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살아있는 게 제일 잘한 일 _ 박길연 ④

《 박길연 _ 살아있는 게 제일 잘한 일 》

① 그렇게 아파본 건 처음이었어
② 신비한 꿈
③ 생의 욕구가 둑을 넘어
④ 탈시설, 삶을 구하는 탈출

- 눈빛들

별도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10만 원도 안 되는 돈을 들고 공간을 얻겠다고 계양구 일대를 돌아다녔어요. 내 시계는 1990년도에 멈춰버렸으니까 그 돈이면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물정은 모르고 열정만 갖고 돌아다녔어요. 그때 온갖 괄시와 멸시, 모욕을 다 당했어요. 말도 못 해, 말도 못해. 우리를 보고 대놓고 혀를 차는 건 물론이고 한 번은 계약서 쓰고 계약금까지 다 냈는데 뒷날 전화 와서는 장애인이 왔다 갔다 하면 자기 딸이 결혼하는데 지장이 생긴다면서 계약을 파기해야겠다는 거예요. 와… 그때 알았죠. 장애인이 어떤 대접을 받고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만 했지 당한 건 처음이었죠.

2013년, 박길연 대표가 민들레야학에서 장애등급 하락으로 장애인 복지서비스가 중단된 사람과 상담을 하고 있다.
2013년, 박길연 대표가 민들레야학에서 장애등급 하락으로 장애인 복지서비스가 중단된 사람과 상담을 하고 있다.

겨우겨우 아주 작은 공간을 얻었어요. 이제부턴 월세 낼 돈이 필요하잖아요. 자, 이제 우리가 뭘 해야 되지?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한 사람이 노점을 하면 된다고 했어요. ‘뭐라고? 노점이라고?’ 나는 이게 무슨 소린가 했는데 알고 봤더니 그들 대부분이 전에 노점을 해봤었더라고요. 너무 자연스럽게 껌 팔고 사탕 팔면 된대요. 속으로 외쳤죠. ‘오 마이 갓!’ 아빠가 보셨으면 피눈물을 흘리셨을 거야. (웃음) 그런데 내색은 못 했어요. 왜냐하면 그들이 정말 진지했거든요. ‘그래! 까짓거 좀 쪽팔리면 어때?’ 생각하면서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돈 걷어서, 그래봤자 내 돈이지만, 마트에 가서 사탕 큰 거 몇 봉지 사고 껌도 샀어요. 그걸 팔기 좋게 섞어서 포장했어요. 그런데 이걸 만들 사람이 또 나밖에 없는 거예요. 손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었어요. (웃음)

“자, 이제 어디로 가면 돼?” 하고 물었더니 가까운 임학역으로 가는 게 좋겠대요. 가는 길에 사탕을 진열할 빈 박스를 두어 개 구해서 무릎 위에 얹고 가는데 인도가 울퉁불퉁하니까 박스가 덜덜거리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어요. 그거 줍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혀를 차면서 왜 나와서 이 고생을 하냐는 거예요. (웃음) 하여간 마지막까지 온갖 수모를 다 겪었어요. 임학역에 도착해서 박스 깔고 사탕을 진열하고는 종이에다 “장애인야학 공간 마련 모금”이라고도 써서 붙였어요. 그러고 나선 나는 내 할 일 다 했다고 손 털고 가만히 있었어요. 그런데 주변이 조용한 거예요. 뭔가 불길해. 조심스럽게 옆을 봤는데 그 친구들이 전부 나만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내가 “왜?” 하니까 그 친구들이 ‘소리를 질러야 사람들이 알지!’ 이런 표정이야. 내가? 너희들이 하자고 한 거잖아! 많이 해봤다며! 그러고 싶었죠. 그런데 둘러보니 언어장애가 없는 사람이 나뿐이었어요! 하…… (고개 떨굼) 여긴 어디이고 나는 누구인가. 확 도망을 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고개를 살짝 들었어요. 흠…… 그때 나를 보던 그 눈빛들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절실함이 담긴 눈빛. 그 눈빛들이 내 눈으로 들어와서 가슴에 콱 박혔어요. ‘나 공부해야 돼. 우리 공간 필요해.’라고 말하는 눈빛.

