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탈시설, 계속해보겠습니다 – 향유의집 폐지가 남긴 숙제
④ 탈시설을 둘러싼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

향유의집 내 구름다리. 사진 오른쪽 앞에는 짐수레로 개조한 수동휠체어가 있으며 등받이 쪽에 ‘121호’라고 적혀 있다. 짐수레 앞에는 전동휠체어가 어렴풋이 보인다. 사진 가운데 소실점이 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이며, 하얀색 글씨로 ‘탈시설, 계속해보겠습니다 - 향유의집 폐지가 남긴 숙제’라고 적혀 있다. 캘리그라피 김영명. 사진 이가연 
향유의집 내 구름다리. 사진 오른쪽 앞에는 짐수레로 개조한 수동휠체어가 있으며 등받이 쪽에 ‘121호’라고 적혀 있다. 짐수레 앞에는 전동휠체어가 어렴풋이 보인다. 사진 가운데 소실점이 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이며, 하얀색 글씨로 ‘탈시설, 계속해보겠습니다 - 향유의집 폐지가 남긴 숙제’라고 적혀 있다. 캘리그라피 김영명. 사진 이가연 

[편집자 주] 2021년 4월 30일, 사회복지법인 프리웰 산하 장애인거주시설 향유의집이 ‘폐지’됐다. 시설이 문을 닫는 데는 폐쇄와 폐지, 두 가지가 있다. 폐쇄는 인권침해 문제 등으로 지자체 행정명령에 의한 것이고, 폐지는 시설이 자체적으로 지자체에 신고하여 문을 닫는 것이다. 

그 시작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회복지법인 석암재단 산하 김포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 살던 장애인들은 시설을 박차고 나와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일명 ‘마로니에 8인의 투쟁’이라고 불리는 이 싸움으로 탈시설 제도의 초석이 마련됐다. 이후 사회복지법인 석암재단은 ‘프리웰’로 이름을 바꾸고, 공익이사가 들어서면서 한국 최초로 법인 주도의 거주인 탈시설과 시설폐지를 이뤘다. ‘문제시설’ 석암베데스다요양원도 ‘향유의집’으로 이름을 바꾸고 과거와 단절한다. 

올해 봄, 향유의집은 거주인 전원이 퇴소하면서 36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중앙정부의 탈시설 정책이 부재한 상황에서 진행된 ‘향유의집 폐지’는 놀라운 성과만큼이나, 정부 탈시설 정책이 어떻게 수립되어야 하는지를 현상적으로 드러냈고 많은 과제를 남겼다. 비마이너는 네 차례에 걸쳐 연속 보도한다. 

82년생 최아람 씨는 2019년 12월 탈시설 후 서울의 한 지원주택으로 입주해 살고 있다. 중증 뇌병변장애와 발달장애가 있는 그는 5살 때 무연고 상태로 아동시설에, 이후 13살 때 사회복지법인 프리웰 산하 장애인거주시설 향유의집에 입소해 38살까지 살았다.

평생 시설 생활을 하던 아람 씨가 지역사회에서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되면서 겪은 변화는 컸다. 원하는 시간에 일어나 과일, 빵, 커피 등 그날 먹고 싶은 음식을 아침으로 먹는다. 매일 한 끼는 직접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해 요리한다. 시설에서 입던 무채색 추리닝은 더 이상 입지 않는다. 활동지원사와 함께 쇼핑을 가서 직접 색상을 보고, 재질을 만져 원하는 옷을 구매하며, 손톱에는 반짝반짝한 네일아트를 받는다. 얼마 전 삼척으로 떠난 여행에서는 평소 입던 옷이 아닌, 특별한 원피스를 골라 입었다. 

아람 씨가 최근 다녀온 삼척 여행에서 원피스를 입고 환하게 웃음을 보이고 있다. 사진제공 최아람
아람 씨가 최근 다녀온 삼척 여행에서 원피스를 입고 환하게 웃음을 보이고 있다. 사진제공 최아람

- 시설 직원·부모, 무연고 발달장애인 탈시설은 ‘자기결정권 침해’ 주장

아람 씨는 본인 의사를 정확히 표현하기 어려운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적극적으로 탈시설 의사를 밝히지는 않았다. 아람 씨처럼 무연고 발달장애인에 대한 탈시설을 추진하면, 당사자가 탈시설의 욕구를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곤 한다. 지난 4월 30일, 폐지된 사회복지법인 프리웰 산하 장애인거주시설 향유의집도 마찬가지다. 2019년 12월에는 8명, 2020년 9월에는 5명의 중증 무연고 발달장애인들이 시설에서 나와 지원주택으로 입주했다. 

