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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옥란, 그녀, 살다
엄마로서 최선을 다한, 인간적인 엄마 최옥란
등록일 [ 2012년09월04일 18시28분 ]

▲최옥란 열사.

노들바람 편집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장애인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열사분들 중에 올해 10주기를 맞은 최옥란 열사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있겠냐고. 최옥란 열사를 전.혀. 알지 못하므로 글을 쓰더라도 무지한 누군가가 그녀를 추적(?)하는 주제로밖에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다고 하니 그렇게 쓰면 된단다. 음….

 

그리하여 이 글은 시작되었다. 해방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투쟁은 더더욱 알 리 없는 사람과 함께하는 ‘열사’ 이야기. 알고 있는 것이 없기에 가볍게 말할 수 없고, 무겁게는 더욱 이야기할 수 없었던 몇 조각 글자들이 하늘에 있는 그녀에게는 ‘인간에 대한 작은 예의’로 닿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흔적을 찾아가련다.


자 그럼, 모르는 게 천 걸음일 때 한 걸음은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어야 할(?) 교장쌤을 찾아가보자.

 

최옥란, 그녀, 살다_ 장애 그리고 삶


민영 • 자기소개부터 먼저 해주세요.
경석 • 저는 노들장애인야학 교장으로 활동하고 있고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로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민영 • 최옥란 열사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나는 것들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해주세요.
경석 • 직선적인 성격이었어요. 불같고. 투쟁하면 앞에 맨날 나가고. 생각도 못했는데 혼자 나가서 도로를 다 점거해 버리고. 성격이 괄괄했지. 그런데 실제로 나는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왜냐하면 나랑 소위 같은 조직에서 활동하지는 않았으니까. 열사랑은 노들야학에 있는 학생들처럼 일상적인 관계로 만나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아, 저기 저쪽에 최옥란이란 친구가 있는데 성질 진짜 불같더라, 열심히 투쟁하는구나, 잘 투쟁하는구나 정도만 알았지요. 조금 가깝게 지내게 된 것은 2001년도부터고. 2001년도에는 이동권 투쟁을 같이 했으니까요. 그전에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하고 그런 일이 다 끝나있었죠. 그래서 개인적인 삶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고 이혼한 장애여성이구나, 이혼했다는 것도 당당하게 묻는 시절이 아니었으니까, 이 정도였죠.


 

민영 • 그럼 최옥란 열사와 가까워졌던 계기가 된 2001년도 이동권 투쟁 당시의 정서나 상황은 어땠나요.
경석 • 2001년도 오이도역에서 장애인이 떨어져 죽고 2001년도 2월 6일에 첫 번째 지하철 철로점거가 강행되는데, 특별히 알린 것도 아닌데, 소식을 듣고 열사가 왔지요. 지하철 점거는 보통 몇몇 사람들한테만 이야기했어요. 다 알려지면 사전에 막혀버리니까요. 몇 명한테만 알려서 철로를 점거하는데 내가 내려가고 난 뒤에 사람들이 내려오기 시작했어요. 그때 가장 먼저 자발적으로 내려온 친구죠.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내려올 줄 몰랐는데, 특히 장애인들이 최고로 격렬하게 투쟁을 했지요. 그때부터 열사는 같이 집회 때 투쟁하고 이동권 투쟁하고 리프트 고장 나면 또 때려 부수고 항의하고 이런 투쟁을 계속했어요. 그러다가 2001년도 겨울에 갑자기 수급권 문제를 가지고 투쟁을 하겠다고 그래가지고 말렸지.
민영 • 왜요?
경석 • 겨울에 하겠다니까.
민영 • 투쟁은 어떤 방법으로?
경석 • 명동성당에서 노숙으로. 겨울에서 노숙하면 고생한다고 좀 쉬면서 하자 했는데… 그때 이동권 투쟁도 한창 진행 중이었고…. 아무튼 그 당시 김대중 정부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만들었지만, 실질적으로 생존의 권리를 보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최저생계비 현실화 문제를 걸고 투쟁하자고… 그 겨울에 시작했죠. 말렸지만 하겠다고 해서…

 

▲장애인이동권투쟁 당시 지하철 선로 점거 투쟁에 참가한 최옥란 열사. 선로 바닥에 엎드려 있는 모습.

