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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코끼리'와 '주토피아'가 공유하는 혐오의 사상, 사회진화론적 문명사관
혐오담론 씹어먹기 세미나 ⑤
등록일 [ 2016년07월01일 17시35분 ]
[편집자 주] 끔찍한 말들이 떠돌고 있다. 할퀴는 말, 증오를 선동하는 말, 차별과 폭력을 부르는 말, 무엇보다 그걸 즐기는 말들이. 그 말들은 말할 권리를 갖지 못한 자들, 권력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소수자들을 겨냥한다. 여성, 동성애자, 이주자, 장애인 등 소수자에 대한 혐오의 담론이 분출하고 있다. 언제 부터일까, 대략 2000년대 이후 온라인의 ‘일베’와 오프라인의 개신교 우파를 중심으로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와 차별과 폭력을 선동하는 담론이 노골적으로 유포되고 있다. 작금의 혐오담론은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을 무분별하게 표현하는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 위기를 반영하는 사회적 담론으로, 20세기 초반의 파시즘과 유사한 정치적 욕망의 표출이다.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혐오 담론의 실체는 무엇이며, 거기 내포된 정치적 욕망은 무엇이고 그 혐오의 정치에 대항하는 정치는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비마이너가 노들야학과 함께 ‘혐오담론 씹어먹기’ 세미나를 열었다. 공개 모집을 통해 25명의 다양한 소수자, 인권 활동가들이 모였으며, 13주 동안 8권 정도의 텍스트를 읽고 토론할 예정이다. 그 토론 내용을 보고서 형태로 연재하려 한다.

<<'혐오담론 씹어먹기' 연재 목록>>

① 혐오표현? 문제는 혐오정치야!
② ‘인류애’로 혐오하는 자들에게 마사 누스바움이 전하는 ‘인류애의 정치’ 
③ 일베의 사상을 넘어 견유주의적 가치전도로

④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여성혐오로 발기된 남근의 정치학과 함께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논란을 일으킨 흥미로운 인물이 있다. 그는 강남역 10번 출구로 처음 나온 일베 유저로, 핑크색 코끼리 탈을 썼다고 해서 ‘핑크 코끼리’라 불렸다. 그는 영화 <주토피아>를 인용한 인상적인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었다. 

"육식동물이 나쁜 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동물이 나쁜 겁니다.
선입견 없는, 편견 없는 주토피아 대한민국
현재 세계 치안 1위지만 더 안전한 대한민국 남녀 함께 만들어요."

그가 일베 유저란 사실과 그 메시지의 의미("사이좋게 지내요"라 쓰고 "닥쳐!"로 읽을 것)가 발각되자 그는 추모 대중들한테 물리적 항의와 야유를 받았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다음날 한 트위터 유저가 <주토피아> 감독에게 다음과 같은 멘션을 보냈다. 
 
“한국에서 여성혐오자가 아무 죄 없는 여자를 죽였어요. 그러자 다른 여성혐오자들이 주토피아의 장면을 캡쳐해서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했어요. 걔들은 포식자를 남자로 바꾸고, 자신들이 닉과 같은 입장이라고 했어요. 여자들이 자신들을 이 사건 때문에 두려워한다는 이유로.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러자 주토피아 감독이 다음과 같은 답장 멘션을 보내왔다. 
 
“끔찍합니다.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와 완전히 반대되네요. 디즈니 본사에 전달하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핑크코끼리'의 피켓에 대한 평가와는 상관없이, 영화에 대한 해석은 관객의 자유인데 그것을 <주토피아> 감독에게 ‘일러바쳐’ 뭘 어쩌자는 걸까? 또 그 피켓 내용에 대해 <주토피아> 감독이 자기 의도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디즈니 본사에 알려 뭘 어쩌려는 건지, 해석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두 사람의 둔감함에 아연해지는 장면이다. <주토피아> 감독에게 ‘판사’의 권위를 부여한 것도 놀랍지만 <주토피아>는 일베의 사상과 무관하다고 당연하게 믿어버리는 것도 놀랍다. 결론부터 말하면, ‘핑크코끼리’는 <주토피아>의 주제를 정확하게 이해했고, 그렇기 때문에 ‘핑크코끼리’와 마찬가지로 <주토피아>는 욕을 먹어야 한다. 
 
