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살아있는 게 제일 잘한 일 _ 박길연 ②

《 박길연 _ 살아있는 게 제일 잘한 일 》

① 그렇게 아파본 건 처음이었어
② 신비한 꿈

- 신비한 꿈을 꾸었지

안 가본 데가 없고 안 해본 거 없이 다 해봤어요. 현금을 200만 원, 300만 원을 들고 집을 나섰다 돌아오면 그 돈이 모두 없어져 버렸어요. 한센인들이 쓰는 피부약이 바이러스 균을 죽일 수도 있다는 소릴 듣고 그분들 사는 마을에도 가봤어요. 언젠가는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옛날에 아이들이 죽으면 단지 안에 넣어서 땅에 묻었는데 시간이 흐르면 시신의 수액 같은 게 물처럼 진하게 고인대요. 그걸 먹으면 낫는다는 거예요. 안 들었으면 모르겠는데 들어버렸으니 아이 아빠가 그걸 파러 가기로 했어요. 어디에 가면 아이들 무덤이 많은지 알아두고 새벽에 사람들 없을 때 가겠다고 친구들이랑 계획도 세웠어요.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우리 아빠가 그 사람한테 전화를 했어요. 내 자식 삶도 중요하지만 내 자식 살리자고 죽은 아이들을 그럴 수는 없다고. 어려서 죽은 것도 가슴이 아픈데 설사 그게 특효약이라고 해도 그렇게 해선 안 된다고 아빠가 못 가게 했어요. 그래서 안 갔죠.

나도 가족들도 점점 지쳐갔어. 어느 날 응급실에서 정신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데 의사가 언니한테 하는 말을 들었어요. 센 약을 많이 먹어서 위에 천공이 너무 많이 생겼는데 그게 치료할 수 없을 정도라고, 빈혈도 심하고 영양 상태도 심각하게 안 좋아서 한 달 이상 견디지 못할 것 같다고 했어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들 생각밖에 안 났어요. 병원에서 죽느니 하루라도 더 아들하고 같이 지내겠다고 내가 막 몸부림을 쳤어요. 언니가 “그래, 그래, 알았다, 가자” 나를 달래서 집으로 왔어요.

집에서 지낼 때 어느 날 꿈을 꿨어요. 계곡물이 흐르는데 어떤 나뭇가지 모양의 약초 같은 게 떠내려왔어요. 평상시 같으면 그냥 흘려보낼 텐데 이상하게 그걸 주워서 집으로 가져왔어요. 그 약초를 보고는 사람들이 어디서 이런 불로초를 가져왔느냐고 그랬어요. 그러고는 꿈에서 깼는데 어떤 분이 집으로 상자를 하나 들고 오셨어요. 건강식품 사업을 하는 분이었는데 우리 소식을 듣고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 번 먹어보겠느냐고 가져온 거예요. 그게 몸에 독소를 빼주고 오장육부를 강하게 해준다고 했어요. 상자를 열었는데 꿈에서 본 그 약초였어요. 너무 신기했죠.

뿌옇고 희미한 빛의 잔상이 보인다. 사진 언스플래시 
뿌옇고 희미한 빛의 잔상이 보인다. 사진 언스플래시 

수입한 거라 굉장히 비쌌어요. 일주일치가 50만 원이 넘었어요. 이걸 먹을 땐 되도록 진통제를 먹지 않아야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해서 진통제를 끊었어요. 통증이 두 배로 왔죠. 그런데 며칠 지나니까 가족들이 내가 혼수상태에서 막 몸부림을 치는데 얼굴에 화색이 돌고 몸을 움직일 때도 힘이 좀 있어 보인다고 했어요. 그래서 보름치를 일주일 만에 먹어버리고 더 구입해 먹었어요. 그게 인천세관을 통과해 들어오는데 어떤 때는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럴 땐 금액을 더 부르는데 마다하지 않고 먹었어요. 그 회사에서 나오는 다른 제품들도 더 구입해서 먹었어요. 처음엔 한 달에 100만 원~200만 원이었는데 나중엔 500만 원씩 들어갔어요. 그때부터 병원에서 주는 약은 일절 안 먹었어요.

