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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때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사회복지법인 향림원에서 ‘내부고발’ 하고 나온 아이들

온종일 벌서고, 이유도 모르고 맞았던 나날
등록일 [ 2015년08월22일 11시08분 ]

사회복지법인 향림원. 향림원은 경기도 광주에 특수학교인 동현학교를 비롯해 장애인거주시설인 품안의 집, 향림재활원 등 총 8개의 산하 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거주시설 내 인권침해 의혹이 제기되면서 시설 밖으로 문제가 불거졌다. 이어 동현학교 급식 비리와 최근 사회복지법인 이사회 선임을 둘러싼 문제까지 연이어 터지면서, 향림원은 지난해에 이어 현재까지 ‘정상화를 위해’ 급박하게 흘러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던 중 지난 5월 말, 향림재활원 거주인이자 동현학교 학생인 김창민(18세, 시각장애 4급, 이하 모두 가명)은 급박하게 시설에서 나와야 했다. 뒤이어 문주형(18세, 지적장애 3급), 문주운(17세, 지적장애 3급), 조현선(16세, 뇌병변장애 2급)도 시설을 나온다. 이들은 모두 향림재활원 거주인이자 동현학교 학생이었다.

 

이들은 어떠한 이유로 다급히 시설에서 나오게 됐으며 그동안 내부에선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문제 시설’로 제기된 곳에서 살았던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향림원 내부를 들여다봤다. 김문동 전 이사장을 제외한 아래 기사에 나오는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저는 때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잘못하면.”
“맞는 거요?”
“네, 어렸을 때부터 때리는 걸 많이 봤어요.”

 

“향림원에서의 생활은 어떠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창민의 즉각적인 대답이었다. 창민은 2살 때 향림원에 왔다. 부모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향림원엔 중증지체장애인 거주시설인 ‘품안의 집’과 지적·발달장애인 거주시설인 ‘향림재활원’이 있다. 거주인은 각각 100명가량 된다. 향림원 내 시설 거주인들은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특수학교인 동현학교에 다닌다. 정원이 100명가량 되는 동현학교 학생의 60%는 시설 거주인들이다. 품안의 집에 살던 창민은 초등학교 3학년 때 향림재활원으로 왔다. 옮겨진 이유는 자신도 알지 못한다.

 

▲사회복지법인 향림원 산하 장애인시설 '품안의 집'

 

창민의 기억에 따르면 2010년 이전엔 거의 매일 기본적으로 네다섯 시간가량 벌섰다. 그는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거나 한 시간 정도 손 들고 벌 받는 것은 “어느 정도 괜찮았다”고 한다. 그러나 하루 절반을 벌만 서게 되는 날엔 버티기 힘들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혹은 저녁 6시부터 다음 날 아침 6시까지. 밥 먹고 벌서고, 밥 먹고 벌서고. 아이들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거나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벌을 받았다. 그들이 훔친 것은 주로 현금이나 간식, 타인의 ‘멋진 옷’ 같은 것이었다. 벌설 땐 엎드려뻗쳐를 하거나 오토바이 타는 자세를 한 채 팔을 앞으로나란히 뻗었다. 팔 위에는, 아이들 표현을 빌리자면 “노트북 다섯 개 올린 것 같은 무게의 책”이 올라왔다.

 

주형, 주운은 형제다. 보육원에 살던 형제는 2009년에 향림재활원에 왔다. 주운이도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벌선 적이 있다. 어느 날엔 창문을 뛰어넘다 걸려 성경을 베껴 쓰는 벌을 받았다. 주운인 그게 “고문 같았다”고 했다.

 

시설에서 폭행은 일상이었고 그만큼 아이들은 다른 이들이 맞는 것도 자주 보았다. 재활교사에게 맞아 거주인이 기절한 적도 있었다. 2010년경 시설 거주인 영석은 ‘베컴 머리’를 해서 멋 부린다는 이유로 재활교사에게 지하실로 끌려가 기절할 때까지 맞았다.