본격적인 탈시설을 앞둔 2018년부터, 일부 향유의집 거주장애인의 부모와 시설 직원은 프리웰이 의사표현이 어려운 무연고 발달장애인들을 지원주택으로 내몰고 있다며 지난 3년간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에 수차례 진정을 제기했다. 진정서에서 아람 씨를 비롯한 무연고 발달장애인들은 강제로 지원주택으로 집단 퇴소당한 ‘피해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진정은 매번 기각됐다. 인권위는 △서울시의 탈시설 계획대로 법인이 탈시설을 추진한 점 △서울시·SH주택공사가 지원주택 입주민 선발 시 탈시설을 전제로 장애정도 및 의사소통을 고려하여 선발한 점 △지원주택에서 매일 20시간 1:1 지원을 하는 점 △1년 5개월에 걸친 과정에서 자기결정권 보장을 위해 노력한 점 등을 고려할 때 인권침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에 더해 지난 2020년 9월, 프리웰 산하 다른 장애인거주시설에 있는 이용자의 보호자 대표는 양천구에도 무연고 발달장애인에 대한 집단퇴소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당사자가 아닌 다른 이용자의 보호자가 소를 제기한 점이 의아하지만, 향후 자신의 자녀가 있는 시설이 폐지될까 우려해서 반대하는 것이라 추측된다. 이에 대해 양천구는 인권위와 마찬가지로 장애인 당사자가 시설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기 때문에 처분을 취소할 수 없다는 입장을 냈으며, 결국 지난 11일 재판부는 행정소송을 각하했다. 

이와 같이 의사표현이 어려운 발달장애인의 퇴소 과정에서 수차례 문제가 발생하자, 복지부는 인권위 권고를 수용해 2020년 장애인복지시설 사업지침 내용 중 단출했던 퇴소절차에 세부적인 규정들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중증장애인이 법정대리인의 부재 등으로 보호자에 의한 동의서 제출이 어려운 경우, 시·군·구청 담당자가 통합사례관리 차원에서 퇴소를 ‘장애인 전담민관협의체’ 안건으로 상정해 자립·전원을 심의하도록 한 상황이다. 해당 지침이 변경된 뒤에는 향유의집 무연고 발달장애인을 비롯해 지난해 폐쇄된 루디아의집 거주인 62명 중 의사표현이 어려운 11명의 무연고 발달장애인이 구청 민관협의체 심의를 거쳐 지원주택으로 입주하게 됐다.   

그러나 지침이 개정되어도 여전히 가족은 보호자의 이름으로 장애인의 탈시설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이로 인해 향유의집 발달장애인 6명은 부모가 의사결정을 대리하여, 탈시설이 아닌 프리웰 산하 다른 시설로 전원됐다. 미성년자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족의 반대로 시설에 남게 된 것이다(해맑은마음터 체험홈 2명, 해맑은마음터 본원 2명, 누림홈 2명). 김정하 프리웰 이사장은 “누림홈과 해맑은마음터 또한 향유의집에 이어 시설폐지를 준비 중이다. 그러나 부모가 강력히 반대하고 있는 최중증·발달장애인이거나, 미성년인 발달장애인은 퇴소의사가 있어도 나갈 수가 없어서 시설폐지에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우려했다. 

향유의집 거주인들이 살던 방. 한 방에 3~7명이 살고 있었다. 사진 이가연
향유의집 거주인들이 살던 방. 한 방에 3~7명이 살고 있었다. 사진 이가연

- 손든 사람만 탈시설? 발달장애인은 평생 시설에서 살아야 

탈시설에 대한 욕구조사가 반드시 필요할까? 현재 서울시는 지난 5월부터 서울시복지재단을 통해 학대 사건이 있던 라파엘의집 등 이용인 50인 이상 장애인거주시설 5곳을 대상으로 탈시설 욕구조사를 진행 중이다. 기존 욕구조사가 거주시설 자체적으로 이뤄졌다면, 이제는 거주시설 및 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의 협업을 통해 ‘체계적·객관적’으로 욕구를 분석하겠다는 취지다. 서울시 장애인탈시설지원팀장은 관련 면담 자리에서 ‘손든 사람만 탈시설을 할 수 있다. 욕구조사에서 무응답자는 시설 잔류계층으로 봐야 한다’라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탈시설 욕구조사를 꼼꼼하게 할수록 장애인 당사자의 인권은 오히려 정교하게 가로막히게 된다. 탈시설 의사표현을 하지 않는 중증 발달장애인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되고, 결국 평생 시설에서 살아야 한다. 장애인거주시설 도란도란의 시설폐지를 끌어낸 김치환 사회복지사는 탈시설 욕구조사를 전면적으로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김 사회복지사는 “언제나 당사자 의사가 중심이라고 말하지만, (욕구조사로) 도리어 그 사람이 사라지는 결과가 만들어진다. 탈시설이 확정된 상황에서 ‘탈시설지원조사’를 진행해야 근본적인 갈등이 해소된다”라고 지적했다. 