 

민영 • 당시 최옥란 열사가 처했던 최저생계비 상황은 어땠는데요?
경석 • 그 당시 이혼하고, 노점을 했었죠. 당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만들어져서 국가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책임지는 제도를 발표하고 시행에 들어갔는데, 수급권을 받으면 좀 더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그 상황이 전혀 그렇지 못하게 된 거죠. 이혼했지만 아들을 자기가 키우고 싶어했는데, 아이를 키우려면 일정 정도 돈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지 가능했죠, 통장에 돈이 있으면, 빌려서라도 통장에 자산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지만, 그럼 수급권이 끊기는 거죠. 또 그 당시에 한 달 수급비 26만 원 받았나? 그거 가지고 약값, 교통비, 월세 내고 나면 먹고 쓸 게 없는데 기초적인 생활 보장이 되지도 않는 돈을 가지고 먹고 살라고 하니… 그거 가지고 살 수도 없고 또 노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장애가 심해서 노동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수급권 가지고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그런 상황이 온 거죠. 그래서 수급권 투쟁에 나선 거고.


민영 • 그러면 현재의 수급권 상황은 어때요?
경석 • 지금도 최저생계비와 관련해서는 상대적으로 수급액이 올라서 지금은 한 50 몇만 원정도지만 현금은 40 몇만 원 정도고. 부양의무제 때문에 실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살지 못하고 수급권 받지 못하고 있고. 이런 모순 때문에, 결국은 수급권을 받는 사람들의 삶은 가난할 수밖에 없는 거죠.

민영 • 3월 26일에 서울역에서 있었던 최옥란 열사 추모집회 기억이 나요. 최옥란 열사를 기리며 특별히 투쟁하는 이유가 있어요? 다른 열사분들도 많으시잖아요.
경석 • 그날 3월 26일이 기일이니까.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에서 한 달 전쯤이고 해서 2001년부터 주로 농성이나 투쟁들을 진행했죠. 특히 최옥란 열사는 특히 장애인이지만은 노점상이었고 장애여성, 이혼한 여성이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차별의 요소를 가지고 살았어요. 그래서 삼중의 차별이라고 하는데 장애에 대한 차별, 여성에 대한 차별, 가난에 대한 차별. 이런 삶을 살았던 사람으로서 장애인뿐만 아니라 빈민 운동하는 사람들도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고리로 그날을 기억하는 거지요.

 

민영 • 선생님은 최옥란 열사가 겪어야 했던, 어… 뭐라고 해야 하지? 마음의 어두운 밤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절망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으세요?
경석 • 나는 둔감한 사람이라 잘은 모르죠. 이혼한 지도 오래됐고 애기랑 떨어진 지
도 오래됐고 가난한 것도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닌데…. 그런 것들 때문에 열심히 같이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마음이 약해졌는지 약을 먹었다는 것은……. 갑자기 계속 죽음의 시기를 맞이해서 힘들고 어려웠던 것들이 많이 강화되었던 것 같고 외로움이나 서러움들이 깊어진 것 같고요. 나랑 같이 활동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걱정돼서 매일 찾아간 적도 있었거든. 힘들어서 죽는다 죽는다 소리를 주변에 많이 했었죠. 투쟁할 때도 자기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계속 어려운 상황 때문에 삶과 죽음을 많이 생각했던 것 같고… 실제로도 또 그것을 그렇게 할 줄은 몰랐지만, 많이 당황했지요.

 

▲지난 3월 26일 최옥란열사 10주기 추모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노들장애인야학 박경석 교장.


민영 • 교장쌤이 지난 시절과 비교해볼 때 체감하는 변화는 어떤 것들이 있었어요?
경석 • 2001년도에는 지하철에 엘리베이터가 아주 일부만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90% 넘게 설치되고 있고 2001년도에는 저상버스 도입이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지금은 서울지역에 24%가 돌아다니고 있죠. 장애인콜택시가 300백 대가 넘게 돌아다니고 있으니 양적으로는 대단한 변화가 있지만 아직은 장애인 이동권이 평등한 수준은 아니고요.

