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주거비, ‘회계결산’ 이유로 수요 폭증 시기에 사업 중단
시민사회단체 “독립주거 중심으로 홈리스 정책 재편해야”
한파에 정화조 터져 오물 넘치는 쪽방… 홈리스 8명, 인권위 긴급구제

기자회견 참가자가 '이러다가 얼어죽는다. 주거지원 좀 해주시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기자회견 참가자가 '이러다가 얼어죽는다. 주거지원 좀 해주시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코로나19에 유례없는 한파까지 겹친 재난상황에서 홈리스의 열악한 주거현실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거리홈리스를 주 대상으로 한 임시주거비 지원사업은 사업시행을 회계연도에 맞추느라 지난달에 종결됐다. 추위가 가장 극심한 동절기에 홈리스의 주거비 지원이 끊긴 것이다.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쪽방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서울지역 쪽방의 경우 도시가스 난방이 이뤄지고 있는 곳은 전체 쪽방의 절반 정도다. 나머지는 전기장판, 연탄 등에 의지해 겨울을 나고 있다.

질병관리청이 지난달 1일부터 이번 달 8일까지 약 한 달간, 한랭질환자(동상, 저체온증 등 추위가 원인이 돼 신체에 피해가 나타나는 질환에 걸린 사람)가 발생한 장소를 조사한 결과 길가, 주거지 주변에 이어 집이 세 번째로 많았다. 쪽방처럼 난방에 취약한 주거환경이 한랭질환을 유발하고 있다.

홈리스행동, 빈곤사회연대 등 43개 시민사회단체로 이뤄진 2020 홈리스추모제 공동기획단(아래 추모제기획단)은 11일 오전 11시, 서울시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 건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혹한기에 홈리스가 겪는 주거위기를 알리고 인권위에 긴급구제를 신청했다.

홈리스 당사자들과 시민사회단체가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현수막에는 '혹한기 홈리스에 대한 긴급구제 요청 기자회견'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홈리스 당사자들과 시민사회단체가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현수막에는 '혹한기 홈리스에 대한 긴급구제 요청 기자회견'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거리홈리스 김 씨가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거리홈리스 김 씨가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 시설은 홈리스에게 오히려 치명적… 독립주거 제공해야

이 날 기자회견에 참가한 거리홈리스 김아무개 씨는 20년만에 돌아온 한파에 코로나19까지 겹쳐 잘 곳과 쉴 곳을 잃은 상태다.

김 씨는 “방역을 빌미로 희망지원센터(서울시가 홈리스에게 휴게실, 응급구호 등을 제공하기 위해 만든 공간)의 출입을 제한해 세탁과 샤워를 할 수 없다.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 구세군도 마찬가지다. 응급구호방 화장실과 샤워실은 얼어서 씻지 못한다. 몇 시간이라도 자려면 바깥에서 잘 수밖에 없다. 서울역 지하도에서 자고 일어나면 추위 때문인지 다리가 저려서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또한 “한파를 피해 서울역 내부로 들어가도 앉아서 쉴 수 있는 곳이 없다. 방역한다고 의자를 다 치웠기 때문이다. 서 있다가 잠시 앉으면 특수경비용역이 와서 일어나라고 괴롭힌다. 방역조치가 아니라 거리홈리스가 추워서 3층에 많이 몰리니까 의자를 치웠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고 호소했다.

김 씨는 “너무 추워서 임시주거비 지원을 신청하려고 했는데 그것도 예산이 떨어졌다고 안 받아준다. 왜 하필 주거지원이 제일 필요한 겨울철에 중단이 되는 건지, 행정보다 사람이 먼저가 되면 안 되나”라고 지적했다.

서울시는 노숙인복지법에 따라 ‘노숙인 등’에게 한시적으로 염가거처(고시원·여인숙 등 저렴한 비적정 주거공간)의 주거비를 제공하는 ‘서울시 노숙인 임시주거비 지원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회계연도에 맞춰 사업을 시행하느라 12월 말에 사업이 종료되는 일이 매년 반복된다. 추위가 극심해져 임시거처의 수요가 가장 높은 시기에 회계결산으로 사업이 중단되는 바람에 1~2월에 지원공백이 발생한다.

안형진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가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안형진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는 “추위가 거세지면 거리홈리스가 임시거처를 가장 필요로하게 된다. 최소한의 염가거처인 고시원이나 쪽방도 구하지 못한 거리홈리스에게 임시거소나 임시주거비를 긴급하게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보건복지부(아래 복지부)는 현재 ‘가족으로부터 방임·유기 또는 생계유지의 곤란 등으로 노숙을 하는 경우’에 긴급복지를 지원한다. 하지만 노숙인시설에 등록된 최초 노숙일을 기준으로 노숙 기간이 6개월 미만일 때만 긴급복지를 받을 수 있다. 복지부는 이에 관해 “초기 노숙인의 유입을 차단하고 노숙 만성화를 예방하기 위함”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에 안 상임활동가는 “‘만성화된 노숙인’은 주거권을 침해당하는 위기 상황을 겪지 않는지 되묻고 싶다”며 “이런 제한적 제도는 개편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날 기자회견에서는 시설 입소 중심으로만 구성된 홈리스 대책이 홈리스의 생명과 안전에 되레 치명적이라는 말도 나왔다. 안 상임활동가는 “홈리스 당사자는 집단밀집시설에서 코로나19 위협에 처할 것인지, 혹한 위협에 처할 것인지를 택일해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놓여있다”며 “감염병 위기로부터 자유롭고 혹한도 피할 수 있는 독립주거를 중심으로 홈리스 정책이 재편돼야 한다”고 말했다.

기자회견 참가자가 '쪽방이 너무 춥다. 임시거처라도 제공하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기자회견 참가자가 '쪽방이 너무 춥다. 임시거처라도 제공하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 방안에서 입김 나오고 정화조 터져 오물 흐르는 쪽방 현실

동자동 쪽방 주민 조남철 씨는 한파 때문에 방 안쪽 창틀에 얼음이 맺히고 방안에서 입김이 나올 만큼 난방이 취약한 환경에 거주하고 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장실마저 얼어 생리적인 현상도 해결하기 어려운 상태다.

다른 주민인 김정길 씨의 경우 한파에 정화조가 터져 오물이 흘러넘치는 탓에 생활에 불편을 겪고 있다. 김 씨가 사는 건물은 불법 건축물로, 소유주만 4명이다. 이들 중 누구도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 김 씨를 포함한 많은 주민이 전기장판에 의지해 혹한기를 보내고 있다.

김호태 동자동사랑방 대표는 “혹한기에 숙박 시설을 임차해 쪽방 주민에게 제공하는 ‘안전숙소’ 정책을 신속히 도입해야 한다. 이는 지난해 서울시가 폭염 대책으로 시행한 바 있다.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빠르게 진행할 수 있다”고 촉구했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홈리스 당사자 8명과 시민사회단체는 서울시, 복지부, 국토교통부를 상대로 △위생설비와 난방설비를 갖춘 안전숙소 제공 △긴급복지지원 시 ‘최초 노숙 발생일로부터 6개월 미만’ 규정 폐지 △최저주거 기준 개정 등의 요구를 담은 진정서를 인권위에 제출하며 긴급구제를 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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