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09월23일mon
기사최종편집일  최종뉴스편집일
비마이너로고
news
뉴스상세검색 버튼
기사등록 기사제보
전체메뉴 펼침
HOME 뉴스홈 > 뉴스 > 사회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쪽지신고하기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한국형 복지의 살아있는 과거, 형제복지원에 묻는다
[기획] 형제복지원 사건 다시보기 ③
현재 진행형인 ‘수용과 감금의 역사’에 던지는 질문
등록일 [ 2015년06월19일 21시51분 ]

지난해 7월 발의된 형제복지원특별법안이 제대로 된 논의도 진행되지 않고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이달 임시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한다면 내년 총선 등에 밀려 사실상 19대 국회에서 처리하기 어려워 질 수 있는 상황이다. 즉, 지금이야말로 형제복지원특별법 제정을 통해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다.


이에 비마이너는 다시 한 번 형제복지원 사건의 역사적 중요성과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짚어보는 기획을 연재한다. 앞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구술기록팀’에서 활동한 서중원 씨의 기고를 통해 ‘부랑인’이라는 낙인의 존재가 국가-시민사회의 공모 속에서 탄생했던 배경을 살펴봤고, 이어 현재 국회 앞에서 노숙농성 중인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한종선 씨와의 인터뷰를 전했다.


이번 기획의 마지막 편인 이번 글에서는 하금철 기자가 형제복지원 사건 관련 자료들을 검토하면서 떠오른 의문과 이 의문의 해결이 우리 사회에 왜 중요한 과제가 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의견을 기자 칼럼 형식으로 전하고자 한다. - 편집자 주

 

수용 인원 3천여 명, 공식 기록상 사망자만 513명. 군대식 편제, 일상적인 감금과 폭력.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여전히 겪고 있는 트라우마. 1987년 처음으로 그 참상이 드러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을 요약하는 말들이다.


사실 지난해부터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높아지는 것을 보고 살짝 의아한 생각도 들었다. “사건이 드러난 지도 30년 가까이 되었고, 고작 2년 반 정도이긴 하지만 해당 시설 원장도 실형을 살다 나온 이 사건을 이제 와서 밝힌다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미안한 말이지만, 사건의 끔찍함으로 치자면 우리나라에 그만한 비극적 사건은 널려있지 않은가?” 이런 의문들이 쏟아지는 통에, ‘피해 당사자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서’라는 당위만으로는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결정적인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이러한 의도치 않은 냉소가 깨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 형제복지원 관련 기록과 다른 수용시설 관련 문헌들을 찾아보면서부터다. 그러면서 형제복지원은 여러 시설 사건들 중에서도 굉장히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여전히 해결과제가 산적한 시설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해왔던 분들에게는 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이러한 고민의 몇 단락을 털어놓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수용소, 형제복지원


흔히 형제복지원 사건을 ‘한국판 아우슈비츠’라고 부른다. 사건의 비인간성과 비극성, 그리고 참혹함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표현이지만, 사실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이 둘은 큰 차이점이 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아우슈비츠는 2차대전 당시 독일이 유태인 등을 집단 학살하기 위해 만든 거대 수용소이다. 여러 다른 이유가 많겠지만, 아우슈비츠는 무엇보다 전시(戰時)라는 특수한 상황이 작용했고, 또한 유태인을 중심으로 한 특정한 민족 집단을 수용 대상으로 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아우슈비츠의 존재를 정당화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우리는 아우슈비츠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반성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에 대한 해답을 이 지점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형제복지원의 경우는 어떤가? 형제복지원의 팽창을 실질적으로 가능케 했던 ‘내무부 훈령 410호’가 나온 1975년부터 그 추악한 실체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1987년까지의 시기는 전시(戰時) 상황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우리는 이때를 한국전쟁의 참상을 딛고 산업화로 도약하던 시기로 기억한다. 분단과 휴전, 군사정권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한다 해도, 형제복지원은 여느 군사독재 국가에 늘 있는 정치범 수용소와는 다르다. 한 발 더 나아가보면, 형제복지원에 수용되었던 사람들은 (아우슈비츠가 대상으로 했던 ‘유태인’과 같은) 민족적 동일성을 기반으로 한 것도 아니고, 딱히 장애인이나 노약자 수용이 목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부랑인’이 그 대상이었는데, 이 ‘부랑인’ 낙인조차 수용 후에 정신교육 등을 통해 사후적으로 주입했다. 적잖은 피해생존자들이 ‘공원에서 잠을 자다가’, ‘늦은 시간까지 시내에서 놀다가’, ‘퇴근길에 난데없이’, ‘부산에 놀러 왔다 차가 끊겨 부산역 대합실에서 기다리다가’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대부분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들이긴 하나, 단순히 ‘가난’이 기준이 된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 일이다.

 

▲2차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모습을 담은 그림.