눈 딱 감고 외치기 시작했어요. 그때 50대 초반 정도 되는 남자분이 지나가다가 그걸 사주면서 힘내라고 5천 원을 주고 가시는데, ‘와! 불쌍하다. 쯧쯧’ 하는 것과는 뭔가 달랐어요. 왠지 힘이 나더라고요. 그 다음날은 사탕을 더 준비해서 갔어요. 얼굴에 철판 깔고 멘트도 더 찰지게 하고요. “이 껌 씹으면 마음 변한 애인도 딱 달라붙어요!” 하면서. (웃음) 물론 그 와중에도 술 취한 남자들이 “병신 육갑하네” 그런 소리를 하면서 지나갔지만 그런 말이 옛날처럼 크게 상처가 되진 않았어요. 그렇게 한 달 동안 열심히 껌을 팔았어요. 그런데 이게 돈을 버는 일이 아니더라고요. 생각해 봐요. 껌 팔아서 얼마나 벌겠어요? 우리가 또 껌만 팔고 헤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밥을 먹어야 껌도 팔지, 김밥 사 먹는 것도 다 돈이니까 밥을 해서 먹여야지, 먹고 나면 치워야지, 또 사탕 포장해야지, 너무 힘들더라고요. 공부하겠다고 공간 빌려놓고 공부는 하나도 안 했어. (웃음) 이건 할 짓이 아니다 해서 사탕장사는 그렇게 접었어요.

2012년 7월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인천에서 발생한 각종 장애인수용시설 인권침해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인천시청 앞에서 무기한 노숙농성을 벌였다.
2012년 7월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인천에서 발생한 각종 장애인수용시설 인권침해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인천시청 앞에서 무기한 노숙농성을 벌였다.

- 휴, 살았다!

야학은 우리만의 아지트였어요. 만날 집에만 있던 장애인들이 모여 있을 공간이 생기니까 너무 해방감이 들고 좋았던 거예요. 어느 날 한 사람이 집에 안 들어가고 야학에서 살면 안 되냐고 물었어요. 씻는 것도 불편하고 화장실도 불편하고 무엇보다 활동보조를 해줄 사람이 없는데 어쩌겠다는 거냐고 내가 되물었어요. 그때 들은 이야기가 지금도 사실 믿기가 어려워요. 자긴 집 지키는 개였다고 했어요. 가족들이 나가면서 “집 잘 지켜” 하고, 돌아와서는 “집 잘 지켰어?” 한대요. 아침에 밥을 주고 가면 점심, 저녁까지 먹어야 되는데 손을 쓸 수 없으니까 엎드려서 핥아먹었대요. 어쩌다 라면을 끓여주고 가면 점심이면 면발이 퉁퉁 불어있고 여름이면 쉰밥을 먹기도 했대요. 가족이 정말 그랬다고? 집에서만 지냈던 16년 동안 내 가족이 나를 그렇게 방치해둔 적은 단 하루도 없었으니까 나로선 상상이 안 됐어요. 그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알았다고 했어요.

야학에 평상을 하나 들여놓고 생활했어요. 돈이 없어서 히터도 없었어요. 게다가 그 친구는 장애 특성상 이불을 덮어줘도 5분도 안 되어서 발로 차버려요. 추운 겨울밤도 전기장판 하나로 버텼어요. 그렇다고 사춘기 아들하고 사는 내 원룸에 데려갈 수도 없고요. 최대한 늦게까지 야학에 같이 있다가 퇴근해서 아침에 최대한 일찍 출근했어요. 그땐 활동보조서비스가 시행되기 전이고 같이 활동하던 남성 비장애인도 없어서 내가 그 친구 대소변 처리를 도와줬어요. 밤에 눈 변이 아침에 가 보면 말라 있어요. 아… 가슴이 찢어져요. 당사자는 얼마나 찝찝하고 힘들겠어요. 이래도 여기서 사는 게 좋으냐고 내가 물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너무 행복하대요. 집에 있을 때 자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 아니 없는 게 더 나은 사람이었대요. 그치만 여기선 아침에 눈 뜨면 사람들을 만나서 같이 이야기하고 밥 먹고 돌아다닐 수 있지 않느냐고, 밤에 좀 추운 것만 견디면 되는데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어요. 이런 생활도 행복이라는데, 거기다 대고 내가 뭐라고 하겠어요.

그렇게 지내고 있는데 하루는 이 친구가 광주의 장애인시설에 자기 친구가 살고 있는데 나오고 싶어 한다면서 우리 야학에서 받아주면 안 되냐고 했어요. 솔직히 나는 한 사람도 감당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활동보조서비스가 시행되면 모를까 지금은 그 사람을 받아줄 여력이 없다고 얘기했어요. 며칠 뒤에 우연히 그 둘이 전화 통화하는 걸 듣게 됐어요. 스피커폰으로 이야기를 나누더라고요. 이쪽에서 지금은 어렵다고 하니까 저쪽에서 뇌병변 장애인이 “어..쩔..수..없...지..뭐..” 그러는데 그 말이 내 가슴을 너무 후벼 파더라고요. 집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았을 때 나도 그 생활이 너무 고되고 바깥 생활이 그리웠어요. 그래도 나는 누가 나를 가로막고 못 나가게 한 게 아닌데 그 사람은 누군가에 의해서 갇힌 거잖아요. 그 사람이 나오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거잖아요.

