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제34회 코다국제콘퍼런스에 다녀오다 ①

전 세계 코다들이 모이는 2019 코다 국제 콘퍼런스가 지난 7월 11일부터 14일까지 나흘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습니다. 이번 콘퍼런스에 참가한 이길보라(CODA, 영화감독, 작가) 님의 참관기를 총 3편에 걸쳐 연재합니다.  

① 코다 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②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 코다 월드 ③ 아시아 코다 콘퍼런스를 꿈꾸며

스물두 살 때였다. 대학에서 교양 수업으로 수어를 배우는 친구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보라 같은 사람을 코다라고 부른대요. Children of Deaf Adults의 약자, CODA, 코다. 농인 부모 아래서 태어난 (청인) 자녀를 일컫는 말이에요.”

처음 듣는 단어였다. ‘엄마아빠청각장애인’ ‘장애인의 자녀’가 아닌,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와의 조우. 나와 같은 이들을 부르는 말이 존재한다는 건 나와 비슷하거나 같은 경험을 하는 이들이 있다는 뜻이었다. 또한 코다에 대한 연구와 문화작업이 선행되었고 또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농사회와 청사회, 수어와 음성언어. 두 세상의 언어로는 해석해낼 수 없었던 감정과 경험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만나본 적은 없지만 세상에 더 많은 코다들이 있을 터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코다라고 불렀다.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찾아보니 생각보다 더 많은 코다 단체들이 세계 곳곳에서 각자 또 함께 연대하며 활동하고 있었다. 코다 영국&아일랜드(CODA UK&Ireland), 코다 홍콩(CODA Hong Kong), 코다 일본(CODA Japan), 코다 브라질(CODA Brazil), 코다 인터내셔널(CODA International)까지. 그중 미국을 중심으로 시작된 코다 인터내셔널은 국제 조직으로 국가·지역별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고, 매년 코다들이 모이는 코다국제콘퍼런스를 주최했다. 놀라웠다. 아직 ‘코다’라는 개념이 청사회는 물론이고 농사회에서도 생소한 한국에서 자란 나는 그저 입을 다물지 못할 뿐이었다. 또 하나의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멀었다. 언젠가 이 드넓은 코다 네트워크에 가닿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나와 비슷한 삶의 조각을 지닌 한국 코다들을 만났고, 20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코다국제콘퍼런스: CODA Love’에서 보다 확장된 의미의 코다 가족 및 식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브라질에서 온 코다들과 함께.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길보라 씨. 사진 코다 브라질
브라질에서 온 코다들과 함께.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길보라 씨. 사진 코다 브라질

- 코다 월드, 코다 랜드

4일간의 콘퍼런스가 열릴 호텔은 파리 동남부의 숲 퐁텐블로(Fontainebleau)에 위치해 있었다. 파리 공항에서 출발해 지하철과 기차, 택시를 갈아타며 헤맨 끝에 겨우 도착한 행사장에서는 모두가 반갑게 포옹하며 안부를 묻고 있었다. 참가자들 대부분이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했다. 도착은 했는데 이제 뭘 해야 하는지 몰라 어색하게 서 있으니 어서 등록 절차를 밟고 첫 참가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가야 한다고 미국 코다 캐시(Kathy)가 말했다. 기차역에서 어떻게 호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는 나를 택시에 태워준 구원자였다. 미국에서 남편과 함께 왔지만 남편은 코다가 아니라 콘퍼런스는 혼자 참가한다고 했다. 캐시는 곧 ‘버디’가 생기겠지만 자신을 또 다른 버디로 생각하라며 언제든지 궁금한 게 있으면 자신을 찾으라고 덧붙였다. 매년 콘퍼런스에서는 첫 참가자들을 위해 버디(Buddy) 시스템을 운영하는데 문화, 정체성이 비슷한 선배 코다를 연결하여 그들의 경험을 첫 참가자에게 나눠주고 언제든지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했다. 누구와 어떻게 인사하며 이야기를 시작하면 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심지어 주최 측의 실수로 모든 프로그램과 정보가 올라오는 페이스북 그룹에 가입되어 있지 않아 그 어떤 정보도 사전에 받지 못한 나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버디와 오리엔테이션이었다.

