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차 확장되는 '코다 코리아' 정체성을 논의하다

'코다, 코다UK&Ireland를 만나다'에서 발제를 하고 있는 이길보라 감독
'코다, 코다UK&Ireland를 만나다'에서 발제를 하고 있는 이길보라 감독
코다는 '농인의 자녀(Children of Deaf Adult)'라는 말의 약어로, 부모가 농인인 청인 자녀들을 지칭한다. 최근 들어 한국의 코다들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독자적인 활동을 만들어가고 있다. 

한국 코다들의 모임인 '코다 코리아'는 지난 8월 영국 그랜덤에서 진행된 '코다 캠프'를 비롯해 영국 농인단체와 코다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코다 코리아의 미래를 어떤 모습으로 그려나갈지 참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난 18일, 하자센터에서 진행된 "코다, 코다 UK&Ireland를 만나다"에서 그 경험을 공유했다.

'코다 코리아'의 결성
 
'농인의 자녀'들에게 '코다'라는 정체성은 무엇을 의미할까. 다큐멘터리 감독 이길보라 씨는 '코다'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을 '안도감'이라고 표현했다.
 
"스물두 살 때 제 친구가 '보라야, 너 같은 사람들을 코다라고 한대'라고 했어요. 그때 처음 들어봤어요. 아, 나를 지칭하는 단어가 있구나. 그러니까, 나랑 비슷한 경험을 겪어온 사람이 많이 있다는 거구나. 내가 겪었던 혼란이 내 잘못도 아니고, 우리 부모님 잘못도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안도감이 들면서, '코다'들을 내가 조금 일찍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2014년, 이길보라 씨가 코다로서의 자신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반짝이는 박수 소리'를 발표한 후, 코다들과의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경험을 가지고 살아온 코다들이 SNS로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개인적인 연락으로 조금씩 알게 되었던 코다를 더 많이 만날 기회가 찾아왔다. 한국에서는 첫 코다 관련 행사였던 'CODA 열정樂서'에서 그는 깜짝 놀랐다.
 
"분명 그날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어쩜 이렇게 나와 똑같은 사람들이 왔지, 하고 신기했어요. 학교를 다닐 때 학부모 면담 자리에서, 다른 친구들은 끼지 않는 그 자리에 자기는 통역을 하러 가야 했던 일 같은 거요. '아, 나는 친구들과 정말 다르구나'라고 느꼈던 순간들. 남들이 '부모가 벙어리인 불쌍한 애'라고 동정하는 게 너무 싫었던 순간들. 그래서 책잡히거나 무시당하지 않으려 더 악착같이 살았던 경험들이요."
 
코다가 아닌 친구들에게는 터놓지 못했던, 설령 하더라도 온전한 동의를 구할 수 없었던 마음속의 이야기들이 그 날, 그곳에서는 길을 만난 물처럼 자유롭게 흘렀다. 모임이 지속될수록, 이 자유를 더 많은 코다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렇게 지난 2015년 5월, '코다, 코다를 만나다' 간담회가 열렸다. 열린 행사이니만큼, 많은 코다들이 함께했다.
 
코다 코리아 규모가 커져갈수록 코다의 정체성을 어떻게 만들어 갈지 고민이 커져갔다. 그래서 자료들을 찾다 보니 이미 다양한 국가에서 코다 모임이 있다는 것, 이들이 전 세계 조직인 '코다 인터네셔널'까지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코다 코리아는 10년가량 앞서 있고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코다 UK&Ireland'의 단체 구성과 운영 등을 파악하기로 했다.

'코다 UK&Ireland'와의 만남
 
코다 UK&Ireland는 '영국농인협회(British Deaf Association, 아래 BDA)'에서 산하 기구 성격으로 만들어졌다가 독립했다.코다 UK&Ireland는 비영리단체로, 개인 기부금에 상당 부분 재정을 의존하고 있다. 자체 프로젝트나 펀딩 사업 등을 통해 충당한 재원으로 이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워크숍을 하거나 일 년에 한 번씩 '코다 캠프'를 연다.
 
코다 코리아 멤버인 이현화 수화통역사는 코다 워크숍 현장을 방문했을 때 학생들의 옷차림을 보고 놀랐다. 'CODA'라는 단어가 큼지막하게 박혀있고, 그 아래에는 이름까지 들어가 있다.
 
