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살아있는 게 제일 잘한 일 _ 박길연③

《 박길연 _ 살아있는 게 제일 잘한 일 》

① 그렇게 아파본 건 처음이었어
② 신비한 꿈
③ 생의 욕구가 둑을 넘어

2010년 9월 17일, 국민연금공단 장애심사센터를 점거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들. 당시 보건복지부의 장애등급심사로 줄줄이 등급 하락이 발생하여 활동보조서비스 신청 자체가 어려워지자, 활동가들이 이에 항의하며 장애심사센터를 점거했다. 사진 김유미
2010년 9월 17일, 국민연금공단 장애심사센터를 점거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들. 당시 보건복지부의 장애등급심사로 줄줄이 등급 하락이 발생하여 활동보조서비스 신청 자체가 어려워지자, 활동가들이 이에 항의하며 장애심사센터를 점거했다. 사진 김유미

- 생의 욕구가 둑을 넘어

집안에서만 지내다가 동생하고 잠시, 아주 잠시 마트에 간 적이 있었어요. 그것도 엄청난 용기를 낸 거였죠. 수동휠체어에 앉아 있는데 어떤 모녀가 저 앞에서부터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걸어왔어요. 엄마는 60대, 딸은 40대쯤 돼 보였는데 그들이 나를 지나친 후에도 고개를 돌려서 계속 쳐다보는 거예요. 집에 와서 몇 시간을 울었어요. 그러고선 다시 문을 닫아버렸죠.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무서웠어요. 아들이 어렸으니까 혹시 아들이 놀림을 받을까 봐 더더욱 나갈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그 생활도 지치고 힘들었어요. 바깥세상도 너무 그리웠고요. 2004년에 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간 뒤에 이젠 슬슬 나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딱 한 번 휠체어 타고 아들하고 나간 적이 있었는데 아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어요. 친구가 지나가니까 나한테 인사를 시키면서 “우리 엄마야! 우리 엄마야!” 했어요. ‘아, 아이가 바라는 게 이런 거였구나’ 그러면 나갈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젊어서 집에만 있었으니 남들보다 컴퓨터를 일찍 다뤘어요. 그때 ‘무한지애’라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있었는데 어느 날 대전에서 번개(모임)를 했어요. 어디 갈 때도 휠체어를 타지 않았어요. 휠체어 타면 장애인처럼 보이는 게 싫어서 동생이 늘 업고 다니게 했어요. 그날은 멀리 가는 거니까 처음으로 수동휠체어를 탔어요. 그 모임에 있던 어떤 오빠의 차를 타고 가서 모임 장소에 딱 도착했는데 저쪽에 뇌병변 장애인들 열댓 명이 모여 있었어요. 그런 장면을 내 눈으로 처음 본 거였어요! 얼어버렸죠. 그 오빠가 내 휠체어를 밀려는 순간 다리에 힘을 팍 줬어요. 브레이크처럼 다리로 딱 버틴 거예요.(웃음) 너무 무서워서 말도 잘 안 나왔어요. 그 오빠가 괜찮다면서 휠체어를 밀고 가니까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다가가게 됐어요.(웃음)

두려움은 잠깐이었어요. 금방 친해졌어요. 모임이 1박 2일이었어요. 숙소에 화장실 편의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았었는데 한 여성이 화장실에 간다는 거예요.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니까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방법이 있다고 했어요. 따라가 봤죠. 그랬는데 글쎄 바닥에 내려가 앉더니 발로 옷을 내리는 거예요. 아니 더러운 화장실 바닥에 왜 앉아? 그런 건 정말 상상할 수도 없었어요. “내가 해줄게!” 하면서 활동보조를 해줬죠. 그날 내가 그 친구 머리도 감겨줬어요. 한편으로는 충격이었고 한편으론 내 편견이 완전히 깨져버리고 녹아버린 날이었어요. 아, 그냥 사람이구나. 단지 몸이 불편한데 나는 그 모습에 무서움을 먼저 느꼈구나. 아… 너무나 너무나 미안하더라고요.