늦을까 헐레벌떡 들어서니 70명 정도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나처럼 처음 참가하는 이들이었다. 앞줄에서 한국에서 온 코다 보석 씨를 만났다. 수어통역사이자 대학원생인 그는 한국에서 온 참가자는 혼자인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다행이라며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건넸다.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나의 모어(母語)인 한국수어와 한국음성언어를 공유할 수 있는 이가 있다는 것에 안도감이 들었다.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무대 앞의 수어통역사들이 손을 움직였다. 프로그램이 시작된 것이었다. 코다 인터내셔널의 회장인 레이(Ray)가 마이크를 잡았다. 무대 우측에는 국제수어 통역사, 좌측에는 이탈리아수어 통역사가 그의 말을 수어로 옮겼다.

“아, 아.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통역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드릴 건데요. 이번 코다국제콘퍼런스의 공식 언어는 미국수어(ASL: American Sign Language), 국제수어(ISL: International Sign Language), 영어음성언어(English Spoken Language)입니다. 또한 프랑스에서 열리는 행사인 만큼 많은 프랑스 코다들이 참가했는데요. 보다 원활한 행사 진행을 위해 이번 콘퍼런스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전문 동시 통역사들을 배치했습니다. 영어음성언어를 프랑스음성언어로, 또 그 반대로 통역할 텐데요. 필요하신 분은 입구에서 헤드셋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또한 단체로 참여한 각국의 코다 그룹마다 영어음성언어 혹은 ASL, ISL을 자국의 수어로 옮기는 통역사가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 통역이 필요하신 분은 각각의 프로그램 시작 전에 주최 측에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코다국제콘퍼런스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은 접근성(Accessibility)입니다. 저희는 이곳에서 그 어떤 이도 소외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부모의 통역사로 자랐고, 현재까지도 (비)전문적으로 통역 일을 하고 있는 우리 코다 모두가 가장 잘 알고 중요시 여기는 것이기도 하죠. 행사장 입구에 앉아 있는 두 명의 전문 동시 통역사들을 제외한, 이 행사의 모든 수어통역, 음성통역은 여러분과 같은 참가자인 코다들의 자원봉사로 이루어집니다. 코다 월드(CODA World), 코다 랜드(CODA Land)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환영사가 끝나자마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반짝이는 박수 소리였다. 참가자들은 양손을 펼쳐 높게 든 후 흔들었다. 어떤 이는 양 손바닥을 부딪쳐 짝짝짝 박수 소리를 냈다. 이곳에서의 박수는 두 가지였다. 농사회에서 사용하는 반짝이는 박수와 청사회에서 사용하는 박수 소리. 나는 손바닥을 부딪쳐 박수 소리를 내다가 두 팔을 올려 반짝이는 박수갈채에 동참했다. 무대에는 레이뿐만 아니라 코다 인터내셔널의 각 국가 및 지역에서 활동하는 임원들과 이번 코다국제콘퍼런스를 진행하는 코다 프랑스 임원 및 자원봉사자들이 서 있었다. 이 모두가 보수 하나 받지 않고 순전히 자원봉사로 이 모든 일을 해왔고, 또 해갈 것이라 했다. 코다 인터내셔널의 운영뿐만 아니라 전 세계 21개국에서 244명이 참가하는 4일간의 국제콘퍼런스는 이 끈끈한 코다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임원 중에는 코다 코리아(CODA KOREA)가 2016년 코다 영국&아일랜드(CODA UK&Ireland)의 청소년 여름 캠프에 참가했을 때 반갑게 맞아준 영국 코다 아드리안(Adrian), 전 세계를 여행하며 코다 네트워크를 확장하려 애쓰는, 2017년에 한국에 방문해 한국 코다들을 만난 시더(Ceder)도 있었다. 이 모든 이들의 애정과 노력으로 2019년 제34회 코다국제콘퍼런스가 개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막 행사가 시작되었을 뿐이었지만 드디어 집에 왔구나, 하는 안도감과 감사함에 코끝이 찡했다.

