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은 ‘권리 보장 대상’ 아닌 ‘권리 생산의 주체’로서의 노동자
“목표는 거창한데 현실은 미약… 간극 메꾸기 위한 구체적 전술 고민해야”

13일 저녁 7시,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서울시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에 대해 논의하는 토론회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노동권위원회와 노들장애학궁리소 공동주최로 열렸다. 사진 강혜민
13일 저녁 7시,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서울시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에 대해 논의하는 토론회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노동권위원회와 노들장애학궁리소 공동주최로 열렸다. 사진 강혜민

근대사회 이후 신체적·정신적 손상으로 ‘노동할 수 없는 몸’으로 낙인찍혀 ‘장애인’으로 규정된 이들은 노동시장에 진입할 수 없었다. 오늘날에도 장애인은 기껏해야 직업재활시설에서 최저임금도 받지 못한 채 주저앉거나, 장애인 의무고용률에 따라 기업이 고용부담금을 내기 싫어서 ‘억지로’ 채용해줄 때에야 직업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재활 중심의 노동시장에 중증장애인의 자리는 없었으며, 장애인은 자신의 현 상태를 부정하며 끊임없이 노동시장에 편입되기 위해 ‘노오력’해야 한다.

올해 7월 1일, 서울시는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시범사업(아래 권리중심 일자리)’을 시작했다. 이 사업에는 현재 260명의 중증장애인이 참여하고 있으며, 이들 상당수는 기존 장애인 복지일자리에도 참여하기 어려웠던 최중증장애인과 탈시설 장애인들이다. 장애인 노동자는 최저임금법 7조에 따라 최저임금 적용 제외를 받아 최저임금을 못 받는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서울시 권리중심 일자리에 참여한 이들은 최저시급을 적용받는다는 것도 이 일자리의 중요한 점 중 하나다. 올해 서울시 예산은 12억 원으로, 내년에는 대상자를 350명으로 보다 확대해 운영될 계획이다.

이들은 ①장애인 권익옹호활동 ②문화예술활동 ③장애인 인식개선활동을 통해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을 사람들에게 홍보하는 활동을 주로 한다. 한국 정부가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을 비준했음에도 이를 대중에게 알리고 협약을 준수할 의무를 지키지 않자, 중증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나선 것이다.

이러한 활동을 하며 장애계는 “이것도 노동이다”라고 외친다. 즉, 과거에 ‘이것은’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상품을 생산하고, 자본가에게 돌아갈 이윤(잉여가치)을 창출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상품을 생산하지도, 이윤을 창출하지도 않는다.

또한, ‘이것은’ 기존 재활 중심의 장애인 노동 패러다임을 벗어난다. 현재 중앙정부의 장애인 노동 정책에 견주어 봤을 때, 재활 패러다임을 벗어난 서울시 권리중심 일자리는 파격적이다. 실제 이는 장애계의 오랜 투쟁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장애계는 2017년 11월부터 85일간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서울지사를 점거하고 장애인 노동권 보장을 위해 공공일자리 1만 개 도입을 요구했는데, 이는 그 성과의 일부다. 하지만 기뻐하기엔 이르다. 이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이 일자리 사업은 올해 서울시의 6개월짜리 시범사업에 불과하며, 서울시는 예산상의 이유로 내년도 시범사업 철회를 시도하기도 했다. 장애계는 “이것도 노동이다”며 전국적 확산을 꾀하지만, 중앙정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이러한 가운데 권리중심 공공일자리가 어떤 노동이며 이 일자리가 오늘날 장애인에게 왜 필요한지 등을 논의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13일 저녁 7시,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열린 이번 토론회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노동권위원회와 노들장애학궁리소가 공동주최했으며, 기존 장애인 노동정책의 패러다임을 넘어 새로운 노동 개념의 정립으로 나아가기 위한 열띤 논의가 이어졌다.

정창조 전장연 노동권위원회 간사가 발표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정창조 전장연 노동권위원회 간사가 발표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 서울시 권리중심 일자리는 ‘권리를 생산하는 노동’

이날 발제를 맡은 정창조 전장연 노동권위원회 간사는 “‘서울시 권리중심 일자리’ 노동자들은 ‘권리를 생산’하는 노동을 수행한다”며 이를 ‘권리생산노동’으로 명명하고, “이들은 ‘권리 보장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 생산의 주체’이다. 이것이 바로 과거 재활 중심, 시혜성 복지일자리와의 차이”라고 강조했다.

정 간사는 “기존 노동 정책에서 바뀌어야 하는 것은 장애인 당사자였다. 그러나 권리중심 일자리는 장애인의 현 상태를 존중한다”면서 “이 일자리는 기존 기준에 맞춘 생산성을 가진 노동력이 될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노동자 당사자들이 타인과 관계 맺고, 동료 시민들의 권리 보장에 대한 인식과 실천 역량, 권리 침해에 저항할 수 있는 역량 발전을 목표로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 일자리는 권리와 사회의 공공적 가치와 사회 변혁을 생산한다”면서 “이는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굉장히 비생산적 노동이다. 그러나 세계는 이윤 창출을 위한 상품으로만 구성되어 있진 않다. 오늘날 ‘생산적 활동’으로 불리는 것들이 도리어 세계를 파괴하고 있지 않나?”라고 물음을 던졌다. 그러면서 정 간사는 “권리생산노동 등 새로운 노동실험을 통해 생산성의 기준을 새롭게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면서 “이제 생산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산적하게 쌓인 과제들도 제시했다. 정부와 지자체에 의해 관리되기에 이 일자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급진성과 의미를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현재 이 일자리는 1년 단위로 계약하는 매우 불안정한 일자리이자 저임금 일자리로, 예산 상황에 따라 언제든 일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있다”는 현실적 한계도 지적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정 간사는 “권리생산노동이 기존 제도에 단순 흡수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운동진영이 생산 과정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민주적 절차가 있어야 한다”면서 “이 일자리는 장애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확대될 수 있기에 장애인운동을 넘어 다른 진영들이 힘을 모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박하순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박하순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 ‘비생산적 노동’은 무척 많아… ‘비장애인 기준으로 장애인 노동 평가하는 게 문제’

그러나 이에 대해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이원화하여 윤리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박하순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생산적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에 이윤을 가져다주는 노동이다. 그런데 여기에 ‘생산적 노동’은 좋은 것, ‘비생산적 노동’은 나쁜 것이라는 윤리적 가치를 부여할 것은 아니다”라면서 “사회를 유지하는데 생산적 노동은 필수 불가결하다”고 반박했다.