 

활동보조인서비스가 제도화되어 있죠. 예전에 정립회관에 노들야학이 있었을 때, 야학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들이 바로 학생들을 수업받게 하고 싶어도 너무 중증장애라 모든 것을 야학 교사들이 이동시키고 했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이동도 일정 정도 담보가 되고 또 활동보조라는 것들이 있어서 좀 편하잖아요. 학생들의 삶도 달라졌고요. 그런 것들이 10년의 투쟁을 통해서 만들어진 양적인 변화이지요. 이제 마이너스 100의 수준에서 마이너스 80 수준에 왔다고 해도, 여전히 장애인이라는 특성의 문제는 사회적 낙인이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차별받고 있는 것이고….

 

민영 • 그러면 저처럼 장애나 투쟁에 대한 감수성이나 감각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최옥란을 설명해보라면 어떻게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경석 • (대답 대신 최옥란 열사에 대한 영상을 튼다.) 최옥란을 보면 마음이 아프죠. 좀 더 지키지 못한 그게… 좀 더 가까이에서 잘 지켰으면, 그런 생각을 하지요. 그랬으면 아직도 같이 열심히 투쟁하는 동지인데, 변함없이 함께할 수 있는 동지인데 그렇게 간 것이 안타깝죠.

 

아직 겨울의 냉기가 선명하고 바람은 차갑던 3월 26일 서울역, 그날. 붉은 점퍼 때문에 유난히 하얘 보이던 낯빛이 사진 속 그녀에게서 받은 인상의 전부였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처럼 손에 촛불은 들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에 그 무엇도 느끼지 못했고 얼어붙은 손마디였지만 촛불의 온기에 마음을 더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녀, 생각보다 더 깊고 무거운 고통의 굴레에서 살다 떠났구나… 고통 받는 한 인간이 삼켜냈을 수많은 불면의 밤은 얼마나 길었던 것일까.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모인 곳, 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에 찾아가면 나는 그녀를 마음으로, 더 이해할 수 있을까.


최옥란, 그녀, 살다_ 빈곤 그리고 삶


민영 •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태현 • 저는 지금 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고,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사무처장 일을 하는 김태현입니다. 최옥란 열사하고는 친한 선후배 사이였다고 해야 할까요.
민영 • 최옥란 열사는 어떤 분이셨는지 편안하게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태현 •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하는 거죠?
민영 • (웃음)
태현 • 저에게는 되게 불편하신 분이었죠. (웃음) 최옥란 열사를 92년도에 처음 만났다가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 한국뇌성마비장애인연합이 만들어지기 전, 뇌성마비연구회 '바롬'을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어요. 그때가 한창 이동권연대 투쟁이 시작될 때인데… 그때 생각해보면 최옥란 열사가 무리한 요청들을 조직에 많이 했죠.


민영 • 무리한 요구의 종류가 무엇이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태현 • ‘바깥으로 나가서 투쟁해야 한다’, 뭐 그런 요청들이 많았으니까. 그때 저희가 준비가 안 돼서 그런 것들을 진행할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던 거죠. 그때는 사무실에 소장님하고 저밖에 없고 사무국장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다른 직업을 가지고 계셨고 밤에만 오셔서 활동을 하셨어요. 담당자를 회의에 내보내거나 집회에 내보내는 것도 어려웠던 상황이었으니까요. 예를 들면, ‘장애인 생존권에 관련된 투쟁을 해야 한다’ 그런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하지만 결국 우리가 그걸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그런데 이거 해야 한다고, 그래서 이거 어렵다고 하면 막 화를 내고…. 그래서 저한테는 되게 불편했고. 그분 상황을 이야기를 들어서 이해하는 거하고 직접 그분의 입장이 되어서 이해하는 거 하고는 많이 차이가 있으니까 그거를 잘 몰랐던 거죠.

 

▲최옥란 열사 10주기를 맞아 명동성당 앞에서 열린 위령노제.