마음먹고 세상 밖으로 나온 건 2006년 5월이었어요. 90년에 아프기 시작했으니까 16년 만이었어요. 처음 간 곳은 복지관이었어. 거기서 수녀님이 강의하는 걸 들었어요. 자기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데 그 어머니가 딸이 수녀 되는 걸 반대하다가 그 뜻을 접으면서 이렇게 말했대요. “그래도 병신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듣기 너무 거북해서 손을 들고 꼭 그런 표현을 쓰셔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엄마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다 보니 어쩔 수 없다고 하셨어요. 내 장애를 받아들이는 게 여전히 힘들었던 시기에 없던 용기도 쥐어짜서 나간 거였는데 처음부터 그런 말을 들으니 너무 실망스러워서 그다음부터 거길 안 갔어요.

그러다가 ◯◯장애인자립생활센터라는 곳이 있다는 걸 알고 전화를 걸었어요. 그랬더니 거기 소장하고 팀장이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는 자기들이 찾던 사람이라면서 같이 일해보자고 했어요. 나는 이제 막 세상에 나와서 배워야 할 게 많은 사람이라고 했는데도 나를 띄워주면서 꼭 나와서 일해 달라고 했어요. 이제 막 문을 연 센터라 체계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어요. 아주 작은 공간에 장애인 소장하고 비장애인 팀장 둘이 있었어요. 거기서 10만 원을 받고 사무국장으로 일하기로 했어요. 그때 장애인운동계에선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 투쟁이 한창이었어요. 6월엔 인천에서 활동하던 박기연 씨가 지하철 선로에 투신해서 사망한 사건이 있었어요. 활동보조서비스를 요구하면서 투쟁하던 분이어서 그의 죽음 후에 ‘박기연 열사 대책위’가 꾸려졌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그 대책위의 사무국장을 맡게 됐어요.

2006년 6월, 박기연 열사 장례 투쟁을 하며 인천시청 앞에서 천막농성을 하는 사람들. 사진 인천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2006년 6월, 박기연 열사 장례 투쟁을 하며 인천시청 앞에서 천막농성을 하는 사람들. 사진 인천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 바리케이드 앞에 서다

그때 활동보조서비스라는 게 있다는 걸 처음 들었어요. 그땐 그걸 권리로서, 그러니까 머리로 이해했다기보다는 몸으로, 동물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가 와서 도와줘야 한다고? 맞아, 당연하지! 그동안 왜 이렇게 당연한 걸 몰랐던 거지? 이런 거 너무 필요해!’ 그렇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내가 그걸 철저하게 경험한 사람이니까! 아파서 죽겠다는 아이를 손 하나 까딱 못하고 지켜봐야 했던 나니까. 정말 짧은 순간이었고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일은 내 가슴에 한으로 맺혀있었어요. 그 농성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회의하고 기록하고 농성장 물품 챙기고 쓰레기 치우고 설거지하고 저녁에 지킴이들 자는 것 다 살핀 후에 새벽에 집에 갔다가 다음 날 아침에 콜택시 불러서 제일 일찍 나왔어요. 그 후에 전국적으로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 투쟁이 번져서 이 투쟁은 정말로 필요하다는 생각에 여기저기 집회에 정신없이 쫓아다녔어요.

그때 우리 아들이 결핵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했어요. 아들이 굉장한 마마보이였어요. 엄마가 아픈 사람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에 아이를 더 감싸며 키웠어요. 다른 아이들보다 공부도 더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밥도 밖에서 먹으면 괜히 엄마가 아파서 그런 것처럼 보일까 봐 꼭 집밥 먹였어요. 그렇게 성장한 애가 갑자기 엄마가 집을 나가서 돌아오질 않으니까 (웃음) 밥도 잘 못 먹고 잠도 못 잤겠죠. 아이가 입원했는데, 세상에, 병원에 한 번밖에 못 갔어요. 그땐 정말 뭔가에 홀렸던 것 같아요. 정신이 온통 농성하는 데 쏠려 있었어요. 16년 동안 갇혀있던 삶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2010년 9월 17일, 국민연금공단 장애심사센터를 점거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들. 당시 보건복지부의 장애등급심사로 줄줄이 등급 하락이 발생하여 활동보조서비스 신청 자체가 어려워지자, 활동가들이 이에 항의하며 장애심사센터를 점거했다. 가로막힌 문 앞에서 박길연 대표가 마이크를 잡고 발언하고 있다. 사진 김유미
2010년 9월 17일, 국민연금공단 장애심사센터를 점거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들. 당시 보건복지부의 장애등급심사로 줄줄이 등급 하락이 발생하여 활동보조서비스 신청 자체가 어려워지자, 활동가들이 이에 항의하며 장애심사센터를 점거했다. 가로막힌 문 앞에서 박길연 대표가 마이크를 잡고 발언하고 있다. 사진 김유미