또 하나의 비교 대상을 찾자면, 서구 자본주의 발전 초기에 늘어나는 빈민 통제와 노동력 확보를 위해 만들어진 영국 엘리자베스 구빈법 시대의 구빈원(workhouse) 등 강제노역장이 있겠다. 이들 강제노역장이 추구했던 것은 ‘게으름’에 대한 도덕적 단죄와 근대적 노동윤리를 빈민의 신체에 새겨 넣는 것이었다. 1600년대 독일 함부르크의 강제 노동 보호소 입구에 걸려있던 “나는 노동을 통해 살고 노동에 의해 처벌 받는다”라는 표어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1) 물론 형제복지원에서도 엄청난 강제노동이 자행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이와 동일시 할 수 없는 것이, 앞서 말했듯 형제복지원에는 멀쩡한 집과 직장이 있는 사람들도 잡아갔으며, ‘부랑인’이라는 낙인은 사후적으로 주입된 것이다. 게다가 이들에겐 느닷없이 ‘빨갱이’라는 낙인까지 함께 덧붙여졌다.

 

이 때문에 형제복지원은 그야말로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한국적인 수용소’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래서 “7-80년대 경제성장의 시기에, 이처럼 불특정 다수의 시민을 포획하는 거대한 수용소가 왜 한국 제2의 도시 부산에 만들어 졌는가? 그걸 누가 지시했으며, 왜 그랬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과연 이런 일이 박인근 원장 개인의 판단으로 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이런 참상이 벌어지는 동안 국가와 지역사회는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우리가 밝혀야 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


시설수용과 감금을 묵인한 89년 형제복지원 판결은 ‘현재진행형’


하지만, 이 의문에 대해 답해야 할 이유가 단지 피해생존자들의 한을 풀고 인권을 회복해야 하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30년 가까이 지난 세월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형제복지원의 그늘에 살고 있고 그 그늘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잠시 87년 당시 박인근 원장 등에 대한 재판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을 살펴보자.2) 당시 박인근 원장은 85년 말부터 87년 1월까지 형제복지원 피수용자 중 168명을 울주작업장으로 보내 경비원 감시 아래 낮에는 강제노역을 시키고, 밤에는 피수용자들이 숙박하는 기숙사 건물로 사용되는 창고 및 축사의 외부에서 문을 잠그고, 도주하는 경우 목봉 등으로 구타하는 등의 위력을 행사해 감금했다는 혐의(특수감금죄)로 기소됐다. 이는 형제복지원 본 시설에서 벌어진 수용과 감금을 다룬 것이 아니라 이로부터 60여km나 떨어진 울주작업장에서 벌어진 특정 행위에 대해서만 ‘감금’이라 규정하고 기소한 것이어서 기소 자체에 분명한 한계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마저도 법원은 7차례에 걸친 재판 끝에 89년 7월 결국 무죄로 확정 지었다. 대법원이 무죄 판결을 내린 근거의 대강은 이렇다. “사회복지사업법 등에 의해 부랑인의 선도보호를 위하여 설치된 사회복지시설의 장은 부랑인의 보호위탁을 받은 경우 부랑인들의 이탈방지를 위한 경비, 경계를 철저히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부랑인들을 수용기간 동안 수용시설로부터 이탈하지 못하도록 이들의 행동의 자유를 제한한 조처는 법령에 의한 정당한 직무행위”라는 것이다.


결국 형제복지원 시설수용 자체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고, 고작 원장이 사적인 공간에서 일(자동차운전 교습소 신축)을 시키고 잠을 잘 때 자물쇠를 채운 것에 대해서만 문제가 되었지만 이조차도 무죄라는 것이다. ‘부랑인’이라 지목된 사람들에 대한 수용은 애초에 합법이고, 그들에 대한 감금은 시설장이 어떤 판단에 따라 집행했건 정당하다는, 헌법에 명시된 ‘신체의 자유’를 가볍게 비웃어버리는 판결이 나온 것이다.

 

▲87년 당시 형제복지원의 진상을 보도한 기사 (동아일보 87년 2월 2일자 11면)

 

이런 사실을 앞에 두고, ‘옛날엔 다 그랬지’라고 웃어넘길 수 있을까? 헌법에 규정한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면서 인신을 구속하고 영구적 감금 조치가 행해지는 것은 오늘날 한국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지난해 8월 보건복지부가 국회에 제출한 ‘정신요양시설 59개소 장기 입원자 현황 자료’에 따르면, 전체 입원자 1만951명 중 가족 및 지자체에 의한 입소가 총 9827명으로 타인에 의한 강제입원 비율이 90%에 달했다. 게다가 이들 중 15년 이상 장기 입원자 수는 전체의 29%에 달하고, 30년 이상인 자도 500명을 넘어선다. 정신질환이 있으니 강제입원 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세계 어느 나라도 가족과 정신과 전문의의 자의적 판단으로 개인의 인신을 이토록 장기간 구속하고 감금할 권한을 준 나라는 없다.


