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애해방운동가 생애기록 - 전사들의 노래
내 삶을 내 손에 움켜쥐고 _ 박명애 ①

2017년 4월 20일, ‘420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에 무대 위에서 발언하는 박명애 대표.
2017년 4월 20일, ‘420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에 무대 위에서 발언하는 박명애 대표.

올해 67세의 박명애는 대구 질라라비 장애인야학의 교장이면서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의 공동대표다. 근사한 은발 머리에 다정하고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노장 활동가가 무대에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모습을 나는 정말로 사랑한다. 중증장애인으로 살며 싸운다는 것에 대해 박명애처럼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수가 노래 한 곡에 영혼을 담아 부르듯이 그는 짧은 연설 안에 자신의 인생을 담아 온몸으로 말한다. “평생 집에서만 지내다 마흔일곱에 야학을 만나 세상에 눈을 떴고 오십 셋에 세상과의 싸움을 시작했다”로 출발해 “동지 여러분, 더 이상 참지 말고 투쟁으로 세상을 바꿉시다!”로 끝나는 그의 열렬한 ‘투쟁 찬가’는 들어도 들어도 들을 때마다 뭉클한, 내가 정말 사랑하는 노래다.

더러는 처음 듣는 노래도 있는데 이런 것이다.

“우리는 밥을 많이 먹으면 화장실을 많이 갈까 봐 마음을 졸입니다. 서울에 투쟁하러 올 때면 며칠 전부터 물도 적게 먹고 밥도 적게 먹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찌나 물도 더 먹고 싶고 밥도 더 먹고 싶어지는지요. 지난번 단식 후에 이렇게 죽는 건가 싶을 만큼 몸이 안 좋았지만 용기를 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려고 가기 싫은 병원도 몇 번이나 가면서 몸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세상이 잘 돌아가는 줄 압니다. 보건복지부 장관은 장애등급제가 폐지되어서 장애인의 삶의 질이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두 눈 부릅뜨고 밥을 굶어가면서 몸 바쳐 투쟁하고 있는데 우리의 삶이 나아졌다니 정말 분노스럽지 않습니까!”

다른 몸을 가진 동지들이 그런 투쟁을 하고 있다는 걸 처음 들은 나는 마음이 숙연해졌다가 점점 뜨거워졌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아는 정말 탁월하고 영민한 선동가다. 꾸밈없고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그 힘인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무대에서 꾸밈없기란 잘 꾸미는 것만큼이나 애써야 하는 일이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솔직하기란 그들 모두를 속이는 것만큼 부끄럽고 용기가 필요한 일인 것이다.

무대 위의 그가 꾸밈없이 솔직하다 해서 무대 위의 명애와 무대 아래의 명애가 같을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둘은 딴판으로 다르다. 무대 위의 명애가 펄떡펄떡 살아있는 저잣거리 아녀자 같은 사람이라면 무대 아래 명애는 점잖고 기품 있는 사대부가의 마님 같은 사람이다. 명애를 만나기 위해 대구 질라라비 장애인야학으로 찾아갔을 때는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식당 배식구의 한켠에 명애가 해왔다는 송편 한 상자가 놓여 있었다. 식판을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착착착 배식구를 통과한 사람들은 떡을 받아든 뒤 명애를 향해 착착착 웃으며 말했다.

박명애 대표 일러스트. 은발 머리에 동그란 점이 크게 찍힌 스카프를 두르고 있다. 오른쪽 뒤로는 화사한 꽃이 피어 있다. 그림 훗한나 
박명애 대표 일러스트. 은발 머리에 동그란 점이 크게 찍힌 스카프를 두르고 있다. 오른쪽 뒤로는 화사한 꽃이 피어 있다. 그림 훗한나 

“대표님, 잘 먹을게요!”

젊은 활동가들에게 깍듯하게 존대를 하는 명애는 번번이 수줍어하며 예, 예, 했다. 떡을 돌릴 만한 경사가 있으시냐고 물었더니 명애가 아니오, 했다. “그럼 웬 떡이에요?” 하고 묻자 송편을 오물거리면서 명애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이 집이 떡을 되~게 맛있게 하거든요.”