비가 많이 오던 날 인천 시청에서 집회를 하는데 경찰이 문을 막고 우리를 못 들어가게 했어요. 나는 추우면 몸에 마비가 와요. 그때 나는 얼마나 순진했던지 공무원들이 나와서 우리를 보호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밖에서 비 맞고 있는 줄 몰라서 안 나오는 줄 알았어요. 옆에 있던 동료한테 “우리 들어가자” 그랬어요. 우리가 여기 있다고 공무원들한테 알려주려고.(웃음) 나는 정말로 들어가서 대화를 하고 싶었던 건데 동료는 ‘한판 뜨자’는 말인 줄 알았대요. 내가 문 열어달라고 난리를 치긴 했는데 싸우려고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열어달라고 그랬던 거예요. 나중에 공무원들이 바리케이드를 치는 걸 보고 이 사람들이 우리를 보호해줄 마음이 없다는 걸 알았어요. 너무 화가 나서 휠체어 발판을 뽑아서 내가 막 휘둘렀나 봐요. 그랬더니 동료가 “그, 그, 그, 그러시면 안 돼요! 무, 무, 무기를 사용하면 안 돼요” 하더라고요.(웃음)

조금씩 장애인들의 척박한 삶을 알게 됐어요. 나는 나만 그렇게 산 줄 알았어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내 의지로 16년 동안 밖으로 안 나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거예요. 비장애인 중심적인 사회와 그 사회의 시선을 갖고 있던 내가 장애인인 나를 가두었던 거예요. 나는 노력만 하면 장애인도 이 사회 안에서 함께 사는 줄 알았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분리하는 벽이 그렇게 단단한 줄 생각도 못 했어요. 장애인들을 수용하는 시설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요. 집에 손님이 오면 가족들이 장애인을 장롱 안에 숨겼다는 얘길 듣고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 걸 알게 되니까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왜 우리가 이렇게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면서 살아야 돼? 왜 우리가 이렇게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살아야 돼? 집에만 살 때는 사람들의 시선이 제일 두려웠어요. 턱이나 계단, 버스, 시설 같은 물리적인 건 하나도 문제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나와 보니까 시선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내 시선이 바뀌었거든요.

- 지하철 타는 법 가르쳐 줘

2006년 가을에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집회하다가 경찰에 잡혀갔어요. 유치장에 처음 들어간 건데 그 자체는 전혀 두렵지 않았는데 문제는 다른 데 있었어요. 나랑 같이 들어간 장애인 동지가 한 명 더 있었는데 다음날이 되니까 그 사람 동료들이 우르르 면회를 온 거예요. 나도 소속이 있었는데 나의 동료는 아무도 안 왔어요. 그 안에 있으니까 그게 그렇게 서운하더라고요. 풀려나던 날 유치장을 나오는데 높은 턱이 있었어요. 경찰들이 급하게 판자를 하나 구해 오더니 경사로처럼 만들어줬어요. 그 동지는 수동휠체어라 가볍게 스윽 밀고 통과했는데 나는 전동휠체어라 올라가니까 뿌지직 소리가 나면서 금방 무너질 것 같았어요. 빨리 통과해야겠다는 생각에 속력을 최대한으로 올려서 쌩-하고 달렸는데 그대로 벽까지 가서 머리를 쿵 박았어요. 속으로 생각했지. 아, 어떡하지… 왜 경사로 설치 안 했느냐고 한판 뜰까… 그런데 그때 나는 너무 외롭고 서러워서 한시라도 빨리 여길 벗어나 집에 가고 싶었어요.