올해 콘퍼런스에 참석했던 한국 코다 두 명. 왼쪽부터 김보석, 이길보라. 사진 김보석
올해 콘퍼런스에 참석했던 한국 코다 두 명. 왼쪽부터 김보석, 이길보라. 사진 김보석

- 나쁜 코다여도 괜찮아

콘퍼런스의 프로그램은 오프닝 키노트(Opening Keynote)와 클로징 키노트(Closing Keynote)를 비롯하여 다양한 분야의 워크샵, 대여섯 명 정도의 참석자들이 각자의 경험과 생각을 나누는 토론회, 주제별 소모임, 숲속 산책으로 아침을 여는 건강 모임,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디스코 파티, 24시간 언제고 열려 있는 병원의 방(Hospital room) 등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콘퍼런스에 처음 참가한 이들에게 추천하는 건 워크숍과 주제별 소모임, ‘병원의 방’이었는데, 후자의 경우 농인들이 종종 환대라는 뜻의 영어 단어 호스피탈리티(Hospitality)를 보고 병원이라는 뜻의 호스피탈(Hospital)로 착각하여 쓰는 것을 보고 붙인 애칭 같은 것이라 했다. 농인을 비하하는 의미가 아닌, 농인 부모의 말투와 습관, 농문화를 애정하는 코다들의 문화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콘퍼런스 기간 동안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으며 수많은 감정들에 휩싸이게 될 텐데 그때 병원 혹은 환대의 장소가 필요하다면 이곳이 바로 그 장소가 될 거라는 거였다. 과자와 음료수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온 이야기꾼들의 풍성한 이야기를 마주할 수 있을 거라 했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첫 참석자들을 위한 소모임 장소로 향했다. 73명의 첫 참석자들이 각자의 언어를 중심으로 나뉘었다.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영어, 영어와 국제수어. 나는 그중 영어와 국제수어 사용자의 방으로 향했다. 스무 명 남짓한 이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있었다. 영어를 국제수어로, 국제수어를 영어로 통역하는 두 명의 통역사들도 있었다. 이 소모임의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는 나무 막대기를 들고 입을 열었다.

“저 역시 첫 참가자로서 이 방에 들어왔던 적이 있는데요. 오늘은 이 모임의 원활한 토론을 위해 자원봉사로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지금 여기서 통역을 하는 두 명의 통역사 역시 무보수로 일하는 것이니 그들의 통역을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일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콘퍼런스의 규칙 중 하나입니다. 또한 이 소모임을 비롯해 콘퍼런스 내에서 나눈 이야기들은 바깥으로 공유하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습니다. 사진이나 동영상 촬영의 경우, 사진에 나온 모든 사람에게 동의를 구해야만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게재가 가능합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각자의 생각과 경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첫 소모임인 만큼 가볍게 돌아가며 어디서 왔고, 어떤 환경에서 나고 자랐으며, 코다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눠보자며 나무 막대기를 옆 사람에게 넘겼다. 어떤 이는 나처럼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 부모 아래 태어나 수어를 모어로 배웠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농인 부모 아래서 외동딸로 태어난 O-CODA(Only Coda)라고 했다. 형제, 자매들이 있지만 자신만 청인으로 태어나 OH-CODA(Only Hearing Coda)가 된 경우도 있었다. 부모가 농인이지만 상대방의 입모양을 읽어 내용을 이해하는 구화를 사용하는 구화인이라 음성언어를 쓰며 자랐지만 나중에 수어를 배워 통역사로 활동하고 있는 코다, 영어음성언어도 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수어를 사용하는 게 편하다며 수어로 자기소개를 한 코다도 있었다. 다들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수어 이름(Sign name)을 붙였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저는 한국에서 온 보라에요. 얼마 전에 네덜란드에서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현재는 암스테르담에서 살고 있어요. 수어 이름은 한국 수어의 지화로 ㅂ, ㅗ, ㄹ, ㅏ. 이렇게 빨리 쓰면 검지를 접은 오른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렸다가 오른쪽으로 향하는 모양인데요. 이게 제 수어 이름이에요. 엄마, 아빠 모두 농인이고 코다 남동생이 한 명 있습니다.”