민영 • 돌아가셨다는 소식 들었을 때 마음이 어떠셨어요?
태현 • 밤늦게 최옥란 열사하고 잘 아시던 분이 전화를 했는데 란이 누나가 이상하다고 집이 그쪽인 걸 아니까 한번 가보라고. 그래서 집에 전화해서 저희 어머니한테 그 집에 좀 가보시라고. 그래서 아마 119에 신고하고 구급대원들이 와서 열사를 데리고 가는 상황이었어요. 과산화수소수를 먹었대요. 다쳤을 때 소독하는 그거를 드셨다고. 과산화수소가 이런 피부는 괜찮은데 내부에서는 접촉하게 되면 살이 녹아들어가게 된다고 해야 하나, 화상을 입은 거죠. 그때는 과산화수소를 먹었는지도 모르고 하여튼 약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광명병원으로 달려갔죠. 처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그런 생각밖에는 안 들었죠. 


민영 • 추모사업회에서 하는 일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태현 • 열사의 삶이 차별에 차별을 더한 삶이어서 어쨌든 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는 사회의 차별에 저항하는 일들을 해야겠죠. 부양의무제 폐지 1인시위도 조직했었고, 빈곤 전반에 관련된 토론회도 주최했었고 그전에 10주기 조직위라고 해야 하나, 전국빈민연합과 전국철거민연합 등 현장에서 투쟁하는 빈곤 관련 단체들하고 같이 추모위원회를 꾸려서 사업들을 진행했었죠. 기본적으로 전장연 투쟁 사업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장애여성 문제, 빈곤의 문제 그리고 함께할 수 있는 범위들이 있으면 사안마다 함께 투쟁할 계획이고요.

 

민영 • 빈곤문제에 대한 최옥란 열사의 생각이 궁금한데요. 사무국장님이 활동을 함께하셨으니까 장애문제와 빈곤문제를 바라보는 열사의 생각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 김태현 사무국장.

태현 • 사실은 빈곤사회연대라는 운동단체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 근본적인 원인이 최옥란 열사의 기초법 현실화 투쟁, 또 최옥란 열사의 죽음 때문이죠. 최옥란 열사 관련 동영상을 보시면 열사가 말씀하시는 것 중에 자기가 투쟁하는 이유는 자기 혼자만 잘살겠다는 것이 아니고… 그때 당시에도 기초법 수급액이 너무 적어서 자살하신 분들이 몇 분이 계셨어요. 그래서 이제 그렇게 자살을 하거나 삶을 포기하는 사람이 더 이상 나오면 안 되기 때문에 투쟁을 한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 부분이 있고요. 열사가 가졌던 목표는 어쨌든 수급액에 대한 현실화, 빈곤 계층 전체의 생존권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했고요. 그리고 또 그때 당시에 기초법 수급권자들이 조직화 되어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었거든요. 그렇게 외롭게 투쟁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문제를 고민하면서 만들어졌던 게 빈곤사회연대에요. 가난의 문제가 결국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는 주장을 하려고 했었고요.

 

민영 • 빈곤문제에서 수급권이 가지는 상징성이 굉장히 큰 것 같아요.
태현 •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국가의 책임을 가족에게 떠넘기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문제화 하는 거죠.
민영 • 그럼 최옥란 열사가 지금 계신다면 어떤 문제에 대해서 주목하고 투쟁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까요?
태현 • 부양의무자, 장애여성 부분이 아니었을까요? 혹시 보톡스 아세요? 보톡스가 우리나라에서 허리 아래로 시술을 하면 건강보험을 받는데 허리 위로 하면 건강보험 적용을 못 받아요. 사실 뇌병변장애인 중에 뇌성마비 장애인들, 특히 경직이 심한 장애인들한테는 보톡스가 근육 이완제로 필요한데, 보톡스뿐만 아니라 근육 이완제 자체가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되고 있어요. 그때 당시에 최옥란 열사가 한 달에 드는 생활비를 죽 계산한 내용이 있는데 그 중 그 부분이 있어요. 근육 이완제 주사가 꽤 비쌌거든요. 당시 30만 원인가 얼마 했던 것 같은데.
민영 • 어우… 큰돈이네요.
태현 • 근데 그게 또, 처음 맞을 때는 한 대 맞으면 1년 이상이 가기도 하는데 이게 점점 맞는 주기가 짧아지게 된다는 문제가 있어요. 그런데 어쨌든 건강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최옥란 열사가 수급권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의료비 부담도 없지 않아 있었거든요. 그런데 실질적으로 보톡스나 근육 이완제의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되니까 그거를 건강보험 적용을 시켜라, 그런 투쟁을 좀 여기저기 찌르고 돌아다니면서 이거 해야 돼! 그러지 않을까 싶어요.