“아!”

되게 놀라운 사실을 안 것처럼 나는 머리를 주억거렸다. 단지 맛있다는 이유로 돌려진 송편에선 되게 다정한 맛이 났다.

두 번째 만났을 때 우리는 장애인콜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명애가 아주 기쁜 소식을 전하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평소엔 콜택시 대기시간이 억수로 긴데 오늘은 서울에서 반가운 손님이 오셨다고 빨리 잡혔네요.”

그리고 기사님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에서 반가운 손님이 오셨다고 기사님도 반가운 분이 연결됐네요.”

서울 손님과 대구 기사님은 명애를 사이에 두고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목적지는 명애가 사는 동네의 카페였는데 도착하자마자 명애는 얼른 커피를 사 기사님에게 건넸다. 기사님이 싱글벙글 웃으며 “잘 먹을게요! 대표님!” 하고선 출발했다. 카페에 들어서니 이번엔 사장님이 자상하게 웃고 있었다. 나도 단골 카페가 있지만 사장님이 나를 보고 저렇게 웃는 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 이유가 뭔지는 금세 알았다. 명애가 사장님을 보며 수줍게 말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반가운 손님이 왔어요.”

박씨라도 물고 와야 할 것 같은 기분으로 화장실에 다녀오니 중년의 세 여자가 노란 은행나무 아래에서 바람에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을 맞으며 여고생들처럼 깔깔대고 있었다. 명애와 명애의 활동지원사님과 카페 사장님이었다.

‘저렇게 즐거울 일인가.’

대구 사람들은 다 기분이 좋거나 모두 명애를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달콤한 마카롱을 연달아 먹었을 때처럼 다정한 얼굴을 너무 많이 보고 그때마다 덩달아 웃느라 나는 벌써 피곤해진 기분이었다. 그때 근방에 비행장이 있는지 갑자기 요란한 굉음이 들려왔다. 명애가 말했다.

“서울에서 반가운 손님이 왔다고 비행기가 떴네요.”

나는 기력이 달리려는 중이었는데 명애가 내 눈치를 스윽 살피더니 말했다.

“내가 뜨지 말라캤는데!”

그러고는 자기가 한 말이 자기도 웃겨 죽겠다는 듯이 크크크크, 하면서 웃었다. 그 표정이 너무 개구지고 사랑스러워서 나도 크크크크 웃었다. 자꾸자꾸 반갑다고 말하는 건 명애인데, 명애 옆에 서 있으니 세상이 온통 명애를 반가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집으로 가기 위해 단정하게 조성된 산책길로 들어섰다. 되~게 예쁜 길이 있다면서 명애가 꼭 보여주고 싶다던 길이었다. 산책을 좋아하시냐고 물으니 명애가 말했다.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고 살던 시절에 마라톤 중계를 제일 좋아했어요. 선수들 옆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는 게 좋아서 끝날 때까지 보고 있었어요.”

마라톤 중계가 가진 예상치 못한 기능에 허를 찔린 나는 걸음을 멈추고 명애를 바라봤다.

‘이렇게 열렬히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집 안에서만 47년을 살았을까. 그건 대체 무슨 뜻일까.’

 

“부모님은 나를 키우느라 젊음 없이 사셨습니다. 부모님에게 젊음이 없었으니 어린 저에게도 삶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업어 학교에 데려다주려면 어린 두 동생이 집에 남겨져 있어야 하는 상황이니, 결국 제가 학교에 가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고 집에만 갇혀있었지요. 내가 공부하기 싫어서 안 한 것 아니고, 밖에 나가기 싫어서 안 나간 것 아닌데, 어머니 아버지의 힘만으로 감당할 수 없으니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제는 이런 사회를 끝장냅시다. 돈의 논리에 밀려서 장애인은 집 안에만 있어야 하는,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부모 혼자 힘으로 감당해야 하는 이 사회를 끝내기 위해 함께 투쟁합시다." (2019년 장애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박명애) 