어느 날 병원 가서 검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병원에서 전화를 해서는 검사가 잘못되었다고 다시 검사받으러 오라고 했어요. 류마티스 염증 수치가 영(0)으로 나왔는데 그럴 수가 없다는 거예요. 다시 검사했는데 또 영(0)이었어. 병원에서도 믿을 수가 없다고 했어요. 기적 같았죠. 그 식품을 먹고 살아난 거예요. 몸이 점점 좋아지고 힘이 생기면서 앉아있을 수도 있게 되었어요. 나중엔 많이 회복되어서 목발 짚고 운동도 할 수 있을 정도였어요. 바다에 들어가서 수영도 하고 자전거도 탔어요. 겨울엔 동네 목욕탕에 사람들 오기 전에 가서 물속에서 운동했어요. 한 3년 그렇게 지내다 이젠 괜찮겠지 싶어서 약을 중단했어. 없는 살림에 빚 내가면서 계속 먹을 수는 없으니까. 그랬더니 다시 재발해서 예전처럼 못 움직이는 상태가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또 식품을 사 먹고 다시 좋아졌어요. 나중엔 집에서 손빨래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살 정도로 회복되었어요.

- 나의 영원한 뒷배

집에서 남편하고 조그맣게 사업을 했었어요. 물품을 수입해서 파는 일이었는데 1997년 IMF 때 망해서 빚더미에 올라앉았어요. 우리 집에 사람들이 와서 차압 딱지를 붙이는 상황이 되었는데 내가 꼼짝 못하고 누워서 그걸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인천 사는 동생이 그러다 내 병이 더 깊어지겠다고 자기 옆으로 오라면서 원룸을 하나 얻어줬어요. 짐 몇 개만 들고 인천으로 왔어요. 인천에서도 동생들이 도와줘서 지냈어요. 한 동생은 집에 들어와서 살림하고 또 한 동생은 생활비를 보태줬어요. 동생이 아이 아빠한테 형부도 이제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과일 가게를 차려줬는데 장사를 할 줄 모르니까 얼마 안 가서 망했어요.

그러고 있는데 부산에서 화장지 사업을 하던 사촌오빠가 일을 도와달라고 해서 부산으로 이사를 했어요. 공장 안에 집이 있어서 출퇴근하지 않아도 됐어요. 나는 집에서 경리 일을 하고 애 아빠는 공장 일을 했어요. 아빠는 아픈 내가 타지에서 일하면서 사는 게 가슴이 아파서 남해로 계속 내려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장애를 입게 되면 제일 보고 싶지 않은 게 바로 고향 동창들이거든요. 달라진 나를 보여주는 게 그렇게 자존심이 상할 수가 없어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에서만 계속 지냈어요. 가족들끼리 놀러 갈 때도 안 갔어요. 내가 그렇게 사는 걸 아빠가 너무 힘들어하셨어요. 명절 때만 고향에 갔는데 연휴 끝나서 본가를 나설 때면 아빠가 나를 붙들고 통곡을 하면서 우셨어요. 나를 너무 보고 싶어 하셨는데 헤어지면 또 한참 못 보니까요. 동네 사람들이 “저 영감 또 자식들 보고 운다” 그러면서 쳐다보면서 지나갔어요.

그랬던 아빠가 식도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으셨어요. 길면 6개월이라고 했어요. 아빠는 남은 시간 동안 하루라도 더 자식들하고 함께 있고 싶다면서 40평짜리 아파트를 구해서는 자식들을 다 불러 모았어요. 결혼 안 한 자식들은 직장 그만두고 오라고 했어요. 남해가 아니라 부산에 집을 구했는데, 순전히 나 때문이었어요.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평생 살던 고향도 등지고 나와 자식들을 선택하신 거예요. 그 집에서 엄마, 아빠, 동생 둘, 그리고 나, 우리 아들, 아이 아빠 이렇게 일곱 명이 살았어요. 방 세 개는 자식들이 쓰고 엄마 아빠는 거실에서 지냈어요. 그래야 우리가 화장실 왔다 갔다 할 때 한 번이라도 더 얼굴 볼 수 있다면서. 주말 되면 포항, 순천에 살던 자매들까지 다 몰려와서 북적북적했죠. 그렇게 2년을 함께 살았어요.

2014년 1월 27일, 장애인들이 설 명절을 앞두고 시외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고속버스터미널을 점거했다. 박길연 대표가 “장애인도 고속버스 타고 고향 가자!”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그 밑에는 장애인들이 구매한 버스표가 붙어 있다.
2014년 1월 27일, 장애인들이 설 명절을 앞두고 시외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고속버스터미널을 점거했다. 박길연 대표가 “장애인도 고속버스 타고 고향 가자!”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그 밑에는 장애인들이 구매한 버스표가 붙어 있다.

