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제34회 코다국제콘퍼런스에 다녀오다 ②

전 세계 코다들이 모이는 2019 코다 국제 콘퍼런스가 지난 7월 11일부터 14일까지 나흘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습니다. 이번 콘퍼런스에 참가한 이길보라(CODA, 영화감독, 작가) 님의 참관기를 총 3편에 걸쳐 연재합니다. 

① 코다 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②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 코다 월드 ③ 아시아 코다 콘퍼런스를 꿈꾸며

- 코다의 유산, 다양성

콘퍼런스의 둘째 날은 오프닝 키노트로 열었다. 매회 콘퍼런스마다 그해 콘퍼런스의 주제와 지향점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이를 발표자로 선정하는데, 이번 오프닝 발표를 맡은 이는 벨기에-핀란드 코다 브릿짓(Brigitte)이었다. 그녀를 그저 벨기에-핀란드 코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녀의 농인 아버지는 벨기에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핀란드 사람이었는데 어머니 가족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비에트 연방에 살고 있던 집과 땅을 넘겨준 후 난민 생활을 했다고 한다. 브릿짓은 벨기에에서 자라 벨기에 농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네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네 명 모두 농인이라고 했다. 현재는 남편과 함께 영국에서 살며 통역사로 일하고 있으며, 자녀들은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 쪽 가족, 어머니 쪽 가족, 남편 쪽 가족, 그리고 자신의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얼마나 다양한 문화 사이에서 나고 자랐는지 이야기했다. 핀란드인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아직도 핀란드음성언어가 능숙하지 않아 배우는 과정 중에 있다고, 부모와는 수어로 완벽하게 소통할 수 있지만 그 부모가 나고 자란 곳의 음성언어를 아직도 잘하지 못하는 것이 여전히 남은 숙제이자 과제라고 했다.

2019 코다 국제 콘퍼런스 로고. CODA LOVE Paris 2019.
2019 코다 국제 콘퍼런스 로고. CODA LOVE Paris 2019.
 

흥미로웠다. 나의 경우, 한국에서 자랐기에 부모가 속한 사회의 언어, 한국음성언어와 부모의 언어인 한국수어를 무리 없이 습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브릿짓의 경우, 농인 어머니가 다른 국가로 이주하면서 또 다른 문화·언어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농인과 결혼하여 농인 자녀들을 낳아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며 수어로 말하고 사랑하고 슬퍼하는 이 일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고 했다. 코다가 농인을 만나 농인 자녀를 낳고 저렇게 행복할 수 있다니. 농문화와 수어가 자신의 유산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고 농정체성(Deafness)과 코다 프라이드(CODA Pride), 코다로서의 자존감이 실제로 이렇게 존재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할 말을 잃었다.

이어서 전 세계의 패널들이 각 나라에서의 코다 문화와 언어, 경험을 공유하는 워크숍이 열렸다. 발표자로는 미국에서 공부한 후 현재는 스웨덴에서 살고 있는 나이지리아 코다, 홍콩에서 나고 자란 홍콩 코다, 중국계 영국 코다, 미국 코다, 독일 코다, 브라질 코다가 무대에 섰고, 필리핀계 미국인으로서 얼마 전에 농인 어머니와 함께 필리핀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는 코다가 사회를 봤다. 그들은 돌아가며 코다로서 각국에서 어떤 경험들을 하며 자랐는지, 각 사회에서 농인의 지위가 어떤지, 그것이 실제로 코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수화언어법이 농인과 코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했다. 대륙별로 나라별로 문화별로 다 다르면서도 또 비슷하기도 했다.

브라질의 경우는 2002년에 수화언어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농인의 사회적 지위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수어(수화언어)가 음성언어와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되면서 실생활 전반적으로 수어통역이 제공된 것은 물론이고, 수어통역 및 교육의 질이 향상되었으며, 수어 연구에 대한 예산이 증폭되면서 농인 연구원 및 교수들이 크게 늘어났다고 한다. 그건 코다의 삶과 코다 정체성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는데, 실제로 농인들이 청인과 동등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자 코다들이 농정체성을 긍정하고 코다 정체성을 보다 쉽게 긍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코다 브라질 단체는 국내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올해 제6회 코다콘퍼런스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했다. 작년에는 50명 정도의 코다가 모였고, 올해는 60명 정도의 참석 인원을 예상한다고 했다.

“5년 안에 이런 큰 변화가 생긴 거예요. 올해는 브라질에서 저를 포함해 5명의 코다가 이 콘퍼런스에 참석했습니다.”