 

어머니가 스물두 살에 나를 낳으셨어요. 195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어요. 첫돌이 다가오는 때였어요. 어머니가 친정에 제사 지내러 가셨대요. 외할머니가 모처럼 친정에 온 딸에게 시집살이 고될 텐데 하루만 더 자고 가라고 붙드셨대요. 아버지는 칠남매 중 둘째였는데 엄마가 시집올 때 큰며느리가 없어서 맏며느리처럼 살림을 살았대요. 시어머니, 시동생, 시누이들이 한집에 살았던 터에 저까지 낳았으니 어머니 시집살이가 많이 힘드셨을 거예요. 그렇게 하룻밤 더 친정에 머물렀는데 그날 밤 내가 병이 났어요. 갑작스럽게 열이 오르면서 경기를 하고 목을 못 가누고 혀가 굳어지더래요. 그 밤에 달려가서 침을 맞았는데도 나아지질 않았대요.

뒷날 엄마가 나를 업고 집으로 돌아올 땐 죽은 것처럼 아기가 축 처져 있었대요. 빠이빠이 손 흔들며 기차 타고 간 아이가 그렇게 돌아왔으니 시집에선 난리가 났겠죠. 이대로 죽나 싶었는데 삼일 만에 깨어났대요. 안 그래도 시집살이가 힘들었는데 나까지 그렇게 되니까 엄마가 더 힘들어지셨어요. 아버지는 당신이 안 보는 데서 내가 그렇게 되어 돌아왔으니 기가 막히셨겠죠. 엄마가 애를 잘 돌보지 못해서 나를 고생 시킨다고 평생 엄마 탓을 했어요. 장애 있는 자식을 부끄러워하던 시대니까 주변에 수군거리고 흉보는 사람들도 많았겠죠. 원래는 되게 밝은 성격이셨다는데 내가 아는 엄마는 말씀이 참 없으셨어요.

엄마는 나를 업고 진주 남강 다리를 넘어 침을 맞으러 다녔대요. 논개가 적장을 껴안고 빠져 죽었다는 강, 난봉꾼 남편을 둔 아내가 목을 맸다는 진주난봉가가 흐르는 그 강이었어요. 여름에 비가 와서 황토물이 세차게 흘러가는 걸 내려다보면 그냥 뛰어들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대요. 그런데 등 뒤로 돌아보면 내가 까만 눈망울을 반짝이면서 쳐다보고 있어서 차마 그러질 못하겠더라고 어머니가 한 번씩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집에 오면 어린 동생들이 온 집안을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더라고, 양손에 아이들 손을 잡은 엄마가 참 부러웠다고 했어요. 동생들은 나 때문에 엄마 등에 얼마 업혀보지도 못했죠.

박명애 대표의 돌 사진. 제공 박명애 
박명애 대표의 돌 사진. 제공 박명애 

몇 년 뒤 우리 가족은 분가해 나왔어요. 어머니는 가정주부셨고 아버지는 비닐우산 공장을 하셨어요. 처음엔 장애가 더 심했다가 네다섯 살 즈음에 혼자 일어나 앉았어요. 오줌을 누는 건 엄마가 요강에 앉혀줘야 했는데 가끔 엄마가 없을 때 오줌을 참는 게 참 괴로웠어요. 요강에 스스로 올라갈 수만 있으면 엄마가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아서 혼자 연습을 했던 기억이 나요. 벽 모서리에 요강을 딱 붙여서 안 밀리게 한 다음에 올라가려고 아주 용을 썼어요. 몇 번 하니까 성공했는데 한 번 올라간 다음엔 내려오는 게 겁났어요. 굴러떨어질까 봐 신경을 잔뜩 써서 톡 튀어 내려왔어요. 그때부턴 혼자 하게 되었죠.