아빠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런 아빠가 없다는 건 감히 상상해본 적도 없었어요. 그런 날이 다가오니까 무섭고 슬펐지만 그래도 함께 보냈던 그 시간은 정말 행복했어요. 아빠의 건강관리는 내가 책임졌어요. 아프면서 대체의학에 관한 공부를 조금 했거든요. 내가 먼저 아팠던 게 도움이 되어서 좋았어요. 병원에서 준 진통제는 최대한 안 드시게 하면서 음식에 신경을 아주 많이 썼어요. 어렸을 땐 아빠가 우리한테 간식을 만들어줬는데 내가 해드릴 수 있어서 기뻤어요. 김치도 덜 맵게 고춧가루 대신 피망으로 담그고 아침에는 콩하고 깨 갈아서 죽을 쒀 드렸어요. 아빠가 변을 보면 내가 다 확인했어요. 의사처럼 먹은 게 소화가 잘되었는지 색깔이 어떤지 살폈어요. 아빠가 내 말을 잘 들었어요. 오늘 간식은 뭐냐고 아이처럼 기대하시고요. 통증 때문에 밤에 잠을 잘 못 주무셔서 매일 밤마다 따뜻한 물로 발과 머리를 안마해 드렸어요. 그때 처음 부산 을숙도로 놀러도 갔어요. 아빠와 추억을 만들고 싶었어요. 나랑 같이 소풍 가는 게 아빠 소원인 걸 알고 있었으니까.

예상했던 일인데도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지금도 그게 몇 년도인지 기억을 못해요. 가족들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요. 한동안 우울증약도 먹었어요. 아빠 생각이 너무 나서 그 집에 계속 살 수가 없으니까 정리하고 인천으로 다시 왔어요.

제일 억울했던 게 뭐냐면 시어머니가 내가 아픈 걸 숨기고 시집왔다고 말했던 거예요. 동생이 피부샵을 하다가 망했는데 빚 받을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찾아오니까 시어머니가 알게 되었어요. 아이 아빠한테 전화해서는 며느리를 잘못 들여서 집안이 망했다고 하셨어요. 내 병원비, 약값 하느라 남편 앞으로 있던 전답을 팔긴 했었어요. 하지만 우리 친정은 그에 비하면 몇 배로 돈을 썼어요. 매달 우리집 생활비를 댄 것도 다 내 동생들이었어요. 나한테 돈을 빌려주고 못 받아도 달란 소리도 안 했어요. 그랬는데 내가 당신 아들 피를 빨아먹는다고 역정을 내셨어요. 아빠 살아계셨을 때 아빠 귀에 그 소리가 들어간 적이 있어요. 그때 아빠가 시어머니한테 전화해서는 어떤 부모가 자식이 아픈데 먼저 치료를 하지 더 힘든 길로 보내느냐면서 우리 아가 구박하려면 당장 보내 달라고 했어요. 우리 아빠는 나를 아가야, 하고 불렀어요. 아이 아빠한테도 자네 원망 안 할 테니 힘들면 언제든지 보내라고 했어요. 아빠가 없다는 건 그렇게 말해줄 존재가 없다는 뜻이었어요.

동생이 식당 주방에서 일하면서 빚을 계속 갚아나갔는데 그 와중에도 자기보다 내가 더 급한 것 같다면서 나 아플 때 찾아와서 건강식품을 사주곤 했어요. 하루는 손에 상처가 크게 나 있더라고요.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설거지를 하는데 컵이 깨진 걸 모르고 씻느라 그랬대요. (울먹임) 그런 애를 두고 시어머니가 그 여시 같은 년이 우리 돈 다 가져갔다고 하시는 거야. 아이 아빠하고 전화 통화를 하는데 나한테까지 다 들렸어요. 내가 전화를 뺏어서 처음으로 소리를 지르면서 시어머니한테 대들었어요.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그 애는 10원을 벌면 10원 다 나한테 주고 1원 더 빚내서 주는 그런 애라고요. 그리고 남편한테 수화기를 건네주면서 바보처럼 듣고만 있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말해 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못하더라고요. 자기 엄마니까. 그 일 있은 뒤에 남편한테 떨어져 살자고 했어요. 나 하나만 보고 살아준 건 고맙지만 당신 엄마한테 이런 모욕을 당하면서까지 살 수는 없다고요. 고향 가서 자유롭게 돈 벌면서 살라고 보냈어요. 그게 그 사람하고의 마지막이었어요.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 필자 소개 _ 홍은전 인권기록활동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비마이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