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 성을 밝히고 재생산에 올라타다
[공동기획] 비마이너 X 장애여성공감 X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가족계획 사업용 특수이동 시술 차량. 보건사회부는 1972년 3월 24일 USAID(미국국제개발처)로부터 가족계획 사업용 특수이동 시술 차량 13대를 인수했다. 차량 겉면에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서울특별시 (사진 출처 : 서울사진아카이브)
가족계획 사업용 특수이동 시술 차량. 보건사회부는 1972년 3월 24일 USAID(미국국제개발처)로부터 가족계획 사업용 특수이동 시술 차량 13대를 인수했다. 차량 겉면에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서울특별시 (사진 출처 : 서울사진아카이브)

프롤로그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현행 모자보건법 제14조 1항에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 한계로 명시되어 있는 다섯 가지 경우 중 첫 번째 항목이다. 박정희 정권 비상국무회의가 1973년에 모자보건법을 제정하며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하게 해하고 있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 임신중절 수술을 허용한다는 내용이 실리면서, 이 내용의 구체적 의미와 상관없이 정부가 인구정책 차원에서의 낙태 자유화의 신호를 주었”다고1) 한다면, 이것은 (함께 제정되었다가 1999년에 폐지된 “불임수술명령” 조항과 함께) 장애인을 향한 ‘재생산 금지의 신호’가 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2) 이 항목은, 그리고 대한민국 법전에 기재된 “우생학”이라는 용어는 아마도 곧 사라질 것이다. 형법 제27장 낙태의 죄를 전면 삭제하고 이에 따라 모자보건법 제 14조 역시 삭제한 권인숙 의원안은 물론 형법을 유지하고 허용사유를 확대한 정부안에서도 더 이상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은 언급되지 않는다.

낙태죄가 폐지되고 우생학적 관점 역시 법에서 삭제된다는 것을 장애인에게 있어서는 낳지 않을 권리와 낳을 권리가 두루 보장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좋을까. 우선은 비용적인 면에서의 의료 보장 확대나 의료기관 접근성 확보와 같은 과제들을 살펴야 할 것이다.3) 출산을 생각한다면 양육에 필요한 자원들 역시 따져야 한다. 한편으로는 우생학은 소위 전문적인 학문 분과나 법‧제도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므로 사회통념과 의료 상품 등의 형태로 생활에 스며있는 우생학적 사고를 찾아내고 해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4) ‘장애는 개개인에게나 사회에나 모두 부정적인 결함이며 따라서 재생산―대물림―되어서는 안 된다’는 관념이 법령에서 단어나 조항 하나를 삭제하는 것만으로 저절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장애여성의 선택권을, 혹은 보편적인 인권을 보장하겠다는 구호만으로 장애여성의 재생산권이 확보되는 것 또한 아니다. 적어도 재생산에 관해 어떤 선택들이 (불)가능한지, 인권으로서의 재생산권이란 어떤 구도 속에 놓여 있는지를 철저히 검토하지 않는 한, 선택에 대해서도 권리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 바는 많지 않다.

권리와 선택이 닿지 않는 곳

우연히 만난 고향 사람을 통해 광명 사랑의집을 알게 되었고, 경순은 거기에 머무르게 되었다. 종이컵 공장에 딸린 두 칸 살림방에 남자 세 명이 한 방을 쓰고, 다른 방에 경순이 살았다. 그곳에서 7, 8년 동안 일하는 사람들의 밥을 해주며 살았다. 공동생활이라 자유롭지 못했고, 밥 짓는 노동에 대한 대가도 없었지만 경순에게 그리 나쁜 기억은 아니다. 집에서 늘 엄마와 하는 일이었기에 밥하고 살림하는 일은 익숙했고, 자신 있었다. 경순이 지은 밥을 공장 사람들 모두가 맛있다고 칭찬했다. 월급 한 푼 받지 못하며 수년을 일했지만 분노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장애인의 노동이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경순이 자기 몫을 한 첫 사회생활이었다.5)