밤새 잠도 못 자고 고민했어. 그리고 또 서울의 문상민 활동가에게 전화해서 그랬어요. “나는 지금 있는 한 사람도 감당이 안 돼… 하지만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몰라 몰라. 죽을 먹어도 같이 먹고 밥을 먹어도 같이 먹어야지, 다른 건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러고선 야학 교사하고 지프차 끌고 그 시설에 가서 그 사람 태워서 나와 버렸어요. 참 단순하고 무식했지. 뒷좌석이 없는 차여서 그 사람을 휠체어에 앉은 채로 태웠어요. 출발하면서 차가 덜컹거리니까 그 사람 머리가 천정에 계속 쿵쿵 부딪쳤어요. 도망치듯이 시설을 빠져나와서 모퉁이를 딱 도니까 그 사람 첫마디가, (용을 쓰는 작은 목소리로) “휴! 살았다!” 였어요. 그 말 잊을 수 없어요.

이 모든 게 내가 세상 밖으로 나온 첫해, 그러니까 2006년에 일어난 일이에요. 그 짧은 시간 동안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하도 많이 만나다 보니까 웬만한 것들엔 초연해지면서도 동시에 시설이나 시설 원장들에 대한 분노는 너무 커졌어요. 시설? 모조리 없애야 돼. 시설장? 다 죽일 인간들! 활동보조서비스는 죽어도 쟁취! 단단히 홀린 사람이었죠. 2007년 3월에 정식으로 민들레장애인야학 개교식을 할 때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방이 있으니까 오갈 데 없는 장애인들이 하나둘 모이고, 손이 많이 필요해지니까 이 사람 저 사람 받고, 같이 지지고 볶다가 싸움이 나서 책걸상이 날아다니질 않나, 자원봉사자가 와서 목욕시켜준다면서 장애인의 벗은 몸을 카메라로 찍지를 않나, 또 장애인 한 명은 있는 대로 사기를 치질 않나. (웃음)

같이 방에 둘러앉아 고스톱도 치고 고생도 많이 했어요. 장애여성인 한 친구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 남성들과 한 방을 쓰면서 때로는 기저귀도 갈아줘야 했고요. 그때 우리는 시혜와 동정을 깔고 뭉쳤던 것 같아요. 그땐 몰랐어요. 장애인을 바라보는 나의 편견이 무너졌다고 표현했지만 한편으로는 선천적 장애인이었던 그들과 나를 다르게 보는 시선도 깔려 있었던 것 같아요. 불쌍하고 힘들어 보여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었던 거죠. 스무 살 넘은 야학 학생이 내 어깨에 기대면 자장자장 노래도 불러주고, 엄마 같은 마음으로 대소변 처리도 해줬어요. 지금의 시선으로 누군가 그 시절의 우리에 대해 지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후회 안 해요.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그런 마음이었기 때문에 그 어려운 시기를 통과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또 어여삐 여겼어요.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때, 굉장히 재밌었어요. 굉장히 재밌고 굉장히 힘들고 굉장히 많은 일들이 있었죠.

지프차를 타고서 시설을 탈출하는 사람들. 일러스트 훗한나
지프차를 타고서 시설을 탈출하는 사람들. 일러스트 훗한나

- 그게 아니고

야학 학생들은 최중증 장애인이 많아서 교육만으로는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어요. 재정적으로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는데도 2008년에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설립했어요. 센터에서 활동지원서비스를 제공하고 자립생활을 지원했어요. 그리고 본격적으로 탈시설 운동을 시작했어요. 그땐 탈시설이라기보단 탈출에 가까웠어요. 시설에 사는 사람들은 핸드폰이나 인터넷을 쓸 수 없기 때문에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어요. 어떤 사람을 시설에서 데려 나오기로 했다면 그 사람을 처음 만나러 가는 그날 바로 데리고 나와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시설에서 이 장애인을 들들들들 볶아요. 오늘 찾아온 사람 누구냐, 왜 만난 거냐, 저 사람들이 뭐라고 너를 꼬드기더냐, 가족들은 알고 있냐, 밖에 나가면 네가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등등. 억압적인 관계에서 의심받고 미움을 받으면 하루가 1년처럼 느껴져요. 당사자들이 굉장히 힘들어해요. 자길 빨리 데리고 나가 달라고 애원해요.