민영 • 열사가 가진 관심의 폭이 넓다는 생각이 드네요.
태현 • 삶이 그랬거든요. 사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 뇌병변장애인들이 스펙트럼이 되게 넓어요. 그러다 보니까 아주 심한 경우에는 자세를 유지시켜 주어야 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안 그러면 척추측만증 이런 게, 뼈가 내장을 압박해서 오래 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해요. 그런데 그런 자세유지 보조기구가 건강보험 적용이 안 돼요. 그런 걸 제작을 하려면 제가 듣기로는 200만 원 이상이 소요되거든요. 그런데 국가에서 관심이 없다 보니까 품질 기준이 없어서 영세업체가 그냥 마구잡이로 만들고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어요. 그런 것 자체가 사실상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해서 계속 소외되고 있는 거죠. 어쨌든 뇌병변 장애인의 전반적인 삶이 그렇게 소외되어 있고 지금도 그런 삶이어서 아마 최옥란 열사가 살아계시면 그렇게 ‘나도 여기에 살아 있소. 관심 좀 가져 주시오.’라고 계속 목소리를 내지 않았을까요?

 

민영 • 정말 ‘살기 위해’ 투쟁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음… 이건 공통 질문인데요. 저같이 투쟁이나 이런 것들을 낯설어하는 사람들에게 최옥란을 설명해 준다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태현 • 어려운 질문이네요. (웃음) 투쟁은… 저는 그렇거든요. 절박함 때문에 시작하게 되는 거라고. 우리가 아기일 때는 뭔가 불편한 게 있기 때문에 울잖아요. 그러면 우는 갓난아기한테 엄마, 아빠가 있으면 기저귀를 갈아주던가, 젖병을 물려주던가, 문제 해결을 찾게 되잖아요. ‘최옥란 열사를 한마디로 뭐다’라고 이야기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싸움꾼’ 혹은 ‘투정꾼’…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어쨌든 최옥란 열사의 삶 자체가 이중, 삼중의 억압된 구조 속에서 계속 억압받으면서 살았었는데… 자기가 힘든 것에 대해서 계속 누군가에게 이야기했죠. 했는데… 다른 사람이 듣기에는 그게 투정이고 ‘이 사람이 나랑 싸우려고 하나’ 생각이 들 수밖에 없겠지만, 저는 사실 투정이나 싸움이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민영 • 최옥란 열사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세요? 혹은 이 인터뷰를 읽을 사람들에게…
태현 • 음… 어쨌든 세상을 바꿔보도록 노력하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최옥란 열사가 수급권 투쟁을 했던 명동성당 입구 오르막길, 열사 얼굴이 인쇄된 피켓 앞에 꽃이 몇 송이 놓여 있다.

 

프로이트는 생존을 향한 삶의 본능을 에로스(Eros)라고 했고, 그것의 크기만큼 내재해 있는 파괴를 향한 죽음의 본능을 타나토스(Thanatos)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전해 들은 최옥란은 누구보다 ‘살고자’ 애쓰며 한 군데 빈 조각 없이 삶을 태우려 애썼던 사람이었다. 어쩌면 생존과 삶을 향한 본능이 그토록 강렬했기에, 그녀의 내면에 하강하는 절망이 더 어둡고 질척거렸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삶을 욕망하였을까. 투쟁하며 싸우며, 때로는 화를 내도록 그녀를 밀어붙이던 그 지극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마지막으로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본 그녀의 지인을 찾아가기로 했다.