샤르코 마리 투스라는 유전성 말초신경병을 갖고 있는 1958년생 장애여성 경순의 이야기다. “경순은 어릴 적부터 동네 사람들에게 부잣집에 가서 애나 낳아주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노동을 하거나 독립하기 어려우니 부모 짐도 덜 겸 그렇게 출가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묘하게 꼬인 데가 있다. 노동하기 어렵다고 여겨졌지만 실은 늘 가사노동을 해 왔으며 “부모 짐도 덜 겸”으로 요구된 역할 역시 재생산 노동이다. 장애가 있으므로 노동하지 못하리라는 단언, 가족과 사회에 짐이 되지 않도록 노동해야 한다는 요구가 동시에 가해진다. 집에서나 옮겨 간 곳에서나 같은 일을 했고 똑같이 무임노동이었지만 한쪽에서는 “짐”이었던 삶이 한쪽에서는 “사회생활”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그는 결혼을 했고 두 아이를 낳았다.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던 ‘엄마 노릇’과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장애여성 엄마 노릇’을 동시에 달성해야 하는 과업”을 오롯이 홀로 해내야 했다. “지금처럼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닐 수 있는 세상이면 절대로 남편과 계속 살진 않았을” 테지만 당시로써는 “선택도 강제도 아니었”다.

임신중지 역시 단순하지 않다. 장애여성의 출산과 양육이 종종 불가능하거나 무용한 것으로 상정되는 가운데 (모자보건법과 같은) 제도를 통해서든 가족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에 의해서든 장애여성의 임신중지가 하나의 강제이자 규범으로 작동해 왔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장애여성의 모성(권)만을 강조하는 것은 “장애여성이 낙태를 선택하게 되는 상황”에 대한 적극적인 고려를 누락시켜 왔다. 성교육에서 배제되어 적절한 피임 방법을 알지 못해서, 혹은 폭력적인 관계로 인해 예상치 못하게 임신하게 된 경우나 다른 여러 이유로 임신‧출산을 원하지 않는 경우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것이다. 이는 곧 성교육에서의 배제, 폭력적인 관계에의 노출과 같은 문제적 상황들, 나아가 모성에 제한되지 않는 다양한 성적 욕망과 실천의 존재가 논의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선택과 강제의 구분, 선택의 권리와 자유라는 말은 공허하다. 장애여성 운동에서 모성권에서 재생산권으로의 담론적 (확대)전환이 요구된 것이 바로 이런 한계 앞에서였다.6)

“모든 커플과 개인이 자유롭고 책임 있게 아이의 수와 터울, 출산 시기를 자유롭고 책임 있게 결정하며 그에 필요한 정보와 수단을 가질 기본적인 권리, 그리고 최고 수준의 성‧재생산 건강을 이룰 권리”를 토대로 하는 재생산권 개념은7) 모성(이라 불리는 출산과 양육), 임신중지 등을 통합적으로 고려하는 한편 그 권리를 실질적으로 누리는 데에 필요한 정보권, 접근권, 건강권 등을 필수적인 논제로 다룬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누구의 권리인지 어떤 방식의 임신과 출산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정당화될 수 없는 방식은 어떤 것인지와 같은 질문은 이루어지지 않는”8) 어떤 난관 혹은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 성‧재생산을 둘러싼 사건들이 개인에게서 일어나는 것으로 상상됨으로써 많은 것이 다시 한 번 숨겨지는 것이다.

사생활(privacy)과 사적 영역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배제함으로써 여성의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은 임신중지 권리를 지지하는 주요한 논리다. 자신의 몸에 대한 자신의 선택을 강조하는 ‘마이 바디, 마이 초이스(My Body, My Choice)’나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가, 혹은 “국가의 행위로부터 사생활을 보호하는 수정헌법 14조 적법절차 조항에 대한 위반”으로서의 임신중지 범죄 규정에 제동을 건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이9) 그러한 논리를 공유한다. 그러나 임신, 출산, 임신중지 등이 누가 이 세계의 성원으로 환영받을 수 있는지, 그러한 환영(과 실질적인 수고)을 누가 할 수 있고 누가 해야 하는지의 문제라고 한다면 재생산권은 ‘나’의 선택, ‘나’의 권리로는 충분히 해명되지 않는다.