<주토피아> 감독의 말처럼 그 영화의 내용은 “편견과 선입견의 위험에 관한 이야기”이다. 강남역 10번 출구로 나온 ‘핑코’와 일베 유저들의 메시지와 정확히 같다. 여성혐오(여성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의 위험성을 외치는 여성들 면전에서 그들은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모는 “편견과 선입견의 위험”을 외친다. ‘반사’, ‘미러링’ 전략이다. 일베와 양성평등연대(구 남성연대)가 대변하듯이 여성차별에 대한 항의(페미니즘)에 맞서는 ‘대의’가 남성 역차별에 대한 항의가 된 지 오래다. 요즘엔 아예 ‘역’자도 빼고, 그냥 남성이 차별받고 있다고, 그래서 양성평등을 위해서는 (하나마나한 공식적 멘트로, 여성차별과 함께) 남성차별을 해소해야 한다고 외친다. 여성차별에 대한 미러링이고, 미러링의 전략이 그렇듯 가치 무화 내지 가치 전도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핑크코끼리'가 일베사이트에 올린 게시물.
 
<주토피아>도 마찬가지다. 대충 공식적으로 말하면, 모든 “편견과 선입견의 위험”에 관한 영화지만, 정확히 액센트는 강자에 대한 약자들의 “편견과 선입견의 위험”에 찍혀 있다. 극중 동물 사회는 10%의 육식동물과 90%의 초식동물로 이뤄져 있다. 초반부에는 경찰관이 되고 싶은 토끼 주디가 겪는 차별이 다뤄진다. 하지만 주디가 경찰이 되어 ‘수달 실종 사건’에 말려드는 중반 이후부터는 육식동물에 대한 초식동물의 “편견과 선입견의 위험”이 그려진다. 실종 사건 이면에 마약 사건이 있었고 그 이면에 ‘양’ 부시장(벨웨더)의 정치적 음모가 있었다. 
 
양 부시장은 마약을 투약해서 육식동물들이 폭력적으로 날뛰게 만드는데, 그것도 모르고 ‘사자’ 시장(라이온하트)은 포악해진 동물들을 잡아다 불법적으로 감금해 두고 있었다. 그 ‘인권유린’의 현장을 폭로한 토끼 경찰 주디는 마약이 주로 육식동물의 야수적 본능을 일깨우는 것 같다고 발표한다. 그 때문에 주디는 영웅이 되고, 사자 시장은 감옥에 가고, 양 시장은 10% 육식동물에 대한 90% 초식동물들의 공포를 등에 업고 시장의 권좌를 차지한다. 그러나 어렸을 때 육식동물로부터 폭행당한 트라우마가 있는 토끼 경찰과 어렸을 때 초식동물들한테 결박당한 트라우마가 있는 여우 사기꾼이 서로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힘을 합쳐 양 시장의 음모를 폭로하고, 진실을 밝힌다. 마약은 실은 수달 같은 초식동물도 폭력적으로 만드는데 양 부시장은 육식동물만 골라 투약함으로써 육식동물에 대한 주디 이하 초식동물들의 편견(그들은 언제든 야수성을 드러낼 수 있어)을 동원했다는 진실, 즉, '핑크코끼리'의 피켓 내용, 모든 육식동물이 나쁜 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른(마약 맞은) 동물이 나쁘다는 진실 말이다. 
 
