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세대 중 찬성은 단 24표… 경사로 설치 부결 
투표 부치며 “찬성하면 주민이 돈 많이 내야 한다” 언급
시청, 시의회 권고에도 ‘나 몰라라’
“‘해주세요’라고 인간적으로 말하면 해줄 수 있어” 시혜적 태도 눈살

ㅅ아파트 후문에 계단이 놓여있다. 단차 수가 많지 않고 경사도 가파르진 않지만 휠체어나 유아차가 지나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사진 하민지
ㅅ아파트 후문에 계단이 놓여있다. 단차 수가 많지 않고 경사도 가파르진 않지만 휠체어나 유아차가 지나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사진 하민지
ㅅ아파트의 정문 모습. 깔끔하진 않지만 계단 옆에 경사로가 설치돼 있다. 사진 하민지
ㅅ아파트의 정문 모습. 깔끔하진 않지만 계단 옆에 경사로가 설치돼 있다. 사진 하민지

공계진 씨는 10개월째 아파트 관리사무소, 입주자 대표 측과 싸우고 있다. 후문 계단의 경사로 설치 때문이다. 공 씨는 계단에 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는 경사로를 설치해 달라 요구해 왔고 아파트 측은 절대 설치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 경사로 설치 요구했지만 “아파트에 기여한 게 뭐가 있냐”

공 씨는 지난해 5월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에 있는 ㅅ아파트로 이사 왔다. 그는 평소 목발을, 가끔 휠체어를 이용한다. 어느 날 휠체어로 아파트를 둘러보다가 후문 계단을 발견했다. 정문에는 깔끔하진 않지만 그래도 휠체어가 지나가기에 무리가 없는 경사로가 있었다. 하지만 후문에는 오로지 계단만 있었다.

후문은 아파트 주민이 정문만큼 많이 이용한다. 정문보다 후문에서 지하철역까지 가깝기 때문이다. 공 씨도 지하철을 이용하기 위해 후문을 자주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계단만 있어서 휠체어가 지나갈 수 없었다. 공 씨는 아파트에 후문 경사로를 설치해달라고 건의하기로 했다.

공 씨가 문의하자 관리사무소의 ㄱ 소장은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고 입주자 대표회에 문의하라고 했다. 입주자 대표 ㄴ 씨는 천천히 생각해보겠다며 결정을 미뤘다. 공 씨는 “천천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빨리 경사로를 설치해 달라”고 말했으나 그때부터 서로 언성이 높아져 대화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후 관리사무소 건물 2층에서 입주자 대표 회의 가 열렸다. 지난 19일, ㅅ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만난 ㄱ 소장은 “ (입주자 대표 회의에서) 그 사람이 아파트에 기여한 게 뭐가 있냐는 이야기가 회의에서 나왔다. 이사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주민의 돈으로 경사로를 설치해 줘야 하냐는 의견이 있었다”고 말했다.

ㅅ아파트는 주민으로부터 매달 ‘장기수선충당금액’을 걷는다. 이는 아파트의 여러 시설이 오래돼 낡았을 때 아파트 값어치가 떨어지지 않도록 수리하는 비용을 일컫는다. 결국 공 씨가 장기수선충당금을 많이 내지 못했기 때문에 경사로 설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공 씨의 경사로 설치 요구는 정당하다.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4조에 따르면 아파트 주 출입구 접근로, 주 출입구 높이 차이 제거 등의 편의시설 설치는 의무사항이다. 따라서 시청과 시의회에서는 공 씨의 경사로 설치 요구에 ㅅ아파트 측에 경사로를 설치할 것을 권유했다.

아파트에 기여한 게 없다는 ㄱ 소장의 말에 공 씨는 “장애인은 당장이라도 어디든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거주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경사로 미설치의 근거로 드는 것은 부당하다. 이건 마치 ‘장애인이 몇 명이나 있다고 엘리베이터 설치를 해주냐’는 논리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ㅅ아파트에는 3명의 휠체어 이용자가 살고 있다.

ㅅ아파트는 후문 경사로 설치 여부를 주민투표에 부쳤다. 게시판에 붙은 공고문에 '입주민 과반수 반대의 의견 제시로 부결되었음'이라고 적혀있다. 사진 공계진
ㅅ아파트는 후문 경사로 설치 여부를 주민투표에 부쳤다. 게시판에 붙은 공고문에 '입주민 과반수 반대의 의견 제시로 부결되었음'이라고 적혀있다. 사진 공계진

- 갑자기 열린 주민투표, 반대표의 압도적 승리

공 씨가 시청에 민원을 넣고 시 의회에도 이를 알리는 등 동분서주하던 사이 갑자기 아파트 게시판에 주민투표 일정이 게시됐다. 지난해 12월에 게시된 공고문에는 투표안건으로 ‘당 아파트 후문 임시도로 휠체어 경사도로 개설 건’이 올라 있었다.