한 여성이 “싫어!”라고 말하며 남성으로부터 몸을 돌리고 있다. 남성은 “널 사랑해서 그러는데 왜 그래?! 가만히 있어!”라고 외치며 여성의 허리를 잡은 채 여성을 만지려고 한다. 장애여성을 위한 성교육 교재 『장애여성공감 성을 밝히다』(2009) 삽화. ⓒ장애여성공감
한 여성이 “싫어!”라고 말하며 남성으로부터 몸을 돌리고 있다. 남성은 “널 사랑해서 그러는데 왜 그래?! 가만히 있어!”라고 외치며 여성의 허리를 잡은 채 여성을 만지려고 한다. 장애여성을 위한 성교육 교재 『장애여성공감 성을 밝히다』(2009) 삽화. ⓒ장애여성공감

재생산 정의: ‘삶’의 조건들을 확보하기

이것은 ‘나’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이기 전에 누가 ‘나’가 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 말하자면 권리를 가질 권리에 관한 문제이다. 1970년대 미국의 프로초이스 운동은 낙태죄 폐지를 통한 임신중지권 확보에서 시작해 스스로의 의사대로 출산을 조절할 권리와 신체적‧정신적‧사회적 안녕으로서의 건강을 누릴 권리, 이에 필요한 정보와 서비스에 접근할 권리를 확보해 나갔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그러한 권리를 가질 권리 자체를 얻지 못한 이들―예컨대 제도적으로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 가정이나 지역공동체, 일터 등에서 통제당하는 이들―이 있었다.

병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의료보험이 있으며 병원에서의 의사소통에 장벽이 없는 이들, 외출이 자유로운 이들과는 삶의 조건이 전혀 다른 이들이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보험이 없고 강제추방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영어로 의사소통하기 어려운 이주여성에게 저 ‘선택’과 ‘권리’는 너무도 먼 곳에 있다. 영주권, 시민권을 인질 삼은 가정폭력을 겪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주로 유색인 공동체를 중심으로) 제안된 것이 재생산 정의(reproductive justice)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1989년에 출범한 재생산정의를위한아시아계공동체라는 단체는 재생산 정의라는 개념이 “여성(women and girls)의 완전한 신체적, 정신적, 영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안녕”을 가리키며 이는 “여성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과 가족, 공동체를 위해 신체, 섹슈얼리티, 재생산에 관한 건강한 결정을 내릴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권력과 자원을 갖게 될 때 달성될 것”이라고 설명한다.10)

이것이 재생산권 개념과 그 자체로 대립하는 것, 혹은 재생산권이라는 개념의 대체용어로 제시된 것은 아니다.11) 재생산권이 ‘권리를 가질 권리 자체를 얻지 못한 이들’에게도 유효한 것이 될 수 있기 위한 보다 넓은 차원에서의 새로운 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치적 […] 안녕”, “삶의 모든 영역에서 […] 건강한 결정을 내릴 권력과 자원”과 같은 것들이 보장되지 않는 조건에 있는 이들이 함께하기 위해서는 출발점 자체가 달라야 했다. 선택과 강제로 나누어떨어지지 않는 것들, 적극적인 강요나 금지가 없더라도 결코 선택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곳,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선택의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는 곳에 머물러 있는 일들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재생산 정의라는 패러다임은 임신중지나 출산에 대한 제도적인 금지 혹은 강요와 다른 층위에서 (또한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문제들부터 따져보아야만, 언제나 그것을 함께 고려해야만 재생산권이 보편적인 권리로서 논의되고 실현될 수 있음을 의식하는 관점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임신중지를 다시 짚어 보자. ‘낙태의 죄’를 규정하고 처벌하는 조항이 폐지되면 임신중지는 권리로서 주어진다. 그러나 이 권리가 곧장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문화적인 금기와 낙인, 차별은 차치하고도) 이 권리는 경제적, 물리적으로 의료기관에 대한 접근이 가능해야, 또한 의료기관에서 언어장벽이 없어야만 행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다른 권리들을 보장하는 것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피임 수단이 없어서, 혹은 폭력적인 상황으로 인해 ‘의도치 않게’ 임신할 ‘수밖에 없는’ 이에게라면 임신중지는 종종 선택도 권리도 아닌 일이 될 것이다.12)