유사한 일은 2018년 대구 시립희망원 폐쇄과정에서도 일어났다. 대구시는 탈시설 의사표현을 하지 않은 발달장애인들을 다른 시설로 전원시키려 했으나, 장애계의 요구 끝에 대구시는 ‘무응답·무연고자’ 9명에 대한 자립을 지원하게 됐다. 당시 사건을 대응한 전근배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은 “탈시설을 기본값으로 간주해야 한다. 시설에 들어올 때는 본인의 욕구가 중요하지 않았는데, 시설에서 나갈 때는 의사표현이 중요한 잣대처럼 여겨지는 건 모순이다”라며 “욕구가 만들어지는 환경이나 역사를 지워버리고, 시설에 있던 것이 마치 개인의 선택인 것처럼 접근하는 건 지자체의 무책임한 자세”라고 비판했다.  

- 국제적 탈시설 흐름 역행하는 ‘탈시설 욕구조사’

탈시설 욕구 파악은 국제적인 탈시설의 흐름과도 맞지 않는다. 1999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옴스테드(Olmstead) 판결에서도 시설 거주는 정신장애인을 지역사회에서 계속 고립시키는 것으로 판단해, 장애로 인한 차별이라고 판결했다. 즉, 의사표현 여부와 상관없이 시설 거주 그 자체를 권리 침해로 보았다. 판결 이후 미국은 지난 2014년 거주서비스에 대한 새로운 홈앤커뮤니티베이스주거서비스(HCBS) 기준을 마련해, 집단생활이 이뤄지는 대규모 시설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으며, 2019년부터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은 시설적 방식의 서비스에 대해서도 재정 지원을 중단하고 있다.  

미국 정부의 홈앤커뮤니티베이스주거서비스(HCBS) 안내 홈페이지. ‘HCBS는 지적·발달장애나 지체장애·정신장애 등이 있는 사람에게 시설이나 고립된 환경이 아닌 자신의 집이나 지역사회에서 서비스를 받을 기회를 제공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medicaid.gov 
미국 정부의 홈앤커뮤니티베이스주거서비스(HCBS) 안내 홈페이지. ‘HCBS는 지적·발달장애나 지체장애·정신장애 등이 있는 사람에게 시설이나 고립된 환경이 아닌 자신의 집이나 지역사회에서 서비스를 받을 기회를 제공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medicaid.gov 

장애인이 시설에서의 삶을 지속하는 것은 의사를 묻지 않고 시작된 자기결정권 침해 상태를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도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제19조에 관한 일반논평을 통해 “시설 입소를 다른 사람이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장애인의 법적 능력을 부정하는 권리 침해가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하며, “협약을 준수하고 장애인의 인권을 존중하려면 탈시설이 반드시 이뤄져야 하며, 모든 장애인의 법적 능력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현재 필요한 것은 지역사회에서의 삶을 전제로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지원할 방안이다. 그러나 정부와 지자체는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탈시설 할 때는 자기결정권에 근거해 욕구를 조사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지역사회에서 자립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서비스가 필요한지, 그 욕구는 묻지 않는다. 진정으로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일상생활 속에서 의사소통을 지원하고 계약의 주체로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하지만, 이에 대한 제도적 지원은 턱없이 미비하다.

- 탈시설 후 공공후견인 신청 늘었지만, 후견인 선정 1년 넘게 기다려야

아람 씨는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 살게 되면서 수많은 선택과 결정의 기로에 서게 됐다. 은행에서 계좌를 만들고, 자산을 관리하고, 병원에 가고, 각종 계약을 맺는 등 시설에서와 달리 의사결정의 주체로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아람 씨는 성인 발달장애인을 위한 공공후견인제도와 공공신탁제도를 신청해 이용하고 있다. 복지부는 2013년부터 발달장애인의 자립생활에서 의사결정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공후견지원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성년후견제도 중 의료·금전관리 등의 영역에 ‘특정후견’을 신청한 성인 발달장애인이 이용한다. 