일베 유저가 이 영화를 보고 작중 육식동물은 남자, 초식동물은 여자의 알레고리라고 생각할 이유는 충분하다. 이 영화에서 작중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은 서구 문명사에서 강자로 군림해온 집단과 약자로 종속되어온 집단의 알레고리이다. 성적으로는 남성 대 여성, 경제적으로는 10% 자본가 대 90% 서민계층, 인종적으로는 백인 대 유색인, 정치적으로는 과두주의 대 민주주의의 대립을 동물세계에 빗댄 것이다. 오래 동안 보수주의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온 디즈니 사(社)가 모처럼 차별과 편견에 대해 던진 사회적 메시지는 이렇다. “약자들의 유리천장 깨기는 물론 중요하다. 그와 함께 강자들에 대한 다수 약자들의 편견과 선입견을 깨는 것이 더 중요하다.” 현실 정치에 좀더 밀착해 보면, 사자 시장(공화당 정부)이 자행한 테러 범죄자 불법 감금(관타나모 수용소)에 대해 인권유린이라고 욕하지만, 그 정도는 사회질서를 위한 선의로 봐줄 수 있는 것이고, 더 나쁜 건 양 부시장(민주당 정부)이 10% 금융자본가에 대한 90% 대중의 (월가 점령시위로 드러난) 공포와 선입견을 등에 업고 대중독재를 획책하려는 정치적 음모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일베의 ‘핑크코끼리’와 디즈니의 <주토피아>가 공유하는 것은 ‘역차별’ 논리로 ‘차별’에 대한 항의를 무력화하는 우파의 전략이다. 차별뿐만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표현의 자유, 인권, 민주주의, 다양성 등 진보가 내세운 가치를 ‘미러링’ 하여 차별주의적 표현의 자유, 주류의 인권, 기득권자의 민주주의, 친일 사관의 다양한 목소리를 주장한다. 이런 미러링 전략은 잘하면 진보의 가치를 통해 보수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고, 못해도 진보의 가치를 무력화 시킬 수 있다.  
 
더 깊게, 일베와 <주토피아>는 사회진화론적 문명사관을 공유한다. <주토피아>의 첫 장면 문명사를 요약한 아동 극은 영화의 갈등 축을 압축한다. 원시 야만의 시대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은 본능대로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에 따라 살았지만 근대에 들어와서 문명의 힘으로 본능을 억제하며 사이좋게 지낸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주토피아’는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이 차이를 인정하며 공존하는 다원주의 사회로 그려지지만, 거기서 핵심적인 공존은 포식자와 피식자의 공존이다. 즉, 19세기 사회진화론자들이 얘기한 우월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이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인종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자연법칙에 따라 살지 않고, 민주주의자들이 세운 문명의 도덕과 법에 따라 본능을 억압하며 살고 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본능을 억누르고 있는 건 포식동물, 즉 강자집단이다. 영화는 언제든지 우리 포식자들은 억압의 사슬을 풀고 본능대로 너희 피식자들을 마음껏 먹을(착취할) 수 있지만 문명의 도덕과 법으로 간신히 참고 있으니, 고마운 줄 알라는 우파의 목소리를 암묵적으로 전한다. 일베의 사상도 똑같다. 사회진화론에서 얘기하듯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야 사회가 발전하는데 민주주의자들이 내세운 문명의 도덕과 법 때문에 사회의 본능이 위선적으로 억압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프로이트, 『문명 속의 불만』, 열린책들, 1997.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을 분석 텍스트로 삼은 이유가 여기 있다. 파시즘의 물결이 유럽을 휩쓰는 와중에 프로이트는 인간의 공격본능이 억압의 사슬을 깨고 맘껏 분출하는 현실에 아연해 하며 이 글을 썼다. 물론, 프로이트는 인간의 공격본능과 자기파괴의 본능이 문명사회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가지 않기를, 인간이 가진 에로스적 본능이 인류애로 발현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공격충동을 인간의 타고난 본능으로 보고, 본능의 억제 속에서 문명의 발전을 설명하는 프레임 자체가 혐오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사용될 수밖에 없다. 일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프로이트의 이론을 상식처럼 공유하고 있다. 문명(도덕과 법)의 억압이 없다면 인간은 만인에 대해 늑대인 공격본능이 분출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사회는 해체될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인간은 강력한 공격 본능을 타고난 것으로 추정되는 동물이다. 따라서 이웃은 그들에게 잠재적인 협력자나 성적 대상일 뿐 아니라 그들의 공격 본능을 자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웃을 상대로 자신의 공격 본능을 만족시키고 아무 보상도 주지 않은 채 이웃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이웃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이웃을 성적으로 이용하고, 이웃의 재물을 강탈하고 이웃을 경멸하고 이웃에게 고통을 주고 이웃을 고문하고 죽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ni hupus.> 인생 경험과 역사에 대한 지식 앞에 누가 감히 이 주장을 반박할 수 있겠는가?" (「문명 속의 불만」, 300쪽)
 