파트너와 협상할 힘, 특정한 상황을 폭력적이라고 규정하고 차단할 힘 자체가 없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은 그 관계를 벗어날 경제적, 물리적 수단이 없어서 생기기도 하지만 다른 관계적 자원이 없어서 생기기도 한다. 폭력을 행하는 사람이 또한 돌봄을 제공하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한 경우, 혹은 어떤 공간의 성원이라는 인정과 소속을 제공하는 유일한 사람인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13) 요컨대 임신중지, 나아가 재생산 전반이 실질적인 권리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특정한 법 조항을 폐지하고 몇 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자체를, ‘삶의 모든 영역에서 권력과 자원을’ 확보해야 한다.

또한 명심해야 할 것은 이것이 그저 주어진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것과는 다른 문제라는 점이다. 성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 의료 기관에서도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사람에게는 임신중지 여부를 결정할 능력이 있을까? 그가 어떤 결정을 내렸을 때 이를 능력과 권리를 행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은 ‘표준적인’ 성교육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이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육 방식을 바꾸어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쉽게 단정해도 되는 걸까? 특정한 형태로 작동하는 능력을 상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삼을 때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대개 그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기 위한 조력이나 능력을 갖지 못한 이들에 대한 보호가 아니다. 능력을 가진 것으로 상정된 이들은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갖지 못한 것으로 상정된 이들은 갖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되는 방치다.

예컨대 정부의 모자보건법 개정안은 “임신한 여성이 심신장애로 의사결정능력이 없는 경우” 임신중지 요청, 의사 설명 청취, 시술 혹은 처방에의 동의를 모두 법정대리인이 대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최대한 스스로의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개개인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설명을 제공하고 동의를 물을 방법의 개발과 수행 등의―조치는커녕 “의사결정능력이 없는 경우”를 판단할 기준조차 제시하지 않는다. “16세 미만 미성년자”에게는 원칙적으로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요구하는 것, 임신 24주 이후의 임신중지 요청에 대해서는 24시간의 숙려 의무를 두는 것 또한 같은 궤도 위에 있다. 누가 능력을 가져도 좋은지를, 누가 권리를 가질 자격이 있는지를 제한하는 식이다. 여기서 ‘나의 권리’가, ‘나의 선택’이, ‘나’의 존재가 금지된다. 재생산 정의를 말한다는 것, 재생산권을 새로이 말한다는 것은 바로 이 깊은 금지와 싸우는 것이다. 이러한 금지를 양분으로 구성되는 권리와 선택이 ‘나의’14) 것이라는 속단과 싸우는 것이다.

보라색 바탕에 꽉 쥔 주먹이 하늘을 향해 있다. 주먹 위엔 하얀 구두가 올려져 있다. 주먹 옆에는 “KEEP GOING” 문구가 쓰여 있다. ⓒthegreats
보라색 바탕에 꽉 쥔 주먹이 하늘을 향해 있다. 주먹 위엔 하얀 구두가 올려져 있다. 주먹 옆에는 “KEEP GOING” 문구가 쓰여 있다. ⓒthegreats