그러나 공공후견인제도는 신청자에 비해 후견인 수가 너무 적어서 이용 자체가 어렵다. 향유의집에서 탈시설을 준비하던 무연고 발달장애인들은 신청 이후 오랜 기다림에도 후견인이 선정되지 못한 상황에서 탈시설 할 수밖에 없었다. 아람 씨는 신청 후 7개월 만에 선정되었으며, 함께 탈시설한 다른 발달장애인은 1년 6개월째 후견인 선정을 기다리고 있다. 작년 9월에 탈시설한 발달장애인들도 가족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선정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장애인개발원(아래 개발원)에 정보공개를 청구한 결과, 지난 4월 기준 공공후견지원사업 신청자 대기 건수는 426명이며, 이 중 탈시설 관련 대기 건수는 280여 건에 달한다. 개발원은 탈시설 관련 대기 건수가 특히 많은 이유에 대해 ‘2018년부터 진행된 탈시설 정책으로, 탈시설 대상자의 발달장애인 공공후견지원사업 신청이 급증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장애인개발원 정보공개 청구결과, 지난 2017년부터 현재까지 공공후견인 청구 건수는 크게 늘어나고 있으나 신청자 대기 건수는 426건, 이 중 탈시설 관련 대기 건수는 280여건에 달한다. 개발원 정보공개청구답변서 재구성. 제작 하민지
한국장애인개발원 정보공개 청구결과, 지난 2017년부터 현재까지 공공후견인 청구 건수는 크게 늘어나고 있으나 신청자 대기 건수는 426건, 이 중 탈시설 관련 대기 건수는 280여건에 달한다. 개발원 정보공개청구답변서 재구성. 제작 하민지

탈시설 후 공공후견인 관련 업무가 증가하자, 개발원 등 후견지원을 담당하는 기관에서 후견인 신청 포기를 종용하기도 했다. 최선영 프리웰지원주택 센터장은 “공공후견인을 신청하는 이유는 의사확인이 어려운 발달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사회적 안전망이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발원을 비롯해 후견인을 연결하는 기관에서는 지원주택 코디네이터가 후견인 역할을 하니, 굳이 후견 신청을 해야겠냐며 되묻는다”면서 “하지만 지원주택은 당사자의 일상을 조력할 뿐 법적 권한은 없다”라고 밝혔다. 

- ‘시설 밖 시설’ 안 되려면? 의사표현 할 수 있는 환경 만들어야

공공후견인이 ‘특정후견’만 가능한 이유는 발달장애인의 모든 의사결정이 대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지만, 은행과 같은 기관에서는 여전히 후견인의 의사를 당사자의 의사보다 우선시한다. 

일각에서는 장애인의 취약성을 이용한 갈취와 범죄가 존재하기 때문에 발달장애인의 의사결정에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김성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사무국장은 “당사자가 피해를 보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대신, 아무런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게 막는 방식으로 권리에 제한을 둔다”며 “시설 바깥의 삶이 다시 시설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의사표현이 어려운 장애인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의사결정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는 지난 2014년, 최종견해를 통해 한국정부가 성년후견제도의 후견인이 장애인의 의사를 결정하도록 한 것에 대해 우려를 표했으며, ‘대체의사결정’이 아닌 ‘조력의사결정’으로 전환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국가보고서를 통해 성년후견제도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아니며, 이용 비율이 높아 즉각적 폐지는 어렵다고 밝혀 빈축을 샀다. 현재 국내 발달장애인의 의사결정 지원을 위한 제도는 공공후견인제도와 시범사업 단계인 공공신탁제도가 유일하며, 아직까지 다양한 의사결정 지원 제도는 모색되지 않고 있다.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제12조에 관한 일반논평을 통해 법적능력 행사를 위한 지원이 대리 의사결정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지원 방식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장애인은 사회적 거래에 필요한 법적 행위의 경우, 은행과 금융기관 등의 민간·공공기관에 이해할 수 있는 정보 제공이나 수어 통역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과정을 거쳐도 결정이 불가능하면 당사자의 의지와 선호를 바탕으로 한 최선의 해석이 이뤄져야 한다. 또한, 학대를 방지하는 안전장치가 제공되어야 하며, 두려움이나 기만과 같은 ‘부적절한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동시에 장애인 당사자가 위험을 감수하고 실수를 저지를 권리까지 존중되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해외에도 의사결정에 대한 대리제도를 완전히 없앤 국가는 아직 없다. 대신 많은 국가에서 당사자의 의사에 반하는 대리를 최소화하는 다양한 의사결정 지원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제철웅 한양대학교 법학과 교수는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의 ‘대리합의법(Representation Agreement Act)’을 소개했다. 대리합의법에 따르면 발달장애인이 직접 지정하는 사람이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발달장애인의 의사와 선호도 조사를 선행한다. 대리인은 장애인이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우선시하며, 의사결정 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시점에서만 대신 의사결정을 한다. 법원에 의해 후견이 개시되는 한국과 달리, 법원의 개입 없이도 대리인이 활동을 개시할 수 있다. 이외에도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에서는 재산·신상·의료 등 다양한 유형과 장애 정도에 따른 후견대체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제 교수는 “공공후견인을 비롯해 대리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발달장애인의 의사나 선호도를 확인하고, 이를 표현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이다”라며 “발달장애인을 제쳐두고 발달장애인이 가장 좋은 게 무엇인지 후견인이 생각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발달장애인을 배제하지 않고, 최대한 당사자가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주변 환경을 조성해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아람 씨를 지원하고 있는 지원주택 팀장과 코디네이터 그리고 활동지원인 3명.  지난 6월 방문한 지원주택에서 이들 다섯 명이 손가락으로 하트모양을 만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이가연
아람 씨를 지원하고 있는 지원주택 팀장과 코디네이터 그리고 활동지원인 3명.  지난 6월 방문한 지원주택에서 이들 다섯 명이 손가락으로 하트모양을 만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이가연