경찰서 밖으로 나오니까 이 동지의 동료들이 또 우르르 와 있었어요. 이번엔 차를 갖고 모시러 왔더라고요. 고생했다고 두부도 사 왔어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인사하고 헤어졌어요. 문제는 내가 심각한 길치였다는 거… 집에 가는 길을 몰랐어요. 지나가는 사람한테 물어서 겨우 지하철은 탔어요. 집에 가려면 부평에서 인천지하철로 갈아타야 하는데 그때 나한텐 지하철이 미로처럼 너무 어렵고 무서웠어요. 어느 통로로 가서 어느 방향으로 가는 전철을 타야 하는지 몰랐어요. 그때 인천에서 같이 활동했던 오빠한테 전화해서 “나 서울에서 지금 가는 중인데 부평역에서 내릴 거야. 나 내리는 데 와서 기다려줘.” 했어요. 가는 길에 막 울었어요. 서러워죽겠는 거예요.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 부평역에서 그 오빠를 만났는데 너무나 반가워서 두 팔 벌려서 “오빠~!!” 하고 불렀어. “오빠, 고마우니까 내가 밥 사주께.” 해서 돈가스집에 갔어요. 밥 먹으면서 “오빠. 나한테 지하철 타는 거 가르쳐줘” 했어요. 그 오빠가 가르쳐주는 대로 열심히 기억한다고 했는데, 역시나 헤매고 난리였지. 집에 들어가니까 새벽 한 시가 넘었더라고요. 집에 와서 또 펑펑 울었어요. (웃음)

2013년 8월 12일,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인천시청 앞에서 장애인자립생활 예산 지원을 촉구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왼쪽이 박길연 대표. 
2013년 8월 12일,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인천시청 앞에서 장애인자립생활 예산 지원을 촉구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왼쪽이 박길연 대표. 

다음날 출근했는데 사람들이 면회 못 와서 미안하다고 하는데 이미 속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어요. 처음부터 그들과 잘 맞지 않았는데 계속 크고 작은 갈등이 생겼어요. 얼마 후에 결국 그만두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나랑 친했던 회원 대여섯 명이 나를 따라 나온다는 거예요. 오지 말라고, 나는 집으로 가는 거라고 했는데도 꾸역꾸역 같이 가겠대. 그래서 다 같이 나왔어요. 그런데 우리가 할 게 뭐 있나요. 같이 놀러 다니기 시작했어요. (웃음)

한 번은 사람들을 부평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한 명이 30분이 지나도 안 왔어요. 전화했더니 오고 있대요. 한 시간이 넘어도 안 와서 내가 또 전화를 했어요. 이번에도 또 오고 있다고만 했어요. 답답하고 짜증이 나서 혹시 길을 잃은 거면 간판을 보고 어딘지 말해달라고 했어요. 내가 데리러 가겠다고요. 그런데도 어딘지 말하지 않고 빨리 가겠다고만 하는 거예요. 한 시간 반 정도 지나서 도착했던 것 같아요. 내가 좀 다그쳤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친구가 한글을 모르더라고요. 아…. 계속 만나면서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어요. 그 친구가 20대였는데 글을 모른다는 게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서울에서 활동하던 문상민 활동가에게 전화해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봤어요. 그때 장애인들의 교육 수준이 얼마나 열악한지 처음 알았어요. 몇 시간 동안 통화해서 나중엔 전화기가 뜨거울 정도였어요.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한글 공부를 해보자고 우리 집에 모이게 됐어요. 그게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죠. 한두 번 우리 집에 모였더니 어느 날 오피스텔 관리소장이 찾아왔어요. 박길연 씨 혼자일 때는 봐줬는데 장애인들이 이렇게 많이 왔다 갔다 하면 집을 빼줘야 한대요.(웃음) 그땐 그게 당연한 줄 알고 바로 네, 알겠습니다, 그랬어요. 우리 중에 부부가 있어서 그 집으로 옮겼어요. 자, 이제 공부 좀 해볼까, 했는데 공부는 개뿔, 늦게 오는 사람 기다리니까 점심 되고 밥해서 먹이고 설거지하니까 한나절이 다 간 거예요.(웃음) 이렇게 해선 안 되는 거구나 생각했어요.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 필자 소개 _ 홍은전 인권기록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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