 

그러나 모든 재활교사가 폭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악독했던 몇몇 사람이 있었고, 그들로 아이들은 자주 괴로웠다. 아이들에 따르면 한동안 잠잠해졌던 시설 내 폭력은 2013년 초에 김주찬 선생이 들어온 뒤 되살아났다. 어떤 거주인은 밥을 안 먹는다는 이유로 김주찬 선생에게 주먹으로, 슬리퍼로 맞았다. 그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시로 거주인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겼고, 복도를 지나가다 어깨라도 부딪히면 그 또한 그에겐 폭행의 단서가 됐다.

 

현선도 그 피해자 중 한 명이다. 현선은 시설 바깥 청소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폭언을 들으며 맞았다. 현선은 향림원에 입소한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창민보다는 늦게 왔고 주운·주형보다는 먼저 시설에 있었다.

 

아이들은 시설에서 아침 6시에 일어나 7시에 밥을 먹고 8시에 학교 갈 준비를 마친 뒤 방 청소, 시설 바깥 청소를 했다. 학교엔 오전 9시에 가서 오후 3시까지 수업을 듣고 3시부터 5시까지는 방과후 프로그램인 음악치료, 핸드벨 치료 등에 참여했다. 방과후 프로그램은 하기 싫어도 해야 했다. 저녁 5시 이후엔 9시 취침 이전까지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주로 티비를 보거나 컴퓨터를 했다. 시설에선 아침 기상 시간과 취침시간을 반드시 지켜야 했다.

 

방학 땐 동현학교에 다니지 않는 성인 장애인들과 함께 시설 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래 봤자 영화 보기, 요리하기가 전부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오전밖에 하지 않았다. 방학 때도 이럴 진대 학교에 다니지 않는 성인 장애인들은 평소에 어떻게 지낼까. 창민에 의하면 그들은 오전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낮엔 시설 측에서 티비 전원조차 못 켜게 하여 “그냥 멍 때리고 앉아있었다”고 한다.

 

# 한 달 용돈 1만 원… 그중 절반은 다시 시설에

 

시설 거주인의 용돈과 통장은 시설 재활교사들이 관리했다. 거주인들에게 매달 1만 원의 용돈을 줬는데, 그 1만 원도 거주인이 아닌 재활교사들에게 지급되어 관리됐다. 그러나 1만 원의 용돈마저 완전히 거주인의 몫은 아니었다. 시설은 헌금 명목으로 용돈에서 매주 천 원씩 걷어 갔고, 원장 생일이 있는 달엔 선물비 명목으로 2천 원을 더 가져갔다. 결국 거주인들은 1주일에 천 원, 고작 시설 내 매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을 수 있는 돈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도둑질 엄청 많이 했는데…” 한 아이가 흘리듯 말했다.

 

이러한 절대적 궁핍 속에서 시설 내 사람들이 서로의 것을 노린 건 당연했다. 종종 가족이 와서 용돈을 주고 간 거주인들이 주요 타겟이었다. 시설 내에선 한 번에 최대 천 원밖에 가지지 못하기에 1, 2만 원만 있어도 그는 ‘부자’였다. 가족이 주고 간 돈에 대해선 재활교사들도 터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돈의 주인이 돈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터지기라도 하면 그 방엔 비상이 걸렸다. 범인이 밝혀질 때까지 아무도 ‘그 방’을 나올 수 없었다.

 

한 방엔 최소 7명에서부터 10명이 같이 살았으며 각 방을 지키는 재활교사가 한 명씩 있었다. 방엔 유치원생부터 4~50대 중년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섞여 살았다. 그들 서로 간엔 싸움이 잦았다. 때론 유치원생과 40~50대가 싸울 때도 있었다. 싸움은 주로 시설에서 배급하는 장난감을 나누는 과정에서 발생했는데 장난감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원하는 이는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신히 이를 차지한다 해도 시설의 말을 듣지 않으면 곧 다시 빼앗겼다.