최옥란, 그녀, 살다_ 여성 그리고 삶


민영 • 선생님, 일단 자기소개 먼저 부탁합니다.
준 • 저는 노동현장에서 노래하는 박준이라고 합니다. 주로 노동자들을 많이 만나니까 노동가수로 소개하는데, ‘노래일꾼 박준’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아요.
민영 • 최옥란 열사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선생님께서 기억하시는 최옥란 열사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해 주시면 됩니다.
준 • 옥란이를… 만난 거는 84년… 더웠던 것 같아요. 그때만 해도 저는 명동성당청년단체연합회라고 청년회 활동을 하고 있었고, 그 근처에 친구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생활했어요. 바오로선교회라고 장애인들이 모여서 초를 만든다든가, 물건을 만들어서 자립하는 공동체가 있었는데 그때 알던 후배가 가게에 옥란이를 데려와서 알게 되었고,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주 보게 되었지요. 87년도가 워낙 암울했었죠. 장애인운동의 큰 틀보다는 장애인 스스로 뚫고 나가야 하는 것들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옥란이가 뭐 자주 아팠었으니까. 목 돌아가는 게 심해지고 그러면 신촌세브란스병원에 가서 진료도 받았던 기억이 나고. 워낙 상태가 심하니까… 그런 기억들. 그렇게 하면서 옥란이를 알음알음 통해서 많은 장애인운동하는 동생들을 알게 되었죠.


민영 • 질문의 방향을 바꿔서, 인간 최옥란이 생전에 좋아했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준 • 옥란이는 술도 좋아했고,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했어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는 노래를 참 좋아했고. 옥란이는 굉장히 인간적이고 솔직했어요. 그런데 동료들과 조직 속에서 잘 호흡하거나 그렇지는 못했어요. 굉장히 치열했어요. 운동도 그렇고, 조직 속에서는 섞이지 못했고, 섞이려고도 안 했어요. 너무 잘나서 그랬나… (웃음)
민영 • 선생님께서 최옥란 열사의 모습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이었나요?
준 • 옥란이 이야기 자꾸 하다 보니까 옥란이가 보고 싶네… 마음이 굉장히 뜨거웠고… 뜨겁기는 굉장히 뜨거웠죠.

▲노래일꾼 박준 씨.

민영 • 뭐랄까… 여린 감수성도 있었겠어요.

준 • 당연히 있었겠죠. 그러니까 이제 조직 속에 같이 어울리지 못하는 것들, 스스로 그걸 아니까. 제가 볼 때는 많이 답답하기도 하고. 조직안에서 결의가 되고 이럴 때는 같이 호흡해야 하는데 항상 사이드에 있었어요. 움직여지면 같이 호흡하고 이런 스타일 말이죠. 일상 조직 안에서는 겉도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항상 그 자리에 옥란이가 있었기 때문에 결코 겉돌았던 사람은 아닌 것 같고요.


민영 • 최옥란 열사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음이 어떠셨어요?
준 • 그건 개신교, 가톨릭 그런 걸 떠나서 예수님한테, 믿음 안에서 해서는 안 될 이야기이고, (박준 선생님, 생전의 최옥란 열사 모두 가톨릭 신자다) 자식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이죠.

 

정부에서 수급 정책이 시작되었는데 너는 지금 노점을 하니까 수급비를 줄 수가 없다, 그래서 노점을 그만두고 나니 받는 수급비가 너무 열악한 거예요. 사실 그 싸움의 시작을 옥란이가 했죠. 사회도 그렇고 여기에 대해 들어주는 것도 없고 최저임금위원회 앞에서 노동자들이 매일 싸워도 그런데 하물며 장애인 수급에 관해서 이야기해봐야 어느 누구도 신경을 안 썼었거든요. 그래서 나는 감히 옥란이가 자식이 있었고 이 아이를 키움에 있어서 남편하고 갈등도 있고 굉장히 절실했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노점을 그만두고 나서 상황이 더 열악해지니까. 맨 처음부터 죽음을 생각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런 상황까지 갈 거라고 생각을 못했었는데… 택하는 거는 순간인 것 같아요. 생각만 해도… 보내고 나면 가슴이 많이 아프죠. 많이 가슴이 아프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민영 • 그럼, 어머니로서의 최옥란 열사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준 • 장애인 동지끼리 혼례를 올리는 경우도 있고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결혼하는 경우도 있지만 장애인이 자식을 갖게 되면 달라요. 유별나요. 일반사람들이랑 다르죠. 아들은 거의 옥란이의 전부였거든요. 아들을 빼앗길 걸 생각하니까 많이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아들이 걔한테 전부였는데… 아마 아들 때문에 싸운 것도 클 거예요. 그게 옥란이는 정말 컸어요. 정~말, 컸어요. 이 아이가 전부였어요. 옥란이와 남편이 헤어지는 과정에서 아들을 키우고 싶지만 조건이 안 되는 것들, 법원 판결 이런 것들… 옥란이로서는 자식을 빼앗긴 거나 다름이 없었던 거죠.