나가며: 욕망의 재고

“의사결정능력이 없는” 어떤 사람을 (‘정상적인’) ‘욕망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라 바꾸어 말해도 좋을까. 무능력이 상정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욕망의 부재가 상정된다. 장애인은 흔히 무성적이거나 성애적 욕망이 없는 존재로, “아이 같고 성을 잘 모르는 순박하고 깨끗한 이미지로” 재현되며 이는 “장애인은 성적인 존재여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금지명령”으로 기능한다. 이 금지에 순종하지 않는 욕망의 형성과 표출은 문제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미국의 어느 부모가 2004년 발달장애인인 6세의 딸에게 호르몬 요법, 성장판 제거 수술, 자궁 절제 수술 등을 받게 해 성장과 2차 성징을 차단한 사례는 그야말로 극단적이지만, 바로 지금 한국의 의료 기관에서도 예컨대 장애를 가진 딸의 월경을 멈출 방법을 상담하는 등의 경우를 찾을 수 있다.15) 이처럼 장애인, 특히 장애여성의 성적 욕망은 없거나 없어야 하는 것, 있다 해도 그저 ‘무능력한’ 스스로에게 위험을 초래하는 것으로 상상된다. 또한 한편으로는 스스로는 통제할 수 없는, 타인에게 위협적인 욕망이―예컨대 반사회적인 장애인의 성적 가해라는 형태로―상상된다. 어느 쪽이든 불가능하거나 부적절한 욕망, 혹은 자격 없는 욕망이다.16)

(적절한) 욕망 없음, 혹은 (적절하게) 욕망할 능력 없음이라는 선입견은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성애적 욕망이 부재할 뿐 아니라 성별화된 정체성이나 이를 토대로 스스로를 구분하고 형성하려는 욕망(혹은 이를 욕망할 필요) 또한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타인에게 몸을 보이거나 타인과 신체를 접촉하는 일이 유쾌하게든 불쾌하게든 성적인 것으로 인식되리라고는 쉽게 생각되지 않는 식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장애인의 성은 정상적이고 규범적인 범위 내에서 최소한으로만―예컨대 이성애적이고 모성적이며 가족적인 것으로―혹은 아예 비정상의 영역에서만―공격적이고 과잉되게―그려진다. 모성이 아니라 쾌락을 위해 성을 수행하는 장애여성의 존재는 없을 것으로 확신된다.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장애에 굴하지 않고 가족을 부양하는 장애인 가장’의 모습이 종종 미디어에 등장하는 가운데에서도 장애남성은 재생산의 참여자로서보다는 잠재적 성폭력범이나 성구매자로 더 자주 묘사된다. 무능력과 비정상/비규범마저도 특정한 방식으로만 상상되는 셈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욕망은 이미 존재한다. 없는 것은 욕망할 자격, 욕망할 수 있도록 겪고 배울 자격―“실패”하고 “갈등”하고 “관계” 맺고 “향유”할 기회들―뿐이다. 욕망의 재/발견이나 재구성이 아니라 ‘재고’라는 부제를 택했다. 알려져 있지 않은 욕망을 찾아서 알리는 것 혹은 그것을 알려질 수 있는 형태로 재조립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은 고려된 적 없이도 이미 충분히 고려된 것으로―정확히 말하자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치부되어 버린 욕망들을 다시금 혹은 비로소 고민하는 것이 출발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숨겨져 있는 것, 찾고 분해하고 새로 고쳐야 할 것은 어쩌면 실은 욕망들이 아니라 욕망들을 분류하고 차등적으로 자격을 부여하는 기제들이다. 능력을 갖지 못한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가질 기회를 차단함으로써 그들을 통제하는 기제들, 무언가를 하지 못하는 이들을 부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규정함으로써 그들의 실천을 숨기는, 불능화(disabling)의 기제들이다.

