간 아무도 표류하는 주검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더군다나 3일간 바다에 쓸려 다녔을 주검에 일반적 상흔 없이 거의 온전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1995년의 장애인 노점상 열사사건은 많은 문제를 사회적으로 드러내는 계기를 만들었다. 노태우 정부 때 제정된 '장애인고용촉진법'에서 300인 이상 기업체는 장애인을 의무적으로 2% 이상 고용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업 대부분은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으면서 벌금만 내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시행 2년 만에 약 400억여 원을 거둬들였다. 당시 전경련과 경총 등은 장애인 의무고용 비율을 2%에서 1%로 하향 조정하기 위해 움직임을 보이다가 당시 장애인 활동가들의 단식농성으로 이를 철회하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 아래 삶의 극한에 내몰려 있던 장애인 노점상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장애인의 생존권 문제가 새로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게 되었다. 최정환, 이덕인 열사 투쟁으로 말미암아 장애인운동은 적극적인 저항을 전개하고, 이후 장애인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95년 장애인 노점상 사건을 계기로 노점상과 장애인이 공동의 투쟁을 전개했으며,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열사의 분신과 이덕인 열사의 장례 투쟁을 함께하면서 장애인과 노점상은 모두 억압받는 기층민중이라는 사실을 절절하게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을 통해 장애인과 도시빈민의 존재조건이 얼마나 열악하고 어려운지 사회적으로 주목받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 장애해방열사 단

 

이제 오랜 시간이 흘렀다. 정권도 몇 차례 더 바뀌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모여 그날을 기억하며 추모제를 준비하고 있다. 이제 우리의 삶은 나아졌을까? 아니다. 1995년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거 같다.

 

1995년 이후 철거지역의 신연숙, 민병일, 박순덕 열사와 1997년 노점상인 양승진 열사 1999년 대전의 장애인 노점상 윤창영 열사, 그리고 다행히 목숨을 건진 1996년 부산의 장애인 노점상 이동재 씨와 2002년 역시 단속으로 커다란 부상을 당한 부산의 장애인 노점상 하재명 씨, 그리고 1998년 종로 5가의 장애인 노점상 전창옥 씨, 2002년 청계천의 장애인 노점상 최옥란 열사, 그리고 같은 해 2002년 청계천 노점상 박봉규 열사, 2005년 부천역 광장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한 장애인 노점상 부부, 같은 해 국회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한 장애인 노점상 황효선 씨, 2006년 부천에서 분신자살한 장애인 노점상 주수길, 그리고 2007년 붕어빵 노점상 이근재 열사, 그리고 2009년 커다란 희생을 치른 용산참사까지 도시빈민과 장애인들의 희생은 정말 끝없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민중생존권을 무시하는 정부와 폭력을 행사하는 공권력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지금 이 시간에도 소리 없이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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