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 성을 밝히고 재생산에 올라타다
[공동기획] 비마이너 X 장애여성공감 X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제2차 국제우생학대회 로고 ⓒWikiCommons
제2차 국제우생학대회 로고 ⓒWikiCommons

전 세계적 대공황이 번지기 직전인 20세기 초, 사회변화에 대한 긍정주의로 가득 차 미국의 진보주의 개혁운동 혹은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이 절정을 이룬 시기. 오랜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하고 세계적인 패권이 바뀌기 시작하던 시기. 신의 뜻이 아닌, 인간의 합리성과 의지로 세상 모든 것을 개혁할 수 있다는 불안한 믿음이 꽃을 피웠던 바로 그 시기에 우생학은 절정을 이루었다.

물론 우생학은 20세기 초에 갑자기 발견된 것은 아니다. 19세기 서구 사회는 대량 실업과 이주, 부랑과 구걸 문제 등 전통사회에서 볼 수 없었던 ‘사회 문제’가 들끓기 시작했다. 중‧상류층 지배계급은 사회 문제를 자신들이 지키고 있는 사회 질서와 체제에서 찾지 않고, 인간 존재의 ‘종’의 문제로 회귀해, 우월함과 열등함을 가리는 데서 ‘해법’을 찾아냈다. 이러한 인종주의적 생각은 식민 제국주의나 노예제와 함께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사회상황은 조금 달랐다. 한 국가나 사회 안에서 ‘정상’(가치로움, 우월성, 생산성)과 ‘비정상’(무가치, 퇴화, 비생산성)이 분포하고, 국가와 사회장치 그리고 인간의 이성은 바로 그 ‘정상성’을 적절하게 관리, 유지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사회의 ‘정상성’을 적절하게 관리, 유지하기 위해 도입된 갖가지 장치에는 기본적 교육, 의료기술, 가족제도에서부터 보험이나 사회복지 제도, 국가 그 자체까지, 수많은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은 오늘날 너무 당연하다. 하지만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이러한 장치들을 통해 우리는 온갖 ‘비정상’이라 여겨지는 속성들, 즉 가난, 장애, 질병, 기타 다종한 ‘일탈’을 사회적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본래적 차이, 모든 ‘정상적’ 개인들이 맞서 싸워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1)

반대로 정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부정적’인 것들을 관리하기 위한 장치 역시 만들어졌다. 극빈자 및 장애인 등 사회에 ‘생산적’이지 못하고 ‘위협’을 가하는 모든 사람들을 격리 수용한 구빈원, 교도소, 정신병원, 장애인시설과 같은 수용공간도 있을 것이고, 골상학, 범죄학, 심리학, 생물학 등 우생학의 절정기 이전에 그것의 도래에 초석을 깐 지식들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비정상적이고 부정적인 것을 인간이 제거해 낼 수 있고, 또 그렇게 할 때 비정상적인 개인들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안전’해지고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생각들을 밑바탕으로 했다.

모든 비정상으로부터 사회의 안전을 지켜라

‘안전’. 이 말은 매우 모호하고 정치적인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는 위험으로부터 안전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안전이 정치가 되는 것은 ‘무엇이 안전인가’를 누가 어떻게 설정하는가를 둘러싸고 흔히 발생한다. 예를 들어, 여성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주차장 한편에 핑크색의 여성 전용 주차자리를 마련하거나 성범죄자의 처벌 형량만을 강화하는 일련의 조치들은 사회가 여성의 안전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는 듯한 착시현상을 일으키지만, 실상 더 근본적인 여성차별의 문제를 시야에서 가릴 뿐이다.

이제까지 안전은 기본적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인권을 침해하는 도구로 둔갑해왔다. 여기에는 안전을 이유로 특정 범죄나 일탈적 속성을 가진 ‘종’ 자체를 지목하고, 이들이 사회 안전을 위협할 수 있기에 미리 예방적으로 제거‧격리하거나 교정하려 한 장구한 역사가 있다.

쇠창살 사이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unsplash
쇠창살 사이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unsplash

‘장애인’은 역사적으로 가장 먼저 표적이 된 집단 중 하나다. 20세기 초 심리학과 범죄학 등의 지식은 ‘정신박약’(feeble mind)2) 그 자체가 범죄성을 지닌다고 규정했다.3) 지적장애인을 새롭게 범죄자로 구성해 낸 20세기 초반 무렵의 서구 사회는 이중적인 해법을 찾았다. 먼저, 지적장애인은 ‘일반적’ 범죄자와 다르게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사람들이기에 처벌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형사사법적 처벌에서 제외되는 대신 그만큼의 혹은 더 큰 사회적 대가로서 처벌적 성격이 아닌 ‘복지/치료’를 위한 공간에 영구적으로 격리‧구금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교육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매우 낮거나 불가능하므로 범죄 예방을 위해 영구적으로 사회와 차단한다는 해법이 나올 수 있었다. 한 사람을 사회에서 영구 제명하는 사실상 가장 혹독한 처벌임에도, 비정상으로부터 사회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일탈자들을 위한 ‘복지/치료’의 제공이라는 ‘인류애’를 위해, 영구적 시설화는 당대 사회에서 ‘합리적’으로 선택됐다.