어느 날 동네 아줌마가 명애도 학교 가라고 통지서가 나왔네, 했어요. 동생이 셋이나 있어서 엄마가 나를 업고 학교에 따라다닐 형편이 아니었겠죠. 데려다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화장실 볼일도 봐줘야 했으니까요. 엄마가 “니는 학교 가지 말고 집에서 엄마랑 놀자” 했어요. 그 소리에 ‘아, 나는 그냥 집에서 노는 건가 보다’ 했어요. 나는 왜 학교에 못 가? 나도 갈 수 있게 해 줘!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은 없어요. 그냥 엄마랑 집에 있는 게 좋았어요. 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도 안 했어요. 안 믿을 수도 있겠지만 정말로 그랬어요. 그게 배움을 포기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하자고 하면 그냥 받아들였어요.

- 못 찾겠다 꾀꼬리

마루가 있는 집에 살 땐 마루까지 나오고 방만 있는 집에 살 땐 방에만 있었어요. 엄마가 한 번씩 극장에 데려가고 동네에 약장사가 오면 할머니 등에 업혀 구경도 했지만 흔한 일은 아니었어요. 예닐곱 살 때 할머니한테 업혀서 나가면 애들이 따라오면서 놀렸어요. 다 큰 게 업혀 다닌다면서 내 장애를 들먹이면서 병신이라느니 앉은뱅이라느니. 내가 절룩거리면서 가는 것도 아니고 할머니 등에 업혀 가는데도 그랬어요. 그래서 주로 방에 있었죠. 그 시절엔 한 집에 여러 가구가 세 들어 살았는데 우리 집엔 여섯 세대가 살았어요. 그 식구들만 해도 많았고 아이들도 많았죠. 내가 못 나가니까 동생들이 자기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왔어요. 심심해서 못 살겠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 오히려 그 시절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어요. 눈이 오면 엄마가 그릇에 눈을 소복하게 떠 줘서 그게 물이 되는 걸 지켜봤고 가을엔 아버지가 국화를 사다 주시면서 힘들게 나갈 필요 없다고 하셨어요.

나는 아버지를 닮았대요. 성격은 급한데 인정은 많은 분이었어요. 멀리 다녀오는 날이면 날 주려고 뭐라도 챙겨와 내 손에 쥐여주셨어요. 가끔 동생이나 친구들이 나를 업고 나갈 때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걸 아주 싫어하셨어요. 다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한다고요. 나는 업혀서라도 나가는 게 좋고 친구 집에도 가보고 싶었는데 나를 나무라시는 게 아니라 엄마한테 화를 내니까 자연스럽게 나가자고 하지 않게 되었어요. 아버지는 꼭 나가야 한다면 옷도 단정하게 갖춰 입고 자가용을 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요. 흙 묻지 않게, 다치지 않게, 당신이 그 길을 다 닦아줘야 한다고요.

한 번씩 술을 드시면 “나 죽을 때 엄마랑 셋이 같이 가자” 하셨어요. 당신이 없으면 엄마가 혼자서는 나를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어린 마음에도 그 말이 참 듣기 싫었어요. 세 사람이 한날한시에 죽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 싶고, 나도 아버지만큼 살 수 있는데 왜 내가 아버지와 같이 죽어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진 못했어요. 모든 걸 듣고만 있었어요. 원하는 게 있을 때 말을 하기보단 내가 안 먹고 내가 안 하면 된다고, 그냥 내가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2월, 대구의 한 카페에서 홍은전 작가(왼쪽)와 박명애 대표(오른쪽)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지난 2월, 대구의 한 카페에서 홍은전 작가(왼쪽)와 박명애 대표(오른쪽)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엄마가 가끔 바람 쐬라고 골목에 나를 앉혀놓고 갈 때가 있었어요. 그러면 뜻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어요. 그 시절엔 한센병을 가진 사람들이 구걸을 다녔어요. 그분들은 조그마한 애가 앉아있으니까 귀엽다고 다가왔는데 나는 그분들 얼굴이 좀 다르니까 무서웠어요. 다른 애들 같았으면 “엄마!” 하고 집으로 달려갈 텐데 나는 그러지 못하니까 ‘엄마가 언제 오나’ 하는 생각뿐이었죠. 집 앞에 개천이 있었는데 봄이면 땅에서 오만 가지 풀들이 올라왔어요. 엄마가 나를 앉혀놓고 잠깐 집에 갔다 오는 동안 그것들 보면서 좀 놀다 보면 어느샌가 혼자 있다는 게 또 무서워졌어요. 집에서 친구들이랑 놀다가도 어린아이들은 지루하면 금방 가버리잖아요. 그러면 나 혼자 남아요. 조용필의 노래 중에 ‘못 찾겠다 꾀꼬리’라는 노래가 있어요. 석양이 질 무렵에 숨바꼭질을 하던 친구들이 모두 가버리고 술래인 아이 혼자 남아서 얘들아, 얘들아, 하면서 친구를 부르는 노래인데, 그걸 들으면 혼자 있어도 괜찮은 척, 안 무서운 척, 안 심심한 척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라요.