 

하지만 이러한 폭력이 잠잠해질 때가 있었다. 재활교사들의 기분이 좋을 때다. 그래서 거주인들은 재활교사들의 기분을 좋게 해줘야 했다. “몇 년 동안 한 방에서 같이 살아야 하니깐, 안 그러면 같이 살기 힘들어요.” 그들이 말했다. 그래서 생일 땐 돈을 모아 선물했다. 선물비는 부족한 용돈에서 긁어모아야만 했다.

 

여느 시설이 그러하듯 향림원도 시설 밖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다. 그런데 시설 안 이동도 교사들의 허락하에 움직여야 했다. 자신의 방에서 친구 방으로 이동하는 것까지 교사들의 허락을 받아야만 갈 수 있었다. 감옥 같았다.

 

그럼에도 시설 거주인들은 시설 재활교사들을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렀다. 시설 측이 거주인들에게 ‘친근감 있게’ 부르라며 시킨 것이다. 그러나 시설에 인권침해 조사가 이뤄지고 이러한 호칭 사용이 문제시되면서 올해 4월부터는 바뀌었다.

 

향림원 내에서도 강제 예배가 이뤄졌다. 이는 특히 2012년 김문동 전 이사장의 사망을 전후로 더 강해졌다. 김 전 이사장이 사망하기 전엔 쾌유 기도를 하고 사망 이후엔 추모회가 계속 열렸다. 시설 거주인들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곳에 참석해야 했다. 기도는 하루 세 번, 아침·점심·저녁으로 열렸다. 기도할 땐 그룹마다 한 명씩 대표로 10~20분가량 기도를 진행해야 했다.

 

향림원에서 대두되었던 문제 중 하나는 급식 문제다. 동현학교 내엔 급식실이 없어서 학생들은 품안의 집과 향림재활원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중증장애인들은 품안의 집으로 가고, 식사가 스스로 가능한 이들은 향림재활원에 가서 먹었다. 그럼에도 법인은 교육청에서 급식비를 받아 이를 착복했다. 동현학교 급식 비리가 알려진 건 동현학교 급식이라며 찍힌 몇 장의 사진이 온라인상에 퍼지면서부터다. 동현학교 관계자 ㄱ 씨 또한 “다른 학교에 비해 급식 질 자체가 상당히 떨어졌다”고 말했다. 향림원에선 거주인들에게 종종 먹고 싶은 메뉴들을 적어내라고 했지만 이는 형식상일 뿐 반영되진 않았다. “써도 안 나왔어요. 우리가 기린도 아니고. 맨날 기린이 먹는 것만 나왔어요.” 아이들이 먹고 싶었던 고기는 매우 드물게, 간혹 1주일에 한 번 정도 나왔다.

 

# “바깥에 이야기하면 혼난다” 학교 선생님에게도 얘기 못 해

 

그러나 이러한 시설 내 폭력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 동현학교 교사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하기 힘들었다. 창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 어떤 선생님들에게도 선뜻 이야기하지 못했다. 시설 재활교사들이 바깥에 이야기하면 혼낸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년부터 계속된 ‘향림원 사태’가 아이들에겐 어떻게 비쳤을까.
 

“잘 모르겠어요. 어른들 싸움이라는 게, 어려워요. 그냥 사이가 안 좋았어요. 학교랑 원이랑.”
“방에만 있었는데요. 관심 없었어요.”

 

아이들의 눈에 ‘향림원 사태’는 어른들의 세계였다. 동현학교 교장은 향림원 법인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했고 법인 역시 이에 응수하며 싸움은 더욱 격렬해졌다. 법인 시설에서 살며 학교에도 다니는 아이들은 긴장감으로 위축됐다. 시설에선 시설 편인 척, 학교에선 학교 편인 척했다. 그러나 그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 아니, 그 누구의 편도 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동현학교 관계자 ㄱ 씨는 정작 이 싸움의 주체가 되어야 할 아이들이 싸움의 과정에서 소외되었다고 말한다.

