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상영작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설에 살기 원하는 거주인 조명하며 탈시설 필요성 설명
탈시설당사자, 지원주택 살아보니 “좀 더 일찍 나올걸”
탈시설운동 활동가들, “탈시설은 인간품위 지키는 사회변혁운동”

“(시설에 사는 게) 좋은데, 갑자기 나가라고 하니까. 아휴.”

“여기(시설에) 있다가 막상 (지원주택으로) 옮기려니까 그것도 좀 안 좋고.”

“(시설폐지돼서) 다 없어지니까 어쩔 수 없잖아. (지원주택으로) 가야 되니까 가야지 어떻게 하겠어.”

한국의 장애인거주시설 중 최초로 ‘폐지’된 향유의집(구 석암베데스다요양원) 거주인들의 말이다. 향유의집 폐지는 탈시설운동의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지난 4월 30일에 문을 닫은 향유의집은 운영법인과 시설이 자체적으로 시설폐지를 결의하고 수년간 순차적으로 거주인 전원의 탈시설-자립생활을 준비해 왔다. 이런 사례는 한국 장애인거주시설 중 최초다.

감옥 같은 수용시설을 떠나 지역사회의 자립을 앞둔 순간, 거주인들은 시설에 머물고 싶다며 망설였다. 이는 탈시설에 반대하는 측의 논리로 활용된다. 탈시설운동이 시설에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자기결정권을 박탈한다는 것이다.

지난 13일 개막한 제19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상영작 ‘그럼에도 불구하고 - 향유의집, 시설폐쇄의 과정(2021, 정민구 감독)’은 ‘시설에 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잖아요’라는 주장에 답하는 영화다. 시설폐지를 앞두고 향유의집을 떠나기 싫어하는 사람의 얼굴을 담았다.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탈시설을 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향유의집 욕실 내부. 강민정 향유의집 사무국장이 “내가 벗고 씻고 있어도 문 열고 들어 오면 들어 오는가 보다. 그런 구조”라고 말하고 있다. 사진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캡처
향유의집 욕실 내부. 강민정 향유의집 사무국장이 “내가 벗고 씻고 있어도 문 열고 들어 오면 들어 오는가 보다. 그런 구조”라고 말하고 있다. 사진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캡처

- ‘왜 시설이어야 하나?’ 반문하는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향유의집 거주인이 시설에서 사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카메라는 거주인이 거의 다 떠나고 텅 비어버린 시설 내부를 비춘다. 복도 양옆에 수용소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여러 개의 방이 쪽방을 떠오르게 한다. 쪽방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한 개의 좁은 방에 여러 명이 살았다는 점이다.

또한 두 개의 방은 하나의 욕실로 이어져 있다. 누군가 씻는 중에 다른 이가 욕실에 들어갈 수 있는 구조다. 씻는다는 기본적인 일상생활에서조차 존엄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영화는 시설 내부 구조로 거주인이 어떻게 살았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잠깐만 봐도 시설의 인권침해적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데, 향유의집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20년 이상 거주한 사람들은 향유의집에서 사는 게 좋다며, 이곳을 떠날 생각을 하면 막막하다고 토로한다.

김정하 발바닥행동 활동가가 “마지막까지 사실은 안 나가고 버티고 싶어라도 하셨어요”라고 말하고 있다. 사진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캡처
김정하 발바닥행동 활동가가 “마지막까지 사실은 안 나가고 버티고 싶어라도 하셨어요”라고 말하고 있다. 사진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캡처

영화는 이들의 두려움을 뒤로하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12년 전, 이들처럼 긴 시간을 향유의집에서 살았지만, 이곳을 떠나 지역사회에서 살고 싶다고 외친 사람들이 있었다. 탈시설-자립생활 운동의 초석이라 불리는 ‘마로니에 8인 투쟁’이다.

시설을 떠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시설을 떠나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고 투쟁한 사람의 이야기가 영화에 대조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탈시설을 반대하는 측이 시설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내세우는 주요 근거 중 하나가 거주인의 ‘자기결정권’이다. ‘시설에 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무연고 중증 발달장애인의 경우 탈시설에 동의하지 않았고 의사표현도 어려운데 왜 탈시설해야 하나?’ 등의 논리로 탈시설을 반대한다.

영화는 장애인운동의 끈질긴 투쟁으로 만들어진 지원주택에서의 자립생활을 보여주면서 반문한다. ‘왜 시설이어야 하나?’

자립한 탈시설당사자의 지원주택 내부. 탈시설당사자가 향유의집 직원, 김정하 활동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향유의집 직원이 “아 진작 나오시지 진작. 아 진짜~”라고 말하고 있다. 사진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캡처
자립한 탈시설당사자의 지원주택 내부. 탈시설당사자가 향유의집 직원, 김정하 활동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향유의집 직원이 “아 진작 나오시지 진작. 아 진짜~”라고 말하고 있다. 사진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캡처

죽을 때까지 시설에서 살 줄 알았다던 ㄱ 씨의 자립생활은 마냥 녹록지만은 않다. 그간 익숙했던 시설종사자가 아닌 그를 처음 지원하는 사회복지사는 실수투성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자신이 하반신 마비라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이렇듯 영화는 탈시설-자립생활을 예찬하지만은 않는다. 다른 사람과 갈등을 겪기도 하고 불편한 것도 없지 않다. 하지만 손님을 초대할 수 있고, 자녀와 손주가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고, 립스틱을 바르는 등 자신을 마음대로 가꿀 수 있고, 다른 사람과 빨래가 섞이지 않고, 먹고 싶은 걸 원하는 때에 해먹을 수 있다. 지역사회의 수많은 사람이 이렇게 산다. ‘내가 결정하는 나의 삶’이 보장된 상태에서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행복해하며 살아간다. 이 평범한 삶이 탈시설당사자에게는 이제야 시작된 것이다.