친구들이 중학교에 들어가니까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줬어요. 다 읽고 돌려주면 친구들이 “이야~ 니 책 참 빨리 읽는다!” 하는 그 소리가 듣기 좋아서 밤을 새워 읽었어요. 순정 소설도 좋아했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봤고 박경리의 소설도 좋아했어요. 옆집에 미용 기술을 가진 언니가 있었는데 손님들이 집으로 찾아와 머리를 했어요. 손님 중에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던 아가씨가 있었는데 종종 나한테 책을 갖다주며 나를 들여다봤어요. 그 시절의 이웃들이 다 좋았어요. 열여덟 살 즈음 그 미용하는 언니하고 같이 펜팔을 했어요. 그 언니가 스무 살이 넘어야 재미있는 편지가 온다면서 내 나이를 스무 살로 속여서 쓰자고 했어요. 그렇게 했더니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답장이 오는데 편지 속의 나도 나이가 많은 가짜니까 꼭 소설을 읽는 것 같기도 하고 남의 편지를 훔쳐보는 것 같기도 했어요.

열여덟 살에 대구로 이사를 왔어요. 그나마 있던 이웃과 친구는 없어졌지만 텔레비전과 전화가 생겨서 심심하지 않았어요. 텔레비전을 보다가 궁금한 사람들이 나오면 전화를 걸었어요. 한번은 꽃을 잘 키워서 소문난 사람이 출연했어요. 우리 엄마도 꽃을 키우셨는데 그게 참 어려운 일이라고 하셨거든요. 궁금한 게 있으면 전화하라기에 전화했어요. 꽃을 어떻게 그렇게 예쁘게 키우셨냐고 묻고는 나는 몸이 불편해서 집에 있다고 내 얘기도 했어요. 그분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전화했어요. 전화로 대인관계를 했죠. 나는 나가서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심심하니까 나가서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아예 안 했어요. 나가는 건 오히려 두려운 일이었죠.

현실을 비관하지 않았어요. 긍정적이었죠. 그런데 스물다섯 살 즈음 감기처럼 짧은 우울증이 찾아왔어요. 아버지는 사업이 안 될 때마다 엄마에게 화를 내셨어요. 엄마는 힘들다고 하소연하거나 자식들한테 화를 푸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랬던 엄마가 내 요강을 비우면서 넋두리하듯 말했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비워주면서 살아야 될랑가…” 그 말이 가슴에 오래 남았어요. 엄마의 한숨이 나의 한숨이 되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애인시설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았다면 전화해서 물어봤을 거예요.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집에서 계속 사는 건 줄 알았고 엄마가 돌아가시면 어떡해야 하나 걱정이 되었어요. 스물여덟 살에 남동생이 결혼해서 올케가 우리 집으로 들어왔어요. 우리 식구끼리 살 때와 또 다르더라고요.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이렇게 계속 살아야 되나,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나, 답답하고 걱정스러웠을 무렵에 남편을 만났어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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