나는 간단히 소개를 마친 후,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덧붙였다.

“콘퍼런스 오기 전에 가족들과 스페인 여행을 했어요. 2주 남짓한 여정이었는데 아빠가 외국 음식에 완전 질린 거예요. 매운 거 먹고 싶다고 했는데 타코 파는 가게 앞에 엄청 맵게 생긴 음식 사진이 있어서 들어갔어요. 아빠는 잔뜩 기대를 하고 그걸 시켰는데 종업원이 오늘은 안 된다고 한 거죠. 그래서 저는 오늘 안 된다고 통역했어요. 그런데 아빠가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면서 왜 안 되냐고 짜증을 내는 거예요. 다른 걸 찾아보라고 하니 그 옆에 있는 메뉴를 짚더라고요. 중간에서 통역하면서 ‘이건 있어요?’ 물어보는데 그것도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자 아빠가 짜증을 내면서 ‘그럼 사진은 왜 붙여놨냐? 왜 장사를 이렇게 하냐?’하고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찌푸린 거죠. 종업원은 아빠를 쳐다보고 있었어요. 저는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럽고 아빠가 이렇게 짜증을 내는 걸 이해할 수 없어 화가 났어요. 제 표정을 읽은 동생이 상황을 무마하려고 아빠에게 ‘오늘 사정이 있어서 안 되는 거래. 가끔 그래’하고 부가 설명을 했어요. 종업원은 아빠 표정을 봤는지 조금 이따 주문하겠냐고 묻고는 돌아갔어요.

그렇지만 저는 충분히 알 수 있었어요. 그가 기분이 나쁘다는 걸요. 한국과 달리 유럽에서는 손님이 왕이 아닌 경우가 많다고, 무례했을 수 있다고 아빠에게 설명했어요. 그런데 아빠가 그러는 거예요. ‘어차피 저 사람 수어 몰라.’ 그걸 어떻게 몰라요! 수어는 표정이 반 이상인데. 표정은 청인들도 읽을 수 있는데! 저는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고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동생도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죠.

저는 안 되겠다 싶어 아빠에게 이번에는 꼭 통역하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상황이 처음은 아니었거든요. 외국 여행을 할 때마다 자기 입맛에 맞지 않으면 엄청 큰 수어와 얼굴 표정으로 종업원 앞에서 ‘맛없어!’ ‘하나도 안 매워!’ ‘느끼해, 별로야’라는 자기표현을 아주 솔직히 하는 아빠 옆에서 동생과 저는 그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했어야 했는지요. ‘아빠, 청인들도 아빠 표정 충분히 읽을 수 있어. 왜 그럴 때마다 동생이랑 내가 아빠 대신 웃으면서 2배로 고맙다고 인사하고 2배로 죄송하다고 말해야 해? 내가 통역을 해야 하는 건 알겠는데 미안하다, 고맙다는 뜻은 알아서 충분히 전달할 수 있지 않아? 왜 내가 아빠 대신 맨날 죄송하다고 해야 하는데? 난 통역사이기도 하지만 딸이고, 그냥 나 자신이기도 하다고!’ 화를 내면서 동생을 쳐다봤어요. 고개를 끄덕이고 있더라고요.