발표자는 브라질에서 온 코다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모두가 손을 들어 반짝이는 박수를 쳤다. 나는 한국 코다 보석 씨를 쳐다봤다. 그도 씁쓸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국 역시 수어언어법이 2016년에 제정 및 시행되었지만 실제로 큰 변화는 없었다. 농인의 사회적 지위는 크게 변한 것이 없으며, ‘코다’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생소한 단어였다.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

“저는 미국에서 자란 필리핀계 미국인이에요. 그런데 항상 내 뿌리가 어디일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몇 년 전에 엄마가 필리핀으로 돌아갔고, 엄마와 함께 살고 싶어 얼마 전에 저도 필리핀으로 이주했어요. 그런데 모든 것이 낯설어요. 저는 타갈로그어(Wikang Tagalog)는 물론이고 필리핀 문화를 하나도 알지 못했어요. 농인 엄마로부터 배운 적이 없으니까요. 조부모님은 청인이니까 엄마와 소통할 수 없었고, 엄마는 필리핀의 문화를 전승받지 못한 채 미국으로 온 거예요. 저는 엄마로부터 수어를 배우고 미국에서 미국인으로서 교육받았지만, 저의 필리핀이라는 뿌리는 완전히 단절되었던 거죠.”

그녀는 코다 안에서도 얼마나 다양한 문화와 정체성이 존재하는지, 때론 복잡하고 어렵지만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유산이 되는지에 대해 피력했다. 코다콘퍼런스에서는 ‘다양성’이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코다 자신이 곧 농사회와 청사회를 넘나드는,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그걸 반영이라도 하는 듯 주제별 소모임은 다양한 코다 정체성을 포용하는 방식으로 아주 세부적으로 나뉘어 있었다. 자매·형제들 중 장녀·장남에 속하는 코다, 한 자녀 코다, 수어를 하지 못하는 코다, 여성 코다, 남성 코다, LGBTQIA 코다, 부모를 잃은 코다, 청력을 잃거나 잃어가고 있는 코다, 각종 중독을 가졌거나 갖고 있는 코다, 알코올 중독 부모 아래서 자란 코다, 농인 파트너와 사는 코다, 코다 파트너와 사는 코다, 청인 파트너와 사는 코다, 부모가 된 코다, 60세 이상의 코다, 20대 코다, 30대 코다, 40대 코다, 50대 코다, 신앙이 있는 코다, 다문화 코다, 농사회에서 일을 하는 코다, 농사회 바깥에서 일을 하는 코다, 부모·형제·자매를 포함하여 자신만 홀로 코다인 경우, 군인 코다, 페미니스트 코다, 피부색이 다른 코다, 학계에서 일하는 코다, 학대를 받거나 받고 있는 코다, 2개 이상의 음성언어 혹은 2개 이상의 수어를 배우고 경험하며 자란 코다, 여전히 부모를 지원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코다, 불과 얼음의 모임 등등. 그것도 모자라 각 국가·지역별로 모일 수 있는 소모임들도 있었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모양의 코다가 존재하며 그 모두는 코다라는 이름으로 환대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문화 코다들의 주제별 소모임에 들어갔을 때였다. 피부색이 다른 코다들이 따로 모여 소모임을 만들자고 했다. 그러자 한 코다가 말했다.

“피부색이 다른 코다들은 다문화 코다로 쉽게 결집할 수 있죠. 그런데 저는 백인이에요, 하얗죠. 근데 저는 단순한 백인이 아니거든요. 엄마와 아빠의 출신 국가가 다르고 그에 따른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어요. 저도 다문화 코다인데 피부색이 하얗다는 이유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제되는 경험을 해요.”

몇 년 전, 한국에서 코다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만들 때였다. 부모와 홈사인(Home-Sign)을 사용하는 코다가 있었고, 수어 교육을 받지 못한 농인 아버지와 지체장애인 어머니 아래서 자란 코다가 있었다. 그때는 그들이 코다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기준으로 봤을 때, 농사회와 청사회를 넘나드는 경험을 하며 수어를 모어로 하는 이가 코다라고 생각하고 편협하게 정의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한 정체성과 모습을 지닌 코다들이 있었다. 경계가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

콘퍼런스 마지막 밤인 7월 13일에 열린 엔터테인먼트의 밤. Sherry Hicks가 미국수어로 노래하고 있다. 사진 김보석
콘퍼런스 마지막 밤인 7월 13일에 열린 엔터테인먼트의 밤. Sherry Hicks가 미국수어로 노래하고 있다. 사진 김보석
 

- ‘동생의 엄마’가 되어야 했던 코다 맏이와 그 뒤에 가려진 동생

주제별 소모임은 콘퍼런스 기간 내내 열렸다.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어색하게 방에 들어갔지만 나올 때면 이상하게 가족이 생긴 기분이었다. 이야기를 모두 나눈 후면 다 함께 어깨동무하고 큰 원을 만들었다. 어깨를 맞대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용기 있게 이야기를 나누어 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사려 깊게 들었던 이, 함께 울고 웃었던 이. 모두가 방에서 나갈 때면 친구이자 가족이 되었다.