 

민영 • 생전에 최옥란 열사가 ‘내 자식, 어떻게 기르고 싶다.’라고 했던 이야기가 있었나요?
준 • 뚜렷이 기억은 안 나지만 ‘내 자식 어떻게 기르고 싶다’ 이건 항상 이야기했죠. ‘나를 이 아기가 부끄러워하면 어떻게 할까?’라고 말하면서 설사 아들이 그렇게 느낀다 하더라도 자기는 괜찮다 그거예요. 이 녀석이 나를 부끄러워해도 나는 그것조차도 사랑할 거라고. 아마 아들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이 아이가 커가면서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그런 거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제일 가슴 아픈 거는, 제 표현이 맞을지 안 맞을지 모르지만, 아들을 빼앗겼어요. 아들을 키우고 싶었고, 키울 용기가 있었고, 장애인이라 아들을 키울 수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판결인데, 그렇게 양육권이 아버지 쪽으로 간 걸로 기억을 해요. 포기하면서 가슴앓이가 아주 심했을 거예요. 옥란이한테는 아들이 전부였는데.


▲장애해방열사합동추모제에서 최옥란 열사의 영정.

민영 • 판결이 그렇게 되고 나서, 자기의 전부가 잘려나간 느낌이었을 것 같아요.
준 • 그렇죠. 옥란이가 되게 어렵게 아이를 낳았던 거였거든요. 자식은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얼마나 큰 축복이에요? 이 아이가 성장하며 부모 곁을 떠나가는데 이 녀석에게 잔가지를 쳐주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해주고 싶은 과정이 많은데 그걸 빼앗겨 버렸으니까. 자기가 자식을 낳고 산다는 거 자체를 상상 못했었는데 사랑을 해서 만난 사람과 그 사이에 자기의 분신을 만들었잖아요. 얼마나 행복해했는데요. 아들만 생각하면 뭐 너무 행복해했죠. 그렇게 됐을 때는 거의 뭐 몸뚱어리가 떨어져나가는 그런 느낌이었을 거예요. “오빠, 나 아기 낳았어.” “그래, 알았어 인마. 엄마는 아기다 낳는 거야.” “형, 내가 아기를 낳았다니까.” “그래. 알았어.” 그랬죠. 자기도 너무 아픈 상태에서 낳았으니까. 뇌성마비 여성들이 아기 낳기가, 잘은 모르겠는데 흔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요. 기억이 나요. 너무, 자랑도 무지하게 했고.
민영 • (웃음) 뭐라고 자랑하셨는데요?
준 • 자기가 자식을 낳은 것에 대한, 엄마가 됐다는 것에 대한…

 

민영 • 인터뷰한 분들께 하는 공통 질문인데요, 투쟁이나 이런 것들에 대한 감수성을 잘 모르고 낯설어하는 사람들에게 '최옥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준 • 옥란이가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거는 엄마로서의 투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내 새끼를 지키고 싶고 그랬던 것들이 가장 컸다고 생각해요. 그 당시에 엄마로서 최선을 다한, 정말 다분히 인간적인 엄마 최옥란. 위에서는 맨날 아들 보고 있겠죠. 잘 크고 있나, 무언의 이야기를 해주고 있을 거예요. 자주 만나겠죠.