사실 그 말을 할 필요는 없었는데 동생 때문에라도 이 말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 모든 걸 그냥 참기만 하는 착한 동생 대신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요. 그런데 이 말을 하면서도 제가 너무 못됐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아빠는 농인인데. 많은 농인들이 그렇듯 직설적으로 수어를 사용하는 것뿐인데. 해외여행 경험도 별로 없으니까 이곳의 문화가 어떻게 다른지 잘 알지 못했겠죠. 통역을 하는 게 저와 동생의 역할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그게 너무 과하다고 느끼는 거예요. 그런 감정을 느끼는 저를 보고 또 죄책감을 느껴요.”

나는 말을 하다 울먹였다. 소모임 방마다 마련된 화장지가 내 앞으로 전달되었다.

“이걸 울면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아빠가 그러는 거예요, 종업원 오면 미안하다고 말할 테니까 그만 말하라고. 저는 나랑 동생한테도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아빠가 저를 한참 무시하더니 제가 몇 번 손을 흔들어 부르니까 ‘이제 다음부터 너희랑 여행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하는 거예요. 저랑 동생은 너무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르고. 엄마는 그 상황을 무마하려고 최대한 웃으면서 애쓰고 있었어요. 저는 제가 못됐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아빠가 통역사인 우리를 이해해줘야 한다고, 미안하다고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런 감정을 느끼고 사과를 요구하고, 농인인 아빠와 싸우는 것 자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죄책감이 드는 거예요. 어디 가서 말도 못 했어요.”

2019 코다 국제 콘퍼런스 로고. CODA LOVE Paris 2019.
2019 코다 국제 콘퍼런스 로고. CODA LOVE Paris 2019.

이야기를 마치고 나니 코다들이 무슨 마음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련했다. 적어도 이곳에는 ‘그래도 부모님이 청각장애인인데 네가 이해하고 참고 잘 보살펴드려야지’라는 말을 쉽게 하는 이들은 없었다. 아니, 그런 말들에 지쳐 갈 곳을 잃은 마음과 감정들이 도착하는 곳이 이곳이었다. 이 이야기를 저녁 식사에서 만난 한 미국 코다에게 나누자, 주제별 소모임 중 불과 얼음(Fire&Ice) 모임이 바로 이런 강렬한 감정과 경험을 공유하는 곳이라고 했다. 공개된 자리에서 토론하기 어렵지만 코다 정체성과 경험의 일부를 형성하는 그런 기억들 말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부모와의 갈등 때문에 너무 힘든데, 그 모임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했다. 그녀의 농인 부모는 농인 아들을 갖기를 원했는데(농인의 지위가 낮지 않고 농문화가 발전되고 정착된 국가에서는 농인들이 자녀와 온전히 소통하기 위해 자신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농인 자녀를 선호하는 경우가 있다), 낳고 보니 청인 딸이었다고 한다. 완전히 정반대의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그녀는 충분히 사랑받으며 크지 못했고, 자신의 청문화와 코다 문화를 온전히 포용하지 않는 부모와 충돌하며 자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녀는 콘퍼런스에 처음 온 코다들에게는 ‘불과 얼음’ 모임을 잘 권하지 않는다며 이런 이야기도 사실 콘퍼런스 첫날에 너무 과할 텐데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다행이었다. 아니, 이런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어 좋았다. 누가 잘했고 옳았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코다로서 느꼈던 감정과 경험을 온전히 털어놓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 그랬다. 이곳에서는 나쁜 코다가 되어도 괜찮았다. 나의 모어인 수어를 사용하고 농문화를 공유하는 부모도, 나와 많은 시간을 함께해온 청인 친구들도 쉽게 공감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코다들은 단번에 이해했다. 국적과 나라에 따른 문화, 언어는 중요하지 않았다. 코다는 코다였다. 어떤 것도 구구절절 설명하고 통역할 필요가 없었다. 이들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위로였다.

▷ 2편에서 이어집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비마이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