시설 쪽에선 눈치 못 채게 거의 007작전을 펼쳐야 돼요. 모든 걸 다 준비해두고 작전을 개시하죠. 일단 보증금 마련해서 집을 구해놔야죠. 그리고 시설에 쳐들어가는 거예요. 말단 직원부터 원장까지 대판 싸워야 돼요. 시설 쪽에선 우리더러 네가 뭔데 이 사람들 납치하냐는 식이고, 우리는 반대로 네가 뭔데 이 사람을 감금하냐고 해요. 인권, 장애인차별금지법 들이밀면 그래도 우리가 이겨요. 하지만 거의 쫓겨나다시피 나오죠. 단 한 명의 원장도 나가겠다는 사람한테 너의 선택을 존중한다, 잘 살아라, 우리가 도울 건 없냐, 하는 사람 못 봤어요. 그래! 가라, 가! 너 아니어도 들어올 사람 줄을 섰다! 이런 식이죠.

한 번은 어떤 분의 탈시설을 준비하던 중이었어요. 그분을 만나러 꽃동네에 갔는데 그분이 옆에 있던 지적·뇌병변 중복 장애인 분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도 나가고 싶어 한다는 거예요. 내가 그분한테 “나가고 싶으세요?” 물으니까 그분이 머리카락을 베베 꼬면서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고…” 그러면서 우는 거예요. 옆에 있던 사람들한테 이분이 왜 이러시냐고 물어봤더니 다들 나가고 싶어서 그런다고 했어요. 그럼 같이 나가요, 내가 말했어요. 그랬더니 무서워하시더라고요. 내가 직원한테 가서 말했어요. “이 분이 나가고 싶대요.” 그랬더니 직원들이 못 나간대요. 내가 화가 나서 원장 나오라고 했어요. 원장이 오더니 저 사람은 말을 할 줄 모른다고, 소통이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그래요? 잠깐만 계셔보세요” 그러고는 그 사람을 데려와서 “나가고 싶다고 딱 한마디만 하세요. 그 뒤부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했어요. 그 사람이 작게 나가고 싶다고 했어요. “원장님, 들었습니까? 소통을 안 하려고 한 거지 안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장애인차별금지법 들이대면서 싸워서 결국 퇴소확인서를 받아냈어요. 그분은 시설 나와서도 한동안 계속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고” 하면서 울었어요. 나중에 보니까 그분이 시설 안에서 너무너무 무시를 많이 당했더라고요. 무슨 말만 하면 가로막히고 거짓말한다고 하고.

문제는 그렇게 나왔는데 우리가 미리 준비해둔 집으로 딱 입주할 수 없는 상황도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우리 집으로 와요. 길게는 열흘도 있었어요. 여자면 괜찮은데 남자면 나도 힘들고 그 사람도 힘들죠. 어떤 분은 사지마비 장애인이었는데 시설에서 침대 채로 차 타고 나와서 그대로 우리 집 거실로 들어왔잖아요. (웃음) 정말 탈출한 거지. 그분은 몇 시간마다 좌약을 넣어주고 케어를 해주어야 했어요. 활동가들이 돌아가면서 고생이 많았죠. 체계적으로 자립생활을 지원한 게 아니라 일단 ‘자리’를 만들어주는 수준이었어요. 수급비를 받으면 월세는 그 사람이 낼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완전 무대뽀였죠. 그렇게 한 2~3년 사람들을 탈출시켰더니 활동가들이 “너무 힘들어요. 속도를 좀 늦췄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더라고요. (웃음) 시설에서 나와 자립생활을 준비하는 집을 ‘체험홈’이라고 하는데, 2011년에 인천시로부터 공식적인 지원을 받기 전에 이미 자체적으로 6채의 체험홈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그 시절에 우리처럼 하는 경우가 없었죠. 중증장애인 한 사람을 탈시설 시킨다는 것, 분명 보통 일이 아니죠.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요. 하지만 그때 나는 왜 이 사람들은 평생 이렇게 살아야 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너무 화가 났어요. 나오고 싶다고 하면 꼭 물어봤어요. 시설에선 자유는 없지만 대신 신변처리는 제때 할 수 있고 세끼 밥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나가면 하루에 한 끼밖에 못 먹을 수 있고 그마저도 안 되는 날도 있을지 모른다, 화장실을 가지 못해 밤새 찝찝한 상태로 뒷날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런데도 나가고 싶으냐. 그러면 다들 괜찮다고 해요. 굶어도 좋다고, 참을 수 있다고 얘기해요. 그런 말을 들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었어요. “그래, 밥을 먹어도 같이 먹고 죽을 먹더라도 같이 먹자, 활동보조서비스도 못 받으면 까짓거 내가 기저귀 갈아줄게.” 대책 없이 그렇게 사람들 데려 나왔던 거 지금 인권의 시각으로 보면 무책임하다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절대 후회 안 해요. 그 고생을 하면서도 한 사람도 내가 왜 나왔을까 후회하는 사람 없었어요.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 필자 소개 _ 홍은전 인권기록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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