휠체어 탄 사람이 어떤 한 사람과 입을 맞추고 있다. 장애여성을 위한 성교육 교재 ‘장애여성공감 성을 밝히다’(2009). 제공 장애여성공감
휠체어 탄 사람이 어떤 한 사람과 입을 맞추고 있다. 장애여성을 위한 성교육 교재 ‘장애여성공감 성을 밝히다’(2009). 제공 장애여성공감

적극적인 강요는 없었지만 달리 선택지도 없었으므로 “선택도 강제도 아니었던” 경순의 결혼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남편도 죽고, 활동지원사도 없고, 친구도 없었다. 국가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도움도 전혀 없었다. 설사 있었다고 해도 알지 못했다.” 스스로는 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주변의 의심을 꺾기 위해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는 단호함”을 품고서 자신과 두 딸의 생계를 꾸려야 했다. 그에게 어떤 권리와 어떤 지원이 보장될 수 있었을지, 그랬다면 어떤 다른 삶이 가능했을지를 생각함으로써 다른 삶을, 다르게 작동하는 성과 재생산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대가 없이 가족이나 공장 노동자들의 밥을 지은, 외줄기 물길에 휩쓸리듯 다른 여지없이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아 혼자서 길러 내야 했던 시간에 다른 어떤 가능성이 있었을지를 말이다.

그러나 이 경험은 배제와 제약만으로 설명되지는 않을 것이다. 전형적인 성역할에 따라 아주 약간의 자리만을 허락받은 역사로 축소될 수만은 없다. ‘집’에서 하던 일을 “사회생활”로 바꾸어 낸 역사, 의존적이라는 낙인을 떠안는 대신 누군가가 기대는 존재가 되고 나아가 그 누군가와 “서로 의존”하는 “연대”의 공간으로서 가족을 만들어 낸 창조의 역사다. 스스로의 삶의 공간을 만들어 낸―그곳이 속한 세계를 어떤 식으로든 바꾸어 낸―역사다. 배제와 제약 속에서도 이만큼 실현된, 자격 없이도 움직이는 욕망의 가능성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어떨까. 묶인 채 쌓여 있는 턱없는 욕망들이 터져 나올 길을 트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앞에서와는 또 다른 삶, 더더욱 다르게 작동하는 성과 재생산의 상상에 이를 수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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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류민희, 「낙태의 범죄화와 가족계획 정책의 그림자」, 160쪽, 성과재생산포럼 기획, 『배틀그라운드: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 137-163쪽, 후마니타스, 2018.

2) 우생학을 근거로 한 인공임신 중지 ‘허용’과 불임수술명령의 구체적인 영향력에 대해서는 황지성, 「건강한 국가와 우생학적 신체들」(앞의 책, 215-242쪽), 특히 219-219쪽을 참고하라.

3) 지난해와 올해 국정감사에서 진선미 의원, 강선우 의원 등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장애여성은 비장애인에 비해 많은 출산 비용을 부담하고 있으며 이용 가능한 의료 인프라 역시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의 두 기사를 참고. 박승원, 「장애여성 산모, 출산비용 크지만 인프라와 서비스는 열악」(2019.10.07.), 허현덕, 「침대형 휠체어도 없는 ‘장애친화 산부인과’?」(2020.10.23.) 이하 모든 웹문서는 2020.11.04. 확인.

4)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오월의봄, 2019. 특히 제3장 「우생학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87-160쪽).

5) 경순 구술, 이진희 글, 「장애와 살아가는 삶을 물려주기」, 106-109쪽, 장애여성공감, 「어쩌면 이상한 몸: 장애여성의 노동, 관계, 고통, 쾌락에 대하여』, 오월의봄, 2018, 103-122쪽. 이어지는 경순의 이야기들 역시 이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6) 진경, 「재생산권 논의의 쟁점과 한계」, 70-71쪽, 78쪽 등, 장애여성공감 외 엮음, 『우생학, 낙태, 모성권 ― 장애여성 재생산권 논의를 시작하며』(토론회 자료집), 2014, 61-82쪽. 이 글은 또한 기존 담론 내에서 “여성운동”의 임신중지 합법화 요구와 “장애여성운동”의 우생학적 허용 한계 폐지 요구가 충돌하는 것으로 상상된 문제, “낙태합법화와 장애아동 지원은 왜 같이 갈 수 없는가”와 같은 고민으로 이어지지 못한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7) International Conference on Population and Development Cairo, 5–13 September 1994, “Programme of Action”(20th Anniversary Edition, English), United Nations Population Fund, 2014, p. 41.