어디 이 뿐인가? 지난해에 몇몇 요양병원들이 서울역 등 역사 인근의 홈리스를 술과 담배 등으로 유인해 사실상 이들을 감금한 일이 드러나 문제가 된 바 있다. 이른바 ‘일당정액제’라는 현행 요양병원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홈리스를 환자로 둔갑시키고 건강보험 급여를 빼먹는 돈벌이를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병원들은 자격 없는 치료사들의 신체억제대 사용, ‘코끼리주사’라 불리는 신경안정제의 불법적 투약 등 정상적인 병원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을 자행했다.


여기에 전국 수많은 장애인생활시설에서 ‘형기 없는 감옥’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하자면 입이 아플 지경이다. 게다가 이런 시설의 수는 갈수록 더 늘어나 지난 5년간 신설된 곳(252개소)이 폐쇄된 곳(60개소)보다 무려 4배나 더 많은 실정이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이 수용과 감금의 현실은 분명 30년 전 세상에 드러났지만 온전히 처벌되지 못한 어두운 과거의 연장이다. 오늘날 장애인계 및 사회복지계가 형제복지원이 남긴 과오에 침묵하면서 과연 ‘탈시설’과 ‘인권’을 말할 수 있을까? 국가와 민간시설 결탁 속에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반헌법적 신체 감금의 역사적 뿌리를 캐내지 않고 우리의 인권 현실이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나갈 수 있을까?

 

▲형제복지원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 앞에서 삭발을 하고 있는 피해생존자들.


현재 6월 임시국회에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특별법이 처리되길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 법안의 주무부처인 행정안전부는 ‘현 정부는 과거사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다루지 않는다는 기조여서 (법안의 처리가) 사실상 어렵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정부의 이 냉혹하고 잔인한 발언 앞에서, 우리는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충실히 해석해 전한 책 『생존자』에 실린 저자의 목소리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히틀러가 그의 참모들에게 유태인 대량학살의 구상을 제의했을 때, 세계의 양심을 무마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은 “결국 오늘에 와서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에 대해 떠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가공할 만한 파괴 수단을 가진 사람들은 죽음이 삶 보다 더 강하다고 믿고 있으며, 또한 이것이 우리 시대의 힘의 논리인 것이다. 그들은 죽어간 인간의 뼈와 살 위에 위축된 침묵을 강요할 수 있다고 믿는다." (테렌스 데 프레, 『생존자』, 99-100쪽)


양식 있는 세계시민이라면 누구나 히틀러가 아우슈비츠에서 자행한 대량학살이 잔인한 범죄라고 생각하는 21세기에, 고작 30년 전에 벌어진 의문의 죽음과 인권침해에 대해 침묵한다는 것은 너무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그리고 이제는 형제복지원에서 죽어간 513명의 사람들의 ‘뼈와 살 위에 위축된 침묵을 강요할 수 있다고 믿는’ 저 오만한 정부에게 강한 일침을 놓아야 할 때가 아닌가.

 

각주 1) 브로니 슬라프 게레멕, 『빈곤의 역사』, 길, 264쪽 

 

각주 2) 아래 판결 내용 정리와 이에 대한 평가는 신권철, 「시설수용과 감금의 모호한 경계 - 형제복지원 판결과 그 이후」, 사회보장법연구, 2014년 제3권 제1호에서 인용. 

올려 0 내려 0
하금철 기자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텔레그램 비마이너 구독하기 비마이너 paypal로 일시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비마이너 정기후원하기 새창으로열기
무통장입금 정보입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관련뉴스]
[기자수첩] 역사교과서, “부끄러움을 가르칩시다”
“벗어나고 싶다, 진짜로. 벗어나고 싶은데…”
‘부랑인’으로 지목된 자들, 국가-시민사회에 의해 추방되다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정신장애인 놀이기구 탑승 안돼"...에버랜드, 법원 권고도 거부 (2015-06-22 20:53:14)
인천서 저상버스로 시내 나오기, “세월아 네월아” (2015-06-18 19:47:12)
비마이너의 아름다운 유혹, 독자 인터뷰 비마이너의 아름다운 유혹, 독자 인터뷰 더보기
제9회 세계인권도시포럼, 인권의 도시는 상상하라! '시설없는' 사회를~, 뉴질랜드 people first에서 발달장애인 자기옹호 운동을 듣다!
신간소개기사보기 도서 구매하기
기고 칼럼 기자칼럼

기고 작은이미지
“나의 괴물 장애아들, 게르하르트 크레취마르가 잠...
2003년 10월 베를린에서 진행된 한 행사에서 명단 하나가 발표...

두 살에 와서 서른아홉까지 시설에서 살...
“시설에서 제일 좋았던 기억? 없어요”
선택권도, 미래도 없던 시설의 삶
Beminor SNS 비마이너 페이스북비마이너 트위터비마이너 텔레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