20년을 시설에서 산 사람에게 자립생활은 낯선 세계다. 그들에겐 시설 밖에서의 삶을 상상할 기회조차 없었다. ‘시설에서 살고 싶다’라는 말은 낯선 세계에 발 딛는 사람이 흔히 가지는 두려움이다. 탈시설운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인권의 가치를 내세우며 시설거주인을 자립생활의 낯선 세계로 천천히 데려갔다. 탈시설운동단체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아래 발바닥행동)’ 활동가인 정민구 감독은 그 과정을 따라가며 탈시설을 반대하는 측에 맞서고 탈시설운동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현장. 활동가들이 관객과의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관객은 그 말을 경청하고 있다. 사진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현장. 활동가들이 관객과의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관객은 그 말을 경청하고 있다. 사진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 탈시설운동 활동가들 “시설에 가둬야 한다는 기준은 누가 정하나?”

영화 상영 직후 부대행사로 탈시설운동 활동가들이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했다. 유아영 경기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활동가의 사회로 발바닥행동의 여준민 활동가, 조아라 전 활동가가 이야기를 나눴다.

유아영 활동가는 “영화에 나온 것처럼 시설에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거주인이 있다. ㄱ 씨처럼 지원이 많이 필요한 사람은 지역사회에서 사는 게 더 불편할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분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조아라 전 활동가는 “향유의집 탈시설운동은 ‘나가고 싶다’고 의사표현을 했든 안 했든 관계없이, 거주인 모두 지역사회에서 자립하는 걸 기본으로 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영화 내용처럼 발달장애인은 자기 의사표현을 하기 어렵고, 무연고자에 중증장애인일 경우 자립하면 안 된다는 논리도 여전히 있다”며 “자기 의사표현을 하기 어려운 경우 보편적 인권의 가치에 맞춰야 한다. 2019년 12월 2일에 32명의 발달장애인이 탈시설하셨는데, 1년 넘게 잘 살고 계신다. 인사를 할 수 있게 됐고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시설에 가둘 때부터 당사자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 입소가 이뤄졌는데, 탈시설의 조건으로 자기결정권이 요구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시설에 가두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라고 되물었다.

오히려 변화는 느리게 나타났다. 탈시설-자립생활은 일상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기에 ‘경험해야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뒤늦게 탈시설한 사람들이 공통으로 표현하는 것은 후회다. “10년 전에 나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후회. ㄱ 씨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적 변화는 결코 소소하지 않다. 이는 거주시설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던 장애인복지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조 전 활동가는 “그동안은 ‘시설거주인 ㄱ 씨’였다면 이제는 ‘ㅇㅇ시 ㅇㅇ구 주민 ㄱ 씨’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수급비도, 활동지원서비스도 개인이 받게 된다. 지원이 시설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설계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활동가들이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 여러 투쟁으로 확대된 탈시설운동 “인간의 품위 지키는 사회변혁운동”

여준민 활동가는 탈시설한 장애인에게 집, 돈, 활동지원서비스 등 크게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세 가지는 탈시설장애인에게 반드시 지원돼야 하는 필수요소다. 탈시설운동은 지원주택과 탈시설정착금 지급 및 확대를 요구해 왔다. 여 활동가는 “활동지원서비스는 2006년에 장애인들이 휠체어에서 내려와 한강대교를 기어가는 투쟁을 해 쟁취했다”며 여러 투쟁이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조아라 전 활동가는 “마로니에 8인 투쟁으로 탈시설장애인이 살 수 있는 주거가 마련됐다. 이후 이어진 탈시설운동으로 터무니없이 낮았던 탈시설정착금도 많이 늘어났다. 탈시설을 원하는 거주인과 공적시스템이 함께 지원계획을 짜야 한다고 요구한 결과 서울시에 장애인전환서비스지원센터가 만들어진 지도 10년이 넘어간다”며 탈시설운동의 성과를 이야기했다.

여준민 활동가는 탈시설운동이 인간의 품위를 지키는 운동이라고 말했다. 여 활동가는 “탈시설장애인이 든든한 이웃으로 함께하는 걸 보신다면 이 운동을 외면하실 수 없다. 탈시설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만 탈시설운동은 인간을 품위 있고 풍요롭게 만드는 운동이다. 우리가 인간의 가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묻는 사회변혁운동”이라고 말했다.

조아라 전 활동가는 “2016년 대구시립희망원 사건 때 거주인 전원을 탈시설하고 시설을 폐지하려 했지만 중앙정부는 ‘선례가 없다’는 말만 반복하며 어떤 지원도 하지 않았다. 향유의집 폐지로 선례가 만들어졌다. 이 선례를 가지고 나머지 99%의 시설도 탈시설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함께 투쟁하자”고 강조했다.

한편, 영화는 15일 오후 5시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폐막식으로 한 차례 더 상영되며 관객과의 대화도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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