코다 자매·형제 소모임에 들어갔을 때였다. 자매 혹은 남매가 함께 온 경우도 있었고, 함께 콘퍼런스에 참석했지만 동생과 들어오고 싶지 않아 누가 들어갈지 사전에 합의하고 들어온 이도 있었다. 나처럼 홀로 콘퍼런스에 참석한 코다들도 있었다. 나무 막대기를 넘겨받으며 짤막한 자기소개를 했다. 내 옆에는 셋째 언니와 함께 들어온 넷째이자 동생인 코다가 있었는데 50대 코다였다. 이처럼 다양한 세대의 코다를 만나는 건 난생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한국에서 내가 만났던 코다들은 모두 내 나이 또래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내 윗세대 코다가 존재할 거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러나 코다는 청인, 농인과 함께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다만 한국의 코다는 자신이 ‘코다’라는 걸, 자신을 명명하는 이름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을 뿐이었다.

소모임에 들어오기 전에는 뭐 딱히 할 말이 있을까 싶었다. 나는 이미 다 자란 성인이고, 동생과 완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어떤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나무 막대기가 손에서 손으로 넘어가며 각자가 경험했던, 코다 자매·형제 관계에서 생기는 다양한 경험들을 듣자, 내 몸 어딘가에 남아 있었던 이야기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초등학교 5~6학년 때쯤이었어요. 당시 저는 한국의 한 농촌 마을에 살고 있었고, 그때의 저희에게는 시내로 햄버거를 먹으러 가는 게 큰 이벤트 중 하나였어요. 몇몇 친구들, 동생들과 함께 날을 정해 다 함께 가기로 했죠. 시내에는 파파이스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유일하게 햄버거를 먹을 수 있었어요. 부모님이 노점 장사를 했는데 경제 상황이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죄송한 맘으로 용돈을 받아 파파이스에 도착해 설레는 맘으로 메뉴를 확인하는데 아뿔싸, 돈이 부족한 거예요.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달랑 세트 메뉴 하나 시킬 수 있었어요. 햄버거가 그렇게 비싼 줄 몰랐던 거죠. 어쩌지, 하고 머릿속으로 온갖 계산을 하고 있는데 친구들이 주문을 하기 시작했어요. 동생은 햄버거를 먹을 생각에 신난 표정이었고, 저는 친구들에게 돈이 부족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냥 몇천 원만 빌리면 되는 거였는데. 고민 끝에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하고는 세트 메뉴 하나만 시켜 동생에게 줬어요. 사실 저는 햄버거를 잘 못 먹었거든요, 느끼해서. 햄버거 하나 다 먹으려면 콜라 두 캔은 마셔야 했어요. 그렇게 햄버거가 먹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내 앞에만 세트 메뉴가 없다는 게 창피하고 속상했어요. 쟁반을 받고 2층으로 올라와 음식을 먹는데 눈물이 났어요. 동생은 그것도 모르고 엄청 맛있게 먹더라고요.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엎드려 자는 척을 했는데 자꾸만 설움이 복받쳐 어깨가 들썩였어요. 사실 이거, 엄청 작고 귀엽고 웃긴 에피소드거든요? 그런데…… 이걸 27살이 되어서야 동생에게 꺼내놓을 수 있었어요. 동생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더라고요. 이야기하는데 울면서 웃었어요. 지금처럼요.”

목이 메 중간중간 말을 멈춰야 했다. 단순히 햄버거를 못 먹어 슬펐던 건 아니라며 울다가 웃기를 반복했다.

어렸을 적 집안 경제 상황이 무척 좋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아빠는 다니던 가구 하청회사의 부도로 직장을 잃었다. 길거리에 내몰린 아빠는 지인에게 와플과 풀빵을 구워 팔면 먹고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노점 장사를 시작했다. 엄마와 아빠는 전국의 축제를 다니며 와플과 풀빵을 구워 팔았다. 성수기에는 제법 장사가 잘되어 쏠쏠했다. 그러나 축제가 열리지 않는 추운 겨울 비수기가 문제였다. 날은 추웠고 어떤 축제도 열리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는 밤마다 돈이 없다고 말했고, 나는 그 수어 대화를 엿봤다. 엄마는 쌀 살 돈이 없다며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었다. 매일 매일이 수제비였다. 동생은 것도 모르고 맛있게 먹었지만 나는 왜 우리가 매번 라면과 수제비를 먹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도저히 우리를 먹일 수 없다며 나와 동생을 대전에 있는 할머니 댁에 보낸다고 했다. 그런데 대전까지 가는 기름값도 없었다. 아빠는 우리를 충남 천안에 내려줬고, 그곳에서 우리는 삼촌을 만나 대전으로 향했다. 나는 그 휴게소의 공기가 얼마나 차가웠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동생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당장 먹을 것이 없다는데 어쩌지 하고 걱정하는 것도, 대출이 가능한지 통역하기 위해 은행에 불려 다녔던 것도, 전세금이 얼마고 보증금은 얼마나 되는지 전화번호를 누르며 부모 대신 확인해야 했던 것도, 불쌍하다며 손에 500원짜리 동전을 쥐여주는 낯선 이들 앞에서 동생 손을 잡고 활짝 웃어야 했던 것도. 같은 코다라고 동일한 삶의 무게를 지니는 것은 아니었다.