공 씨는 “장애인 이동통로는 당연히 설치해야 하는 건데 표결에 부치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비장애인이 다수인 아파트 주민에게 경사로 설치에 관한 의견을 묻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의도 자체가 부당한데 거기다 대고 찬성표 던져달라는 것도 말이 안 돼서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고 말했다.

올해 1월에 있었던 투표에서도 공 씨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선거관리위원이 집마다 주민투표를 독려하고 다니면서 선거에 의도적으로 개입한 정황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공 씨는 “아내가 투표하려 하자 선관위원이 ‘찬성에 체크하면 주민이 많은 돈을 부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내가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된다고 문제를 제기하자 위원이 얼른 말을 바꾸더라. 공정한 투표는 이뤄지지 않았다. 답이 정해져 있는 투표였다”고 말했다.

투표 결과, 반대표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240세대 중 반대 130세대, 찬성 24세대, 기권 86세대였다. 결국 경사로 설치 건은 부결됐다. 특정 결과를 정해놓고 진행된 투표 아니냐는 물음에 ㄱ 소장은 “그렇지 않다. 찬성에 투표하면 주민에게 돈을 걷을 수밖에 없다고 알려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원이 들어올 수도 있다. 당연한 사항을 알려준 것뿐”이라고 말했다.

ㄱ 소장은 비용문제를 거론하기도 했다. “견적을 내보니 공사 비용이 최소 1,500만 원에서 최대 3,500만 원까지 든다”고 말했다. 그러나 비마이너가 후문 계단의 길이와 높이, 각도를 측정해 서울 지역 10군데 업체에 견적을 내 본 결과, 손잡이 설치 등 여러 옵션을 추가해도 최대 1,000만 원이었다. 가장 낮게 부른 곳은 300만 원이었다.

아파트 측은 공 씨의 태도를 지적하며 공 씨가 부드러운 태도로 경사로를 설치해 달라고 요청할 경우 응하겠다는 입장이다. ㄱ 소장은 “블록을 쌓고 시멘트를 발라 저렴하게 경사로를 설치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공 씨가 시청 부르고, 시의원 부르고, 기자까지 부르며 사람들을 조종한다. 자신이 직접 나타나 ‘해주세요’라고 인간적으로 말하면 해 줄 의향이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시흥시청은 작년 11월 24일, ㅅ아파트에 공문을 보냈다. '장애인 및 노인, 유모차 이용 주민 등의 편의를 위하여 턱 낮추기 및 경사로 설치 등으로 보행에 불편함이 없도록 권고하오니, 어려우시더라도 적극 검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쓰여있다. 사진 공계진
시흥시청은 작년 11월 24일, ㅅ아파트에 공문을 보냈다. '장애인 및 노인, 유모차 이용 주민 등의 편의를 위하여 턱 낮추기 및 경사로 설치 등으로 보행에 불편함이 없도록 권고하오니, 어려우시더라도 적극 검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쓰여있다. 사진 공계진

- 시청, 시의회도 당황 ‘장애인 편의시설 조건부 아냐’

아파트 측의 대응에 시청과 시의회도 장애인 편의시설은 조건부가 아니라며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시청 관계자는 지난 19일 비마이너와의 통화에서 “공 씨에게 연락을 받아 관리사무소를 방문했다. 경사로를 만들어 놓으면 아이들 유아차, 어르신들 리어카, 어린이 자전거도 쉽게 다닐 수 있다 얘기하고 경사로를 꼭 좀 설치해 달라고 부탁도 많이 했다. 그런데 아직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니 참 답답하다”고 말했다.

안선희 더불어민주당 시흥시의원 또한 “장애인의 권리는 당연히 보장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안 의원은 “공 씨는 아파트 주민이다. 주민은 불편함 없이 아파트를 이용해야 한다. 불편함을 해결해 주는 게 관리소장의 일이다. 그리고 장애인의 권리는 조건부가 아니다. 당연히 보장해야 하는 일이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지 몰랐다. 다시 한번 최선을 다해서 해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변재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은 “접근성 보장은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에서도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다. 법에는 장애인에게 정당하게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고 적혀있다. 아파트 측이 공 씨에게 차분한 태도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보장을 감정 문제로 해석하는 건데 굉장히 잘못된 일이다. 전형적인 장애인 혐오발언이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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