박 연구위원은 “공공부문에서의 노동도 ‘생산적 노동’은 아니다. 예를 들어 동해시에 있는 한 공무원의 노동은 시장에서 평가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비생산적 노동이다”라면서 “삼성 이재용과 같은 경영자들도 생산적 노동을 하는 게 아님에도 이윤에 더해 경영자로서의 임금도 가져간다. 우리사회에 비생산적 노동은 무척 많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비생산적 노동도 생산적 노동의 강도와 규율(의 기준을 적용)을 받을 것이고, 장애인이 아닌 노동자들은 비생산적 노동자일지라도 상당히 ‘빡센’ 노동을 하고 있다”면서 “장애인 노동에 대한 평가는 비장애인의 비생산적 노동에 견줘 이뤄질 텐데, 이러한 시각이 우리의 주관적 의지와 무관하게 소멸되진 않을 것이다. 결국 이 일자리도 그러한 비교와 평가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 아닌가. 이를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사회가 바뀌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현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김상현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 이 일자리는 왜 꼭 중증장애인이 해야 하는가?

김상현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수혜자(생산된 것을 받는 사람)가 판단했을 때 쓸모 있어야 ‘이것도 노동이구나’ 생각한다”면서 “여기서 수혜자가 받는 것은 ‘편견을 제거하는 것’, 즉, 인식과 가치 체계의 변화이다. 그런데 이것을 과연 수혜자가 받길 원할까? 수혜자는 자신의 편견이 제거되길 원할까?”라는 물음을 던졌다.

김 교수는 “국가가 돈을 주다 보니 국가가 개입하게 된다. 그런데 국가가 가치관의 변화를 강요/권유할 수 있는가?”라면서 “이러한 부분에서 권리중심 일자리가 독특한 부분이 있다. 이에 대한 방어 논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어 “이 일자리는 왜 꼭 중증장애인이 해야 하는가? 비장애인, 경증장애인 활동가들은 왜 정부로부터 임금을 받지 못하는가? 라는 부분도 생각해볼 지점”이라고 밝혔다.

전지윤 다른세상을향한연대 실행위원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전지윤 다른세상을향한연대 실행위원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 “목표는 거창한데 현실은 미약… 간극 메꾸기 위한 구체적 전술 고민해야”

전지윤 다른세상을향한연대 실행위원은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문제의식을 장애인 노동권 문제에도 적용하여 발전시킬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사회적 재생산 이론은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 임금노동, 시장에서의 교환가치, 상품 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필요노동시간만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노동, 공동체에서의 사용 가치, 삶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개별적 필요노동시간에 대해 주목”하며 “시장 밖에서 직접 상품 생산에 기여하지 않더라도 삶의 가치와 의미를 만들어내면서 사회구성원의 육체와 영혼을 보듬고 사회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도움되는 모든 활동을 생산적이고 가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시각에서 전 실행위원은 “코로나 팬데믹은 돌봄, 간호 등의 재생산 경제, 돌봄 경제가 사회 존재와 지속을 위해 얼마나 필수 불가결한지 보여줬다”면서 “장애인들이 자신의 권리를 옹호하고 동료를 지원하고 돌보는 활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평가하는 것은 코로나 이후의 이러한 방향과도 부합한다”고 긍정했다.

그럼에도 몇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발제자인 정창조 간사가 권리생산노동을 ‘가사노동, 돌봄노동과 등치시켜 파악해서는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며 돌봄 노동과 분리한 것에 대해 전 실행위원은 “맥락은 이해되나 굳이 그러한 구분과 차이점 부각이 필요한가”라면서 “사회적 재생산 이론은 그동안 상품 생산에 비해 간과해왔던 노동력 재생산에 주목해왔는데, 권리생산노동도 가사, 돌봄 노동처럼 인간의 삶과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며 더 가치 있게 만드는 사회적 재생산 노동의 일부라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나”라고 물음을 제기했다.

이어 “향후 법제화가 되면 장애인만이 아닌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도 이 일자리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새로운 사회로의 대전환을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 그러나 목표는 거창하나 현실은 미약하기에 이 엄청난 간극을 메꾸기 위한 구체적 전술과 불가피한 타협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이러한 토론자들의 지적에 정 간사는 “‘생산적’, ‘비생산적’의 범위와 의미, 노동과 재생산의 개념은 시대에 따라, 진영에 따라 이해하는 바가 다르다. 오늘 토론자들이 제기한 비판이나 질문도 기존 개념에 대한 서로의 다른 이해와 사용과 맞닿아 있다”면서 “그러나 여태 기생적 존재로 살아와서 세계를 구성하는 데 참여하는 것 자체를 갈구하는 중증장애인에게는 기존의 개념 이해를 넘어 개념에 대한 새로운 정립이 필요하다. 향후 여러 입장을 가진 이들과 장애인 노동권 담론을 더욱 풍부히 해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보고 싶다”고 밝혔다.

관련기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비마이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