- 지역사회에서 ‘보호’ 아닌 ‘지원’을

현재 아람 씨는 지원주택에서 총 3명의 활동지원사로부터 3교대로 일상생활 지원을 받고 있다. 지원주택에서는 아람 씨가 일상에서 의사소통이 원활히 이뤄질 수 있도록 체계를 만들어나가는 중이다. 활동지원사들은 매일 아람 씨의 상태를 확인하고, 특이사항이나 일과를 기록으로 남긴다. 코디네이터를 비롯한 지원주택 직원들은 기록을 확인하고, 아람 씨의 권리가 보장되는 방향으로 활동지원사들이 지원할 수 있게끔 의견을 공유해 소통하고 있다. 

이재오 장안동지원주택 팀장은 “시설에서는 오랜 기간 일대 다수로 지원받기 때문에 본인이 원하는 것을 알거나 찾기 어렵다. 경험을 안 해보면 선택 자체를 하지 못한다. 지원주택에서는 1:1 매칭으로 긴 시간 동안 비언어적 표현 등 고유한 의사소통 방식을 하나씩 찾을 수 있는 환경과 경험을 제공한다. 아람 씨의 경우, 처음에는 어려워하셨지만, 자신이 의사표현을 하면 지원을 받는다는 걸 인식하고 신뢰가 형성된 뒤로는 점점 표현이 다양해지고, 안정적으로 변하셨다”고 밝혔다.

2018년 12월 기준, 장애인거주시설에 있는 장애인 약 3만 명 중 80%가 발달장애인이다. 발달장애 특성을 이해하고 소통을 지원하는 전문 활동지원 인력이 더욱 필요하지만, 여전히 별도의 인력 양성 제도는 없다. 또한 활동지원 제도는 지체장애인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어, 발달장애인은 활동지원 시간도 부족해 코디네이터나 야간순회방문서비스를 통해 공백을 메꾸고 있다. 지원강도가 세다 보니 인력이 자주 교체되어 전문성을 강화하기도 어려워지고, 그때마다 발달장애인 당사자도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그럼에도 아람 씨가 시설 밖 지역사회에서 더 많은 의사를 표현하게 된 이유는 그를 둘러싼 주변 환경이 ‘보호’가 아닌 ‘지원’하는 방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최선영 센터장은 “지원주택에서는 아람 씨의 독립적인 삶을 지지하고 곁에서 지원해 나가고 있다. 아람 씨의 변화를 보면서 지원하는 분들도 함께 놀라워하시며, 태도가 많이 바뀌게 됐다. 얼마 전 여행을 가는 아람 씨에게 함께 탈시설한 이웃은 용돈을 건네주기도 했다. 이것이 일상이고 사람 사는 맛 아닌가”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위해 만났던 날, 아람 씨는 알록달록한 양말과 팔에는 파스텔톤의 팔찌를, 손에는 반짝이는 네일아트를 하고 있었다. 그는 점심은 밖으로 나가 냉면을 먹고 싶다고 말했다. 시설에서 무채색의 추리닝을 입고 마치 취향 없는 사람처럼 살던 아람 씨의 삶에는 짙은 자신만의 취향이 천천히 배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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