민영 • 최옥란 열사에 대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세요?
준 • 많이 미안하다.
민영 • 뭐가 미안하세요?
준 • 그런 거죠 뭐. 다분히 저도 인간적인 생각이지만, 워낙 미움이 컸었고, 옥란이를 많이 미워했어요. 미움은 무시하고 다른 단어잖아요. 미움이 너무 크면 진보가 될 수 있다고, 이놈은 이렇게 가면 안 되걸랑요. 이렇게 죽을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이놈이 죽으면 안 되는 놈이에요. 지금도 너무 화가 나고, 인간적으로 잘못하고 이런 건 문제도 아닌데, 미워요. 이렇게 가버리니까… 아들이 얘한테 전부였어요. 미안해, 많이 미안해… 옥란이 추모 사이트가 있어요. 어쩌다 들어가면 옥란이는 늘 외로워요. 사람들의 마음이 멀어진 건 아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힐 수 있고 항상 좀 쓸쓸해요 이놈은 항상 외로웠으니까. 사람이 다가갈 수 있는 한계가 있잖아요. 사람이 ‘나는 너를 다 이해할 수 있다’는 위선이라고 생각해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항상 이놈은 멀리 있어요. 늘 멀리 있으니까, 동지에서도 좀 멀리 있었던 기억이 나고. 가끔 추모 사이트에 들어가면 흔적이 없어요. 사람들이 없어서 그게 많이 미안도 하고 그래요.
(인터뷰가 끝나고 다 먹은 해장국을 앞에 둔 박준 선생님, 읊조리듯 말한다.)
준 • 옥란이 하고는 기억이 막 야단치는 것밖에 없어. 사무치는 기억들… 장애인 이런 거 다 떠나서 오빠같이 그랬던 게 많지…. 옥란이에 대한 기억은 다 추억이죠…. 뭐 다 아픔이고…

 

▲벽제중앙추모공원에 있는 최옥란 열사 납골함.

 

가끔씩, ‘사랑한다는 것’은 ‘집착과 고통이라는 감정을 겸하여 감당하겠다.’라는 말처럼 이해될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진하고 끈적끈적한 감정이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라고 믿는다. 적어도 내가 만난, 혹은 내가 경험하고 있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는 것은 그렇다. 열 달 동안 기른 분신을 배 아파 낳아본 자만이 그 마음, 헤아릴 수 있으리라. 자식이 내 목숨보다도 소중하게 느껴지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말하던 수많은 어머니의 대답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다.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그 모질고, 징글징글한 혈육의 정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을 때, 생의 목적을 잃은 영혼도 함께 주저앉았을 것이다. 뚫려버린 텅 빈 가슴은 죽음을 닮은 절망으로 채울 수밖에 없었으리…


나는 아직도 ‘열사 최옥란’을 잘 모른다. 다만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아들을 남기고 떠난 한 여성이 있었다는 것,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울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이 살았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그렇게 살아 있는 자에게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는 일은 늘 쉽지 않다. 더욱이 그 죽음이 생의 가장 깊은 고통을 홀로 거두어 떠난 자의 것일 때 그것을 더듬는 일은 더더욱 마음이 쓰다. 적어도 짧고 뜨거웠던 그녀의 삶을 미약하게나마 가늠해 보았기에 다음 해에 맞게 되는 기일은 아마도 올해의 그것과 같게 느끼지는 않으리라 생각해 볼 뿐……

 

다음 해의 기일이 올해처럼 춥다면, 곱은 손에 쥔 촛불의 따뜻함이 나에게도 온기가 되어 다가오기를 바랄 뿐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녀의 죽음을 반추하는 지금의 부족함을 조금이나마 이해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방도, 투쟁도, 열사도- 아직은 멀고 무겁고 어렵다. 다만 그녀, 이 땅에서와 같지 않은 저 하늘의 평온함을 아들과 함께 누리며, 편히 쉬시기를 바라고 또 바라본다.

 

 

* 이 글은 노들바람 2012년 여름호에도 실렸습니다. 서민영님은 지난해부터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선생님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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