 

“교사들이 교권 침해받은 부분이 있고 법인이 비리를 저지른 건 사실이기에 (이 싸움이) 유의미하긴 하나 실제로는 아이들 문제였어요. 그곳은 아이들의 삶의 터전이거든요. 그러나 아이들이 중심인 적은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시설 내 자유로운 분위기를 원했고 고등부의 경우 자립하기 위한 독립적 생활을 요구했지만 이는 지원되지 않고 있어요. 수급 통장도 시설이 관리했고 아이들은 원치 않는 방과후 활동에도 참여해야 했어요. 아이들은 불만이 많았는데 아이들 이야기를 귀담아들어 줬던 교사는 없었습니다. 투쟁을 위해선 아이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필요했지만 세심은커녕 무심한 거죠. 법인도 학교도 아이들을 위해 싸운다고 했지만 그런 건 보지 못했습니다.”

 

창민이 시설에서 나오던 그 날도 그랬다. 더는 침묵할 수 없다고 생각한 창민은 이를 담임선생님과 교장 선생님께 이야기했다. 선생님들로부터 비밀 보장을 약속받은 뒤, 창민은 자신이 아는 모든 폭력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창민이 학원에 간 사이 광주시청 사람들과 비대위 측 사람들이 찾아왔다. 비밀 보장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시설 내 폭력에 대해 털어놓은 창민으로선 더는 시설 안에 머무를 수 없었다. 보복이라도 당할까 두려웠다. 창민은 다신 향림원에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길로 창민은 정해진 거처도 없이 시설을 나와야 했고 담임선생님 댁에서 2주간 머무르게 됐다. 그 뒤로 창민이 진술에서 폭력 피해자라고 지목한 주운·주형이 나오고, 현선이 나왔다. 현재 이들은 각자의 상황에 맞는 거주지를 찾아 안정적으로 생활 중이다.

 

창민은 16년 동안 향림원에 살았지만 시설 안팎에서 이번처럼 적극적으로 시설 문제를 조사한 걸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시설 조사가 행해졌을 때 반가웠고 다행스러웠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늘이 살아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열여덟 해의 삶 중 대부분의 시간을 시설에서 갇혀 살다시피 지냈던 창민.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오랜 시간 시설 바깥의 삶을 꿈꾸었던 창민에겐 기회이기도 했다.

 

“보치아나 골볼 같은 장애인운동 코치가 되고 싶었어요. 언젠가 시설에서 탈출해서 미래를 개척할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시설 나갈 기회가 생겼을 때 바로 나가기로 결정할 수 있었죠. 지금은 살 만해요. 공부는 더 해야 하지만 그래도 미래에 대해선 더 수월해졌어요. 적응은 차츰차츰 나아지니깐.”

 

요즘 창민은 지적장애인이 대부분이었던 동현학교에선 채워지지 않던 공부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하고 있다. 아니, 그곳에 있다가 이곳의 수업을 따라가려니 꽤 벅차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은 삶이다. 주운, 주형, 현선 역시 마찬가지다. 이곳에선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다. 이를 사람들은 ‘자유’라고 한다. 여기에 자유가 있다.

 

위치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다르듯,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향림원 사태의 양상 또한 달리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설 내 거주자들에겐 현재 상황이 어떻게 보일까. 우린 아직 시설 거주인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지 못했다.



[향림원 관련 보도문]

 
본 인터넷신문 2015년 8월 22일자 향림원 보도와 관련하여, 장애인 인권침해 사안에 대해 1심에서는 무죄판결이 내려졌고, 급식비 횡령 혐의 및 후원금 사용과 관련하여 검찰로부터 “혐의 없음” 처분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 조정에 다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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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민 기자 skpebble@beminor.com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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