일베가 굉장히 좋아할 이 늑대 본성론에서 본능의 주체는 ‘개인’이다. 프로이트에게 본능의 주체는 개인이다. 문명은 집단생활의 필요 속에서 개인의 본능에 대한 사회적 제약을 통해 형성된다. 문명화 이전의 삶은 본능에 충실한 개인들의 약육강식의 삶이다. 여기에 오류와 속임수가 있다. 프로이트가 본 ‘개인’은 프로이트의 시대, 19세기에 출현한 핵가족 속에서 태어나 자본주의적 시장과 국민국가 체제 안에서 ‘경쟁’과 ‘권력’을 본능적으로 체득한 인간의 실존형식이다. 개념사적으로 근대 이전에는 ‘개인’이 없었다. '개인'은 근대의 산물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자기 시대의 ‘개인’이 태고 적부터 있었다고 생각한다. 
 
19세기에 비로소 생겨난 핵가족 형식, 즉 엄마-아빠-자식 간의 내밀한 애착관계가 고대부터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프로이트는 19세기 부르주아 핵가족 안에서 남자 아이가 겪는 아버지와 관련된 심리적 갈등, 즉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태고 적으로 투사시켜 집단적 부친살해가 문명의 시발요인이라고 말한다. 또한, 남성의 심리적 갈등(외디푸스 콤플렉스)을 인간 일반의 심리구조로 보편화 하고, 여자는 그에 대한 예외로만 설명한다. 그런 사고방식이 프로이트만의 것은 아니다. 근대 서구인들의 무의식에는 현재 자기가 본 것을 과거로부터 이어진 인류 전체의 경험으로 투사하는 사고체계, 자신의 특수한 경험을 인류사 전체로 확대하는 사고방식이 뿌리박혀 있다.억압의 형식이 그렇듯이 억압된 본능의 형식은 사회, 역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프로이트에게는 그런 사회적, 역사적 감각이 없다.
 
그럼에도, 본능(instinct)을 ‘충동(drive)’으로, 충동의 주체를 개인이 아니라 사회로 살짝 바꿔서 이해하면 프로이트의 충동이론은 꽤 쓸 만한 지혜를 준다. 약자에 대한 혐오, 공격, 파괴에서 쾌감을 느끼는 정치, 문화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이해관계나 이성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이성이나 이해관계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사실은 무의식적 충동(욕망)의 작용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충동 형식을 둘로 나눴다. 하나는 인간의 신체를 “더 큰 단위로 결합시키려는” 에로스 충동이고, 다른 하나는 “그 단위를 해체하여 원래의 무기질 상태로 돌려보내려는” 죽음 충동이다. 혐오의 정치가 동원하는 파괴적 공격 충동은 죽음의 충동에서 파생된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의 ‘보디 폴리틱’을 다시 끌어 와 죽음 충동에 휩싸인 신체를 개인의 신체가 아니라 ‘보디 폴리틱’, 즉 ‘사회체’, ‘정치체제’로 여길 필요가 있다. 그럴 때 혐오하는 이들의 개인 심리가 아니라, 그런 개별적 공격충동으로 발현된 집합적 신체, 즉 사회체의 죽음충동에 분석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우리의 자본주의적 사회체제는, 우리의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 체제는 지금 자신의 죽음을 향한, 자신의 해체를 향한 충동에 몸부림치고 있다. 그 충동을 잠재우는 게 목표가 되어선 안 된다. 그렇게 파괴된 사회적 관계들로 어떤 새로운 사회체를 구성할지 연구하며, 더 크고 더 자유롭고 더 관능적인 사회체의 결합을 위한 에로스 충동을 가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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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lizom@hanmail.net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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