이처럼 당대 지식에 의해 지적장애는 범죄성을 지니고 사회를 위협하는 존재로 구성되어 예방적으로 시설에 수용되었다. 애초에 교도소나 구빈원 같은 수용시설은 역사적으로 사회혼란이나 안전을 위한 ‘해법’으로 최초 등장해 수백 년간 유지되어 왔고, 여기 수용되는 사람들은 바로 사회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로 지목된 온갖 ‘비정상’, 즉 실업자, 부랑인, 장애인, 가족 밖 여성(성판매여성, 미혼모, 독신여성) 등이었다. 자본주의 노동력으로서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다고 여겨진 실업자‧부랑인뿐 아니라 장애인, 남성 노동자의 부양에서 떨어져 나온 여성 등은 ‘비정상’이자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인구로 지목되어 시설에 수용되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성에 기여하지 않고 ‘의존적’이라 여겨진 장애인, 반대로 남성 노동자의 부양에 강제적으로 의존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고 가족에서 벗어나 성적으로 ‘독립적’인 여성은 남성중심주의‧자본주의의 상보적 질서를 위협하는 ‘비정상’이라는 측면에서 서로 연결되었다.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 여성 등에게는 권력의 시각에 의해 의존성‧비생산성‧위험성이 언제 어디서든 임의적으로 꼬리표처럼 달라붙어 그들을 복지시설이나 교도소 등에 수용‧감금시켰다. 그럼에도 이제껏 시설화의 역사는 주로 자본주의 지배와 관련해 남성/비장애인을 중심으로 이야기되었으며, 이에 비해 장애/여성의 시설화를 추동한 것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20세기 무렵부터 도입된 ‘정신박약 범죄자’에 대한 우생학적 예방적 시설화는 남녀를 불문하고 영향을 미쳤지만, 성적 행위 그리고 범죄성의 유전을 통한 재생산 우려와 결부되어 더욱 증폭되면서 정신박약이라고 규정된 장애/여성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차별적 젠더 및 섹슈얼리티 규범에 의해 장애/여성들은 이와 같은 예방적 영구 구금조치가 취해질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다수의 대상이었다. 이와 같이 ‘정신박약 범죄자’를 향한 담론, 제도, 법이 만들어진 시기는 우생학 운동이 절정을 이루었던, 역사적으로 몇 안 되는 시기 중 하나다. 동일한 시기 미국은 어느 나라보다 이른 시기에 우생학적 단종시술을 법제화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처럼 장애인들을 범죄자 그리고 사회적 위험과 연관시키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다는 것은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다.

우생학의 역사적 현재

시간이 지나면서 정신박약 외에도 (소위 ‘사이코패스’라고 명명된)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범죄 위험성을 가진 집단으로 지목되었다. 보다 최근에는 특정 인종이나 민족 집단이 ‘테러리스트’이자 변태성과 비정상성을 체현한 위험 집단으로 지목되기도 했다.4) 우생학의 시기는 이미 오래전에 저물었다고 하지만, 이처럼 ‘위험한’ ‘비정상’ 집단을 지목하고 사회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관리하는 방법은 지속해서 우생학을 소환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고도로 전문화되고 자본화된 각종 사회 안전장치들 속에서 위험하고 비정상적인 집단을 선별, 배제하는 기술들은 나날이 새롭게 ‘합리성’을 갱신하고 있다. 동시에, 오늘날에는 20세기 초 이래로 가장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사회안전장치라 여겨진 공공복지‧의료‧교육‧주거 등의 영역이 점차 축소되거나 철폐되는 경향이 지속되고 있으며, 이 속에서 안전이나 위험은 점점 더 사회가 아니라 개개인들이 관리하고 감당해야 할 몫이 되고 있다.