8) 백영경, 「프롤로그: 낙태죄 폐지가 시대의 상식이 되기까지」, 15쪽, 『배틀그라운드』, 5-23쪽.

9) U.S. Supreme Court, Roe v. Wade, 410 U.S. 113, 1973. 확인. 이 판례에 대한 설명으로는 류민희, 앞의 글, 146쪽을 참고하라.

10) Asian Communities for Reproductive Justice(ACRJ), “A New Vision for Advancing Our Movement for Reproductive Health, Reproductive Rights and Reproductive Justice,” 2005, p. 1. ACRJ는 현재 포워드투게더(Forward Together)라는 새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재생산 정의에 관한 한국어로 된 간략한 설명으로 성적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이슈페이퍼 2019년 11월호의 「정의」를 참고하라.

11) 또한 백인 비장애 중산층 등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기준으로 전개된 미국의 프로초이스 운동, 재생산권 운동에 대한 비판의 맥락 속에 있는 개념이므로 지금 어떤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옳은지를 따지거나 이를 근거로 한국의 맥락에서 형성되어 온 재생산권 개념을 기계적으로 비판할 문제는 아니다. 최근 한국의 임신중지 합법화 논의 역시 형법 낙태죄 조항, 죄화에 따른 비용 문제 등을 제외한 다른 영역에서는 접근성 문제를 겪지 않는 이들(예컨대 도시에 거주하며 어느 정도의 비용은 감당할 수 있는 한국계 비장애인 비청소년)의 입장에서 전개되어 왔다고 비판할 수 있는 부분이 없지 않겠지만 한편으로는 성노동자, 이주여성, 장애여성, 청소년 등 다양한 주체들의 적극적인 활동과 함께 재생산정의라는 접근틀과 공명하는 요소 역시 풍부하게 찾을 수 있다.

12) 한편으로 시설에서 생활하는 경우 혹은 소위 지역사회에서 생활하지만 사적인 공간을 갖거나 이용할 수 없는 경우라면 의도적인 임신조차도 유명무실한 권리에 불과할 수 있다.

13) 강진경, 「친밀한 통제, 시설화의 또 다른 얼굴」, 87쪽 등, 장애여성공감, 『시설사회』, 와온, 2020, 79-90쪽. 강진경이 이 대목에서 직접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특정 관계의 절대성을 토대로 왕왕 그 친밀함이 통제로 전환된다는 사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활동지원서비스뿐만 아니라 가족, 애인, 친구 등 전체적으로 독점하지 않는 관계가 중요”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가족실천을 해 나가면서 동료시민으로 함께 살아가는 경험이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점임을 밝혀 둔다.

14) 앞서 연재된 「Enjoy Sex(인조이 섹스), 성적 권리를 향유한다는 것」에서 나영정이 지적하는 성적 권리를 ‘소유’의 형식으로 이해하는 것의 문제점을 또한 참고하라.

15) 물론 여기에는 장애인의 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 일상적인 돌봄이 전적으로 가족 구성원들에게 내맡겨지는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16) 전혜은, 「장애와 퀴어의 교차성을 사유하기」, 40-42쪽, 전혜은·루인·도균,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 도서출판 여이연, 17-72쪽. 장애인의 성적 욕망과 성소수자의 성적 욕망이 각각 상상되고 판단되는 방식이 어떻게 교착되는지를 검토하고 이를 토대로 퀴어학과 장애학이 만나 욕망과 정상성의 문제를 다룰 길을 모색하는 글로, 다음 단락의 서술은 이 글을 두루 참조했다.

* 필자 소개 _ 안팎 성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기획운영위원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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