"이 옷을 다 맞춰 입고 워크숍을 진행해요. 제가 갔던 날은 재정 마련을 위해 어린 코다들이 직접 만든 파이나 물건을 파는 날이었는데, 이 옷을 입고 길거리를 스스럼없이 다니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그 옷을 입지 않았길래, '너 코다라는 게 부끄러워서 옷을 안 입었니?'하고 물었더니 '아니, 내 이름이 알려지는 게 싫어서 그래'라고 당당하게 답하더라고요."
 
그는 이러한 건강한 정체성의 근거를 사회적 환경에서 찾았다. 처음에 이 씨는 영국에서는 아직 스코틀랜드에서만 수화법이 통과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보다 뒤처지지 않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건을 사기 위해 들른 마트에서, 박물관에서 농인이 수화 통역을 편하게 제공받을 수 있는 것을 보고,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수화로 대화를 주고받아도 신기하거나 불편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이현화 수화통역사가 영국 수화 서비스를 설명하고 있는 모습. 마트에서 계산을 할 때 수화통역이 필요한 경우 호출할 수 있는 표지판과 박물관 영상에 수화통역이 제공되는 모습.
이현화 수화통역사가 영국 수화 서비스를 설명하고 있는 모습. 마트에서 계산을 할 때 수화통역이 필요한 경우 호출할 수 있는 표지판과 박물관 영상에 수화통역이 제공되는 모습.
 
농인을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대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농인 부모는 물론 코다 역시 '생경한 존재'가 아니다. 부모들이 먼저 농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보니, 코다 역시 자연스럽게 그러한 자부심을 체화하게 된다.

"워크숍도, 캠프도, 코다들이 직접 알고 찾아온다기보다는 부모님 손에 이끌려 오는 경우가 대다수예요. 농인 부모님들은 이미 알고 계시는 거죠. 코다인 내 자녀는 코다를 더 많이 만나야 한다는 걸. 이건 건강한 정체성 확립을 위한 교육적 목적도 있지만 감정적으로 자유로운 즐거움도 누리는 자리이기 때문이에요."

"코다로 살면서 불행한 경험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영국 코다 친구들은 한참을, 정말 한참을 고민하다가 '가끔 통역을 부탁할 때가 있어 귀찮았어'고 대답합니다. 솔직히 저는 코다로 살면서 불행하고 힘든 일이 많았거든요. 많은 한국 코다가 같은 걸 느끼며 살아왔을 거예요. 영국 사례를 보니까 우리 모임이 이렇게 될 수도 있겠구나 싶어 기쁘면서도 과연 사회적 환경이 이렇게 다른데 잘 이식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됐습니다."
 
이 씨는 어렸을 때부터 농-청문화간 다리 역할을 해온 코다들의 잠재력은 넓다고 강조했다. 수화통역사가 될 수도 있고, 훌륭한 이야기꾼이 될 수도 있고, 두 문화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연구자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코다가 자신의 잠재력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얼마만큼 넓게, 고르게 제공하고 있는가.
 
코다 캠프에 자원활동가로 참여했던 김진유 씨는 그 시작 지점을 코다 간의 만남에서 찾았다. 성인 코다들이 자원활동가로 참여하고, 18세 미만 코다들이 참여하는 코다 캠프를 통해 어린 코다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롤 모델'을 보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또래 코다들과 만나면서 '남들은 모를 이야기'를 신나게 하기도 한다.
 
"캠프를 통해 코다들은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아요. 제일 큰 열매는 역시 '자긍심 고취'인 것 같습니다. 캠프에서 '데비'라는 친구를 만났는데요, 그 친구는 자신이 이전에는 농문화나 청문화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왔답니다. 하지만 자신이 '코다'임을 알게 되면서 자신이 속한 곳을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해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오늘의 자신이 만들어졌고, 다른 사람들의 '다름'에도 인내심을 가질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저는 이것이 코다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중심적인 말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수화로 박수를 보내는 모습.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수화로 박수를 보내는 모습.

 
이날 행사에는 '코다 코리아' 회원과 가족, 시민 등 100여 명이 넘게 참가한 가운데, 코다들의 화합을 다지고 코다의 삶을 더 이상 컴플렉스가 아닌 당당한 자기 정체성으로 갖고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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