위험의 개인화와 특정한 집단들에 대한 위험화‧범죄화라는 부정적 상호작용 속에서 난민, 이주민, 노숙인, 정신장애인 등이 주로 무엇으로 뉴스에 등장하는지 한번 떠올려보자. 그러한 뉴스에 대해 우리사회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서구사회에서는 오늘날 유색인‧여성‧(정신적) 장애인 등 권리를 갖지 못한 주체들이 ‘범죄자’가 되어 구금시설에 가장 많이 수감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과거로부터 형제복지원이나 정신병원 같은 각종 복지‧치료 관련 시설들이 사회적 ‘위험’이나 ‘범죄성’을 가진 것으로 지목된 온갖 취약계층을 강제 수용하는 교도소 역할을 대신 해왔다. 오늘도 정신장애인이나 지적장애인 등 정신적 장애인들은 범죄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본인 동의 없는 병원·시설의 강제입원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장애여성들의 경우에는 반대로 성/폭력 피해를 당할 위험이 높아 안전을 위해 이들을 시설에 수용해야 한다고 하는 논리가 만연해 있다. 그런가 하면 몇 해 전 제주에 도착한 예멘 난민들은 잠재적 범죄자로 지목돼 난민 지위를 인정하지 말라는 청와대 청원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난민, 장애인, 여성, 범죄자, 부랑인‧노숙인 등 각기 상이한 주체들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은 서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실상 ‘안전’을 매개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있다. 과거 정신박약 범죄자부터 오늘날 난민 혹은 테러리스트까지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생학의 역사적 현재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붉은색 선으로 그려진 여성의 몸. 네 명의 여성은 물 속에서 춤추는 듯하다. 서로의 몸이 겹쳐져 있는 부분에는 아름다운 자연의 일부가 그림으로 들어가 있다. 오른쪽 위에는 “We share the world”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thegreats
붉은색 선으로 그려진 여성의 몸. 네 명의 여성은 물 속에서 춤추는 듯하다. 서로의 몸이 겹쳐져 있는 부분에는 아름다운 자연의 일부가 그림으로 들어가 있다. 오른쪽 위에는 “We share the world”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thegreats

장애/여성의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를 상상하기

우생학을 역사적으로 조망할 때, 그 근원에는 히틀러 같은 독재자나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나 나약한 인간 개개인이 품고 있는 보편적이며 원초적인 욕망 즉 ‘안전’에 대한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단지 ‘안전’을 누가 어떻게 말해왔고, 그 해법을 특정하게 설정한 것이 누구였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안전’만큼 계급, 젠더, 인종, 장애 등에 기반 한 권력 관계의 산물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안전’을 다시 보편적 인권의 자리로 되돌리는 작업은 해방의 기획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19세기경 이래로 역사적으로 ‘안전’을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배제되어야 했던 장애/여성들의 시각으로 ‘안전’을 새롭게 재개념화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재생산 정의’(reproductive justice) 운동은 우생학적 시설화와 재생산권 침해에 대한 피해만으로 말해지지 않는, 보다 넓고 적극적인(positive) 운동이다. 장애인에 대한 역사적 시설화와 강제불임시술의 피해를 말하고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는 것만큼 우리에게 현재 중요한 것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새 길을 내는 것이다. 주지하듯, 한국은 1973년 이래로 수십여 년간 우생학적 사유가 ‘낙태죄’의 예외적 허용 사유였다. 우생학적 낙태 허용 조항은 20세기 초 우생학의 시대가 ‘정신박약 범죄자’에 대해 그런 것과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장애인을 낙태죄 처벌에서 제외했고, 그리하여 더 큰 대가로 사회적 배제를 강제해온 것이다. 이 사회의 안전을 위해 장애인의 생명과 삶이 재생산되지 말아야 한다는 명령은 많은 장애인들이 시설화된 삶을 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성적 관계나 가족구성 등을 할 수 있는 ‘정상적’ 사회적 시스템으로부터 배제되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관계를 해체하고 장애/여성의 시각으로 ‘안전’을 재정의하게 된다면, 장애/여성이 성적 관계의 자유를 누리고, 원하는 가족 구성을 하고, 더 큰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함께 이 세상에 사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세계를 상상해야만 하고 더 근본적으로 사회를 변화시켜야만 한다.

몸이 다르면 보이는 세계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면 보이는 세계도 다르듯,5) 장애/여성이라는 ‘다른’ 사람들이 어떤 차이와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를 적극적으로 들으려는 노력에서부터 시작해보자. 그러다 보면 우리 몸과 언어도 어느새 이미 기존과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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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반나 프로카치, 「사회경제학과 빈곤의 통치」, 심성보 외 옮김, 『푸코 효과: 통치성에 관한 연구』, 난장, 2014.

2) 현재의 용어로는 지적장애(intellectual disability)에 해당한다. 서구와 한국에서 지적장애를 지칭하는 용어는 ‘백치’, ‘치우’, ‘노둔’(idiot, imbecile, feeble mind, moron), 정신지체(mental retardation) 등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다종한 변화를 거쳐 왔다. 이 글에서는 해당 시기에 사용된 용어를 그대로 번역했음을 밝힌다.

3) Nicole Rafter, 『Creating born criminals』,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97.

4) 재스비어 푸아, 「퀴어한 시간들, 퀴어한 배치들」, 이진화 옮김, 『문학과 사회』(116호), 문학과 지성사, 2016년 겨울호.

5) 사이토 하루미치, 김영현 옮김, 『서로 다른 기념일』, 다다서재, 2018.

* 필자 소개 _ 황지성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기획운영위원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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