콘퍼런스에 마련된 ‘병원의 방’. 농인들이 종종 환대라는 뜻의 영어 단어 호스피탈리티(Hospitality)를 보고 병원이라는 뜻의 호스피탈(Hospital)로 착각하여 쓰는 것을 보고 붙인 애칭이다. 편하게 앉아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사진 Catherine White
콘퍼런스에 마련된 ‘병원의 방’. 농인들이 종종 환대라는 뜻의 영어 단어 호스피탈리티(Hospitality)를 보고 병원이라는 뜻의 호스피탈(Hospital)로 착각하여 쓰는 것을 보고 붙인 애칭이다. 편하게 앉아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사진 Catherine White
 

막대기가 나에게로 돌아왔다. 동그란 모양으로 앉은 참석자들은 자유롭게 말하거나 들었다. 앞쪽에 앉은 한 프랑스 코다 자매는 짤막한 자기소개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이야기도 꺼내놓지 않았다. 동생이 콘퍼런스에 함께 오자고 해서, 이 소모임에 함께 들어가자고 해서 함께 왔다고 언니가 입을 열었을 뿐이었다. 둘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계속 눈물을 훔쳤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감정과 이야기를 계속해서 만지고 꺼내 놓을까 말까 고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둘은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사려 깊게 들으며 눈물을 훔쳤다.

“초등학생이었나 중학생 때였어요. 저는 공부를 곧잘 하는 우등생이자 모범생이었어요. 그런데 동생은 그렇지 못했죠. 엄마가 동생을 잘 타일러 보라고 했어요. 성적에도 좀 신경 쓰고 공부도 열심히 하면 좋겠다고요. 동생이 수어도 잘 못 하고 해서 말도 잘 안 통하고, 엄마가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제가 이야기하는 게 훨씬 더 잘 통할 거라고요. 그래서 동생을 앉혀 놓고 훈계를 했어요. 집안 사정도 좋지 않고 하니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냐고. 길게 이야기를 하는데 동생이 눈물을 흘리더니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거예요. 제가 왜 동생을 울려야 하는지, 그 역할을 왜 제가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어요. 그렇지만 엄마가 하기 어려우니 내가 해야지, 하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니 제가 동생에게 또 다른 짐을 지웠던 것 같아요.”

이상하게도 나무 막대기를 들고 입을 열 때마다 감정이 북받쳤다. 이미 15년도 더 지난 일인데 그때의 나와 동생을 떠올릴 때마다 목이 메었다. 어쩌면 그때 내가 동생에게 누나라는 이름으로, 엄마라는 이름으로 그의 자리를 빼앗은 건 아닐까. 실컷 어리광과 말썽을 부릴 나이에 나는 동생에게 나처럼 빨리 어른아이가 되기를 요구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통역사이자 보호자 역할을 하는 것처럼, 너도 어서 자라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어른아이가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얘기했던 것인지도. 나는 내가 코다 맏이라 동생에게는 엄마가, 부모에게는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고, 그게 큰 짐이었다고 했지만 정작 동생의 입장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었다. 엄마인 척하는 목소리 큰 누나와 농인 부모 아래서 자기 의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자란 동생. 그가 싫은 소리 하나 하지 않는, 언제나 반듯하고 착한 아이가 된 것은 나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콘퍼런스에 오기 전, 동생에게 나중에 함께 가자며 의향을 물었다. 동생은 흥미롭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시큰둥해했다. 나처럼 강하고 긍정적인 코다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게 나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대기를 옆 사람에게 넘겼다. 프랑스 코다 자매 중 동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쳐다봤다. 눈가가 빨갰다. 어떤 마음으로 나를 쳐다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이야기 중 어떤 부분이 당신의 그 감정을 일렁이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신과 언니는 어떤 이야기를 지녔는지는 모르겠지만 너와 내가 그 어떤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임이 끝난 후, 자매에게 다가가 인사하며 그들을 꼭 안아주었다. 이야기를 들어줘서, 함께 울어주어 고맙다고. 이렇게 용기 내어 언니와, 또 동생과 함께 이 방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힘이 된다고. 나도 언젠가 동생과 이 방에 들어와, 평생 듣지 못했던 동생의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내가 빼앗았던 그 자리를 동생에게 돌려주고 싶다고 말이다.

▷ 3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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